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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태니커] 사회주의

사회주의 社會主義 socialism

자본주의의 시장원리를 반대하고 생산수단을 공유화함으로써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학설 및 정치운동.

개요

영국의 사회주의자 앤서니 크로스런드가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자가 사회기구 속에서 구현하려고 하는 일련의 가치 또는 열망"이라고 말했듯이 사회주의의 뜻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근대 사회주의 이념의 싹은 플라톤의 〈국가 Republic〉,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Utopia〉와 18세기 계몽주의시대의 풍부한 유토피아 문학으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지만, 실제로 근대 사회주의는 산업혁명이 야기한 사회·경제 관계와 전통적인 질서의 붕괴에 반대했던 다양한 작가들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야기한 부정·불평등·피해 및 자유방임적 시장경제 체제에 대해 비판의 화살을 쏘았다. 당시의 탐욕스런 개인주의를 비판하고 그들은 형제적 결속감으로 결합된 새로운 생산자들의 공동체를 꿈꾸었다. 그들은 미래에는 대중이 자본가로부터 생산수단과 정부를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20세기에 사회주의자로 자칭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같은 생각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사회주의의 특정한 이념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을 달리했다. 생산수단의 완전한 국유화만이 그들의 목표를 달성시켜 줄 것이라고 주장한 사회주의자도 있고, 주요 산업의 선택적 국유화와 상속권자의 사유재산권 통제를 제안한 사회주의자도 있다. 또 다른 사회주의자들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의 지배와 계획경제를 주장한 반면 그밖의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적 입안자가 시장경제를 주도하는 '시장 사회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사회주의자들이 제시한 좋은 사회로 나아가는 최선의 방법 역시 다양하다. 몇몇 사회주의자는 정부의 지도를 요구하지만 다른 사회주의자는 공공기관, 준(準)공공 위탁기관, 지방자치기관, 생산자의 자치공동체 등의 정책결정기구를 통해 가능한 한 분산·분권화를 주장한다. 노동자의 지배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정부의 계획기구에 의존하는 사회주의자도 있다. 국가수입이 보다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모든 사회주의자가 공통되지만 수입의 절대적 평등을 바라는 사회주의자도 있고 직업에 따른 차등지불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수입을 보장하는 것에만 목표를 두는 사회주의자도 있다.

"각자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는 사회주의자들이 자주 부르짖는 구호이다. 그러나 많은 사회주의자는 각자가 사회에 대한 공헌도에 따라 자신의 몫을 받는 것이 사실상의 사회유지라고 보며, 사회는 먼저 모든 시민에게 최소한의 의·식·주를 보장해야 하고 그들을 교육·건강·교통·오락 등의 기본 서비스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자는 또 모든 시민의 정치적 권리와 신분차이를 평등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신분의 차이를 완전히 없애야 하는지, 사회주의 사회에서 정책결정의 불평등이 유지되도록 내버려둘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이견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라는 말이 사용되고 악용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일찍이 1845년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독일인들이 사용하는 사회주의라는 말이 "모호하고 막연하며 정의할 수 없는 용어"라고 토로했다.

엥겔스 시대 이래 사회주의는 이 용어를 사용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재산과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독일 내의 어떠한 단체도 불법화했던 1870년대 후반 독일의 총리 비스마르크조차도 몇 년 뒤에 "국가는 우리의 제국(帝國)을 위해 사회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파시스트와 전체주의적 독재자 등 현대의 궤변적 보수주의자들도 종종 자신들이 사회주의 건설에 종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 이념의 기원

근대적인 의미에서 사회주의 용어는 1830년경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 용어는 프랑스에서는 푸리에와 생시몽주의자의 저작, 영국에서는 로버트 오언의 저작에 적용되었다.

생 시몽과 푸리에

앙리 드 생 시몽 백작(1760~1825)은 풍부하지만 비조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괴짜 천재였다. 그의 사회주의 저작은 사회질서와 교권적 위계질서의 붕괴에서 비롯된 당시의 불건전하고 제멋대로인 개인주의적 사상에 관한 생각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는 각 시대마다 그 시대를 구원할 수 있는 싹을 가지고 있으며 이 싹은 높아지는 과학과 기술 수준 및 이미 새로운 산업질서를 건설하기 시작한 산업가와 기술자들 속에서 자라고 있다고 주장했다.

과학적·기술적 지식이 산업주의에 합류함에 따라 전문가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생 시몽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똑같은 능력을 부여받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가 평등주의적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재능에 어울리는 사회적 지위에 오를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보장받음으로써 잠재능력을 최대한 이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공무질서를 근절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는 강제적 제도로서의 국가를 사실상 제거할 수 있다. 미래의 사회는 거대한 작업장처럼 운영될 것이며 이 속에서 사람에 대한 지배는 사물의 행정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생 시몽의 추종자들은 생 시몽의 학설을 보다 정확하게 사회주의화하는 데 힘썼다. 그들은 사유재산권이 새로운 산업체제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고 권력과 재산권의 세습적 양도는 합리적인 사회질서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생시몽주의자들이 생시몽 교회를 세우려는 다소 기묘한 시도를 했다고 해서 그들이 부르주아-자본가들의 재산권이 더이상 신성불가침일 수 없다고 주장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프랑수아 마리 샤를 푸리에(1772~1837)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고독한 사상가로 거의 정신이상자였다. 그는 대부분의 생애를 영업사원으로 보내면서 경험한 경쟁세계와 낭비적 상업에 대한 혐오감을 통해서 반(反)자본주의적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지나칠 정도로 풍부한 상상력을 가졌던 덕분에 그는 다가올 재생된 세계는 사회적 변형뿐 아니라 자연적 변혁과 심지어 우주의 변혁에 의해 특징지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양은 레모네이드로 변할 것이며 야생동물은 인류에게 봉사하는 반(反)사자와 반(反)호랑이로 바뀔 것이라고 했다.

지나치게 세심하고 망상적이었던 푸리에는 자신의 공동체 모델로서, 좋은 미래사회의 발아세포인 '팔랑스테르'(phalanstère)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 공동체 안에서 인간은 더이상 마음에 맞지 않은 일을 강제로 하지 않아도 되며 자신의 기질과 기호에 맞는 일을 할 수 있다. 아침에는 양배추를 재배하고 저녁에는 오페라를 부를 수 있다. 푸리에는 인간의 자발성은 불필요한 규정 밖에서 이루어진다는 반(反)율법주의적 견해를 가졌다. 생 시몽이 전문가의 지배를 예언했던 데 반해 푸리에는 사랑과 열정이 조화되어 있고 강제 없는 질서 속에서 인간이 서로 결합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오언주의

웨일스의 로버트 오언(1771~1858)은 보다 진지한 견해를 피력했다. 처음에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직물업을 경영하면서 모범적인 고용주이자 교육개혁가 및 공장개혁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동료 자본가들에게 절망을 느끼고 신생 노동조합운동을 추진했다. 자신에게 부(富)를 얻게 해준 산업주의의 해악을 날카롭게 의식하면서, 경쟁이 없어지고 교육의 나쁜 결과를 합리적인 계몽에 의해 상쇄시킨다면 새로운 생산력은 인류의 이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산업에 대한 공동협동통제와 '통일과 협동 마을'의 창설을 주장했는데 이 마을에서 주민은 수확고를 증가시키고 더불어 그들의 육체와 정신을 향상시킬 수 있다. 오언식의 공동체는 인디애나 뉴하모니를 비롯한 미국의 여러 곳에 설립되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협동에 대한 그의 시도와 '위대한 노동조합' 속에서의 노동조합운동 역시 실패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는 영국의 사회주의 전통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경쟁체제에 대한 비난, 협동과 교육에 대한 강조, '불건전한 환경이 일으킨 어리석은 결과를 없애면 인간은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낙관적 메시지는 사회주의 운동이 지속되는 데 이바지했다.

그밖의 초기 사회주의자

1840년대에는 많은 사회주의 학설이 등장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프랑스의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는 급진적 사회주의(그는 이것을 공산주의라 불렀음)를 발전시켰는데 급진적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체제인 자본주의는 곧 협동결사체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는 믿음과 인민적 민주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이론화를 서둘렀고 자발성과 혁명적 행동의 미덕에 대해 강한 믿음을 가졌으나 이론적인 공헌보다는 수많은 반란을 기도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에티엔 카베는 자신의 영향력있는 유토피아 저서 〈이카리아 여행 Voyage en Icarie〉(1840)에서 토머스 모어와 푸리에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노동자 조직 L'Organisation du travail〉(1839)으로 가장 유명한 루이 블랑은 이 책에서 정부가 융통해준 자본으로 국유 작업장을 설치할 것을 주장했다. 이 작업장들은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노동자들은 그들의 경영자를 선출할 수 있다.

