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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전교조의 <교육복지 실현을 위한 범국민운동>을 비판한다!(Today 편집부)

 

 

0. 들어가며


지난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 언론들이 주목한 만남이 있었다. 바로 정진화 전교조 위원장과 김신일 교육부총리의 만남이다. 이 두 사람은 대학시절 사제지간이었다는 점에서 유난히도 세간의 주목을 받았었다. 이날 정진화 위원장은 김신일 부총리에게 초콜렛을 건내며 ‘대화와 타협’의 손길을 건냈다. 정권의 파시즘적/신자유주의적 교육구조에 맞서 싸웠던(싸워야만 하는!!) 전교조와 교육부와의 만남에서 이런 장면이 연출되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에도 정진화 위원장은 ‘툭하면 연가투쟁만 하는...’, ‘칙칙한 이미지의...’ 전교조를 ‘신선하게’ 바꿔보겠다는, 누워서 제 얼굴에 침 뱉는 발언들을 서슴없이 해 왔다.

 

▲2월 14일 정진화위원장과 김신일부총리의 만남.

그러나 전교조의 위와 같은 행보는 지난 97년 IMF경제위기 이후 노동운동이 걸어왔던 퇴행적인 행보들을 보았을 때 새삼스럽지만은 않다. 지난 10여년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들이 추진되면서 노동자 민중들은 일상적인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 공세에 시달려야 했는데, 이에 맞서 싸워야만 하는 “민주노조운동”세력들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98년 파견법/정리해고법과 민주노총/전교조의 합법화를 맞바꾼 것이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또한“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이라는 수사를 통해 그간 노동운동에 대한 비난을 피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사를 건 투쟁을 외면한 채 정부와의 상층 교섭으로 모든 문제를 환원하려 했던 것이다. “투쟁보다는 대화를”, “빨간 머리띠를 풀겠다”고 당당히(??) 말하는 현 민주노총 위원장의 발언도 이런 맥락에 놓여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운동이 택하는 “대화의 기술”중의 핵심은 정부가 깔아놓은 멍석에 같이 앉는 것이었다. 2005년에 발족한 <사회양극화해소 국민연대>, <저출산․고령화 해소를 위한 연석회의>에 민주노총이 참여한 것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노무현 정부는 자신들이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불안정 노동과 빈곤에 대한 불만을 관리하기 위해, 이 기구들 안에서 각종 <협약>을 만들어 내면서 신자유주의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을 포섭해 들어간다. 이 기구를 통해 정부를 정책적으로 압박하겠다고 참여한 NGO들과 노동운동 진영은 점차 그 <협약>에 발목이 잡히면서 자신들의 운동지향성을 잃어가고 정부가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하위파트너가 되어간다.


현재 전교조 본부가 추진 중인 “교육복지실현을 위한 범국민운동”(이하 교육복지운동)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비판받아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2월 14일 교육 부총리와의 만남에서 전교조는 교육부에 “교육과 관련된 범사회적 논의기구 설립”을 제안했는데, 김 부총리는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노조에서 대신 해 줬으니 교육부에서는 반길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러한 흐름 하에서 전교조 본부는 지난 6월 20일 “교육복지실현국민운동본부”를 출범시켰으며 현재 “교육희망 행진21”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 그런데 교육복지운동은 “교육=복지”라는 담론을 만들어 내며 포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청와대 산하 교육혁신위에서 추진 중인 정책들과 흡사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에 의해 왜곡되는 교육현실에 대한 비판은 수사에만 그칠 뿐이다. 실제 참여정부의 교육정책을 입안했던 사람들이 이 운동과정에 참여하면서 이러한 우려가 허구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교육복지운동이 자신들의 의도 또는 수사와는 다르게 신자유주의 교육재편을 위한 하위파트너 역할을 할 뿐임을 다양한 측면에서 따져보고, 앞으로 교원노조운동이 나아가야 할 바를 고민해 보고자 한다.



