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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학습사회 실현?? 평생교육-평생고통사회!!(배병근/ 부산교대 4학년)

 

“19세기의 교육개혁 및 확대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에 연관되어 있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 교육개혁에 대한 자극은 종종 농민들이나 노동자들의 불만에서 비롯되기도 했지만, 교육개혁의 형태와 방향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는 데 성공했던 운동의 지도자들은 예외 없이 전문직업인들 및 경제의 선도적 부문의 자본가들과 제휴하였다.” 『자본주의와 학교교육』(보울즈&진티스)



신자유주의 교육의 ‘제2의 물결’, <미래교육>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이에 따르지 못하는 한국교육의 괴리에서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된 지 오래되었고, 이미 95년 <신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 방안>(일명 <5.31교육개혁안>)을 필두로 ‘신자유주의 교육재편’1)이 본격화되었다. 당시 진보진영에서는 이 개혁안의 ‘수월성 교육’, ‘학습자중심교육’ 등의 함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정부의 행보를 수수방관하거나 심지어 지지하기까지 하였다.

  지난 8월 중순, 대통령 자문기구인 교육혁신위원회(위원장 정홍섭)가 발표한 <학습사회 실현을 위한 『미래교육 비전과 전략(안)』>(이하 <미래교육>)은 5.31교육개혁안의 방향을 그대로 이어받아, 새롭게 제시한 중장기적 신자유주의 교육재편 로드맵이다.2)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학습’한다는 것은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질문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하나의 조건을 추가해보자. “인간이 평생 동안 ‘자본의 이윤추구의 도구로서’ 학습한다는 것은 좋은 일일까?” 이 물음에 대한 절대다수의 답변은 당연히 “나쁘다.”일 것이다. 그러나 ‘나쁘지만 어쩔 수 없이 학습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가 우리의 미래사회라면 어떤가!

  <미래교육>은, 신자유주의가 세계화되고 불안정노동이 일반화된 한국사회에서 자본이 원하는 이상적 미래교육의 모습을 학습사회로 표현한다. <5.31교육개혁안>에서는 ‘평생교육’이라는 개념 도입 정도로 그쳤지만 <미래교육>에서는 평생교육을 포함한 일생/사회전반의 모습을 아우르는 ‘모토(motto)’로 정리된 것이다. 이 ‘학습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까? 지금부터 보고서의 정책들을 ‘정책고객’3) ○○○(자신의 이름)의 일생 전반에 적용해 상상해보자!



일할 수 있는 자, 모조리 동원하라!?


  지난겨울 발표되었던 ‘비전2030 인적자원활용「2+5」전략’의 핵심은 학제개편으로 ‘2년’ 일찍 사회에 진출하고, 군복무 기간도 단축하며, 정년을 연장하여 ‘5년’ 동안 더 일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즉, 노동력 공급 확대를 의미한다. 이는 <미래교육>에서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선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노동시장의 축소를 해결하기 위한 영․유아 보육/교육 강화는 여성들이 ‘어느 정도’ 안심하고 노동시장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다. 자본이 이야기하는 ‘일손이 부족하다’는 말은 절대적인 노동인구(노동력) 부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러한 경로는 현재진행중인 이랜드 투쟁에서 드러나듯 특히 여성노동자들에게 불안정한 일자리를 강요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불안정 노동의 ‘조건’인 대량의 산업예비군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의무교육 체계에 학년군제․무학년제를 도입하는 취지는 학제운영을 유연화 함으로써, 학생들의 학습 속도나 흥미에 따라 학습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미래교육>에서 언급하는 외국의 사례에 따르면 학습수준이 높은 학생의 경우 남들 보다 일찍 다음 학년군으로 진급이 가능하고4), 3년 과정을 2년 내에 마치기도 한다.5) 결국 조기 진급/졸업을 활성화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2+5」전략’에서 학제개편을 통해 수학기간을 감축하려는 의도와 동일하며 동시에 우수학생을 조기 선발하겠다는 의도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국민들이여, 평생토록 ‘학습-일-학습-일-…’하라!?


  평생학습 참여를 고취하기 위해 도입되는 평생학습계좌제에는 개개인의 학습결과(자격증, 시험결과, 업무경험도, 논문, 포트폴리오 등)를 평가․인정하는 기능까지 포함된다. 이 또한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경제활동인구 감소에 대응하여 여성, 노인 등 잠재적 인적자원개발을 위한6) 정책이다.

