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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남성교사 할당제, 무엇이 문제일까?(배병근/ 부산교대 04)

 

 

 

||부산교대 04학번 배병근



최근 초·중학교 교사의 ‘여초(女超)현상’이 교육적, 학교운영의 측면에서 문제가 된다는 이유에서 서울시교육청이 남교사를 인위적으로 일정비율 이상 신규 임용시키는 방안(남교사 할당제)을 검토 중이라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언론, 인터넷 등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며 찬/반 양론의 입장이 대결하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인터넷 리서치 결과는 남교사 할당제를 찬성하는 여론이 70~80%대를 차지하고 있다.


■할당제에 대한 오해...이게 양성평등제라고??

남교사할당제를 추진 중인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이 방안을 다른 말로 ‘양성평등제’라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할당제’의 취지와 양성평등의 개념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다. 한국사회에서 공공기관, 그리고 일부 기업 등에서 여성할당제를 시행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이 정책에 대해 지지를 보낸 이유는 업무수행 능력차이가 성차에서 기인하지 않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여성이 취업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성의 능력이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할 것이라는 기존의 편견과 취업의 과정에서 여성이 겪게 되는 (보이지 않는) 악조건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당한 차별을 받는 여성의 입직기회를 넓히기 위해 그에 대한 적극적 해결책으로서 채용인력의 일정 비율 이상을 여성에게 할당토록 한 것이 바로 할당정책이었다.

이러한 맥락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남교사 할당제는

 전혀 다른 배경을 지니고 있다. 교직의 여초현상은 여성이 남성을 차별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남성들에 의한 ‘자발적 기피’의 결과였다. 여전히 남성들 대부분은 ‘돌봄’과 관련된 직업을 기피한다. 초등과 유아교육에 해당하는 아이들을 돌보는 직업은 가치로운 일로 인정받으면서도 동시에 남성이 하기에는 부적합한 일로 간주된다. 남자다움의 상징이었던 배우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영화 ‘유치원에 간 사나이’에서 유치원 교사를 맡았다는 말에 어색함을 느꼈던 경험처럼 말이다.

IMF이후 불안정 노동의 확산은 남성의 교직에 대한 편견을 완화시켰다. 교대의 경우 10

년 사이 남성의 수가 20% 수준에서 34% 가까이로 껑충 뛰었다. 그리고 이미 교대 입학 시 할당제를 시행하여 한 번의 혜택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24살 이하 신임교사 가운데 여성이 초등학교 95.6%, 중학교 95.4%라는 통계에서 보여지 듯 임용고사라는 관문 통과의 경쟁에서 여성이 우세하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여교사의 비중이 컸지만 이로 인해 여초현상이 더욱 가속화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초현상과 남교사 할당제가 제기되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그간 교직에 많은 여성이 종사한 것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에 의한 ‘결과’였다. 비정규직의 70%가 여성인 현실에서 교사와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여성의 제한된 선택지에 대한 열망은 더더욱 클 수밖에 없다. 이러한 때에 문제원인에 대한 근본적 치료가 아닌 남교사 할당제와 같은 정책은 여성들의 선택지를 더더욱 제한할 뿐이다.


■성차별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찬성의 근거들


남교사 할당제를 찬성하는 이들의 근거는 ‘학생의 성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아동기에 성역할모델로서의 남/여교사가 균등하게 배치되어있어야 함’, ‘동성(同性) 교사-학생간의 이해도가 더 높음’, ‘업무능력이나 교육활동 수행 능력이 남교사가 더 뛰어남’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교직의 여초현상의 원인이 남녀의 사고와 행동이 달라야 한다는 생각 - ‘교직은 여성에게 어울려!’ - 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봤을 때 이는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두 번째 근거 또한 어릴 때부터 남녀가 따로따로, 특히 중·고등학교의 사춘기 시절에 남중/고, 여중/고를 다니며 서로를 이해할 경험의 부족과 그러한 경험에 기반을 둔 개인적 차이가 더 옳은 설명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업무능력과 교육활동 수행 능력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기 이전에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칼퇴근’을 하는 여교사의 대부분은 ‘일찍 일을 끝냄’이 아니라 ‘가사노동의 시작’이 아닐까? 언론에서 찬성의 근거로 활용한 여교사가 필요로 한 것 또한 실상 ‘근력(筋力)’이지 ‘남교사’가 아니었다.


■Epilogue : 꼭 하고 싶었던 질문!


사회는 남녀차별이 진행 중이지만, 아이들이 그토록 남자선생님을 바란다면 그 요구를 받아줘야 하는 것인지, 아이들의 열망의 좌절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 것이 맞을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 스스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왜 남자선생님을 찾아보기가 힘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은 어떨까? 비록 지금의 아이들이 초·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줄곧 여자 담임선생님을 만나게 될 지라도 이것이 ‘남녀차별 역사의 축적으로서의 현실’이라는 것, 그리고 그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교육정책가와 교사뿐만 아니라 아이들 자신이기도 하다는 점에 대해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 가끔씩, 아이들의 요구가 과도하기도 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교사는 너무 성급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어차피 교육은 순간적인 변화를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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