1. 신자유주의 복지개혁의 일환으로서의 “교육복지”


교육복지운동은 지금까지 교육에 대한 관점이 도구적으로 다루어져 왔음을 비판하며, 교육을 그 자체로 복지, 즉 웰빙(well-being)으로 인식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교육이 전통적인 인문교육과 생산력 향상을 위한 교육을 뛰어넘는 “받으면 좋은 것”으로서의 교육, 즉 교육복지체제를 형성해야 한다고 말한다.1) 이런 말들은 사실 매우 듣기 좋은 말들로만 채워져 있지만, 궁극적으로 어떤 교육을 하자는 것이 알 수 없고 모호하기만 하다. 그러면 전교조가 교육복지운동을 제안하면서 밝힌 교육복지의 개념을 살펴보면서 이의 실제적 내용을 분석해 보도록 하자.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교육을 복지의 관점에서 보려는 노력이 희박하였다. 그러나 설사 빈곤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취학 전부터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장차 사회부양책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적 능력을 갖춘 인간으로 육성되어야 한다.

- (가칭)교육복지국가 건설국민운동 제안의 편지 中 9page


위의 언급을 통해 보건대, 교육복지운동의 핵심은 교육을 사회복지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여러 군데에서 확인되는데, 교육복지운동 공개워크샵 등에서 영국, 미국, 프랑스 등에서 진행되고 있는 교육복지 사업들을 비교 분석하는 작업들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제공되는 복지(welfare) 인가하는 점이다. “사회부양책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적 능력을 갖춘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최근 회자되는 적극적 복지정책(Active welfare policies)의 핵심적인 맥락과 연결된다. 그럼 잠깐 논의를 우회해서 이 적극적 복지정책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자.


1950-60년대 자본주의 성장기를 배경으로 하여 계급타협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었다. 이른바 케인즈주의적 합의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메리카)핵가족모델에 기초한 고전적인 의미의 복지국가(welfare state)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백인남성노동자를 대상으로 하여 사회보험, 공공부조 제도 등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권익을 제한된 것이나마 지켜줄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세계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는 이 사회적 합의의 경제적 토대를 점차 잠식해 들어갔다. 세계자본주의의 이윤팽창이 한계에 다다르자 많은 국가들은 그나마 사회적 공평성을 유지해 주던 공공부문에 대한 재정지원을 철수하기 시작했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이들 영역은 ‘시장’에 의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저해하는 요인들이고, 나아가 당시 자본의 구조적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사회보장제도들은 집중적인 공격의 도마 위에 올랐다. 이른바 ‘영국병’또는 ‘복지병’(illness of welfare) 이라는 말이 회자되면서 복지제도들의 경제적 비효율성을 성토했고, 이들 국가들은 사회복지제도들을 점차 축소해 갔다. 그러나 이런 신자유주의 공세는 여전히 실업과 노동시장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신자유주의적 반(反)복지 공세는 오히려 실업자를 양산하고 사회적 빈곤을 심화시켰다. 이제 고전적 복지국가, 신자유주의 반(反)복지국가 어떤 것도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이러한 복지담론의 위기 속에서 영국 노동당의 블레어는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가 주장한 ‘제3의 길’노선을 채택하면서 새로운 복지개혁을 단행했다. 핵심은 ‘시장vs복지’의 대립을 지양하고 복지에 대한 투자가 궁극적으로 시장의 생산성 향상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사후적인 소득보장정책이나 임금정책이 아니라 사전에 노동시장에서 도태되는 사람들에게 개입하는 정책을 펴는 것이다. 이전의 신자유주의에서는 노동시장의 경쟁에서 도태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방관’으로 일관해 왔다면, ‘제3의 길’노선에서는 이들에게 노동유인(work incentive)을 적극 제공하여 끊임없이 노동시장으로 견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노선은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대를 기본 전제로 한다. 노동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복지수급자들이 ‘복지병’에서 벗어나 취업기회를 늘리기 위해서는 저임금이나 비정규 일자리의 확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노동연계복지’(workfare)라는 새로운 복지담론이 등장한 것이다.