  초․중․고등교육에서도 마찬가지로 직업교육이 부족․부실하다고 평가하며 이를 확대․내실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70-80년대 한국 중․고등 교육의 대중화가 경제발전의 밑바탕이 되었지만, 현 시점에 와서는 학력만 높아지고 노동시장의 요구에 부합하는 인력양성에는 크게 미흡하다는 게 그 이유이다. 특히, 표현에 있어서 ‘맞춤형 인력’, ‘기업 주문형 인력양성’과 같은 노골적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또한 재직근로자의 직업능력개발이 미흡하다는 점에서 이들에게 직업능력개발에 힘쓸 수 있도록 각종 지원과 함께 국가직무능력표준(KSS)라는 하나의 자격․평가 기준을 넌지시 내민다. 이 모든 것들은 자본에 종속된 한 인간의 지식․기술․소양을 평가하고 이 평가기준에서 낙오한 사람은 일상적인 고용의 불안정을 겪으며 낙오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 것이다.

  결국, 이 땅에 살아가는 대다수의 민중은 일생에 걸쳐 직업을 얻기 위해 ‘학습’하고,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학습’하고, “인력부족해결”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침침해지는 눈을 비벼가며 돋보기 끼고 ‘학습’해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WTO양허안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타결된 한-미FTA에서 ‘성인(평생)교육시장’을 개방하기로 한 상황에서 평생교육‘시장’은 이윤추구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돈독히 수행할 것이고, 인생/사회 전반으로 확대된 거대 시장에서 국내외 자본은 제대로 한 몫 건질 수 있을 것이다.7)



‘비’교육적인 인간상을 교육이념으로 내걸라!?

 

 

  마지막으로, 5.31교육개혁안 때부터 줄곧 초․중․고 학교체제와 평생학습을 관통하여 제시되고 신자유주의 교육재편의 논리가 있다. 바로 미래의 사회상으로서의 ‘정보화/지식기반사회’8), 그리고 바람직한 인간상으로서의 ‘신지식인/인간자본(인적자원)’이 그것이다. 전자는 이전과는 달리 노동과 자본이 아닌 ‘지식과 정보’가 생산의 결정적 요소가 되는 사회이며 지식과 정보가 경쟁력이 치열한 경쟁 구조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관건이라 이야기 한다. 이러한 향후 미래사회에 대비하기 위해 국가/기업/사람들은 그러한 사회에 걸맞는 능력․규범․문화를 갖추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맥락에서 끊임없는 학습과 지식습득을 통해 자신의 일하는 방식을 개선․개발․혁신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활용함으로써 부가가치를 높여 가는 사람이 후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9)

  이러한 사회의 이상적 인간상 양성을 ‘교육’이 담당할 것을 요구받는데 그것이 ‘수월성교육’, ‘학습자중심교육’ 등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 요구는 ‘교육’이라는 활동의 목적이나 의도와는 애당초 어긋나는 것이다. 개인의 다채로운 삶으로서의 자아실현을 돕는 교육, 나에게만 이로운 것이 아닌 ‘널리 이로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이 교육인데, 이들이 원하는 인간이 평생에 걸쳐 학습하는 ‘신지식’은 ‘이윤창출에 기여 하는 지식’으로 협소하게 정의 내려질 뿐이고 나머지 지식은 폄하된다. 따라서 ‘인문학의 위기’로 대표되는 기초학문/교육의 붕괴를 자본은 결코 해결하지 못한다. 그리고 ‘창의력’, ‘대안적 사회를 꿈꾸는 창의력’을 자본은 인정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창의력’ 또한 인간 형성에 기여하는 많은 가치들 중의 하나라는 점을 (예비교사라면 더더욱!) 착각해서는 안 된다. 결국 이들은 자본에는 친화/복종적이지만 (성공의 과정에서나 결과적으로나)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적대/경쟁적인 인간일 뿐이다. <미래교육>에도 ‘공동체의식’이 언급되고 있지만 이는 공염불에 그칠 수밖에 없다.


