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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투]현대자동차 노조의 노동운동 내 위상과 현재적 과제

현대자동차를 해부한다 ③
현대자동차 노조의 노동운동 내 위상과 현재적 과제
 
노사정 모두에게 현대자동차는 '공룡'이다. 현대자동차를 보면 자본의 운동, 그리고 노동의 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모든 상황이 드러난다. 그 '공룡'을 <비정규노동> 9월호(한국비정규노동센터 발행·월간)가 해부했다. <매일노동뉴스>가 <비정규노동> 9월호 '특집 : 현대자동차를 해부한다'에 실린 세 글을 독자에게 소개한다. 귀중한 원고를 전재하는 것을 허락해주신 필자 여러분과 <비정규노동>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편집자 주>



최근 현대자동차 노조의 위기가 눈에 띄게 가속화되고 있는 탓에, 현대자동차 활동가들에게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현대)자동차도 (현대)중공업처럼 되는 거 아닙니까?” 하는 질문을 종종 던지게 된다. 여러 지인들이 필자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현대자동차 활동가들의 답변은 제각각이다. 대체로 보면 “라인 작업의 특성상 자동차는 절대 중공업처럼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낙관파’(?)와 “자동차도 이미 중공업 못지않게 다 무너졌다”고 말하는 ‘비관파’(?)들이 있다.

현장 노동운동이 거의 초토화되고 수십명의 고립된 활동가들만이 남은 채 노동조합 자체가 완전한 노사협조주의로 전락한 현대중공업의 노동운동과, 민주노총의 중심 사업장으로 여전히 역할하고 있는 강력한(?) 노동조합을 가진 현대자동차의 노동운동은,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분명히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미 중공업 못지않게 다 무너졌다”는 탄식을 근거 없는 비관주의로만 몰아붙이기에는 사태의 전개가 그리 단순하지 않아 보인다. 전·현직 노조간부들이 채용비리에 연루되어 줄줄이 구속되고, 조합원의 2/3가 노조간부들의 ‘빨간 조끼’를 특권과 관료주의의 부정적인 상징으로 인식하며, 비정규직과 현장 활동가들에 대한 관리자·경비들의 폭력이 일상화되고 있는 최근의 상황 전개는 현대자동차 노조가 겪고 있는 ‘위기’의 폭과 깊이가 결코 간단치 않음을 보여준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만만치 않은 위기를 겪고 있다는 것은, 노조 스스로가 혁신위원회 구성에 나설 만큼 이미 ‘공식적이고 공공연한’ 사실이다. 위기의 원인과 해법을 둘러싸고도 다양한 주장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위기의 원인을 얼마나 근본적인 수준에서 진단하는가에 따라 그 해법의 유효성도 좌우될 것이다.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에 서 있는 현대자동차 노조

오늘날 현대자동차 노조는 87년 대투쟁 이후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성과를 상징하며 민주노총의 중심으로 역할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자동차 노조가 87년 대투쟁 직후부터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으로 서 있었던 것은 아니다.

87년에서 95년까지의 시기, 다시 말하여 현대중공업 노조나 전노협으로 결집된 상당수 중소규모 제조업 사업장 노조들이 강력한 민주노조를 구축하여 전투적인 파업투쟁을 거듭하던 시기에 현대자동차 노조는 잠깐의 민주노조 시기를 제외하고는 노사협조주의 내지 실리주의의 대표 주자로 역할하였고, 따라서 당시의 민주노조운동 흐름 속에서는 떳떳하게 명함을 내밀기도 쉽지 않은 처지였다.