▲ <제3의길>의 주창자 ‘앤서니 기든스’

일견 그럴싸해 보이는 이러한 정책은 실상 기존 신자유주의적 반(反)복지 담론을 세련되게 번안한 것에 불과하다. 이들은 실업의 가장 큰 원인을 개인의 노동윤리와 노동유인의 부재에서 찾기 때문에 복지급여의 수준을 크게 낮추고 수급자격과 기한을 엄격히 제한한다. 이들이 내리는 처방은 19세기 영국 구빈법 시기의 자유방임이데올로기를 대표하던 '열등처우의 원칙'(The principle of less eligibility), 즉 “복지급여가 노동시장으로부터의 소득보다 더 매력적인 것이 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일치한다. 이때의 복지는 인간다운 삶의 보장이 아니라, 최악의 일자리를 갖는 것보다도 못한 복지급여를 받을 것인지, 아니면 최악의 일자리에서 노동을 할 것인지를 양자택일 하도록 강요하는, 일종의 ‘형벌’인 것이다.


이러한 정책들은 우리나라에서도 김대중정부 시절 생산적복지라는 이름으로, 노무현정부 시절에는 참여복지 또는 사회투자국가라는 이름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런데 위 정책들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교육정책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유연화되고 변화무쌍한 노동시장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자신을 끊임없이 이에 적응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평생에 걸쳐 자신의 인적자본(Human Capital)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재교육의 과정이 강조된다. 이것이 최근 회자되고 있는 이른바 ‘평생교육’의 실체인 것이다. 그러나 이 평생의 교육은 치열한 경쟁구조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과 지식을 계속 고양시켜 나가야 하는 매우 고통스럽고 긴장된 과정이며‘평생의 고통’이다. 이른 새벽에 외국어 학원과 컴퓨터 학원을 다녀야 하고 늦은 나이에 대학을 다시 들어가기 위해 머리를 싸매야 하는 4-50대 노동자들의 모습이 바로 현재 자본이 강요하고 있는 평생교육의 상인 것이다.2) 이렇게 평생교육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교육을 재편하려는 계획은 얼마 전 교육혁신위가 발표한 “학습사회 실현을 위한『미래교육 비전과 전략(안)』”에서 강조되고 있는 바와 같다. 위와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교육복지운동이 교육혁신위의 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는 것은 지나친 오해인 것일까?


덧붙여 “취학 전부터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자. 이 말은 “사회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는 모든 아동들이 교육의 기회와 복지를 누릴 수 있는 아동복지체제의 구축이 시급하다. (… …) 아동관련 급여를 인상하고, 아동의 자산형성을 도와 성인기 사회적응을 원활하게 하고, 저소득층 아동에 대한 목돈을 지급하는 ‘아동신용기금’(Child Trust Fund)을 만들어야 한다.”3) 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런 내용들이 그나마 교육복지운동에서 눈에 띄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신자유주의 복지개혁 과정에서 추진되는 사회투자전략의 일환으로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빈곤 아동을 선발하여 아동의 앞으로 통장을 개설한 후, 일정액의 정부지원금, 민간의 후원 등을 매월 적립하여(3-4000만원 정도의 액수), 아동이 성인이 되었을 때 자립의 기반으로 활용할 수 있게끔 한다는 구상으로 시범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복지개혁에서는 경제 불안정을 이유로 기존의 사회보장제도들을 금융시장에 내맡기거나 점차 축소하는 반면, 저임금의 해고가 쉬운 노동력 인구 확보 차원에서 ‘여성’과 미래 국가성장동력을 위해 기능할 ‘아동’에 대한 투자는 강조되고 있다.4) 위 정책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는 것이고, 저출산․고령화에 대응하고자 하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5)



2. 사회적 맥락을 초월한 학교의 자율성?


