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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노동당 창건자 제임스 키어 하디

노동운동가 평전 영국노동당 창건자 제임스 키어 하디
최재희 (고려대 노동사 박사과정)
광부들의 열악한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하디는 임금향상과 노동시간단축을 목표로 파업을 주도한다. 그러나 6주간 지속된 1880년 라나크에서의 파업을 위시한 여러 광부파업은 파업자금의 부족과 자본가의 집요한 방해로 실패하고 하디는 해고당한다.


제임스 키어 하디는 1856년 8월 스코틀랜드의 광산 마을에서 한 가난한 노동자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메리 키어는 조선소 목수였던 데이비드 하디와 재혼했고, 하디는 새 아버지를 따라 스코틀랜드의 여러 마을을 전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

당시 영국이 세계 최고의 산업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삶은 매우 열악했었고,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디 또한 8살이란 어린 나이에 직업 세계에 뛰어들게 되었다. 교육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첫 직업은 하루 12시간 반을 일하는 빵가게의 점원이었다. 실직한 아버지는 일거리를 찾아 집을 비우고 있었고, 그의 임금이 가계의 유일한 수입이었다. 바로 밑의 동생이 열병으로 죽고 어머니가 다른 동생을 해산하는 어수선함 속에 15분 늦게 가게에 출근했고 그 때문에 급료가 지급되는 바로 그날 해고당한다. 맛있는 음식냄새가 진동하는 주인의 내실에 불려가 처음 보는 화려함에 눈이 부셔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한 채 불성실하다는 비난과 함께 돈 한푼 받지 못하고 쫒겨난다. 자신을 애타게 기다릴 어머니 생각에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비를 맞으며 거리에서 웅크리고 앉아있어야 했던 아이, 그가 바로 영국노동당의 창건자라 불리는 어린 시절의 하디였다.
몇 가지 직업을 거친 후 하디는 10살에 그가 평생 자랑스럽게 여겼던 광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아침 6시에 막장에 들어가 해가 진 다음에야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으므로 겨울에는 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라야 했다. 12살에는 막장이 무너져 갇힌 상태에서 지쳐 잠자다 구출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야학에서 글을 배웠고 노동조합의 집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속기법도 익혔다. 사려깊으면서도 반항적인 광부로 성장한 하디는 이런 자질과 더불어 노조활동의 헌신성으로 자연스레 광부들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광부들의 지도자

광부들의 열악한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하디는 임금향상과 노동시간단축을 목표로 파업을 주도한다. 그러나 6주간 지속된 1880년 라나크에서의 파업을 위시한 여러 광부파업은 파업자금의 부족과 자본가의 집요한 방해로 실패하고 하디는 해고당한다. 하디는 파업승리의 열쇠가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에 달렸다는 인식을 갖고, 1886년 에어셔광부연합과 스코틀랜드광부연맹을 조직하면서 동시에 기관지 『광부』(The Miner)를 발간한다. 이 과정에서 하디는 신생조합이 산업내의 분쟁을 통해 스스로의 이익을 보장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설사 간헐적으로 성공한다 하더라도 경기 변화와 자본가의 변덕에 좌우되는 일시적인 이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국가를 통해 노동자의 이익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며 정치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1867년과 1884년의 선거법개정을 통해 성인 남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지만, 유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던 자유당과 보수당이 의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이 노동자의 표를 얻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지만 실제로는 공허한 구호에 불과했다. 일부 보수적인 노조의 대표가 자유당의 후원을 받으며 자유당원으로 의회에 진출했지만, 이들 또한 개인적인 출세나 명성에 집착하면서 자신들이 속한 계급의 이해를 기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디는 기존 정당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노동자 대표만이 진정으로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디에게 그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온다.
1888년 미드라나크에서 실시된 보궐선거에서 하디는 노동자의 대표로 의원직에 도전한다. 광부밀집지역인 이곳에 런던출신의 변호사를 공천한 자유당은 하디에게 출마포기를 설득한다. 조건은 그 동안의 선거비용을 보전해주고 일년간 200파운드의 봉급과 다음 선거에서의 공천을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하디는 이를 거부했고 곧 이 선거는 전국적인 관심을 끌게된다. 각 지역의 사회주의자들이 자원봉사를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작가였던 플로렌스 하크니스는 300파운드를 기부했다. 그러나 선거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하디는 617표를 얻었고 자유당의 필립스가 3847표로 당선되었다.