  <미래교육>의 핵심은 ‘노동력 공급 확대/원활화’와 ‘신지식인의 양성’을 위한 교육으로의 전환에 있다. 자본의 위기 극복책 혹은 발전전략으로서 제시된 교육개혁이기에 <미래교육>의 한계는 분명하다. ‘학습사회’ 자체를 실현될 수 있을지도 지금으로서는 불확실한 미래일 뿐이고, 실현되더라도 그것은 자본의 위기를 지연시키는 데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학습사회’가 결코 우리가 바라는 모습의 학습사회는 더더욱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다. 우리 ‘내부의 적’을 만들기 위한 학습, ‘이윤창출의 도구’가 되기 위한 학습, ‘일상적 해고의 두려움’ 속에 이루어지는 학습. 이런 것들이 (‘나’를 포함한) ‘우리’ 스스로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고 (‘경제’에 국한되지 않는) ‘삶’에 보람을 느끼게 만들 수 있을지는 지난 경험과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느끼고 판단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흐름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맞설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 ‘신자유주의 교육재편’은 신자유주의에 입각하여 교육에 경쟁과 시장원리를 도입, 추진하고 있는 교육변화 과정이다.

 

2) <미래교육>은 ▲유연한 학습체제 구축 ▲고등교육 역량 강화 ▲평생학습 활성화 ▲사회통합과 균형발전 4개 부문 184개 세부과제로 구성된다. <5.31교육개혁안>에서 제시되었던 총과제가 48개였던 점과 비교한다면 <비전2030-미래교육 비전과 전략(안)>(이하 <미래교육(안)>)은 보다 포괄적이다.

 

3) ‘정책고객’또한 신자유주의 교육재편의 과정에서 나타난 표현으로 국가정책 또한 ‘서비스’라는 시장원리를 도입하였다.

 

4) 보고서 56쪽, <참고자료> 프랑스의 학년군제 운영 사례 중

 

5) 보고서 57쪽, 핀란드의 무학년제 운영 사례

 

 

6) 보고서 129쪽, 이들에 대해 혁신위는 ‘평생학습 소외계층’(125쪽)이라 지칭하며 애틋한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7) “FTA를 통해 부분 개방을 하기로 한 원격교육, 테스팅 서비스는 이미 지금까지 국내에서 특별한 법적 규제가 없었기 때문에 이미 상당 부분 문이 열려 있는 상태이다. 오히려 이미 개방되어 있던 것을 명문화함으로써 향후에 국내 정책의 필요에 따라 규제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하였다. 애초 미국이 관심을 보였던 테스팅 서비스와 원격교육이 ‘현재유보’ 사항이 됨으로써 개방 상태를 유지하고 나중에라도 규제조치를 취할 수 없게 된 것이다.”   - ‘한미FTA가 교육에 미치는 영향’(4월 예비교사 월례포험 발제문)

 

8) <미래교육> 보고서에서는 (짐작컨대) ‘학습’사회를 강조하기 위하여, 이를 ‘학습자본주의사회’(학습의 기회와 과정 및 결과가 자본 형성에 핵심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회)라 이름 짓기도 한다.

 

9) 진보교육연구소, <교육운동의 이해> 참고

 

 

▲ 21세기 지식문화강국을 열어가겠다는 <교육혁신위>의 홈페이지 메인 이미지. 이들이 만들겠다는 지식기반사회의 반교육적 모습들은 우려를 자아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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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교원양성임용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최고봉, 진보교육연구소 회원)

 

 

마침내 총론이 나왔다!


역사는 2007년 8월 16일을 기억할 것이다. ‘5․31 교육개혁안’을 대체할 ‘포스트 5․31 교육개혁안’이 발표된 날로 말이다. 이름 하여 ‘미래 교육 비전과 전략(안)’이다. 재미있는 것은 5․31 교육개혁안은 총론이 나온 후에 각론이 나왔는데, 이번에는 그 반대의 순서를 밟았다는 것이다. 이 야심찬 프로젝트가 발표된 이후 교육계에서는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정권 말에 발표해서 진정성이나 실현가능성이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20년을 내다보는 프로젝트가 현 정권 말에 발표되거나, 차기 정권 초에 발표되거나 큰 차이가 없다. 다음 정권에서도 ‘미래 교육 비전과 전략(안)’을 받지 않을 수 없을테니.

13년만에 새로운 신자유주의 교육개혁의 총론이 나왔다. 다만 구체적인 로드맵이 없을 뿐. 하지만 이 로드맵이야 말로 현 정권이 아닌, 다음 정권이 만들 일이다. 대강의 방향이 그려졌으니, 앞으로 일사천리로 추진될 수도 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무렵이면 영역별, 과제별로 정교한 로드맵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나 새로 조직될 교육부의 이름으로 나올 것이다.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왜 교원양성임용을 ‘혁신’(?)하려는 걸까?