자, 그럼 다시 화제를 돌려 위에서 언급한 교육복지운동이 인적자본론, 평생교육론에 기반해 있다는 비판이 ‘지나친 오해’가 아님은 아래 문장들을 통해 확인해 보자.


 국가는 지금보다 교육에 더 적극적으로 더 공공성에 입각하여 관여해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 교육이 질 높은 노동력을 창조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므로 이를 통해 경제성장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조는 인용자)

- 교육복지국가 건설국민운동 제안의 편지 10page


교육이 질 높은 노동력을 창조하는 수단이어야 한다는 말은 지식기반사회에서 강조하는 인적자본론의 핵심적인 언명이다. 지식기반사회라는 담론은 1990년대 신자유주의 교육개혁론의 중추이다. 이런 교육 담론을 유포하고 있는 자들은 그것의 신자유주의적 함의를 숨기기 위해 “인간적”, “사람중심”이라는 말을 꼭 함께 쓰고는 한다. (최근 유력한 대선후보의 한명으로 거론되고 있는 문국현이 지식기반사회에서 유용한 인적자원을 키워나가자는 내용을 담은 정책을 “사람중심 진짜경제”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람이 끊임없이 자본의 생산성 요구에 맞춰 훈육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기 좋게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 많은 대선 후보들이 자신들의 차별성을 주장하지만 하나같이 미래에는 “학습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전교조 본부도 인적자본론에 대한 이런 비판을 모르는 바 아니다. 교육복지운동을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인적자본론에 대한 비판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6) 권재원은 지식․정보사회의 인적자본론은 지식교육 그 자체를 생산력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노동력의 교육, 재교육 비용이 증가하자 이를 사회에 떠넘기고자 하는 기업들의 욕구가 반영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교육은 사실상 목표중심의 교육과정으로서 행동주의 학습이론과 결합하여 교육을 하나의 공학적 조작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사실상 평가 중심 교육과정이라는 비판도 빼먹지 않는다.(110p) 그런데 이 비판은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그는 인적자본론이 교육을 다른 가치 있는 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에 문제라고 지적한다. 전통적인 인문교육이 문화적 전승을 받는 교양인을 목표로 하고, 인적자본론에서는 유능한 노동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데, 둘 다 교육 밖에서 설정된 목표라는 것이다. 이렇게 교육이 다른 좋은 것의 수단으로 사용되면 교육은 짧을수록 좋은 것이 되며, 다른 좋은 상태를 위해 거쳐 가야 할 필요악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112p) 그래서 그가 주장하는 ‘교육복지’에서는 “교육은 교육받는 사람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교육이 가진 복지적 기능이라 함은 근대의 도래와 함께 본격화된 빈부격차를 교육을 통해서 해소하는 것이다.(113p) 경제적, 도덕적으로 열악한 상태에 있는 빈곤층 아동들을 국가가 수용하여 교육함으로써 빈곤의 구렁텅이가 재생산 되는 것을 막는 기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교육을 통해 얻는 결과가 아니라 교육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복지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교육을 다른 사회적인 구성요소와 독립적인 것으로 상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정의는 과연 정당한가? 학생이 교육을 받게 되면 “교육내용”이라는 것을 습득하게 되는데, 이는 한 사회 또는 공동체 속에서 의미 있는 성원(시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자원이 되는 것이다. 교육이 이런 일종의 사회화/재사회화 과정의 일환이라고 했을 때, 교육이 오로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교육”이라는 영역을 여타의 사회적 관계를 초월한 신비한 것으로 두고자 하는 착각에 불과하다.