특히 95년 이전 현대중공업 노조가 87년의 대투쟁, 88~89년의 128일 파업투쟁, 90년의 골리앗 투쟁, 91년의 공안탄압분쇄 투쟁, 94년의 LNG 파업투쟁 등을 거치며 육해공 3면 진압작전에 나선 공권력에 맞서 격렬한 가두투쟁을 수차례 거듭하면서 한국의 전투적인 민주노조운동을 선도하고 있던 것에 비하면, 현대자동차 노조는 91년의 성과급 투쟁, 93년의 현총련 투쟁 등이 전개되긴 하였으나 그 격렬함과 치열성에서 결코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90년대 초반까지 노동운동의 고양기가 지나간 이후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가 거세게 밀려들었던 9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다. 구체적으로는 95년 양봉수 열사 분신투쟁을 계기로 민주노조를 재건하여 96~97년의 노동법 개악저지 민주노총 총파업 투쟁에서 핵심 투쟁동력으로 역할하면서부터 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에서 87년 대투쟁 못지않게 중요한 사건이었던 96~97년의 총파업에서 현대자동차 노조가 핵심 투쟁동력으로 역할한 것은, 당시의 총파업에서 현대중공업 노조가 파업대오가 급감하며 결정적인 몰락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과 극명한 대비가 되었다. 이후 96~97 총파업을 통해 유보되었던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이 IMF경제위기를 틈타 결국 법제화되고, 법제화된 정리해고의 실질적인 집행을 둘러싸고 총노동과 총자본의 대리전이 되었던 98년의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저지 투쟁을 거치면서, 현대자동차 노조는 민주노조운동 속에서 확고한 중심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자동차 노조가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에 서 있는 힘의 근원은 무엇일까?

일차적으로 조합원 수 4만이 넘는 거대한 규모의 조직력이다. 현대자동차 노조는 울산·아산·전주 등 생산공장의 생산직·사무직에다가 판매·정비·연구 분야까지 현대자동차의 다양한 직군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라는 한국 최대 기업에 기반하는 노조답게, 현대자동차 노조의 규모는 단위 기업별 노조로 한국 최대이며, 조합원 수가 산업별 노조인 금속노조보다도 더 많다. 또한 세계 최대규모라는 울산의 생산공장을 주된 기반으로 하면서도 “한라에서 설악까지”라는 구호가 상징하듯이 전국적 조직망을 가진 거대 복합 노조다.

그러나 조직력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투쟁력이다. 현대중공업 노조의 경우 조합원 수가 2만에 달하지만 투쟁력을 상실한 이후 그 규모의 위력이 전혀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현대자동차 노조는 최근 10년여 동안 매년 빠짐없이 임금 내지 단체협약 등을 둘러싸고 파업투쟁을 전개했다. 또한 적어도 현재까지 현대자동차 노조의 파업은 거대한 공장의 생산을 확실하게 중단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수천명 혹은 일만명 이상의 조합원들이 집결하는 집회를 때때로 개최할 수 있는 힘도 여전히 갖고 있다.

거대한 규모에 덧붙여, 현대자동차 노조가 갖고 있는 이러한 투쟁력은 제조업 단위노조의 대다수가 실질적인 파업 능력을 상실한 요즈음에 와서는 상대적으로 더욱 돋보인다. 그런 만큼 현대자동차 노조는 민주노총·금속연맹 등의 이러저러한 총파업 투쟁에서 핵심 동력 역할을 해 왔고 또 마땅히 역할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현대자동차 노조의 중심적 위치를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다. 현대자동차 노조의 조합원들을 주요 기반으로 해서, 울산 북구는 국회의원·구청장에다가 시의원·구의원의 다수를 민주노동당이 장악하고 있다. 어느 면에서 보나 민주노동당이 여당 노릇을 하고 있는, 현재로서는 전국적으로 유일무이한 지역이다.

그래서 민주노총도 민주노동당도 현대자동차 노조의 힘을 무시할 수 없는 구조가 되어 있다.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현대자동차 노조는 민주노총의 상급단체”라는 진담같은 농담을 민주노총·금속연맹 간부들이나 현대자동차 노조 간부들에게 종종 듣곤 한다. 실제로 현대자동차 노조의 동의 없이 민주노총·금속연맹이 어지간한 투쟁이나 사업을 추진할 수 없게 되어 있고, 그래서 서로 의견이 엇갈릴 경우 결국 현대자동차 노조의 의견에 따르게 되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한계 또한 전형적으로 대표하는 현대자동차 노조

거대한 규모와 투쟁력으로 민주노총의 중심에 서 있는, 그래서 자본과 보수언론에게 ‘경제를 망치는 강력한 노조’의 대표주자로 집중 공격을 받고 있는 현대자동차 노조. 그러나 현대자동차 노조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고, 갈수록 그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다. 그런데 현대자동차 노조가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과 ‘위기’는 결코 무관하지 않다. 중심에 서 있기에, 한국 민주노조운동 전반이 처해 있는 한계 또한 전형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자동차 노조는 도대체 어떤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인가? 필자는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는 사회적 고립의 위기다. 특히 총자본과 보수언론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넘어 광범한 노동자 민중으로부터 고립되고 있는 위기다.