그가 1848년 혁명 이후 파리에 세운 국유 작업장은 부활하는 중간계급에 의해 곧 폐쇄되었으나 그가 '노동조직'을 계획하고 '노동권' 인정을 주장한 것은 근대 복지국가를 예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1809~65)은 무정부주의 전통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는 사유재산과 사유재산을 근간으로 하는 제도를 비판했는데 상호관계·평등·정의로 이루어진 인간관계가 강탈·착취·탐욕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주장은 사회주의자들의 상상력을 강렬히 자극했다. 또 생산자 공동체에 대한 그의 반(反)국가통제주의적·연방적 시각은 사회주의 전통 내에서 집권적·국가통제주의적 시각과 균형을 맞추는 대안을 제공했다.

19세기 초반 영국에서는 많은 작가들이 출현하여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공격했고, 저명한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의 사상을 급진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임금노동을 비난했다.조금 뒤에 일어난 프레더릭 데니슨 모리스와 찰스 킹즐리가 이끄는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운동은 경제적 급진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의 결합을 시도했다. 1830, 1840년대의 급진적 차티스트 운동에서는 반(反)자본주의 이념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 운동은 특정 사회주의 집단의 운동이기보다는 노동계급의 정치운동이었다 (→ 색인 : 차티스트 운동).

마르크스와 사회민주주의의 등장

지성사의 관점에서 볼 때 마르크스 이전의 모든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매우 본질적 가치가 있는 이념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마르크스 이후 사회주의 발전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이념은 19세기 후반에 사회주의 전통을 풍미했던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강력한 조류가 뿌리내리는 데 이바지했다.

공산당선언

카를 마르크스(1818~83)는 정신을 종합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독일의 관념 철학과 영국의 정치경제, 그리고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결합했으며(→ 마르크스주의), 평생 동안의 지적 동료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선언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1848)을 집필했다. 마르크스는 사회가 역동적인 대립자의 균형으로 존재한다고 이해했다.

불화가 모든 것의 근원이며 사회갈등은 역사과정의 핵심이다 (→ 색인 : 역사철학).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생계를 빼앗기 위해 자연에 대항해 싸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상호관계를 맺으며 이 관계는 인간이 생산활동에 도달하는 단계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사회에서 출현하는 노동의 분화는 역사 드라마의 주역인 적대계급의 형성을 이끈다 (→ 색인 : 분업) .

전임자들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역사를 단순히 부자와 빈자 또는 힘을 가진 자와 힘을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투쟁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이 투쟁이 주어진 역사적 단계에서 출현하는 특정한 역사적 계급에 따라 크게 다르다고 가르쳤다. 마르크스가 정의한 계급은 생산과정 속에서 공동지위를 공유하며 그들의 상호이익에 대한 공동전망과 실현을 개발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헤겔과 몽테스키외처럼 마르크스는 사회를 구조화한 전체로 생각했다. 법전·교육체계·종교·예술 등 사회의 모든 측면은 상호 관련되어 있고 경제적 생산양식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생산양식이 역사운동의 결정적인 요소임을 강조한 점에서 마르크스는 다른 사상가와 달랐다. 그는 생산관계가 사회 전체의 문화적 상부구조를 세우는 근거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이 학설을 전임자들의 학설과 구분해 그들의 학설을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자신의 학설을 과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이 인간발전을 위한 단순한 관념적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 자본주의의 저작과 역사운동에 대한 과학적 검토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이 학설은 과거역사에 대한 해석일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과학적 예측이 될 것이다.

역사는 계급투쟁에 의해 형성되며, 자본가의 감독에 대항한 동시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은 결국 사회주의 사회를 이끌어올 것이고 이 사회에서 서로 결속한 생산자는 자신들의 집단적인 운명을 공동으로 만들어가면서 경제적·사회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그러므로 계급투쟁은 하나의 목적이 된다.

제1인터내셔널

〈공산당선언〉은 유럽 대륙의 노동자 집단인 '공산주의자 동맹'의 강령으로 씌어졌으나 1848년의 유럽 혁명들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마르크스·엥겔스는 영국과 유럽대륙에서 발전하는 노동운동과 완전히 고립되어 살았다. 당시 사회주의는 고립된 분파, 특히 망명자들의 교의였다. 그러나 1864년 런던에서 유럽 대륙 및 영국의 노동자 대표들과 지식인들의 회의가 열린 뒤 국제노동자연합, 즉 제1인터내셔널로 알려진 조직이 출현했다.

제1인터내셔널은 단순한 노동조합주의에서부터 무정부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향을 포괄했지만 마르크스는 처음부터 이 조직을 이끌었고 이 조직을 자신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도구로 만들었다. 제1인터내셔널은 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었지만 영국의 노동운동이 마르크스주의 혁명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에서 제1인터내셔널은 영향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유럽 대륙, 특히 독일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고 곧 당시 노동운동의 주요학설로 자리잡게 되었다.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독일 노동운동의 창시자 페르디난트 라살(1825~64)은 자율적 노동계급 조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와 의견을 같이했지만 자본가의 지배로부터 노동자를 해방시킬 생산자의 협동조직을 설립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정부가 제공해주기를 바랐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와 달랐다.

마르크스에게는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어떤 호소도 생각할 수조차 없는 문제였기 때문에 그는 독일에서 라살에 대항해 자신의 추종자를 결집했다. 1869년 그들은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 색인 : 독일 사회민주당). 라살 추종자와 마르크스 추종자 사이의 분열은 1875년 두 분파가 타협안(마르크스는 이 타협안에서 라살의 흔적이 보이는 부분을 강하게 비판했음)을 기초로 연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운동은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반(反)사회주의 입법을 통해 그들을 억압하고 사회개혁을 실시하여 그들의 호소를 근절시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성장했다. 1877년 사회당은 독일 제국의회에서 50만 표를 얻으며 12명의 의원을 배출했다. 사회민주당의 당원수는 1881년 31만 2,000명, 1890년에는 142만 7,000명으로 불어났다.

반사회주의 입법이 폐지된 뒤 사회민주당은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을 채택했는데, 이 강령은 라살의 국가 보조를 받는 기업을 설립하자는 주장을 묵살하고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목표인 '계급지배와 계급 자체의 폐지'를 서약했다.

마르크스 사상은 여러 차례의 발전과정을 경험하면서 여러 유형의 추종집단이 생겨났다. 그들은 각각 마르크스의 구절와 어휘를 인용함으로써 자신들의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정당화했다. 1840, 1850년대 초기에 부르주아 지배에 대한 폭력적인 혁명적 전복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출현에 의해서만 노동계급이 해방될 것이라고 주장했던 마르크스의 견해는 1860년대 후반에 이르러 매우 온화해졌다.

상층 노동자 계급에게 유리한 제2차 개혁법(1867)이 통과된 뒤 영국에서 쓴 저서에서 마르크스는 영국이 평화롭게 사회주의로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또 그러한 평화적 방법이 미국과 다른 나라에서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혁명적인 마르크스주의 웅변가처럼 보였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점점 의회활동에 익숙해져갔다. 이론가 카를 카우츠키(1854~1938)의 지적 지도를 받으면서 그들은 경제력의 필연적인 발전이 반드시 사회주의를 출현시킬 것이라는 경제결정론을 전개했다. 사회민주당의 공식 강령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여전히 완고했지만 그들의 활동은 점점 실용주의적으로 되어갔다.

한때 엥겔스의 가까운 동료였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1850~1932)은 유명한 저서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임무 Die Voraussetzungen des Sozialismus und die Aufgaben der Sozialdemokratie〉(1899)에서 사회민주당에게 혁명이라는 짐에서 벗어나 이미 실제로 받아들였던 것을 이론적으로도 인식하라고 호소했다. 즉 독일은 사회주의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혁명적 격동을 겪어서는 안 된다.

독일과 영국의 정치적 상황 차이를 무시하면서 베른슈타인은 의회의 압력을 통해 사회주의 개혁을 이룩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점진적으로 변형시키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독일의 사회민주당에 영국과 같은 길을 걸으라고 촉구했다. 카우츠키의 정통교리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간의 투쟁은 독일 사회민주당을 동요시켰다. 베른슈타인의 학설은 1903년 공식으로 무효화되었지만 실제로 수정주의는 당 전체에 퍼졌고 특히 당의 의회 지도자와 노동조합 지도자에게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모든 사회민주당 지도자는 자국 정부와 전쟁을 지지했고 따라서 사회민주당의 혁명적 요구는 종말을 고했다.

