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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1/11
    한대수 - 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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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1/11
    소록도
    무위
  3. 2005/01/11
    집행유예 2주
    무위

한대수 - 먼지

앨범에 가사가 적혀있지 않기도 하거니와

굳이 여기다 가사를 적어놓는 것이 이 곡을 듣는데 방해가 될 것 같다.

가사를 다 알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랩도 아니고, 옛날 노래들 처럼 시를 읆는 것도 아니고,

한대수 제멋대로 주절 거린다.

 

운율이 맞는 듯도 하고, 어거지로 대충 갖다 맞추는 듯도 하고,

하여튼 제멋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요즘의 나에게는 정말 절절하게 다가오는 가사다.

이 노래 가사를 듣다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한대수! 정말 미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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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밤새 운전을 하고 갔다.

소록도, 정말 멀더만.

녹동 선창장에 도착을 하고, 코앞엔 소록도가 보였다.

약간 낯설고, 약간은 떨리고, 조금 설레기도 하고.

 

 

어리버리 첫날- 자원봉사

 

대단한 영미씨다. 소록도까지 일감을 싸갖고 오다니!

영미씨는 컴터앞에 앉아 일을하고, 그런데님과 나는 자원봉사자 회관을 찾아갔다.

 

- 며칠간 하실 거죠?

"3일이요"

-단기로 하실 거니까 좀 힘든 일이어도 괜찮죠?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네."

(어, 이게 아닌데. 우린 자봉도 하지만 실컷 놀기도 할건데 이래서야...)

 

그런데님은 중환자병동에, 난 정신병동에 배치됐다.

 

잠도 못자서 몽롱한데, 무엇을 할지 몰라 어리버리한 첫날이었다.

한센병환자도 처음이고, 정신병동도 처음이고.

가자마자 물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씼겨주란다.

처음 씼겨드린 할아버지는 한센병 때문에 눈도 없고, 손가락도 없다.

아니, 씼겨드리기 전에 한 일이 있구나.

할아버지께서 소변을 보시겠다고 했고, 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해야하죠?"

 

주로 한 일은 씼겨드리기(제일 힘든 목욕시키기는 전날 했다고 한다.),

식사시키기(식사시간도 약간의 전쟁이다. 눈이 안보여도 혼자 드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떠먹여드려야 하는 분도 있다.), 기저귀 갈기, 소변 받기, 옷갈아입히기, 등등.

 

가장 나를 긴장시킨 것은 손톱깍아 드리는 것이었다. 그냥 손톱만 보면 무지 긴데,

손톱 밑을 보면 살과 늘러붙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조금만 잘못하면 피가 나기 때문이다.

손톱이 너무 두꺼워져 손톱깍기가 아예 안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3일간을 주로 병동에서 보냈는데 병동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그곳 사진은 없다.

사진촬영이 금지되지 않았다해도 안찍었을 것 같다. 사진찍으러 간 것도 아니었고.

 

첫날 사진은 없다. 너무 피곤했고, 다음날 새벽 4시반에 일어나기로 했기 때문에

저녁에 선영씨집에 돌아오자마자 잠을 잤다. 그런데...

 

 

밤9시가 좀 안되서 영미씨가 깨웠다. 밤바다에 나가자고.

나나 그런데님이나 밤바다에 가고 싶었겠는가?

너무너무 일어나기 싫었는데 그래도 일어났다.

하루종일 혼자 있었던 영미씨와 놀아줘야겠다는^^ 의무감 땜시.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밤바다 좋은 줄도 잘 몰랐는데, 선영씨집에 돌아와 술을 먹으니 좀 말똥말똥해졌다.

송환 얘기도 하고, 소록도 얘기도 하고...

 



그런데님의 셀프샷. 자신의 변화하는 모습을 관찰하겠다나 뭐라나.


둘째날 점심시간에 선영씨집앞에서.


병동 바로앞 바다에서 


옛날에 사용했던 검시실 내부


일제시대때는 강제로 정관수술을 했다고 한다. 그 수술대

 

단종대 (이 동)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차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짱박혀 담배피기


그런데님보다 내 점심시간이 30분 더 길어서 영미씨와 좀 돌아다녔다.

 

 

둘째날

 

둘째날 자원봉사는 훨씬 수월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이젠 어리버리 단계를 지나 뭘 해야할지 감이 잡혔기 때문.

하루 자봉한 주제에, 새로온 자원봉사자들에게 뭘해야 할지 교육도 하고. ^^

 

홍구 할아버지라는 분이 계셨는데 어깨를 몇 번 주물러 드리곤 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께서 내게 오라고 손짓을 하셨다.

자신의 침대에 와서 앉아보라는 것이다.

그리곤 창밖의 바다를 보라고 한다.

정신병동이라 창문에 비록 쇠창살이 쳐져 있지만 창밖의 바다는 아름답다.

잘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할아버지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우시는 거다.

난 어쩔줄을 몰라하고 있는데 간호사 지나가다 그런다.

"그 할아버지 원래 그래요."

 

그냥 혼자 생각해 보았다.

이 할아버지는 정신이 말짱한 편이었고, 나이는 여든이 넘으셨다.

혼자 걷지도 못하고, 기저귀를 차고 사신다.

자신이 이 병동에서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란 걸 아시고 계실게다.

그런 저런 생각이 들면 울음이 안나오겠는가?

 

 

두 번째 밤바다

 

이날은 정신을 좀 차려서 카메라도 챙기고, 폭죽도 챙겨서 바다로 나갔다.