다수의 현대자동차 조합원들로부터 직접 들은 바에 따르면, 이미 몇 년 전부터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은 명절에 고향 가는 발걸음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고향에 가서 친척·친구들과 나누는 이야기들이 결코 즐겁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은 고향의 친척·친구들로부터 격려를 받았고, 투쟁의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현대자동차 조합원의 권리 향상은 전체 노동자 민중의 권리 향상과 직결되어 있다고 인정받았고, 현대자동차 노조는 총자본의 무수한 탄압에 맞서 노동자 민중의 선봉에서 투쟁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현대자동차 조합원의 권리 향상은 전체 노동자 민중의 권리 향상과 별 상관이 없으며, 심지어 전체 노동자 민중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비난까지 받고 있다. 예전에는 선봉 투사로 추켜세우던 고향의 친척·친구들이 이제는 보수언론의 논리들을 줄줄 읊어대며 냉소적인 비난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이 가까운 친지들에게까지 느끼고 있는 ‘사회적 고립’은 일차적으로 보수언론의 집중적인 이데올로기 공세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총자본과 보수언론의 이데올로기 공세는 과거에도 늘 있었던 일이고, 특히 현대자동차 노조와 같은 대기업 노동자들은 직접적인 이데올로기 공세를 수도 없이 겪어 보았다. 그런데 왜 과거에는 안 먹히던 이데올로기 공세가 지금은 먹히는 것일까?

그 답은 노동계급 내부의 양극화에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하청기업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는 IMF경제위기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벌어져 왔다. 실업과 개인파산도 만만치 않은 수준이다. 그런데 양극화를 불러온 것은 자본의 책임이지만, 노동운동이라면 마땅히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평범한 노동자 민중은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노조의 ‘강력한’ 투쟁은 그러한 기대를 외면하는 ‘그들만의 배부른’ 투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조합원들로부터의 신뢰 상실의 위기다. 사회적으로는 ‘그들만의 배부른’ 투쟁을 하고 있다고 비난받고 있는데, 정작 현대자동차 노조는 조합원들로부터도 갈수록 신뢰를 상실해 가고 있다. 일차적으로 조합원들의 화살은 노조 간부들의 특권과 관료주의, 나아가 부패와 비리에 대한 질타로 모아진다. 올해 들어서는 전·현직 노조 간부들이 채용비리로 줄줄이 구속되는 사태까지 겪었으니, 노조 간부들에 대한 조합원들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다.

특권과 관료주의에 대한 조합원들의 질타는, 노동조합이 투쟁을 통해 확보한 권리나 투쟁의 상징물들이라 하더라도 노조 간부들이 전용해 온 것들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근무시간 중 대의원 활동에 대한 근태 인정, 전·현직 주요 간부들의 개인차량 사내 출입, 노조 간부들이 착용해 온 ‘빨간 조끼’ 등이 특히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노조 간부들의 특권과 관료주의, 또 그에 대한 조합원들의 질타는 그 자체로도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조합원들의 근본적 요구들을 해결하는 데 노조가 상당히 무능력 내지 무관심하다고 여기는 가슴 깊은 실망감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를테면 대다수의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은 98년 정리해고 저지 투쟁 이후 노조가 정리해고를 막아낼 수 없다는 패배적 인식이 내면화된 가운데, 잠재적인 고용불안으로 연결되는 해외공장 건설이나 모듈화 확대 등의 문제에 대하여 노조가 뾰족한 대책 없이 끝없이 밀리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그런가 하면 수천 명에 달하는 근골격계 환자가 발생하고 1년에 10여명이 과로사로 죽어 나가는 데도 주5일제 도입 이후에도 주당 실질노동시간이 60~70시간에 달하고 있고, 40대 이상의 조합원이 절반을 넘어섰는데도 생명을 갉아먹는 야간노동이 폐지될 전망은 아직도 가물가물할 뿐이다.