사실 위와 같은 관념은 교사의 진보적 실천을 교실 안에서 학생과의 미시적 관계 안에 묶어두고자 하는 진보주의 교육관의 함정이기도 하다. 진보주의 교육관은 19세기말-20세기초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제적 불평등과 빈곤의 확대를 해결하는 한편 경제적 효율성도 달성하고자 하는 상충되는 두 가지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등장하였다. 여기서 학교는 사회개혁을 위한 핵심적 수단으로 이해되었다. 왜냐하면 학교는 하층계급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공간인 동시에 경제적 격차를 초월하여 모든 개인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통합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진보주의 교육관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듀이(J. Dewey)는 생활교육과 학생중심주의에 입각해서 학교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옹호한다. 그는 학교교육이 생산적 노동자의 양성과 같은 외부적 목표에 부합해야 한다는 통념을 반박하면서 직업교육 중심의 교육을 비판한다. 또한 그는 교육이 개인의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키고 이렇게 변화된 개인들이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학교교육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한다.

여기서 학교의 자율성은 교사와 교육전문가의 자율성으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교사와 교육전문가는 학생의 능력과 발달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학생 개인의 학업성취도를 평가하고 학교교육이 학업성취도에 미친 효과를 측정할 필요성이 부각된다. 이를 위해 적성검사․지능검사를 포함하는 각종 시험제도가 도입되고 교육과정은 능력에 따라 분리된다. 여기서 학생중심주의라는 것은 지식의 독점에 따른 지적차이의 위계의 문제를 회피한 채, 실용적인 문제해결적 지식의 습득으로 이해 될 뿐이다. 이는 학생의 능력에 대한 과학적 평가에 입각한 교육을 통해 실현된다. 결과적으로 진보주의 교육관은 성과주의(또는 업적주의; meritocracy)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는 것이다.7)

“교육 안에서의 복지”라는 것도 학생들의 ‘행복’의 기준에서 평가받는 교육체계라고 말하지만, ‘행복’이라는 단어는 매우 몰가치적인 것이다. 학생주도의 학습방법의 채택, 혼합반 제도, 개방적 교실과 발견학습 등 이른바 진보주의 교육 방식의 내용들이 신자유주의 교육재편의 신호탄이었던 95년 <5.31교육개혁안>에서 주장하던, ‘열린교육’, ‘수요자 중심 교육’이라는 담론과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가? ‘행복’을 만드는 과정을 교실 안에서 교사의 미시적 실천에 가둬두는 것은 학생중심주의를 신자유주의적 논리에 포섭되게 할 것이다. 이들은 학생의 ‘행복’이 구성될 수 있는 조건은 사회, 경제적 요소들을 포함한 매우 복합적인 것임을 불구하고 “교육을 통해 사회 불평등의 감소가 구체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응답할 필요도 없고, “오직 교육자와 학습자가 교육을 통해 만족하고 행복하면 그만이다”라고 자족할 뿐이다.8) 게다가 “사실상 교육이 책임 질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질책으로부터 교육을 해방”(119p)시킨다는, 주객이 전도된 발언으로 교원‘노조운동’으로서의 최소한의 책임감마저 포기하겠다는 적극적인 선언을 하고야 만다.



3. 교육을 통한 사회적 평등의 달성인가, 성과주의의 심화인가?


둘째, 국민 개인의 가치관과 품성의 수준을 보편적으로 증진시켜 사회적 일체감과 통합을 추구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셋째, 교육은 계층적 수직이동을 가능케 하는 장치로서 사회적 평등화에 기여하는 제도가 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평등을 완화해주고 불평등의 고착화로 인하여 치려야 하는 엄청난 사회비용을 감소시켜 주는 중요한 수단이 교육이다. (강조는 인용자)

- 교육복지국가 건설국민운동 제안의 편지 10page


권재원은 위에서 교육이 교육받는 자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면서 빈곤을 해소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계층적 수직이동을 통해 해소될 수 있는 것인가? 계층적 수직이동이 활발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계급/계층으로 위계화 되어있는 사회가 좀 더 평등해 질 수 있음을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 이는 개별적 대중들의 지위상승 욕망을 실현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즉 차별화된 지위간의 위계 구조가 철폐되지 않은 채로, 이들 간의 활발한 상호 이동만을 강조하는 것은 하위 계급/계층 대중들의 내부 경쟁만을 부추길 뿐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교육 기회 보장이라는 것은 경쟁의 대열에 뛰어들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것으로 뒤바뀌고 만다.