기타 유럽 대륙의 사회민주당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프랑스 노동계급의 역사에 깊게 뿌리박고 있는 사회주의 전통과 경쟁해야 했다. 블랑키와 푸르동의 추종자들은 1871년 파리 코뮌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다. 그뒤 프랑스 사회주의는 갈등에 의해 분열되었다. 1875~76년 쥘 게드가 세운 노동당은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했으나 다른 사회주의 정당들은 18세기의 혁명적 유산뿐 아니라 블랑키·블랑·프루동의 영향력을 받아들였다.

1905년 다양한 정당이 합병된 뒤에도 사회주의운동은 혁명주의와 개혁주의 사이의 불화로 계속 분열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사회주의는 계속 성장했다. 초대 의회 때 3만 5,000명의 당원을 가지고 있었던 사회주의 연합당은 1906년 선거에서 54석, 1914년 하원선거에서는 100석 이상의 의석을 얻었다.

그러나 독일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사회주의 운동도 혁명적인 웅변은 실용적인 활동으로 바뀌어갔고 당은 제3공화국 의회에 노련하게 참여했다. 위대한 사회주의 웅변가이면서 평화선거의 주요지도자였던 장 조레스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날 암살된 뒤 대부분의 사회주의 지도자는 프랑스의 전쟁노력을 지지했다.

19세기 후반에 사회민주당은 유럽 대륙 대부분의 나라에서 불타올랐던 마르크스주의 학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덴마크의 사회민주당은 1870년대에 창당했고 스웨덴의 사회주의 운동은 1889년에 시작되었다. 노르웨이 노동당(처음에는 사회민주당으로 불렸음)은 1887년에 결성되어 20세기 초기에는 주요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중부 유럽에서도 사회민주당은 빠른 속도로 정치적인 세력으로 성장해갔다.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당은 1888년에 결성되어 1908년 의회선거에서 전체 1/3의 득표를 얻으면서 독일 이외의 가장 강력한 사회주의 정당이 되었다. 1885년 노동조합과 협동조직 등이 합병하여 결성된 벨기에 노동당 역시 빠른 속도로 수천 개의 상호원조결사체를 조직했으며 매우 강력한 노동조합운동을 일으켰고 보다 자유로운 보통선거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수많은 파업을 이끌었다. 1894년에 창당한 네덜란드의 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몇 년 동안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활동하면서 1912년 하원선거에서 20%의 의석을 차지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처럼 덜 산업화한 유럽 지역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주로 전(前) 자본가와 농민 계층을 기반으로 하는 무정부주의 경향과 경쟁해야 했다. 정치세력으로서 유럽의 무정부주의는 매우 유력한 러시아의 자유주의 사상가인 미하일 바쿠닌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의 '무정부주의 연맹'은 제1인터내셔널에 속해 있었으나 마르크스와의 불화로 바쿠닌과 그의 추종자들은 1872년 제1인터내셔널에서 추방되었다.

스페인에서는 1879년 사회노동당이 결성되었으나 바쿠닌주의자를 비롯한 무정부주의 사상의 흐름이 강력했기 때문에 그뒤에도 사회주의 운동은 계속 무정부주의와 경쟁해야 했다. 스페인의 사회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야 무정부주의를 청산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도 무정부주의가 사회주의운동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제1인터내셔널의 이탈리아 대표들은 바쿠닌의 가르침을 따랐다.

1892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필리포 투라티의 지도로 독립된 사회당이 형성되었다. 1913년 시민의 선거권이 확대된 뒤 공식 사회당은 의회에서 51석을 얻었고 분열된 다른 2개의 사회당도 31석을 얻었다. 계속적인 내부 불화에 시달리고 있던 보다 후진 지역에서는 무정부주의 경향이 강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무렵 이탈리아의 사회당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마르크스주의 조직의 하나로 성장했다.

제2인터내셔널

제1인터내셔널은 유럽 전체에서 사회주의운동을 다양화했다. 제1인터내셔널이 각 나라 나름의 정치체제에 근거하여 발전하기 시작했을 때 국제적 운동은 더이상 단일한 제도기관에 의해 통제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1876년 제1인터내셔널이 해체된 뒤 마르크스·엥겔스는 사회주의운동이 열렬히 추구하는 바에 대해 자문하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더이상 그 운동을 지도하지 못했다.

이제 사회주의의 역사는 분리된 민족운동의 역사가 되었고 민족운동은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형식적으로만 인정하고 점차 수정주의적·비혁명적 노선으로 나아갔다. 20세기 초기에 사회주의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강력한 의회세력으로 부상했다. 귀족정치가 아직도 강력한 러시아를 제외한다면 유럽에서 사회주의자들은 기존 체제의 폭력적인 전복보다는 기존 체제의 변형을 추구하는 개혁가였다. 다양한 정당 속에서 단지 소수 좌파만이 혁명적인 정통교의를 고수했다.

1889년에 창설된 제2인터내셔널은 사회주의운동의 변화된 성격을 반영했다. 제2인터내셔널은 제1인터내셔널이 시도했던 통일되고 순수 교의적인 조직이 아니라 사회주의운동의 국제적 의회와 같은 것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독일의 당이 주도했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웅변가였던 독일 대표들은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단호하게 반대하면서 '좌익'노선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사회주의자의 정부참여는 빌헬름 황제가 이끄는 독일에서는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에 독일 대표들은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이 문제에 대해 완고한 견해를 펼 수 있었다.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이 문제가 표결에 부쳐졌을 때 독일 대표들은 이에 찬성하는 조레스 등에 대항해 반대편에 섰다. 그러나 조레스는 "당신들의 뛰어난 동지 카우츠키가 제공한 이론적 공식의 확고함 뒤에서 당신들은 죽을 때까지 숨어 있을 것이고…… 행동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지적하면서 독일의 대표들을 승복시켰다.

정부 참여 문제와 전쟁 문제에 있어서 독일이 주도하던 제2인터내셔널은 전쟁을 반대하는 많은 선동적인 선언을 했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이미 제2인터내셔널은 마비상태임을 드러냈다. 제2인터내셔널의 대표 대부분은 노동계급의 국제적 결속성이라는 이념을 버리고 각 민족정부 편으로 돌아섰다. 그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비밀리에 믿어왔던 생각, 즉 '노동자들에게도 결국 조국은 있다'라는 신념을 인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여러 사회주의 경향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는 유럽 대륙의 사회주의운동을 풍미했지만 영국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1880년대에 급진적인 언론인 헨리 하인드먼은 엄격한 마르크스주의 원칙에 입각해 '사회민주주의 연맹'을 창설했지만 이 단체는 영국 사회주의운동의 주변에만 머물러 있었다. 시인 윌리엄 모리스가 자유주의-생디칼리슴의 이념에 입각해 세운 '사회주의자 동맹' 역시 유력한 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반면 비(非)마르크스주의 이념에 바탕한 페이비언 사회주의는 영국에서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페이비언 협회는 시드니 웹, 베아트리스 웹, 그레이엄 월러스, 시드니 올리비에, 조지 버나드 쇼 등 당시의 유명한 젊은 급진적 지식인들에 의해 1880년대에 조직되었다. 이 협회는 진보적이고 온건한 사회주의 형태로 발전했다. '점진주의의 필연성'을 확신하는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결코 대중조직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인간권력에 대한 실제적이고 겸손한 충고를 통해 사회를 변형시키는 활력있는 지식인 집단이기를 원했다.

매우 영향력 있는 기관지 〈페이비언 에세이스 Fabian Essays〉(1889~)에는 사회주의자이건 사회주의자가 아니건 간에 정책형성자에게 영향을 미친 사회입법과 개혁의 청사진이 담겨 있다. 쇼가 "사회주의자의 정책을 통과시키기 위한 정부 이면의 공작"으로 정의한 '침투'를 통해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핵심 정치가, 공무원, 노동조합 간부, 지방의 정책형성자들에게 계획적·건설적 개혁입법의 필요성을 확신시키는 데 힘썼다. 비마르크스주의 경제학만큼이나 대륙 사회주의 전통에 근거한 이론을 폈던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전체 사회조직의 지속성을 해치거나 급작스럽게 변화시키지 않는' 새로운 질서를 추구했다.

생디칼리슴

프랑스의 노동조합주의에서 나온 생디칼리슴 운동은 파리 코뮌(1871)의 유혈사태가 끝난 뒤 재조직되었다. 의회와 정치활동이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생디칼리스트들은 그들 자신의 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직접행동만이 원하는 사회주의로의 변형을 이끌어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페르디낭 펠루티에의 지도 아래서 '노동조합사무소 연맹'(1892년 설립되어 1902년 노동총회 연맹과 합병했음)은 국가를 마비시키고 조직노동자의 수중에 권력을 장악시키는 '총파업'을 통해서 노동의 해방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념을 제시했다. 노동조합은 생산의 핵세포를 지도·경영했다.

