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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코리아]구해근<한국노동계급의 형성> 서평

[서평]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일어서기까지, 『한국노동계급의 형성』
[업코리아 2003-11-19 15:00]
화염병과 각목으로 무장한 한국 노동자들의 시위가 낯설지 않은 요즘, 한국노동운동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87년 민주화와 함께 노도와 같이 일어났던 민주노조운동, 사회변혁의 주역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한국노동운동이 점차 국민의 마음 속에서 멀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 속에서도 자꾸 잊혀져가는 그날의 기억과 역사적 의미를 되살려 보고자, 빛바랜 사진첩을 열어보는 심정으로 구해근의 [한국노동계급의 형성](신광영 역, 창작과비평, 2002)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공돌이, 산업전사에서 노동자로서의 정체성 발전

E.P 톰슨의 계급형성론적 시각에서 한국 노동운동을 분석한 이 책은, 영문명 헤이근 쿠 (Hagen Koo)로 더 유명한 하와이대 사회학과의 구해근 교수의 10여년에 걸친 조사와 연구가 낳은 역작이다. 사회과학자들이 한번쯤은 출판을 꿈꿔보는 코넬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영문책 (Korean Workers: The culture and politics of class formation)을 한국 사회과학계의 간판급 학자인 중앙대의 신광영교수가 번역하였다. 함량미달의 번역이 원전의 깊이와 무게를 가벼이 만드는 안타까움이 횡횡하는 한국 출판계에서, 오히려 번역을 통해 원전의 무게가 더해진 작품을 만나는 기쁨도 작지 않은 책이다.

저자 구해근 교수는 “어떻게 공장 노동자들이 공순이. 공돌이처럼 노동자를 경멸하는 문화적인 이미지와 국가가 강제한 산업전사라는 타의적 정체성을 극복하고 노동자로서 자신들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발전시키게 되었느냐”라는 질문을 던지며 글을 시작한다. 저자는 계급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부터 다소 자동적으로 형성된다고 주장하는 맑시스트의 환원주의적 시각을 배격한다. 대신 한국노동자들로 하여금 그처럼 놀라운 용기와 열정으로 국가와 자본의 가부장제적 권위에 도전하게 만든 공장 내의 실존적 경험이 무엇인지를 파헤친다. 민주화 이전 압축성장과정에서 가해진 공장 내의 비인간적이고 전제적인 작업관계, 특히 여성노동자에게 가해진 계급착취. 여성억압. 신분종속에 대한 재조명이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 분석되고 있다. 민주화이후 대공장 남성노동자의 전투적 노동운동에 가려져 있던, 초기 한국노동운동의 주역인 여성노동자들의 역할과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작업인 것이다.

대공업 노동자 수 늘어나고 민중운동과 노동운동이 결합

저자가 비록 영국의 역사학자 E.P 톰슨의 계급형성론적 시각을 빌려 왔지만, 사회학자로서 비교론적 관점에서 구조적인 분석도 병행하고 있어, 한국노동계급형성에 관해 입체적인 이해를 가질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오늘날의 ‘한국’ 노동운동을 낳은 구조적 조건은 무엇인가?

저자는 크게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가 낳은 구조적 변화이다. 즉, 대공장노동자의 급속한 양적증대와 울산 등 소수 산업단지의 공간적 집중이다. 둘째, 권위주의 시대, 공장 밖에서 급성장한 민중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이다. 권위주의정권과 경제적 불의에 반대하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그리고 진보적 지식인 사이의 계급동맹을 목적으로 하는 민중운동은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으로, 야학의 성장으로, 노학연대로, 그리고 대학생들의 위장취업으로 표현되었다. 셋째, 권위주의정권의 배제적 노동통제이다. 한국정부는 노동자를 조직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하려 노력하였고, 공안조직을 통해서 노동운동을 통제하는 데 주력하였다. 노조활동가를 해고하고 다른 사업장에 취업하지 못하도록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방식으로 노조활동가를 산업현장에서 몰아내었지만, 이러한 배제적 노동통제는 오히려 노조활동가를 급진적인 민중운동가와 강한 연계를 맺게 하였고 골수 노조운동가집단을 양산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오늘날 한국노동운동을 규정짓는 ‘대기업조직노동자들의 전투적 노동운동’의 구조적 뿌리는 바로 지역적으로 집중된 전략산업분야의 대공장제, 민중운동의 이념적 세례, 그리고 강한 노조운동가집단의 존재라고 저자는 보고 있는 것이다.

사회과학자로서 냉철한 이성에 의해 한국노동계급의 형성을 추적하고 있지만,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저자의 따뜻한 시선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특히 YH 사건 등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룰 때는 전태일평전을 보는 듯한 감동이 느껴진다. 그리고 1997년 국민의지지 속에 총파업궐기로 노동법개정을 이끌어내고, 1998년 IMF경제위기를 극복하고자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사회협약을 맺는 등 한국노동운동이 성숙해지는 과정을 역사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저자가 바라보고 있음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빛바랜 사진으로 열정을 깨운다

하지만 저자의 따뜻한 시선이 사회과학자의 냉철함을 무디게 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현 단계 한국노동운동이 전체 노동계급을 대변하고 나아가 시민과 함께하는 사회운동노조주의로 전환해야하는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대기업노동자의 이익집단활동으로 전락하는 상황에 대한 진단도 잊지 않는다. 권위주의시대의 유산인 기업별 노조운동, 재벌-하청관계로 대변되는 이중적 산업구조, 노동시장유연화로 인한 노동시장의 분절화,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후 노동해방’이라는 상투적이지만 전체노동계급을 하나로 묶었던 이념성의 약화, 노동자정당의 부재...

저자의 지적대로 한국의 노동계급은 새로운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계급의식적이고 정치적으로 조직된 계급이 될 것인가, 아니면 협소하고 특수한 경제적 이해에 사로잡힌 분해된 노동자집단이 될 것인가” 하는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다. 따라서 필자는 그 누구보다도 한국노동운동의 한가운데 서있는 노조활동가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한권의 빛바랜 사진첩에 불과하다고 외면당할지 모르겠으나, 한국노동운동 초기의 강한 저항정신, 계급불평등과 사회적 불의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 강한 연대의식과 정치적 자신감을 회복하는데, 그 어떤 채찍보다도 추억어린 사진 한 장이 절실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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