사회가 변화하면서 점점 ‘지식의 수명’이 짧아지고 있다. 평생교육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날이 갈수록 변화하는 지식 때문이다. 지식의 수명의 단축은 인문학, 사회과학 보다는 자연과학과 기술 영역에서 더욱 심하다. 요즈음 이공계 핵심 기술의 수명은 불과 3년이다. 사태가 이러니 연구원을 정규직으로 채용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이공계 교수까지 확보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기업에서는 ‘가방 끈이 긴 사람을 뽑아도 인재가 없다’고 푸념을 한단다. 학교는 학교 나름대로 불만이 많다. 대학은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 다 죽이고 실용학문으로 전환한지 오래되었다. 다들 토익(TOEIC)이다, 한국어능력시험이다 난리다. 그런데도 취업은 되지 않는다. 기술인력은 어떤가. 고등학교에 선택형 교과를 도입하고, 새로운 학문을 적용하려 하는데 교사들이 난리(!)라고 한다. 다들 자기 밥그릇 챙기려고 ‘변화’를 거부한다는 보수언론의 지적은 하루 이틀 된 레퍼토리가 아니다.

지식의 수명이 단축되자, 그 동안 오래된 지식을 가르쳐왔던 근대적인 교사가 걸림돌로 지적되었다. 자본과 정부는 떨어지는 이윤율 만회를 위해 이른 바 교육개혁을 추진한다. 아무래도 개혁은 경제활동과 직결된 대학부터 추진되었다. 그 결과로 신분이 안정된 교수는 사라지게 점차 줄어들고, 계약직 교수 혹은 이름만 교수인 연구직 교수가 늘어났다. 지식의 수명은 점점 짧아지는데, 정식 교수로 채용하면 대학 강의의 질을 확보할 수 없단다. 이제 대학은 이름난 교수, 대중적인 인기를 끌 수 있거나 탁월한 실력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교수만 제한적으로 채용한다. 대학이 어느 정도 구조조정이 되었으니, 이제 중․고등학교 차례가 돌아왔다. 1990년 임용고사 도입 이후 처음 맞는 대수술이다.



이렇게 변화한다.


한국 교원양성임용 문제의 핵심은 중등이다. 대학교육과 직결되어 있고, 노동시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 교수는 어차피 교사교육이란 과정이 생략되어 있었다. 교원양성임용은 결국 전문적인 교사교육을 받는 사람에 한정된 문제다. 그러니 중등교육, 특히 고등학교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에 대한 문제가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지식의 수명’이 짧아지면 고등학교 교육도 변해야 한다. 그런데 정규직 교사들을 억지로 내몰 수는 없다. 그래서 이제 임용과 자격, 더 나아가 교원양성 자체를 바꿔야 한다. 물론 이 구상은 단기간에 추진될 수 없다. 워낙 건드려야 할 것이 많다. 너무 덩치가 크다보니 그 동안 하루 이틀 미뤄왔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교원양성임용제도 개편에 대한 요구가 봇물을 이루게 된다.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교육혁신위는 마침내 칼을 뽑을 계획인 것 같다. 교원전문대학원, 교원자격갱신제라는 새로운 메뉴도 개발되었다.

교육혁신위가 교원전문대학원 제도를 도입하려는 것은 예사롭게 볼 문제가 아니다. 한국 교원양성임용의 모델 자체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의 교원양성임용제도는 근대 독일 모델과 일본을 통해 소개된 미국 모델이 공존하는 이중체제였다. 초등이 100년 전의 모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면, 중등은 굉장히 급격한 해체를 경험했다. 특수는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유아는 거의 방임 수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원전문대학원 제도를 도입하려는 것은 이런 다양한 수준의 교원양성임용제도를 해체하고, 미국 모델로 이행하려는 시도이다.

교원자격갱신제는 그야 말로 회심의 일견이다. 그 동안 ‘도입을 해야 한다’, ‘도입하면 안 된다’ 이야기만 무성했지 도입하겠다고 확정적으로 발표한 경우가 없었다.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란 뜻이다. 무사적 전통의 일본과는 달리, 이 나라는 문사적 전통을 이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다 끝났다. 교원자격갱신제 도입으로 모든 교사가 계약직으로 전환된다. 이름이야 정규직으로 해주자. 일본처럼 갱신기간을 10년으로 잡으면 어차피 10년 계약이다. 교사자격 박탈되면 자동으로 해직이니, 계약직 아니라고 우겨도 소용없다. 그러니 교원자격갱신제와 맞물려 교원평가제는 드디어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지식의 수명’이 짧아졌으니 새로운 지식을 가르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교사는 나가라는 것이다. 물론 자본과 정부에 저항하는 반골 교사도 함께.