S.보울스와 H.진티스는 『자본주의와 학교교육』에서 대중교육이 확대되는 것이 어떻게 대중의 지식에 대한 권리와 유리된 채로 대중 내부의 성과주의 경쟁으로 귀결되었는지를 분석한다. 20세기초에 자본가들은 수많은 노동자들을 관리․감독․훈련시킬 필요성이 높아졌고, 한편으로는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각종 소요사태들이 발생했다. 자본은 이런 대중들의 불만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생산구조 내에서 자신들의 특권과 권력의 손상을 최소화하는 범위 내에서 교육과 지식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요구를 수용한다.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교육개혁가였던 호레이스 만(Horace Mann)은 학교교육을 “위대한 평등화의 장치”라고 부르며 보통교육의 확대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학교의 훈련이 아동들을 공장노동자로 준비시키는 데 대단히 적합하다고 생각했고 이를 통해 지식보다는 정서를 강조하고 순종과 복종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은 더 많은 교육을 받게 되지만 학교교육의 내용과 형태를 통제하지는 못한다. 또한 자본의 구조적 위기가 심화되면서 실업과 빈곤이 증가하여 노동시장 내부의 경쟁이 심화된다. 그러나 자본은 교육기회를 고등교육으로까지 확대해서 이에 따른 대중의 불만을 무마하려 한다. 대학과 대학원 입학비율이 높이지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는데, 그러나 이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노동시장의 차별적 구조는 온존한 채로 고학력 소지자만이 대거 증가한 것이기 때문에, 대중 내부의 성과주의 경쟁은 더욱 심해지는 것이다.


이미 한국사회에서 교육기회는 무한하게 팽창되어 있다. 대학 진학률도 약 20여년 만에 급격하게 팽창하였고, 이제 학력을 자랑하고 싶으면 대학원 정도는 가 줘야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한 교육기회의 보장은 사회적 불평등 해소에 전혀 기여할 수 없다.9) “교육 안에서의 복지”를 주장하는 권재원은 교육이 사회 불평등의 감소 여부를 구체적으로 입증 할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회피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현재 한국사회에서 교육은 불평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이제 교육권의 확대는 단순히 학교의 양적 확대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재정을 지출하는 구체적 방식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자들은 교육의 효율성이라는 관점에서 교육 재정의 조직화나 교육의 목표집단과 같은 ‘교육의 미시경제적 문제’를 중요시한다.(그들의 협소한 의미에서의 학생중심주의) 또한 교육의 질은 교사의 자질에 관한 문제로 이해되고 교원평가제처럼 교사의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안들이 모색된다.10) 여기서 교육의 내용과 질에 대한 실질적 통제권은 결국 국가와 자본이 쥐고 있을 수밖에 없다. 교육복지가 아무리 결과의 산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의 ‘행복’에 의해 평가받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들, 이 ‘행복’을 수업에서의 단순한 ‘즐거움’의 문제로 협소화시키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교육을 탈(脫)정치화하게 되고, 결국엔 ‘행복지수’따지기 위해 또 다른 세련된 평가기준을 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육이 실질적으로 사회 불평등의 해소하는 기능을 갖기 위해서는 노동자로서의 (학생)시민이 공동체와 노동과정을 실질적으로 통제하면서 교육 내용 자체가 자본의 무한 이윤추구를 끊어낼 수 있는 해방의 무기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은 (무상)교육을 확대하는 것을 포함함은 물론, 이를 뛰어넘는 것이어야 한다.11)