생디칼리스트들은 수많은 지식인들을 그들 대열에 끌어들였고 이들 지식인들은 생디칼리슴과 정치적 노선을 통한 사회주의로의 진입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려 했다. 그들의 저작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저서로 꼽히는 조르주 소렐의 〈폭력론 Réflexions sur la violence〉(1908)은 소렐 자신이 곧 극우파로 돌아섰음에도 불구하고 혁명투사들의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길드 사회주의

길드 사회주의 전통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몇 년 동안 영국에서 발전했다. 임금제도와 이윤생산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이 가진 적대감을 공유하면서 길드 사회주의자들은 생디칼리슴에서 국가에 대한 불신과 생산자의 지배에 대한 강조를 빌려왔다. 그들은 길드로 조직된 독립된 생산자가 자신들의 고용상태를 관리하고 창조적인 일에 참여하는 중세로 거슬러올라갔다. 산업에서의 자치를 목표로 삼으면서 길드 사회주의자들은 산업조직·교회·노동조합·협동결사·지방자치단체에 자율성을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또 모든 사회집단은 위로부터의 통제 없이 자신의 특수한 기능을 수행해야 하며, 개인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모든 기능집단을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능집단간의 협동은 국가에 의한 관리를 대체할 것이고 경찰의 보호와 같은 국가의 업무를 제한할 것이다. 국가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주권자가 아니라 하나의 기능집단이 될 것이다.

길드 사회주의는 여러 사상가에게 기원을 두고 있지만 성숙한 길드 사회주의 학설을 발전시킨 사람은 뛰어난 옥스퍼드 명사인 G.D.H.콜이었다. 그의 초기저서인 〈노동의 세계 The World of Labour〉(1913)· 〈산업에서의 자치 Self-Government in Industry〉(1917) 등에는 길드 사회주의 이론이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길드 사회주의운동은 대중의 지지를 널리 얻지는 못했지만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관료적·집중적 경향과 대비되는 한에서 계속 영국의 노동운동의 근원적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미국의 사회주의

미국에서 사회주의는 유럽만큼 유력하지 못했다. 그러나 1901년 사회당이 결성되었을 때 1만 명이었던 당원수는 1912년 15만 명으로 불어났고 같은 해 대통령 선거에서는 총 득표수의 6%에 해당하는 89만 7,000표를 얻기도 했다. 미국의 사회주의는 유럽 출신의 이민 인구에게 가장 강력한 뿌리를 두고 있지만 19세기의 유토피아적 식민지, 노예제 폐지론자, 노동조합주의자, 농업개혁가, 1880, 1890년대의 소외된 사회주의자 집단으로부터 큰 영감을 얻었다.

사회당의 전신인 사회노동당은 1877년에 설립되었지만 1890년 언론인이자 논객인 다니엘 드 리온이 참여함으로써 독특한 전망을 펼칠 수 있었다. 드 리온은 마르크스주의의 교조적 경향과 프랑스의 생디칼리슴 속에서 발전된 '노동주의'를 결합하려 했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노동조합원이 '시시한 판에 박힌 기업' 위로 올라서고 비밀투표와 산업전투를 통해 자본력과 성공적으로 경쟁할 수 있기를 바랐다.

사회노동당은 하나의 분파로 남아 있었으나 사회당은 유진 데브스의 지도를 받으며 대중운동으로 발전했다. 전 노동조합 관리였던 데브스는 투옥기간 동안 다양한 사회주의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사회주의로 전향했다. 데브스가 이끄는 사회당은 중앙집권화하지도 않았고 정치적으로 동질적인 것도 아니었다. 사회당은 개혁주의자, 혁명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 그리스도교 목사, 지방자치단체 개혁가, 철도사업·기업활동을 증오하는 인민주의자, 그리고 저임금으로 노동을 착취하는 공장에서 형제애를 꿈꾸는 유대인 피복 노동자를 모두 받아들였다. 사회당은 주요한 이론적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비(非)교조적 방법을 통해 미국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는 데 효과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미국 사회당은 제1차 세계대전 뒤에 쇠퇴했는데 마지막의 저명한 지도자는 노먼 토머스였다.

러시아 사회주의의 등장

인민주의 전통

19세기에 러시아를 지배한 급진적 경향은 인민주의였다. 인민주의 학설을 처음으로 전개한 작가이자 편집자 알렉산드르 헤르젠은 농민의 공동사회에서 미래에 다가올 사회주의 사회의 싹을 보았고, 러시아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뛰어 고대 농민의 전통에 근거한 협동사회를 건설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헤르젠은 농민계급을 이상화했고 그의 추종자들은 많은 학생과 지식인들에게 혁명활동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인민에게 가라"고 영감을 불어넣었다.

1860, 1870년대에 보다 급진적인 인민주의자들은 농민반란에 대한 신념을 잃고 테러리즘으로 돌아섰다. 소규모의 학생 혁명가 집단은 테러리즘을 통해 차르 체제를 타도하려 했고 이런 그들의 노력은 1881년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바쿠닌이 입수한 저서 속에 있던 세르게이 네차예프의 〈혁명가 문답 Revolutionary Catechism〉은 혁명의 유일한 목표가 "모든 기존 목표의 뿌리와 가지를 자르고 러시아에 있는 모든 국가전통·질서·계급을 소멸시키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서유럽에서는 숙련공과 농민에게 지지를 받으면서 푸르동의 계승자로 출현했던 바쿠닌이 러시아에서는 거의 소외된 지식인으로 이루어진 엘리트적·테러리스트적 운동이 일어나도록 도왔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꼽힌다. 인민주의의 광범한 흐름 속에서 테러리즘은 대중의 교육과 평화적 선전을 믿었던 진보적 사회주의의 반대를 받았다. 엘리트주의자들이 테러 운동을 추구하는 동안 점진주의자들은 인민 속에서 선전활동에 열중했다.

혁명 전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는 처음에는 인민주의자였다가 1880년 제네바에 정착했을 때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했고 1883년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인 ' 노동해방단'(Osvobozhdenie Truda)을 결성했다. 그는 러시아 사회주의가 우선적으로 성장하는 공장 프롤레타리아를 토대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러시아는 예외적이라는 헤르젠의 생각을 거부하면서 그는 혁명은 성격상 유럽적일 것이고 그 속에서 러시아의 자리는 러시아 나름의 노동운동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880, 1890년대의 다양한 저서와 팜플렛을 통해 플레하노프는 인민주의자를 공격했고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의 객관적인 역사적 필연성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했다. 사회진보의 법칙은 경멸받을 수 없으며 러시아에서의 부르주아 혁명은 산업의 발전과정에서 필연적이다. 조직된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혁명의 이점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추진해야 할지를 알 것이다.

독일식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면서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1870~1924, 후에는 당 이름인 레닌으로 알려짐)는 혁명에 대해 더욱 호전적으로 접근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What Is To Be Done ?〉(1902)에서 그는 자신의 독특한 학설을 공식화했다. 사회주의는 전문혁명가들이 노동자와 농민 대중을 동원·활성화할 때에만 성취할 수 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노동자는 노동조합의식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호전적이고 훈련받은 비타협적인 혁명가 조직이 대중을 행동으로 이끌어야 한다.

레닌의 추종자들은 1903년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불법단체) 제2차 대회에서 다른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결별했다. 반(反)레닌주의는 보다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지도자인 L.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마르토프는 "우리가 볼 때 노동당은 전문혁명가의 조직에만 국한될 수 없다. 노동당은 전문혁명가뿐 아니라 활동적·지도적 프롤레타리아의 전체적인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선언했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2개 분파는 처음에는 협동하여 합동회의까지 개최하기도 했으나 1912년에 완전히 갈라섰다. 각 지도자들은 한 분파에서 다른 분파로 전환했다(플레하노프는 원래 레닌편이었으나 1904년 반대파와 제휴했음). 레온 트로츠키 등은 일시적이라도 어느 한 분파에 속하지 않고 자유를 누리려고 했다. 이같은 분쟁은 2개 분파 대부분의 망명 지도자가 살던 서유럽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러시아 내부에서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하층 노동계급을 끌어들인 반면 레닌의 반대집단 멘셰비키는 주로 교육받고 숙련된 노동자와 유대인 지식인을 끌어들였다. 1917년 2월혁명이 차르 체제를 무너뜨리고 자유주의적이면서 막연하게나마 사회주의적인 지도력을 형성시킨 뒤 볼셰비키는 도시대중에게로 조직을 확대해나갔다. 1917년 4월 레닌이 망명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완전히 새로운 전략을 요구하여 추종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때까지 볼셰비키는 미래에 다가올 혁명의 기회를 준비하는 동안 자신들의 당면과업은 민주공화국의 한계 속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레닌은 그들이 즉시 권력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쟁의 즉각적인 종결을 원하는 대중의 바람, 토지에 대한 농민의 갈망, 새로운 정치체제의 허약함이 1905년 볼셰비키 간부들이 이끈 유산된 사회주의 혁명이 이루지 못한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레닌은 러시아 혁명에 뒤이어 곧 독일 혁명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은 고립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차르의 권력이 붕괴되었을 때 자발적으로 확대된 소비에트(노동자와 농민의 평의회)는 볼셰비키가 기존 체제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한 주된 조직기반이었다. 레닌의 슬로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는 주요 도시중심지에서 반응을 얻었다. 1917년 9월 볼셰비키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소비에트들은 공식 정부에 도전하는 '이중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7년 10월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트로츠키에게 임시정부를 무너뜨릴 수 있는 군사력을 부여했고 레닌이 이끄는 혁명정부체제를 출범시켰다.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

볼셰비키의 권력장악은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서도 혁명이 곧 퍼질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착수되었다. 레닌의 관점은 언제나 국제주의적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주의 지도자 대부분이 1914년 자신들의 민족정부를 지지하고 나섰을 때 레닌은 그들을 새로운 혁명 사회주의자 조직의 토대를 무너뜨리려는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권력을 장악한 뒤 볼셰비키들은 제3인터내셔널을 창설하기로 결심했다.