미국 모델이라 부르는 것은 실은 짧은 기간 안에 교사자격을 갖춘 다수의 사람을 배출하고, 초반에는 계약직으로 임용하며, 이직을 자유롭게 하는 교사양성임용제도이다. 그런데 그 동안 우리는 계속 미국 모델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사실 교육계에서 미국 모델이라 칭했던 교사양성임용 모델은 사실 일본에 의해 여과된 미국 모델이었다. 과거에 ‘우리도 미국처럼 하자.’고 말하면 문화와 전통이 다른 우리 나라에 먹힐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일본이 했는데 이런 성과가 있었다. 우리도 해보자.’고 주장하면 설득력이 높았다. 어느 정도 비슷한 문화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일본에서 실시했던 정책은 한국에서도 큰 반발 없이 적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미래교육의 비전과 전략(안)에 포함된 교원양성임용 개편방안은 일본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미국 모델로 가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앞으로 교육운동 진영은 미국 모델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교육당국의 주 관심사는 역시 중등이다. 그런데 중등만 바꾸어서는 안 된다. 중등은 교원전문대학원 체제로 가고, 초등은 가지 않는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다 같이 간다. 다 같이 도입하는 것이 아니면, 다 같이 현 체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교육혁신위도, 교육부도 잘 안다. 아마도 조만간 교원양성임용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는 흐름이 나올 것이다. 더불어 다른 나라의 교육개혁 동향을 소개한다면서 교원양성임용을 미국 모델로 개편한다는 소식을 전할 것이다. 모름지기,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징후가 있기 마련이다.



예비교사 운동, 10년을 내다보자.


소문을 듣자하니 올해도 예비교사들이 10월 집회를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당장 급격한 임용축소로 인해 고통받는 예비교사들이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꿈틀하지 않는다면, 더욱 고통스러운 수렁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동안 예비교사 운동이 지나치게 임용고사 정원(TO)에만 관심을 집중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교육혁신위는 10년, 20년을 내다보고 계획을 내고 있는데 교육운동은 한 해 한 해 위기를 넘기는 것에 집착했다. 이러다간 큰 낭패를 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교육운동 진영에게는 당장 발등의 불을 끄면서도, 다 쓰러져 가는 집을 일으켜 세울 계획도 필요하다. 위기의 지연이 아닌,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전략. 예비교사 운동도 10년을 내다보는 운동을 계획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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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전교조의 <교육복지 실현을 위한 범국민운동>을 비판한다!(Today 편집부)

 

 

0. 들어가며


지난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 언론들이 주목한 만남이 있었다. 바로 정진화 전교조 위원장과 김신일 교육부총리의 만남이다. 이 두 사람은 대학시절 사제지간이었다는 점에서 유난히도 세간의 주목을 받았었다. 이날 정진화 위원장은 김신일 부총리에게 초콜렛을 건내며 ‘대화와 타협’의 손길을 건냈다. 정권의 파시즘적/신자유주의적 교육구조에 맞서 싸웠던(싸워야만 하는!!) 전교조와 교육부와의 만남에서 이런 장면이 연출되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에도 정진화 위원장은 ‘툭하면 연가투쟁만 하는...’, ‘칙칙한 이미지의...’ 전교조를 ‘신선하게’ 바꿔보겠다는, 누워서 제 얼굴에 침 뱉는 발언들을 서슴없이 해 왔다.

 

▲2월 14일 정진화위원장과 김신일부총리의 만남.

그러나 전교조의 위와 같은 행보는 지난 97년 IMF경제위기 이후 노동운동이 걸어왔던 퇴행적인 행보들을 보았을 때 새삼스럽지만은 않다. 지난 10여년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들이 추진되면서 노동자 민중들은 일상적인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 공세에 시달려야 했는데, 이에 맞서 싸워야만 하는 “민주노조운동”세력들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98년 파견법/정리해고법과 민주노총/전교조의 합법화를 맞바꾼 것이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또한“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이라는 수사를 통해 그간 노동운동에 대한 비난을 피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사를 건 투쟁을 외면한 채 정부와의 상층 교섭으로 모든 문제를 환원하려 했던 것이다. “투쟁보다는 대화를”, “빨간 머리띠를 풀겠다”고 당당히(??) 말하는 현 민주노총 위원장의 발언도 이런 맥락에 놓여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운동이 택하는 “대화의 기술”중의 핵심은 정부가 깔아놓은 멍석에 같이 앉는 것이었다. 2005년에 발족한 <사회양극화해소 국민연대>, <저출산․고령화 해소를 위한 연석회의>에 민주노총이 참여한 것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노무현 정부는 자신들이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불안정 노동과 빈곤에 대한 불만을 관리하기 위해, 이 기구들 안에서 각종 <협약>을 만들어 내면서 신자유주의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을 포섭해 들어간다. 이 기구를 통해 정부를 정책적으로 압박하겠다고 참여한 NGO들과 노동운동 진영은 점차 그 <협약>에 발목이 잡히면서 자신들의 운동지향성을 잃어가고 정부가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하위파트너가 되어간다.