흔히 현대자동차 노조 등은, 세상을 바꾸겠다고 시작한 노동운동이 사회양극화 혹은 빈곤의 심화 등 전반적인 사회적 모순에는 무관심한 채 자신들의 문제에만 ‘배부르게’ 집중하고 있다고 비판받는다. 그러나 정작 현대자동차 노조는 세상을 바꾸는 것뿐만 아니라 조합원들의 삶을 바꾸는 데서도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는 자본에 맞선 대응능력 상실의 위기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강력한 대기업 노조’를 비난하고, 틈만 나면 보수언론으로부터도 집중 공격을 받는 탓에, 강력한 노조의 대표주자인 현대자동차 노조에게 현대자동차 자본이 쩔쩔 매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들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오늘날 현대자동차 자본은 노동자 권리 축소와 이윤 확대로 요약되는 자신들의 의도를 다양한 측면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관철시키며 순풍에 돛단 듯 질주를 거듭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최근 몇 년 동안 창사 이래 최대 매출, 최대 순익의 기록을 연속하여 갱신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현대자동차 그룹의 정몽구 회장은 주식보유재산 1위를 달리고 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은 상장사 가운데 142위에 머물러 있다. 주야 맞교대 및 장시간 노동으로 유지되는 임금 수준이지만 그래도 정규직은 그나마 낫다. 정규직 임금의 60%밖에 받지 못하는 사내 비정규직, 강제적인 단가인하의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는 부품하청업체 노동자들에 대한 초과착취를 성공적으로 관철시키며, 현대자동차 자본은 매년 엄청난 이윤을 챙기고 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노조는 이 지점에서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최근 들어 사내 비정규직의 임금 인상을 생색내기 수준에서 건드리고 있을 뿐, 부품하청업체 노동자들이 단가 인하 등으로 강요당하고 있는 초과착취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무대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자본의 순항(!)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근 현대자동차 그룹은 정몽구 회장으로부터 그의 아들인 정의선 기아자동차 사장에게 경영권 세습 과정이 한창 진행 중이다. 건설업체 엠코, 물류업체 글로비스 등을 설립하여 현대자동차 관련 일감을 떼거지로 몰아주면서 회사 가치를 극대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주식 가격을 몇 십 배로 증폭시켜 경영권 세습에 필요한 주식 매입비용을 확보하는 방식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기업의 부가 총수 일가의 재산증식과 경영권 세습으로 도둑질 당하고 있음에도, 정작 이것을 문제 삼는 현대자동차 노조의 목소리는 미미하기 그지없다. 실제로 현대자동차 그룹의 경영권 세습은 소액주주의 권리 침해라는 측면에서 참여연대 등으로부터 일정한 공격을 받기는 했을지언정, 정작 현대자동차 노조로부터는 사실상 어떤 제동도 걸리지 않고 있다.

이것만이 아니다. 인도·터키·중국·미국 등 해외공장의 본격적인 양산체제 가동, 납품물량의 40%를 중국에서 역수입해 공급하라는 부품하청업체들에 대한 바이백 지침, 모듈화 비율의 지속적인 확대(현행 30~40% 수준) 속에 현대모비스·동희오토 등 무노조 완전비정규직 조립공장의 확산 ···

이미 초국적 거대기업이 되어 있는 현대자동차 자본은 나름대로 거창한 비전과 전략을 갖고 엄청난 이윤을 빨아들이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노조의 대응 능력은 자본의 전략에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고, 그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현대자동차 노조의 위기 극복을 위한 과제

일본의 도요타자동차 노조는 이른바 일본식 노사협조주의 노선의 대표주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생산직 노동자의 80%에 달한다는 비정규직을 철저히 배제한 채 자부심과 애사심으로 똘똘 뭉친 정규직 그들만의 기업별 노조. 작금의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후퇴를 거듭할 경우 현대자동차 노조의 미래가 도요타자동차 노조의 모습처럼 전락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심한 독설일까? 겉으로 드러나는 조직력과 투쟁력을 놓고 본다면 터무니없는 걱정이라고 치부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해결하지 못한 위기의 축적은 결국 결정적인 몰락의 분기점을 낳을 수밖에 없다. 현대중공업 노조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현대자동차 노조의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다양한 수준과 지점에서 총체적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지만, 필자는 다음 두 가지가 위기 극복을 위한 핵심과제라고 본다.

첫째, ‘계급적이면서 전투적인 노동운동’의 방향을 명확히 세워야 한다.

