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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본다고 없어지나

뻐꾸기님의 특정한 글은 아니고 [공장의사 일기] 에 관련된 글.

 

다른 다큐를 보면서 그런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칠레 전투'를 보면서는 정말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젠 힘든 것 그만 좀 봤으면 좋겠다."  

칠레 전투가 워낙 속상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내가 그 즈음 힘들어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게다.  

 

화학공학을 전공했고 (그렇다고 화학이나 화공에 대해 물어보지 마시라. 쥐뿔도 모른다.) 화공과 출신 상당수가 그렇듯 공장에 들어갔다. 내가 있던 부서는 우리 회사 제품을 쓰고 있는 다른 공장에 갈 일이 무척 많았다. 포항제철이나 삼미특수강, 현대 자동차 등 작업조건이 상대적으로 양호한 곳도 있었지만 절반 정도는 정말 열악한 환경의 작업장들이었다. 난 아직도 어쩌다 쇳가루 냄새를 맡으면 그 때 생각이 난다.  어설프게나마 '노동자성'을 갖고 있던 나에게 그건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경험이었다.

 

나 자신이 물론 노동자였고,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뒤늦게 맑스에 반한 나에게 '노동자'란 말은 최소한 그 당시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단어였다. 보는 월간지도 '말'에서 '길'로 바뀌었다. "너 같은 녀석은 직장생활 6개월 이상 못할거야"라는 친구들 말과는 달리 2년반을 다녔다. 직장생활 자체는 별로 힘든 것이 없었는데 각 공장을 돌아다니는 것이 내 마음을 편하게 하지는 않았다. (회사를 그만둔 이유와는 상관없다. 흔히들 하는 고민 "이렇게 평생?" 뭐 그런 거였다.)


관리직인 내가 우리공장의 생산직 사원들과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도 무척 힘들었고, 다른 공장의 노동자들과 대면하는 것은 더 복잡했다. 다른 공장의 관리직도 상대하고 생산직도 상대하는데 우리 회사의 이익과 상대편 공장 노동자의 이익이 (또는 상대공장 관리직과 생산직의 이익이) 서로 꼭 부합하는 관계가 아닌지라 정체성의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제일 괴로운 건 이것저것 떠나서 "어떻게 이런 데서 일을 하냐?"라고 느껴질 때다. 환기시설이 엉망인 곳에서 그 많은 분진을 잘난 3M 마스크 하나로 막아내고(나도 써봐서 알지만 분진을 막아주기엔 형편없다. 다만 없는 것보다 나을 뿐이지) 소음은 또 얼마나 심한데...  환풍기 두어개만 틀어놓고 도장을 하는 곳은 페인트 냄새에 취한다. 휘발성 용제 때문에 아마도 애들이 본드 흡입할 때의 효과 비슷한 게 생기지 않을까 싶다.

 

 

뻐꾸기님의 공장의사일기를 보다 보면 그 때 생각이 날 때가 있다. 그 때 생각이 안나더라도 그냥 내용 자체가 힘든 경우도 많다. 아는 사람의 얼굴이 떠오를 때도 있고 말이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 "힘든 것 이젠 그만 좀 봤으면 좋겠다."

  => "어, 이 생각 언젠가도 했던 것 같은데"

    => "그래, 칠레 전투!"

 

그러던 즈음 신문에서 9월 11일이 칠레의 아옌데 정부가 미국이 사주한 쿠데타에 의해 무너진 날이라는 칼럼을 봤다. 칠레전투가 바로 그 내용이다. 1부 마지막에 쿠데타 군이 카메라를 향해 총을 겨눈다. 그리고 카메라가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카메라맨이 총에 맞고 죽은 것이다. (미국의 사악함은 정말 종류도 다양하고 끝도 없다.)

 

그래도 내가 공장에 다니던 시절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여파로 그 이전에 비해서나 현재에 비해서 꽤 나은 편이었다. 일단 해고의 불안에 떠는 일이 별로 없었고, 비정규직 문제도 없었다.(있기야 했겠지) 고생한만큼은 아니지만 임금도 그리 형편없지는 않았다.  물론 그 때도 대기업 하청 노동자의 처우는 상대적으로 열악했고, 12시간 맞교대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러고 어떻게 사나"하고 안스러워 하기도 했다. 십수년이 지난 지금 더 나아지기는커녕 비정규직의 삶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고, 전선이 확실했던 그 당시에 비해 이젠 피아의 식별 문제도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밥.꽃.양>을 보며 울화가 치밀어 오를 때만 해도, 그게 극히 일부노조만의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억지로 믿어보려 했는데...

 

하여튼 2005년, 내 상황도 우울하고, 대한민국도 우울하고, 참 엿같다.

칠레전투 이후로도 속상한 다큐를 계속 보듯, 공장의사 일기도 계속 보게 되겠지. 가끔은 꿍얼거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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