현재 전교조 본부가 추진 중인 “교육복지실현을 위한 범국민운동”(이하 교육복지운동)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비판받아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2월 14일 교육 부총리와의 만남에서 전교조는 교육부에 “교육과 관련된 범사회적 논의기구 설립”을 제안했는데, 김 부총리는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노조에서 대신 해 줬으니 교육부에서는 반길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러한 흐름 하에서 전교조 본부는 지난 6월 20일 “교육복지실현국민운동본부”를 출범시켰으며 현재 “교육희망 행진21”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 그런데 교육복지운동은 “교육=복지”라는 담론을 만들어 내며 포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청와대 산하 교육혁신위에서 추진 중인 정책들과 흡사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에 의해 왜곡되는 교육현실에 대한 비판은 수사에만 그칠 뿐이다. 실제 참여정부의 교육정책을 입안했던 사람들이 이 운동과정에 참여하면서 이러한 우려가 허구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교육복지운동이 자신들의 의도 또는 수사와는 다르게 신자유주의 교육재편을 위한 하위파트너 역할을 할 뿐임을 다양한 측면에서 따져보고, 앞으로 교원노조운동이 나아가야 할 바를 고민해 보고자 한다.



1. 신자유주의 복지개혁의 일환으로서의 “교육복지”


교육복지운동은 지금까지 교육에 대한 관점이 도구적으로 다루어져 왔음을 비판하며, 교육을 그 자체로 복지, 즉 웰빙(well-being)으로 인식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교육이 전통적인 인문교육과 생산력 향상을 위한 교육을 뛰어넘는 “받으면 좋은 것”으로서의 교육, 즉 교육복지체제를 형성해야 한다고 말한다.1) 이런 말들은 사실 매우 듣기 좋은 말들로만 채워져 있지만, 궁극적으로 어떤 교육을 하자는 것이 알 수 없고 모호하기만 하다. 그러면 전교조가 교육복지운동을 제안하면서 밝힌 교육복지의 개념을 살펴보면서 이의 실제적 내용을 분석해 보도록 하자.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교육을 복지의 관점에서 보려는 노력이 희박하였다. 그러나 설사 빈곤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취학 전부터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장차 사회부양책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적 능력을 갖춘 인간으로 육성되어야 한다.

- (가칭)교육복지국가 건설국민운동 제안의 편지 中 9page


위의 언급을 통해 보건대, 교육복지운동의 핵심은 교육을 사회복지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여러 군데에서 확인되는데, 교육복지운동 공개워크샵 등에서 영국, 미국, 프랑스 등에서 진행되고 있는 교육복지 사업들을 비교 분석하는 작업들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제공되는 복지(welfare) 인가하는 점이다. “사회부양책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적 능력을 갖춘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최근 회자되는 적극적 복지정책(Active welfare policies)의 핵심적인 맥락과 연결된다. 그럼 잠깐 논의를 우회해서 이 적극적 복지정책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자.