지금 현대자동차 노조의 노선은 ‘전투적인 실리주의’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매년 파업을 하고 있으니 전투적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투쟁의 압도적인 부분은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의 실리적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벌어진다. 전체 노동자 계급의 과제를 떠안고 치르는 투쟁은 상급단체 일정에 맞추어 생색내는 연례행사 정도로 지나갈 뿐이다.

그 정도라도 하는 데가 어디 있느냐고 충분히 항변할 수 있다. 맞는 얘기다. 그러나 퇴보와 몰락의 길을 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평가 기준은 잘 설정해야 한다. 전체 노동자 계급의 단결이라는 웅대한 전망에 입각하여 새로운 투쟁 전망을 열어 나가지 못한다면, ‘우물 안 개구리’ 현대자동차 노조는 사회적으로 고립된 가운데 초국적 기업 현대자동차 자본에게 결정타를 얻어맞고 허망하게 주저앉는 일을 머지않아 겪을 수밖에 없다.

필자가 보기에 지금 현대자동차 자본의 주요 전략 가운데 하나는 현대자동차 노조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생산의 거점을 최대한 이동하는 것이다. 해외공장의 본격 가동도 그렇지만 모듈화 확대는 더 심각하다. 신차가 투입될 때마다 모듈화 비율을 10% 가량씩 높이면서 지속적으로 일감을 부품하청업체로 빼돌리고 있다. 최근 모듈화 비율 47%의 신차가 등장했고 모듈화 비율이 50%를 넘어서는 일도 조만간 보게 될 것 같다. 부품하청업체의 모듈조립공정에서 처리하는 일감이 50%에 육박하고 있다는 것은, 이들 모듈을 끼워 맞추는 현대자동차의 최종 조립공정이 껍데기 공정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모듈화로 일감이 빠져 나간 곳은 현대모비스를 중심으로 철저히 수직계열화되어 있는 부품하청업체이거나 혹은 비정규직으로만 구성된 현대모비스 모듈조립공장이다. 대체로 이들의 임금은 법정 최저임금에 턱걸이하는 수준이며, 열악한 근로조건과 높은 노동강도 때문에 6개월 근속이면 왕고참 취급을 받을 정도로 유동성이 심하다. 동일한 물량을 놓고 현대자동차 안에서 정규직이 일하는 경우와 부품하청업체에서 작업이 이루어지는 경우 ‘작업인원 1~2배 × 임금수준 2~3배’, 그래서 노무비 기준으로 한다면 심지어 두 배에서 다섯 배까지 차이가 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돈 차이가 나는데, 자본의 입장에서 모듈화 확대에 기를 쓰고 나서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자본 측은 매번 신차투입 협상 때마다 사활을 걸고 모듈화 확대를 관철시켜 나가고 있다.

그러나 모듈화 확대에 대한 현대자동차 노조의 대응은 어떤가? 필자가 보기에는 사실상 무대책이다. 신차투입 협상이 시작될 때면 “모듈화 저지” 어쩌고 하는 강한 톤의 목소리들이 들려오지만, 머지않아 결국 현재의 고용을 (그것도 주로 정규직만의 고용을) 보장받는 선에서 모듈화 계획을 대체로 수용하며 타결된다. 그리곤 무관심이다. 모듈화로 빠져 나간 일감이 어떤 조건의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지, 그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조건이 자신들의 미래와 어떤 상관이 있을 것인지 최소한의 관심도 없다.

이미 50% 가까운 물량이 모듈 작업으로 처리되고 있는 조건에서, ‘모듈화 저지’만으로 사태에 대처할 수는 없다. 모듈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정의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해 내고 그들의 노동조건이 현대자동차 내부의 노동조건과 유사한 수준까지 개선될 수 있도록 만드는데, 현대자동차 노조는 누구보다 사활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달려들어야 한다.

그러나 모듈화 문제가 공론화된 지 5년여가 흘렀고, 그 사이에 자본은 생산과정에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 왔지만, 모듈공정 노동자 조직화 등에 대한 현대자동차 노조의 대응은 거의 아무 것도 진전된 것이 없다.