1919년 모스크바에서 대표들이 모여 있는 동안 베를린에서 일어난 혁명적 봉기가 진압되어 지도자들은 처형당했으며 독일 노동계급의 대다수는 새 독일 공화국의 지도력을 기꺼이 사회민주당에게 넘겼다. 그러나 러시아 지도자들이 꿈꾸는 세계혁명은 여전히 가까워 보였다. 제3인터내셔널 제1차 대회 직후 헝가리와 독일의 바이에른에서는 단명한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모든 유럽의 주요국가에서는 공산당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이 1920년 7월 제2차 세계대회를 열었을 때 이 조직은 더이상 소분파 개인이나 대표의 소규모 모임이 아니라 12개의 주요공산당에서 파견된 대표들의 연합체였다. 이 대회로 러시아 지도자들은 이제는 사회주의운동과 완전히 분리된 코민테른의 지배권을 얻었다. 또 이 대회는 코민테른의 지지자는 전쟁에서 '사회적 애국자'였던 사회당 지도자와 중도파를 모두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21개 조항의 코민테른 회원규정을 채택했다. 코민테른은 러시아를 모델로 한 훈련받은 군사적 세계혁명조직의 창설을 목표로 삼았는데 이 조직은 러시아의 지도력과 권위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1923년에 유럽에서는 희망적인 혁명의 흐름이 멈췄다. 독일 지역에서 일어난 새로운 봉기는 1923년 완전한 실패로 끝났고 소련 적군(赤軍)의 폴란드 침략 기도 역시 저지되었다. 노르웨이의 노동당, 독일의 좌파 공산당, 프랑스와 스페인의 생디칼리스트 등 일시적으로 코민테른에 참여했던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을 탈퇴했고 중앙집권식으로 하달되는 코민테른의 정책을 거절했다. 유럽은 경제적·사회적 안정책을 마련했다. 1924년 레닌이 죽자 모스크바는 그때까지 지배권을 가지고 있던 당을 러시아의 외교정책 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트로츠키 등의 코민테른 지도자는 여전히 세계 혁명을 의제로 삼았지만 러시아의 지도자들은 더이상 이것을 믿지 않았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사회주의

공산당과의 분열

전 세계에서 공산당은 사회당을 재건하려는 지도자들을 자본주의 유지를 '객관적으로' 조장하는 '사회주의의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공산당은 사회당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민족국가를 보호하면서 전쟁 동안 부르주아와 연합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저버리고 국제사회주의를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사회당 지도자들은 소비에트 국가의 독재적인 성격을 지적하면서 이에 응수했고 공산당이 민주적인 사회주의 전통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 색인 : 소련).

유럽의 사회당 운동은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이었다. 독일에서는 다시 연합한 사회민주당의 깃발 아래 대부분의 노동계급이 결집했기 때문에 공산당은 독일 노동운동에서 소수의 위치로 전락했다. 처음에 공산주의가 사회당들의 관심을 끌었던 프랑스에서는 사회당이 다시 지배권을 차지했고 공산당은 프랑스 좌익에서 소수가 되었다.

이탈리아 사회주의는 공산당·좌파사회당·우파사회당으로 분열함으로써 무솔리니의 권력장악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영국의 공산당은 노동당 속에서 거의 성장하지 못했고 급진적 분파 이상의 세력이 되지 못했다. 다른 대륙의 사회주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사회주의 역시 제2인터내셔널의 추종자와 제3인터내셔널에서 조직된 공산당 사이의 강한 분열을 드러냈다.

코민테른은 때로는 혁명노선으로 전환하고 또 때로는 호전적인 사회주의 계층과의 연합을 시도하는 등 특이한 노선을 보여주었다. 1929년 경제공황이 엄습한 뒤 코민테른은 자본주의의 '최후 위기'가 모든 곳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키리라 기대하면서 극좌편향했다. 코민테른은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을 노동계급의 적인 "사회주의적 파시스트"라고 비난했다. 프로이센 주의회에서 공산당은 나치 운동이 하나의 과도적 현상이라는 이론을 근거로, 사회민주당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나치에 찬성표를 던졌다 (→ 색인 : 나치즘).

동시에 사회당은 이론적으로는 항상 그렇지는 않았지만 실제적으로 혁명교리에 대한 서약을 포기했다. 이제 사회당은 각각의 민족정부로부터 노동계급의 최대이익을 얻어내려고 노력하는 압력단체가 되었다. 독일·영국·스칸디나비아에서 사회당은 정부에 참여했고 프랑스 등지의 사회당은 마음이 맞는 좌파 부르주아 정권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당은 구체적인 사회·경제 활동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세계 경제공황이 서유럽과 중유럽의 경제와 정치체제를 혼란에 빠뜨렸을 때 무능을 드러냈다.

세계 경제공황에 대한 반응

스웨덴과 벨기에를 제외한 지역에서 사회주의자들은 경제공황 동안 종합적인 사회주의 계획을 추진하지 못했다. 권력을 잡았을 때 그들은 정통적인 예산행정과 공공재정 정책을 따랐고 권력을 얻지 못했을 때는 더 많은 실업보험을 요구하고 임금감축에 반대함으로써 노동자의 즉각적인 이익을 서로 경쟁적으로 옹호했다. 경제위기의 심화에 따라 공산당이, 특히 공황에 의해 가장 심하게 타격받은 실업자와 미숙련 노동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넓혔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밖의 노동자들에게는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

파시즘의 등장

독일에서 히틀러의 출현은 독일의 공산당과 사회당 모두를 붕괴시켰다. 공산당은 나치의 승리가 단지 일시적이고 그뒤에는 자신들이 독일 대중을 승리로 이끌기를 희망했다. 공산당의 구호는 "나치 다음에─우리"였다. 사회당은 경제공황이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그뒤에는 나치라는 열병이 점진적으로 쇠퇴할 것이라 기대하면서 평상시와 다름없는 정치적 역할을 했다. 분열된 노동운동은 나치의 권력장악을 정지시킬 수 없음을 드러냈다. 이 불행한 사태로 공산당과 사회당은 그들의 이전 정책을 재검토하고 전략과 전술을 수정해야 했다.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엥겔베르트 돌푸스 총리가 이끄는 혁명정부에 의해 붕괴될 위협에 놓이자 1934년 2월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이론적 기여와 구체적인 업적이라는 2가지 면에서 오랫동안 모범을 보여왔다.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거의 모든 노동자의 지지를 받았고 빈 인구 200만 명 중 50만 명에 이르는 당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당은 거의 전적으로 대도시적이었다. 따라서 1934년 2월 유혈싸움은 빈에만 국한되어 일어났고 이 봉기가 4일 만에 진압되자 사회당은 지하로 들어갔다.

정부 속에서의 경험

독일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사회민주당은 마지 못해 독일 정부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회민주당 당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당은 내부적으로 분열해 우파인 '다수 사회당'은 조심스럽고 실용적인 방안으로 나아가려고 했고 카우츠키와 그의 전(前) 베른슈타인 반대자들이 이끄는 '독립 사회당'은 근본적인 구조개혁을 추진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이끄는 극좌파는 혁명당을 조직하려는 열망에서 독일 공산당을 창당했다.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능가하는 젊은 극단주의자들은 1919년 초기에 좌익 폭동을 일으켰으나 다수 사회당 정부와 그들의 동료인 우파 장교에 의해 가볍게 진압되었다.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는 암살당했고 나머지 지도자들은 코민테른으로 들어갔다. 몇 개월 뒤 바이에른에서 일어난 좌파와 공산당의 폭동 역시 실패로 끝났다.