1950-60년대 자본주의 성장기를 배경으로 하여 계급타협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었다. 이른바 케인즈주의적 합의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메리카)핵가족모델에 기초한 고전적인 의미의 복지국가(welfare state)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백인남성노동자를 대상으로 하여 사회보험, 공공부조 제도 등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권익을 제한된 것이나마 지켜줄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세계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는 이 사회적 합의의 경제적 토대를 점차 잠식해 들어갔다. 세계자본주의의 이윤팽창이 한계에 다다르자 많은 국가들은 그나마 사회적 공평성을 유지해 주던 공공부문에 대한 재정지원을 철수하기 시작했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이들 영역은 ‘시장’에 의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저해하는 요인들이고, 나아가 당시 자본의 구조적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사회보장제도들은 집중적인 공격의 도마 위에 올랐다. 이른바 ‘영국병’또는 ‘복지병’(illness of welfare) 이라는 말이 회자되면서 복지제도들의 경제적 비효율성을 성토했고, 이들 국가들은 사회복지제도들을 점차 축소해 갔다. 그러나 이런 신자유주의 공세는 여전히 실업과 노동시장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신자유주의적 반(反)복지 공세는 오히려 실업자를 양산하고 사회적 빈곤을 심화시켰다. 이제 고전적 복지국가, 신자유주의 반(反)복지국가 어떤 것도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이러한 복지담론의 위기 속에서 영국 노동당의 블레어는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가 주장한 ‘제3의 길’노선을 채택하면서 새로운 복지개혁을 단행했다. 핵심은 ‘시장vs복지’의 대립을 지양하고 복지에 대한 투자가 궁극적으로 시장의 생산성 향상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사후적인 소득보장정책이나 임금정책이 아니라 사전에 노동시장에서 도태되는 사람들에게 개입하는 정책을 펴는 것이다. 이전의 신자유주의에서는 노동시장의 경쟁에서 도태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방관’으로 일관해 왔다면, ‘제3의 길’노선에서는 이들에게 노동유인(work incentive)을 적극 제공하여 끊임없이 노동시장으로 견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노선은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대를 기본 전제로 한다. 노동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복지수급자들이 ‘복지병’에서 벗어나 취업기회를 늘리기 위해서는 저임금이나 비정규 일자리의 확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노동연계복지’(workfare)라는 새로운 복지담론이 등장한 것이다.

▲ <제3의길>의 주창자 ‘앤서니 기든스’

일견 그럴싸해 보이는 이러한 정책은 실상 기존 신자유주의적 반(反)복지 담론을 세련되게 번안한 것에 불과하다. 이들은 실업의 가장 큰 원인을 개인의 노동윤리와 노동유인의 부재에서 찾기 때문에 복지급여의 수준을 크게 낮추고 수급자격과 기한을 엄격히 제한한다. 이들이 내리는 처방은 19세기 영국 구빈법 시기의 자유방임이데올로기를 대표하던 '열등처우의 원칙'(The principle of less eligibility), 즉 “복지급여가 노동시장으로부터의 소득보다 더 매력적인 것이 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일치한다. 이때의 복지는 인간다운 삶의 보장이 아니라, 최악의 일자리를 갖는 것보다도 못한 복지급여를 받을 것인지, 아니면 최악의 일자리에서 노동을 할 것인지를 양자택일 하도록 강요하는, 일종의 ‘형벌’인 것이다.


이러한 정책들은 우리나라에서도 김대중정부 시절 생산적복지라는 이름으로, 노무현정부 시절에는 참여복지 또는 사회투자국가라는 이름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런데 위 정책들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교육정책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유연화되고 변화무쌍한 노동시장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자신을 끊임없이 이에 적응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평생에 걸쳐 자신의 인적자본(Human Capital)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재교육의 과정이 강조된다. 이것이 최근 회자되고 있는 이른바 ‘평생교육’의 실체인 것이다. 그러나 이 평생의 교육은 치열한 경쟁구조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과 지식을 계속 고양시켜 나가야 하는 매우 고통스럽고 긴장된 과정이며‘평생의 고통’이다. 이른 새벽에 외국어 학원과 컴퓨터 학원을 다녀야 하고 늦은 나이에 대학을 다시 들어가기 위해 머리를 싸매야 하는 4-50대 노동자들의 모습이 바로 현재 자본이 강요하고 있는 평생교육의 상인 것이다.2) 이렇게 평생교육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교육을 재편하려는 계획은 얼마 전 교육혁신위가 발표한 “학습사회 실현을 위한『미래교육 비전과 전략(안)』”에서 강조되고 있는 바와 같다. 위와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교육복지운동이 교육혁신위의 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는 것은 지나친 오해인 것일까?


덧붙여 “취학 전부터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자. 이 말은 “사회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는 모든 아동들이 교육의 기회와 복지를 누릴 수 있는 아동복지체제의 구축이 시급하다. (… …) 아동관련 급여를 인상하고, 아동의 자산형성을 도와 성인기 사회적응을 원활하게 하고, 저소득층 아동에 대한 목돈을 지급하는 ‘아동신용기금’(Child Trust Fund)을 만들어야 한다.”3) 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런 내용들이 그나마 교육복지운동에서 눈에 띄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신자유주의 복지개혁 과정에서 추진되는 사회투자전략의 일환으로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빈곤 아동을 선발하여 아동의 앞으로 통장을 개설한 후, 일정액의 정부지원금, 민간의 후원 등을 매월 적립하여(3-4000만원 정도의 액수), 아동이 성인이 되었을 때 자립의 기반으로 활용할 수 있게끔 한다는 구상으로 시범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복지개혁에서는 경제 불안정을 이유로 기존의 사회보장제도들을 금융시장에 내맡기거나 점차 축소하는 반면, 저임금의 해고가 쉬운 노동력 인구 확보 차원에서 ‘여성’과 미래 국가성장동력을 위해 기능할 ‘아동’에 대한 투자는 강조되고 있다.4) 위 정책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는 것이고, 저출산․고령화에 대응하고자 하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5)



2. 사회적 맥락을 초월한 학교의 자율성?