물론 맥주와 안주도 가지고 나갔다.

깜깜한 바다가에서 핸드폰 불빛을 이용해 나뭇가지를 찾아서 긁어 모았다.

그런데님의 집념으로 제법 그럴 듯한 모닥불을 피우고.

맥주로 병나발도 불고.

이게 뭔 사진이냐고?

믿거나 말거나 밤바다 사진이다.

낸들 어떻게 하나? 뵈는 게 없는데 어찌 찍냔 말이다.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잔잔한 파도소리는 들린다.

못온 사람들 부러워하라고, 무지 재미있는 척?하며 폭죽놀이를 했다.

 

 

마지막날

 

영미씨는 아침에 먼저 출발하기로 했다.

새벽에 일을 하고 긴 아침식사 시간을 이용해서 사진도 찍고 영미씨 배웅도 했다.

선영씨 집이고,

선영씨 집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 이런 풍경이다.

선영씨가 일하는 어린이집.

말그대로 선영씨집 코앞에 있다.

두 번째 셀프샷. 뭐 바뀐게 있나?

 

거실에서 기념촬영

집앞에서도 기념촬영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며.

내가 찍은 그런데님 사진 중에 이게 젤로 맘에 든다.

 

드디어 배가 오고

혼자 씩씩하게 배를 타러가는 영미씨.

어제밤에 얼핏 사슴 한 마리를 본 게 전부였는데

오늘은 떼거지로 등장했다.

뻘에서 꼭 한 장 찍어야겠다기에.

근데 어두워서 셔터속도를 늦게 했더니 좀 흔들렸다.

뽀샾으로 보정을 좀 하긴 했는데...

어두워지는 바닷가에서 선영씨에게 요술풍선 강습.(그런데님 촬영)

자신의 컴터 바탕화면으로 쓰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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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유예 2주

아버지와 병원에 다녀왔다.

 

방사선 치료가 끝났는데도 상태가 안좋아져서 원래 한두달 정도 있다가 찍을 예정이었던 MRI를 오늘 찍을 수도 있다고 했다. 스테로이드 때문에 반짝효과를 봐서 좋아졌을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어쨌든 호전은 되었으니 2주정도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의사나 나나 모두 악성 뇌종양일거라고 예상은 하지만 아직 결정적으로 뭐가 나온 것은 아니기에 마음의 준비를 2주간은 미룰 수 있게 되었다.

이러기를 벌써 몇 번째인가?

뇌종양인 것을 안 다음부터 양성이니 악성이니 의사들도 의견이 많았고, 뇌수술 후 별거 아니라는 말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제 회복하는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다시 악화되서 뇌사진을 또 찍고, 그 새 또 자라난 걸 봐서는 악성같다고 하고... 아버지는 병원을 못믿겠다고 하고... 그러다 별 수 없이 방사선치료를 시작하고... 점점 좋아지는 것을 보니 방사선치료가 효과있는 걸로 믿기도 했다가... 다시 안좋아져서 거의 다 줄였던 약을 왕창 늘리고...

어쨌든 조직검사에서 악성판정이 난 적이 없고, 아직은 뇌사진을 찍지 않았으니 말그대로 '아직'은 악성이란 판정이 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어차피 죽는다. 하지만 사형수가 자신의 사형집행일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아무 차이가 없을까?

 


 

아래글은 아버지가 아주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원에서 써놓은 글이다.

나중에 상황이 바뀌었다고 내 스스로가 딴소리 할까봐 적어놓은 것이다.



당사자 되기

 

아버지는 뇌종양으로 수술을 하기로 했다.
아주대 병원에서의 치료 방법중에는 수술이 없었다.
너무 위험한 부위라고 극히 일부 조직만 떼어내서 암덩어리인지 단순한 양성혹인지 알아보고 방사선 치료하자는 거다. 그런데 조직을 떼어내기 위해서도 마취를 하고 바늘로 두개골을 뚫고 세포를 떼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반신불수가 된다고 한다.

어차피 위험한 것이라면 그나마 완치의 가능성이 있는 수술을 선택하기로 했다.
지금은 잘된다는 생각만 하고 있지만 몹시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별의별 생각이 다들고 말이다.

광기형을 통해서 영동세브란스 병원의 실력 있는 권위자에게 수술을 받기로 했다. 수술할 환자들이 워낙 많이 밀려있는데, 아는 사람의 부탁이니 그 스케줄 사이에 아버지를 끼워넣어 주기로 했다. 한국사회의 커다란 병폐중의 하나인 '연줄'을 우리도 동원한 것이다. 연줄 없는 사람들이 그만큼 뒤로 밀려나겠지. 원칙적으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있나? 아니, 못한다. 이 죄를 앞으로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거부할 수는 없다.

병원에서 파업을 하고 있다. 모든 일정이 늦어지고 있다.
아직은 식사가 제대로 안나오고 하루 세끼 똑같은 도시락이 나오는 정도의 불편이지만 장기화되면 뭐가 어떻게 돌아갈지 알 수 없어 무지 불안하다.
주5일제를 요구하고,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하는 그들의 주장을 100% 지지한다. 하지만 당장 피해를 입게될 내가 어디까지 이성적일 수 있을까? 벌써부터 TV에서는 평소의 60%밖에는 수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우리 아버지의 수술도 그만큼 늦어지겠지.
노사간에 타결이 안되면 난 물론 사측을 더 원망하겠지만 같은 노동자로서 그들을 계속 지지할 수 있을까?
당사자가 된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천지인-열사가 전사에게전(연주곡)

2004.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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