1920년대 초기에 독립 사회당은 다수 사회당과 다시 연합했다. 1919년 새 국민의회 초대 선거에서 다수 사회당은 대다수인 39.3%, 독립 사회당은 8%의 지지를 얻었다. 사회당 정부는 독점산업 사회화의 필요성을 비롯한 급진적인 조치들을 공표했다. 그러나 1920년 6월 선거로 비(非)사회당 내각이 출범했고, 사회당원이 몇 명 참가하기는 했지만 내각의 성격은 비사회주의적이 되었다. 중간계급이 권력을 잡았고 1925년 에베르트 대통령이 죽자 보수적인 국가주의자 힌덴부르크가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기 혼란상태 속에서 사회민주당은 극우와 극좌 모두에 반대하는 공화국 적법성의 보루였다. 여러 주(州, Länder), 특히 프로이센에서 사회민주당은 정부를 장악했고 많은 개혁주의 복지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국 정치무대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1928년 5월 선거를 통해 사회민주당은 제국의회에서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출현했다.

다수득표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지도자 헤르만 뮐러가 총리가 되었고, 그들의 재정전문가가 재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 정부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독일도 직면하고 있던 경제공황에 거의 대처하지 못했다 (→ 색인 : 대공황). 사회민주당 정부는 정통 통화수축정책에 입각하여 세금을 저축하기 위해 실업수당을 감축하고 예산적자를 감소하려 했으나 이런 정책은 효과를 보지 못해 1930년 물러나야 했다. 이 정부는 사회민주당이 참여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정부였고, 그 직후부터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1923년 총선거에서 5년 앞서 사회주의 계획을 채택했던 노동당이 다수를 얻어 여당이 되었다. 노동당은 자유당의 지지를 얻어 1924년 1월 램지 맥도널드가 이끄는 제1차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노동당 내각은 몇 개의 온건한 개혁조치를 취한 뒤 1924년 10월 선거로 물러났다. 노동당 내각이 단명한 것은 어느 정도는 '볼셰비키주의자 위협'이라는 조작된 공포로 유권자들이 갑자기 우파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1929년 6월 노동당은 2번째 기회를 얻었다. 노동당은 하원의석 총 615석 가운데 288석을 얻었고 자유당의 지지를 얻어 맥도널드가 이끄는 제2차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독일 사회민주당과 마찬가지로 노동당 역시 불경기, 특히 솟아오르는 실업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노동당은 원대한 사회개혁을 약속했지만 이 개혁을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런던으로부터 도피된 자본의 양은 대격변을 불러일으켰고 기업측은 균형예산과 실업수당의 감소를 요구했다. 맥도널드가 기업의 요구 몇 개를 들어주겠다고 했을 때 노동조합은 격렬히 반대했다. 이 문제로 분열한 노동당 정부는 보수당과 자유당과의 전국연합을 결성했고 이때문에 노동당은 1930년대에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탈리아의 경우 1919년 선거에서 이탈리아 사회당은 총 550만 표 중 200만 표를 얻었다. 이탈리아는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대규모 파업, 대중시위, 공장점령, 토지재산의 자발적 몰수 등이 이탈리아 전체로 확산되었다. 1920년 8월 임금협상이 깨진 뒤 북부 산업지역에서는 혁명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50만 명의 노동자가 공장을 점령했고 생산을 계속하면서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극좌세력이 파업 확대를 주장했으나 분열된 사회당 지도자들이 주저하자 노동자들은 이에 실망하여 기세가 꺾였다.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이 노동계급의 모임을 해산하기 시작했다. 1921년 우파 당원들은 사회당과 자유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제안했으나 좌파는 이를 거부했다. 무솔리니의 테러단은 점점 더 산업 중심지로 침투해 들어갔다. 노동조합이 일으킨 총파업은 형편없는 실패로 판명되었다. 그 직후 무솔리니는 로마 행진(1922. 10)을 감행하여 권력을 잡고 총리에 취임했다. 1926년 이탈리아에서 의회제 정부는 완전한 종말을 고했고 사회당은 지하로 들어갔다.

프랑스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 정부에 참여하지 못했다. 사회당은 실제로는 점진주의를 택했지만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전전(戰前)의 정책을 고수했다. 1930년대 중반 호전적인 우파집단이 제3공화국을 위협했을 때 사회당은 그들의 정책을 전환했다. 1936년 6월 인민전선의 대표로 정부가 구성되었는데, 인민전선은 사회당 지도자 레옹 블룸이 이끌었으며 좌파 공산당부터 중도파 급진사회당까지 포괄했다 (→ 색인 : 프랑스 급진사회당).

마침내 공산당은 '사회 파시즘' 교리를 버리고 기꺼이 중도파·좌파 정당과 연립했다. 1936년 6월 인민전선의 승리는 공장에서의 연좌농성파업과 함께 일어났다. 이 파업은 레옹 블룸이 이끄는 인민전선 정부를 급진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전까지 프랑스 고용주들이 인정하지 않았던 집단교섭권이 법으로 규정되었으며 사회보장과 전반적인 노동조건도 매우 개선되었고 주 40시간 근무가 의무화되었다.

블룸 정부는 미국의 뉴딜 정책을 프랑스식으로 실시하려 했으나 처음에 가졌던 열정이 퇴색한 고용주들은 정부를 자극해 전통적인 재정·예산 정책으로 돌아가도록 압력을 가했다. 1937년 6월 연립정부의 중간계급 출신 각료들은 블룸의 긴급재정권 요구를 거절했고 블룸은 사임했다. 사회당은 급진사회당이 이끄는 차기 정부에 참여했으나 나중에 블룸은 별도의 인민전선 정부를 구성했고 이 정부는 1938년 약 1개월 동안 유지되었다. 1939년 프랑스가 독일에 대항한 전쟁에 들어갔을 때 전쟁을 반대했던 공산당은 불법화했다. 1940년 프랑스가 무너진 뒤에 사회당은 비시 프랑스에 의해 해체되었다.

스웨덴에서만이 사회당은 정부정책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스웨덴 노동당 정부는 1932년에 처음으로 구성되었다. 다른 유럽의 사회당과 달리 스웨덴 사회당은 정통 재정정책을 버리고 경제계획에서 정부의 대규모 개입을 강조했다. 광범한 공공업무는 유효자본에서 재정지원을 받아 실업의 감소를 도왔고 경제를 장려했다. 개인소비의 감소에 따른 상쇄효과를 이용해 공공투자가 이루어졌고 1933년에 16만 4,000명에 이르렀던 실업자는 꾸준한 경제팽창정책을 통해 1938년에 사라졌다. 스웨덴의 혁신은 제2차 세계대전 뒤 거의 모든 서유럽 국가가 실시했던 경제정책의 본보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사회주의

전세계로 퍼진 사회주의 정당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산업화한 국가에서 먼저 사회주의가 출현할 것이라고 항상 주장해왔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종류의 '사회주의'는 농업사회와 후진국가에 급속하게 퍼졌다. 이런 국가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가 의도했던 바와 상관 없이 산업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식민주의에 대항한 투쟁에서 특히 지식인과 반(半)지식인은 자신들이 사회주의라 생각한 이념을 택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의미있는 민족독립은 국가의 경제통제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그들은 소비를 제한하고 국가자원을 생산력 촉진에 이용함으로써만이 급속한 경제성장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생국들은 소련을 급속한 산업화의 본보기로 삼았다. 전체주의 일당지배국가에서부터 군사독재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체제는 그들이 사회주의라고 선언했다. 사회정의·평등·민주주의에 대한 서유럽의 전통 사회주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지배정당은 인도 등 소수국가에 불과했다.

반면 역설적이게도 서유럽의 사회당은 마르크스주의 시각을 포기하고 복지국가 이념으로 전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거의 모든 사회당은 민족 단위의 정부에 참여했다. 곧 그들은 의회제를 따라 권력을 추구하는 대중정당이 되고자 했고 자유당이나 기독교민주당 등과의 연립정부에 기꺼이 참여했다. 완전한 국가소유권만이 좋은 사회를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그들은 공공의 통제와 일정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혼합경제체제가 모두에게 사회적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보았다. '점진주의의 필연성'이라 할 수 있는 이 이념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자와 독일의 수정주의자가 소리 높여 주장했던 것이다.

서유럽 사회주의의 변형

전후 독일 사회민주당은 1951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 방향을 전환했다 (→ 색인 : 독일). 이 선언은 계급투쟁을 비롯한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교리를 언급하지 않고 대신 사회민주당이 "경제권을 전체 국민의 손에 넣어주고 자유민들이 평등하게 함께 일하는 공동체를 창설하는 데 목표를 둔다"고 했다. 사회민주당은 경제의 공공통제를 주장했지만 포괄적인 국가의 소유권은 거부했으며, 계획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이 계획은 공산주의나 전체주의와 전혀 다른 종류의 민주사회주의적 계획이라고 주장했다.