노동자 정당 결성을 향해

그러나 하디는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선거 직후 8월에 그는 스코틀랜드노동당을 결성했고 이는 영국정치사에서 노동자당의 명칭을 사용한 최초의 정당이었다. 이 당의 강령은 상원의 폐지, 토지와 광산의 국유화, 무상교육, 학생에 무료급식, 철도, 운하의 국유화, 누진세 등을 제시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노동당의 궁극적인 목적은 생산에 사용되는 모든 자본의 국유화였다. 이와 같이 하디는 노조활동과 정치활동을 통해 자연스레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주었다. 비록 그가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 경제문제 등에서 몇 가지 이론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었지만 하디의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 출신으로 누구보다 더 노동자의 삶의 현실과 소망을 잘 알고 있던 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는 중간계급 출신의 일부 도그마적인 구호성 사회주의와 달랐고,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전체노동자의 이익을 외면하던 기성노조의 보수적인 태도와도 다른 입장이었다.
하디와 그의 입장이 전국적인 관심을 끌게 될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1891년 총선거에서 그는 런던 사우스웨스트햄의 노동자후보로 지명된다. 이곳은 런던에서 가장 빈곤한 노동자 밀집지역이었다. 선거 결과, 하디는 시장 출신의 보수당후보를 1232표차로 물리치고 의원으로 당선된다. 새로운 의회가 개회하던 날, 그는 노동자의 평상복 차림으로 노동자들에 둘러싸여 의회에 입장한다.
그의 첫 의회연설은 실업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실업이 노동자와 그 가족에 얼마나 큰 정신적, 육체적, 도덕적 폐해를 끼치는 지를 역설하면서 국가차원의 실업구제책을 마련할 것을 주장한다. 실업구제책의 핵심은 8시간 노동법이었다. 노동시간의 법적 규제는 노동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뿐 만 아니라 일자리를 늘려 실업자를 구제하는 방안이었다. 그에게 이것은 노동자들간의 경쟁을 지양하고 노동자계급의 연대와 단결을 넓혀간다는 의미에서도 중요했다.
"한사람이 하나의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도 좋지만 각 개인에게 하나의 직업은 더 중요하다." 그는 곧 실업자의 의원이란 별칭을 얻게된다. 1894년 알비온 탄광이 무너져 200명 이상의 광부가 사망한 바로 그날 빅토리아여왕의 손자가 태어난다. 의회가 왕위계승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결의안을 논의할 때 수많은 야유에도 불구하고 홀로 서서 왕실을 비난하며 광부들의 슬픔을 위로하고 보상하는 것이 국민의 대표인 의회의 역할이라 역설하던 그의 모습은 특이하기까지 했다. 하디는 영국정치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첫 노동자의원이었다.
하디는 당선 이후 곧 새로운 전국정당의 결성에 몰두한다. 그 결과 1893년 독립노동당이 탄생한다. 그는 노동자정당의 건설에 기존 노동조합의 지지가 필수적이라 생각했다. 노조는 자금, 인원, 조직의 현실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자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당명을 둘러싼 논란에서 나타난 하디의 입장은 이런 인식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디는 당명에 '사회주의'를 명기하지 않음으로써 사회주의에 거부감을 가진 노조를 배려했고, '노동'이란 명칭을 통해 당의 입장이 노동자계급의 이해와 일치한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 사회주의를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 선언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다. '독립'은 계급기반이 다른 기존 정당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노동자의 이익을 추구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독립노동당은 노조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노조는 참여를 거부했고 하디를 포함해 1895년 총선에 나선 당의 모든 후보들은 패배한다. 정치활동이 조합의 기금을 헛되이 소모시키며 조합자체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다는 기존 노조의 인식은 하디의 입장과 큰 차이가 있었다. 조직노동자와 미조직노동자 및 실업자의 이해가 배치될 수 있는 상황에서 노조가 자신들의 자금과 희생으로 전체노동자의 이익과 사회진보를 옹호려는 분위기는 아직 성숙되지 못했다.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사회문제의 본질이며 사업장 안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 단초는 곧 마련된다. 태프 베일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노동당의 결성

1900년 웨일즈남부 태프 베일 철도회사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자 회사는 소송을 제기한다. 즉 파업이 야기한 손해에 대해 노조의 배상을 청구한 것이다. 법원은 2만 3천파운드의 배상을 결정했다. 이제 파업권은 사실상 부인되었으며 노조의 모든 일상행위도 손해배상의 위협 아래 놓이게 되었다. 노조는 다시금 법과 정치활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0년 독립노동당을 위시해 노동조합, 노동단체, 사회주의단체들이 결집해 노동자대표위원회를 결성했고, 이는 1906년 영국노동당으로 발전한다. 하디를 위시한 독립노동당은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고 당의 노선과 활동의 결정에서 유일한 준비된 집단이었다. 1900년의 총선에서 하디만이 다시 홀로 노동자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당의 세력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1906년에는 29명의 후보가 의회에 진출했고 영국의 정치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혁명과 무장봉기를 주장하던 완고한 사회주의집단과 한줌의 기득권에 집착하던 보수적인 노조 사이에서 양자의 공통점을 찾아내 연결하고 정치투쟁을 통해 노동자계급이 사회진보와 인간해방의 선봉에 서고자 했던 하디의 소망이 다소나마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영국노동당에서 하디의 이름은 절대 부패하지 않는 이상주의와 연대와 단결의 상징이 되었다. 1918년 영국노동당은 생산, 분배, 교환수단의 국유화를 위시한 사회주의 강령을 선언한다.

제국주의 반대! 전쟁 반대!

하디가 말년에 몰두했던 작업은 제국주의자들의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일찍이 보어전쟁을 반대해 곤욕을 치렀던 그는 대륙의 사회주의자와 연대해 전세계적인 총파업으로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들이 노동자를 희생시키는 전쟁을 막고자 했다. 레닌은 그를 "제2인터내셔날의 지도자 중 끝까지 진정으로 전쟁을 반대한 유일한 인물"이라 평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도 하디는 전쟁반대와 평화를 역설하며 전국을 돌았고 무분별한 애국주의의 분위기에서 그의 집회는 총성과 함께 끝나곤 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하디는 영국의 정치사와 노동운동사에서 특이한 인물이었다. 전쟁이 그의 계급과 당을 분열시키는 것을 보면서 키어 하디는 1915년 9월 26일, 59세의 나이로 자신이 꿈꾸던 이상세계로 떠났다.


출처: 노동사회 1999년 2월호, 통권 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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