무엇 때문일까? 현대자동차 노동운동 전반이 계급적인 관점을 명확히 갖추지 못하고 기업주의 이데올로기에 심각하게 갇혀 있기 때문이다. 계급적 노동운동에 대한 모색과 실천이 워낙 빈약한 탓에 ‘주식회사 현대자동차’ 밖에서 전개되는 일이라면 자신의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에 대해서까지 극도의 무능력을 보일 수밖에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힘을 가진’ 현대자동차 노조가 그들만의 문제 속에 안주하기보다 전체 노동자 계급의 과제를 실질적인 자기 투쟁으로 떠안고 나서기를 수많은 노동자 민중은 바라고 있다. 그런데 계급적인 노동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은 현대자동차 노조 스스로도 미래를 개척해 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구받고 있는 사활적인 과제라는 것이다.

지금 현대자동차 노조는 사내 비정규직은 물론이요, 부품하청업체 노동자 등 현대자동차 생산에 관여하는 전체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운동으로 총결집시키는 일에 무엇보다 전력을 쏟아 부어야 한다. 빠른 시간 내에 현대자동차와 관련된 전체 노동자들의 연대전선을 강력하게 구축해 내지 않고서도 앞으로도 현대자동차 자본과 맞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오산이라고 필자는 감히 단언한다.

향후 몇 년, 현대자동차 노동운동의 전개 양상은 한국 노동운동의 퇴보와 전진을 상당한 정도로 규정할 것이다. 계급적이면서 전투적인 노동운동. 그 길만이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에 서 있는 현대자동차 노조에 거는 광범한 노동자 민중의 기대에 부합하는 것이며, 동시에 스스로의 위기를 극복해 나갈 전망을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다.

둘째, ‘노련한 해결사’가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로서 활동가들의 자기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한다.

지금 현대자동차 정문 안팎에는 다양한 처지의 노동자들이 천막농성 혹은 노숙농성을 하며 투쟁을 하고 있다. 정문 안쪽에는 최근 일상화된 관리자·경비들의 폭력 근절을 요구하는 정규직 노동자들, 불법파견 철폐를 요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다. 정문 바깥쪽에는 현대차 자본의 부품사 구조조정의 본보기로 폐업을 당한 대덕사 노동자들, 98년 리콜을 약속받으며 노사합의에 근거하여 희망퇴직을 하였으나 되돌아 갈 길이 막혀 버린 노란봉투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과 관련하여, 현대자동차 노조의 공식기구들은 거의 무대책이다. 나서봐야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현대자동차 활동가들 전반이 빠져들어 있는 관료주의적 타성의 중요한 핵심이 있다. 현대자동차 노사 간의 교섭구조를 통한 해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일들은 아예 손을 대려고 하질 않는 게 너무나 당연한 관행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현장 안에서 벌어지는 숱한 문제들에 대한 대응 태도들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힘이 있다고 한들, 얼마나 힘이 있을 것인가? 현대자동차 노조에게 또 활동가들에게 기대되고 요구되는 것은, 도깨비 방망이 휘두르듯 척척 해결해 주는 ‘노련한 해결사’의 역할이 아니라, ‘함께 투쟁하는 노동자’로서의 진실한 연대와 공동투쟁이다.

노사 간의 교섭구조를 통한 해결 가능성 여부가 실질적인 활동의 기준이 되어 버렸다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는 손오공처럼 암묵적으로 자본에 의해 설정된 반경 안으로 활동의 폭이 철저히 갇혀 버렸다는 것이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기 마련이듯이, 정체된 노동조합 내부에 관료주의적 특권이 만연하고 심지어 부패와 비리마저 스며드는 것은 필연적인 경과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자동차 활동가들이 관료주의적 타성을 극복해 내는 관건은 스스로 ‘유능한 해결사’가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로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노사 교섭구조를 통한 사안의 해결 가능성을 읽어낼 줄 아는 노련한 판단력, 협상과 처세의 기술. 지금 현대자동차 활동가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이런 것들이 결코 아니다.

노동자 계급의 눈으로 모든 문제를 바라볼 줄 아는 계급적 시야, 당장의 제한된 교섭구조가 아니라 폭넓은 단결과 과감하고 끈질긴 투쟁을 통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나가려고 하는 원대한 전망,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고 늘 낮은 모습으로 희생하고 헌신하는 겸허한 자세. 이러한 모습들로 얼마나 많은 현대자동차 활동가들이 자기혁신을 해 낼 수 있는가에 따라, 앞으로도 과연 현대자동차 노조가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을 힘차게 이끌고 나아갈 수 있을지가 좌우되지 않겠는가!
 
양준석 울산노동자신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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