4. 나아가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재 전교조 본부가 추진 중인 교육복지운동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수사만 남겨놓은 채 완전히 우회하여 오히려 신자유주의 교육개혁을 위한 안전판 구실을 하고 있다. “교육복지”라는 개념은 김대중 정권시기 등장한 생산적 복지(productive welfare)와 다르지 않은 것들이고, 현재에는 노무현 정부가 추진 중인 사회투자국가정책에 적극 조응하고 있다. 또한 사회적 맥락을 초월한 학교교육의 자율성을 주장하면서, 자본주의 한국사회에서 교육이 갖는 핵심적 모순을 간과하고 있다. 이는 다시 성과주의라는 이름으로 사회 불평등을 확대 재생산하는데 이용되어 온 대중교육의 모순을 외면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지난 8월 16일 교육혁신위에서 제출한 『미래교육 비전과 전략(안)』은 앞으로 정부가 보여주게 될 신자유주의 교육개혁, 아니 교육 파탄의 예고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국민들이 앞으로 지식기반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평생교육, 아니 평생고통을 받을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의 새로운 이윤추구를 위해 노동력을 다른 방식으로 통제하고 훈육하려는 전략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90년대부터 진행된 신자유주의 교육개혁에 대해 많은 운동진영들은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오히려 열린교육, 학생중심교육이라는 화려한 수사에 넘어가 정부 정책에 동조하는 흐름을 보이기도 했다. 요즘엔 전교조가 스스로 논술교육사례를 연구하고, 교육희망 신문에 논술업체 광고를 게재 하는 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보이고 있는 형편이다.

지식기반사회, 신지식인, 평생교육과 같은 담론의 홍수 속에 밀려들고 있는 신자유주의 교육재편에 대한 분명한 대립각을 세우지 않고서는 이 땅 교육운동의 미래는 없다. 교원노조운동, 예비교사운동도 철저한 성찰과 혁신을 통해 반신자유주의 교육운동으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 심성보, 「한국의 교육복지, 어디로 가야하는가」, 『교육복지실현국민운동 공개워크샵 자료집』, 49p

   권재원, 「복지로서 교육: 공교육의 패러다임 전환」, 같은 자료집, 113p

 

2) 천보선, 「신지식인 교육 패러다임의 신자유주의적 본질과 문제점」, 『진보평론 5호』, 93p

 

3) 심성보, 앞의 글, 49p

 

4) 이는 복지를 시장의 생산성 확대에 종속시키는 미국식 복지체제의 전통적인 형태이다. 미국에서는 이를 이란 이름으로 진행한 바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 진행되고 있다.

 

5) 노무현 정부의 저출산․고령화 대책이 여성의 권리를 어떻게 배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저출산대책에 여성은 있는가”, 『Today 21호』참고.

 

6) 권재원, 앞의 글, 109p

 

7) 박상현, 「대중교육의 이론과 쟁점」, 『대중교육: 역사․이론․쟁점』, 공감, 2005, 64-65pp

 

8) 권재원, 앞의 글, 118p

 

9) 물론 모든 민중이 성별, 사회․경제적 배경 등에 얽매임 없이 보편교육에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공교육의 주체에서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는 장애인과 민족적 차이에 의해 교육에 대한 접근권이 배제되어 있는 이주자들의 교육기회를 확보하는 것은 강조되어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육의 내용과 형태를 이들이 실질적으로 통제 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10) 박상현, 앞의 글, 70-71pp

 

11)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마오쩌둥이 발표한 「5.7지시」의 내용중에 “대학의 학제를 단축한다”는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엘리트들에 의한 지식독점을 비판하고 지식을 대중의 것으로 돌리려 한 시도였다. 생산현장과 유리된 대학교육제도를 철폐하고, 대학을 생산현장으로 내려보내려 한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농민/병사 중에서 학생을 선발할 것과, 이들이 4년이라는 오랜 기간이 아니라 형편에 따라 다닐 수 있는 중단기의 대학과정을 만들 것을 요구한 것이다. 사실 4년의 대학과정은 그것이 지식적 요구에 필요한 만큼의 기간이라기보다는 그 기간과 간판만큼의 사회적 차별의 제도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승욱, 『중국의 노동자와 기억의 정치』, 폴리테이아 (근간) 에 관련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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