몇 년 뒤인 1959년 바트고데스베르크에서 채택된 행동지침 강령에서 사회민주당은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마지막 유산을 버렸다. 이 강령은 생산수단 속에서 사유재산권을 주장했지만 마르크스라는 이름과 '계급'·'계급투쟁' 등의 말은 어디에도 사용하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은 중앙계획경제를 거부했으며 자유경쟁시장 이념과 "가능한 경쟁-불가피한 계획"을 지지했다. '혼합경제'는 이상처럼 보였다.

사회민주당은 더 이상 보편적으로 타당한 학설을 가지려 하지 않았고, 어떤 정당도 전체로서의 사회에 자신의 독특한 철학을 부과하지 않는 다원주의 사회를 지향했다. 그래서 모든 의도와 목적 면에서 독일 사회민주당(1969년 빌리 브란트의 지도 아래 정부를 구성함)은 복지국가 확대를 위해 힘쓰는 개혁주의 정당이 되었다.

영국 노동당은 결코 마르크스주의를 채택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전후 세계의 정치현실에 쉽게 적응했다. 1945년 노동당은 처음으로 의회에서 다수의석을 얻었다. 6년 동안 지속된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가 이끈 정부는 영국 복지국가의 기초를 닦았다. 석탄·철도·교통·철강 등 많은 기간산업을 국유화했고 종합적인 국유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되었으며 사회보장이 확대되었고 완전고용이 이루어졌다.

노동당은 1951년 선거로 물러났지만 그들이 이룬 주요업적은 계속 유지되었다. 철강산업은 다시 사유로 바뀌었으나 보수당은 그밖의 복지국가의 성격을 손상시키지 않았다. 애틀리의 뒤를 이어 노동당 당수가 된 휴 게이츠컬은 '당이 대규모 산업의 국유화를 추구한다'는 초기 약속을 버리고 당의 공약을 바꾸려고 했다. 이런 게이츠컬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노동당은 복지국가의 확대와 실용계획의 확대를 목표로 하는 개혁주의를 실제로 받아들였다.

1965년 다시 권력을 잡았을 때 지도자 해럴드 윌슨(1970년 선거 때까지 총리를 지냄)은 신중하게 개혁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그러나 노동당 정부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고 내부개혁보다는 지출의 균형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성 때문에 사회주의 성격이 뚜렷한 정책을 택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뒤 재건된 프랑스 사회당이 전후 프랑스 정부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사회당은 프랑스 산업, 특히 공공시설·광업 및 은행·보험의 국유화, 경제에 대한 광범한 공공통제 정책, 사회보장분야의 구조적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사회당은 전전(戰前)에 노동자로부터 얻었던 많은 지지를 공산당에게 빼앗겼다. 사회당은 점점 공무원, 전문직 중간계급, 그밖의 화이트칼라 피고용인을 대변하는 정당이 되었다.

그들은 독일 사회민주당이 취했던 공약변경을 시도하지 않았고 온건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 아래서 권력을 잡았을 때 사회당은 산업·재정 분야의 국유화에 착수했지만 세계적 불경기라는 비상사태와 프랑에 대한 압박으로 매우 온건한 노선을 유지했다.

이탈리아 사회주의운동은 수많은 정당으로 분열했다. 가장 큰 조직인 이탈리아 사회당은 피에트로 넨니의 지도로 무솔리니 이전의 좌파 사회주의 전통을 부활시키려고 했다. 사회당은 공산당과의 협동에 의해서 노동계급의 이익이 가장 잘 보장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럽의 사회당 중에서 이탈리아 사회당은 계급갈등과 '정통' 마르크스주의라는 전전(戰前)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가장 가까웠다.

그러나 1956년 헝가리 혁명 이후 사회당은 점차 공산당과의 관계를 끊었고 1963년에는 기독교민주당과의 중도파-좌파 연립정부에 참여했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사회당 역시 다른 서유럽의 사회당과 사실상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 제2의 사회당은 주세페 사라가트가 결성한 민주사회당이었다. 이 당은 온건한 사회개혁을 추진했고 1947년 이후 거의 모든 이탈리아 연립정부에 참여했다. 1966년에 2개의 주요 사회당이 출현했으나 1960년대 후반에 다시 분열했다.

마르크스주의를 공식으로 포기한 정도는 서로 달랐지만 서유럽에서 모든 사회당은 복지국가를 지향했다. 사회당 이론가 중에는 사회주의가 결국 복지국가 위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계급구분이 사라지고 보다 평등한 부의 분배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것은 그들의 꿈이었을 뿐 더이상 그들의 정치행동이 되지 못했다.

아프리카의 사회주의

아프리카에서 사회주의 이념은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아프리카 지식인들에 의해 주로 북부 아프리카에서 전파되었다. 또 많은 프랑스 이주민, 특히 교사와 공무원들은 사회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였다. 특히 튀니지와 알제리에서 다양한 민족해방운동은 사회주의 이념을 통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투쟁과 연결되었다 (→ 색인 : 식민주의).

알제리가 독립을 획득했을 때 최초의 지도자 아흐메드 벤 벨라 주변에는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집단 출신의 프랑스 자문관들이 있었다. 농업의 집산주의와 산업의 자영은 알제리 민족정부가 실천해야 할 시급한 과제였다 (→ 색인 : 민족주의). 이 계획이 실패했을 때 벤 벨라는 물러나야 했고 그의 후임인 우아리 부메디엔은 '알제리 사회주의'를 계속 추진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국가주도 기업과 토지사유에 입각한 경제체제에 만족해야 했다. 사실상 알제리는 군사독재로 나아갔다.

튀니지에서는 1956년 독립한 뒤 일당체제가 출범해 하비브 부르기바의 주도로 주요기업을 국유화했다. 지배당인 데스투르 사회당은 경쟁 정치조직을 금지했고 계획된 경제발전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밖의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1950, 1960년대에 '아프리카 사회주의'가 확산되었다. 세네갈의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대통령은 어느 정도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을 주창했고 기니 대통령 세쿠 투레는 식민지 이전 아프리카의 공동체적 가치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을 결합한 '아프리카화한' 마르크스주의를 추구했다.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 대통령은 가나 정치의 토대가 '양심주의'에 있다고 선언했고 "전체주의 방안만이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1966년에 권좌에서 쫓겨났다.

케냐·탄자니아 등 그밖의 아프리카 국가에서 지배엘리트들은 급속한 산업화와 근대화를 우선적으로 추진하면서 '아프리카 사회주의' 관점의 고수를 선언했다. 많은 아프리카 사회주의 작가들은 공동 토지소유, 몇몇 부족의 평등주의 관습, 한때 부족사회에서 존재했던 호혜조직 등 아프리카 전통에 입각해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프리카에서 사회주의 공약은 이상에 가까운 말에 지나지 않았다. 단순한 생계차원에서 시장경제와 산업화로, 보건, 교육, 주택, 공공행정 조직에로의 이동이 시급했다. 자율적 기관에서 인간은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정치적·사회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힘쓸 수 있지만 아프리카에서 이런 기관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프리카에서 강제와 구별되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전망은 너무나 먼 일이었다.

아랍의 사회주의

중동의 사회주의운동은 공무원·군대장교·교사 등 신(新)중간계급에 속하는 유럽에서 교육받은 지식인들이 주도했다. 계급구분 없이 아랍 인민 전체에 호소하고자 그들은 근대화와 모든 아랍인의 형제애를 위해 힘썼다.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한 것은 보통 바트당이라 불린 아랍 사회당이었다. 시리아에서 결성된 이 당은 종족이나 지역에 대한 충성을 거부했다. 이 당의 분파들은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권력을 잡았지만 특정 사회주의 정책이나 구체적인 개혁을 추진하지는 못했다.

1952년 이집트에서 가말 아브델 나세르가 권력을 잡았을 때 중하층 계급 출신의 그의 젊은 장교집단은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나세르는 외국기업의 지배에 대항한 투쟁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도입했다. 1960년대 중반 이집트는 국내외 모든 대규모 산업·재정 기업을 국유화했고 대토지소유자의 땅을 몰수했으며 모든 중요한 경제분야를 국가의 통제 아래 두었다. 그러나 이 권력구조는 군사독재 형태였다.

아시아의 사회주의

아시아 사회당 12개 대표가 1953년 1월 랑군(지금의 양곤)에서 모여 제1회 아시아 사회주의자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표 가운데는 국제적 명성을 얻는 인사도 있었다. 인도·미얀마·스리랑카·인도네시아·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의 정부들은 그들 자신을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그러나 곧이어 사회당들은 명목상의 권력마저 잃었다. 몇 개의 사회주의 조직이 경쟁하던 인도에서는 지배당인 회의당이 다양한 정치적·사회적 경향을 흡수통일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실상의 전국적 정당이었다.

미얀마 사회당은 몇 년 동안은 연립체제 속에서 미얀마를 지배하기도 했으나 1962년 네 윈 장군이 정권을 잡자 불법화했다. 인도네시아 사회당은 1960년 수카르노 대통령에 의해 폐지되었다. 싱가포르를 제외하고 전후 동남 아시아 사회당들은 1960년대에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유럽식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쇠퇴함에 따라 사회주의 형식을 표방한 다양한 권위주의 정치체제가 등장했다.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수카르노는 자신의 공식 이데올로기가 '레소핌'(Resopim:혁명, 인도네시아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이라고 선언했다. 미얀마의 군사독재자들은 미얀마가 사회주의국가라고 공표했다. 북베트남(나중에는 베트남 전체)은 공산당의 지배를 받았다. 나머지 인도차이나 국가에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혁명운동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전통주의 세력과 싸웠다. 중국에서는 1949년 이래 인민공화국 공산당 정부가 권력을 잡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사회당들은 독립투쟁에서는 잠시 능력을 발휘했으나 그뒤에는 전국정치 무대에 뿌리내리지 못했다. 유럽에서 교육받은 지식인인 사회당 지도자들은 유럽의 모델에 뒤지지 않으려 했고 민주주의라는 길을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이념을 지지했으나 유럽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동남 아시아 국가들은 권위주의 체제를 통해 산업발전을 추구했다. 싱가포르와 인도에서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계획을 결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에서도 '사회주의'는 근대화와 급속한 산업화를 추구하는 신엘리트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아시아 최고의 선진국 일본은 확고하게 설립된 전통적인 사회주의 조직을 가지고 있다. 일본사회당은 1901년에 처음으로 결성되었으나 곧 해체되어 지하로 들어갔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과 그 이후에 사회주의 조직은 다시 확산되었다. 1936년 사회대중당은 의회에 18명의 의원을 배출했고 50만 표 이상을 얻었다.

사회주의 조직들은 1940년대 이후 다시 출현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뒤 억압받았다. 1946년 사회당은 90석의 의석을 얻어 3번째로 강력한 정당이 되었고 1년 뒤에는 의회에서 최대다수 의석을 얻어 지도자 가타야마 데쓰[片山鐵]는 연립정부의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1948년 10월 보수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했고 사회당은 점진주의자와 혁명주의자로 분열되었다.

좌파 혁명주의자는 미국에 극력 반대하며 소련편으로 돌아섰고 우파 점진주의자는 미국과의 밀접한 군사적·정치적 관계를 점진적으로 완화할 것을 주장했다. 2개 파는 1950년대에 완전히 갈라져 좌파는 일본사회당, 우파는 민주사회당을 결성했다. 이 2개의 당은 의회 내에서 1/3 정도의 의석을 함께 가지고 있지만 영원한 소수의 위치에 운명지어진 것으로 보였다. 일본 사회주의는 아직도 전후시대에 유럽 사회주의가 겪었던 것과 같은 변화를 기다리고 있다.

그밖의 지역과 국가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캐나다 등 영연방 국가에서도 사회주의는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은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이 출현한 1901년에 결성되었고 불과 3년 만에 그 지도자 J.C. 웟슨은 세계 최초의 노동당 출신 총리가 되었다. 1908년, 1910년 5월, 1913년 6월에 노동당은 정부를 주도했으며 그뒤에도 자주 권력을 차지했다.

뉴질랜드의 경우 1893~1906년 뉴질랜드 정치를 지배한 것은 자유당과 노동당의 느슨한 연립이었으나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서 뉴질랜드 노동당이 출범한 것은 1913년의 일이었다. 이 당은 꾸준히 성장하여 1935년 권력을 잡았고 그뒤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노동운동은 처음부터 점진주의와 개혁주의 노선을 따랐다. 그들은 노동조합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원칙상으로는 사회주의 공약을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당면문제를 다루는 수단으로서 정부의 통제를 이용하고 사회사업을 확대하는 데 주된 관심을 가졌다. 그들이 도입한 다양한 사회보장책 덕분에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근대 복지국가와 매우 평등한 사회로 발전했다.

캐나다의 사회주의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 비해 느린 속도로 전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에 캐나다 사회주의 운동은 2개 분파로 갈라졌고 이 2개 분파는 모두 연방의회에서 의석을 얻지 못했다. 1920년대에 캐나다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사회당과 노동당이 번창했으나 역시 연방의회에 거의 의원을 배출하지 못했다.

1932년 '협동사회연합당'(Cooperative Commonwealth Federation/CCF)의 조직으로 사회주의 운동은 전국적인 중요성을 얻기 시작했다. "대담하고 포괄적인 규모의 사회·경제 계획"의 필요성을 선거운동의 토대로 삼아 CCF는 대부분의 지방선거에서 지지를 얻었고 1944년 6월에는 서스캐처원 지방에서 정부를 구성하여 20여 년 동안 이 지방에서 권력을 유지했다. 1961년 진보적인 노동조합 지도자와 CCF 지도자가 만나 신민주당을 결성했다.

CCF가 성격면에서 농민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데 반해 신당은 산업분야의 지지를 받았다. 계획경제를 주장하면서 신민주당은 사회보장의 확대, 정부의 고용보장, 저임대 주택의 대규모 건설 등을 추진했다. 신민주당의 정책은 전후 서유럽의 사회주의가 추진한 정책과 비슷한 것이었다.

라틴아메리카 사회주의의 역사적 뿌리는 매우 깊다. 1870년대 초기에 아르헨티나에서는 제1인터내셔널의 지부가 몇 개 설립되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적도 있지만 다양한 분열과 이주한 산업노동자의 지지에 주로 의존하는 현실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그들은 농촌지역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칠레에서 사회주의자들은 1920, 1930, 1940년대에 여러 연립정부와 인민전선정부에 참여했다. 1958년 선거에서 칠레 사회주의자들은 인민행동전선(FRAP) 후보자인 살바도르 아옌데를 지지했다. 아옌데는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고 1964년에도 다시 패배했지만 197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3명의 후보 중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거두어 공산당에서부터 민주주의 개혁가에 이르는 인민전선의 지지를 받으며 정부 수반이 되었다. 아옌데 정부는 외자산업의 국유화와 국가의 계획적 건설을 약속했으나 경제혼란의 증가와 중간계급의 반대에 부딪혔고, 아옌데가 1973년 군사 쿠데타로 실각하자 칠레에서 사회주의의 미래는 불투명해졌다.

L.A. Coser 글 | 이호성(李豪城) 참조집필

참고문헌

이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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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주의를 생각한다 전2권 : 다이우치 유즈루, 주섭일 역, 탐구당, 1989
과학적 사회주의 : G. P. 체르니코프, 노중기 역, 백두, 1989
사회주의 : N. 매켄지, 양호민 역, 탐구당, 1965

사회주의와 다른 주의(-ism)와의 비교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비교 : 전득주, 행림출판사, 1991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 : J. A. 슘페터, 이상구 역, 삼성출판사, 1991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 쿠시넨, 동녘 편집부 역, 동녘, 1989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까치글방 57) : 박호성, 까치, 1989

사회주의와 제반 현상과의 관계

사회주의와 민주화 운동 : G. 루카치, 박순영 역, 한겨레, 1991
프랑스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 느티나무 편집부 편, 느티나무, 1991
중국사회주의 정치개혁의 이론과 실천 : 북경인민출판사 편, 삼광출판사, 1990
동구혁명과 사회주의 : 가토 데츠로, 허태유 역, 하늘땅, 1990
사회주의와 전쟁 외 : V. I. 레닌, 오영진 역, 두레, 1989
서독 기민당과 사민당의 사회경제적 정책이념의 변천과정과 내용(의정연구 제32집) : 한국의회발전연구회 편·발행 , 1988
Democratic Socialism:Theory and Practice : Mihailo Markoviq, Harvester Press, 1982
Essential Works of Socialism : Irving Howe (ed.), 1970
The Origins of Socialism : George Lichtheim, 1969
Der Sozialismus:Vom Klassenkampf zum Wohlfahrtsstaat : Iring Fetscher (hrsg.), 1968
World Communism:A History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 Franz Borkenau Univ. of Michigan Press, 1962
Marxism : George Lichtheim, 1961
A History of Socialist Thought, 5 vol. : G. D. H. Cole, 1953-60
Socialism and Saint-Simon : Émile Durkheim, Routledge & Kegan Paul, 1959
European Communism, : Franz Borkenau, Faber & Faber, 1953
The Tragedy of European Labor : A. F. Sturmthal, 1943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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