자, 그럼 다시 화제를 돌려 위에서 언급한 교육복지운동이 인적자본론, 평생교육론에 기반해 있다는 비판이 ‘지나친 오해’가 아님은 아래 문장들을 통해 확인해 보자.


 국가는 지금보다 교육에 더 적극적으로 더 공공성에 입각하여 관여해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 교육이 질 높은 노동력을 창조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므로 이를 통해 경제성장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조는 인용자)

- 교육복지국가 건설국민운동 제안의 편지 10page


교육이 질 높은 노동력을 창조하는 수단이어야 한다는 말은 지식기반사회에서 강조하는 인적자본론의 핵심적인 언명이다. 지식기반사회라는 담론은 1990년대 신자유주의 교육개혁론의 중추이다. 이런 교육 담론을 유포하고 있는 자들은 그것의 신자유주의적 함의를 숨기기 위해 “인간적”, “사람중심”이라는 말을 꼭 함께 쓰고는 한다. (최근 유력한 대선후보의 한명으로 거론되고 있는 문국현이 지식기반사회에서 유용한 인적자원을 키워나가자는 내용을 담은 정책을 “사람중심 진짜경제”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람이 끊임없이 자본의 생산성 요구에 맞춰 훈육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기 좋게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 많은 대선 후보들이 자신들의 차별성을 주장하지만 하나같이 미래에는 “학습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전교조 본부도 인적자본론에 대한 이런 비판을 모르는 바 아니다. 교육복지운동을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인적자본론에 대한 비판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6) 권재원은 지식․정보사회의 인적자본론은 지식교육 그 자체를 생산력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노동력의 교육, 재교육 비용이 증가하자 이를 사회에 떠넘기고자 하는 기업들의 욕구가 반영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교육은 사실상 목표중심의 교육과정으로서 행동주의 학습이론과 결합하여 교육을 하나의 공학적 조작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사실상 평가 중심 교육과정이라는 비판도 빼먹지 않는다.(110p) 그런데 이 비판은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그는 인적자본론이 교육을 다른 가치 있는 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에 문제라고 지적한다. 전통적인 인문교육이 문화적 전승을 받는 교양인을 목표로 하고, 인적자본론에서는 유능한 노동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데, 둘 다 교육 밖에서 설정된 목표라는 것이다. 이렇게 교육이 다른 좋은 것의 수단으로 사용되면 교육은 짧을수록 좋은 것이 되며, 다른 좋은 상태를 위해 거쳐 가야 할 필요악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112p) 그래서 그가 주장하는 ‘교육복지’에서는 “교육은 교육받는 사람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교육이 가진 복지적 기능이라 함은 근대의 도래와 함께 본격화된 빈부격차를 교육을 통해서 해소하는 것이다.(113p) 경제적, 도덕적으로 열악한 상태에 있는 빈곤층 아동들을 국가가 수용하여 교육함으로써 빈곤의 구렁텅이가 재생산 되는 것을 막는 기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교육을 통해 얻는 결과가 아니라 교육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복지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교육을 다른 사회적인 구성요소와 독립적인 것으로 상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정의는 과연 정당한가? 학생이 교육을 받게 되면 “교육내용”이라는 것을 습득하게 되는데, 이는 한 사회 또는 공동체 속에서 의미 있는 성원(시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자원이 되는 것이다. 교육이 이런 일종의 사회화/재사회화 과정의 일환이라고 했을 때, 교육이 오로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교육”이라는 영역을 여타의 사회적 관계를 초월한 신비한 것으로 두고자 하는 착각에 불과하다.


사실 위와 같은 관념은 교사의 진보적 실천을 교실 안에서 학생과의 미시적 관계 안에 묶어두고자 하는 진보주의 교육관의 함정이기도 하다. 진보주의 교육관은 19세기말-20세기초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제적 불평등과 빈곤의 확대를 해결하는 한편 경제적 효율성도 달성하고자 하는 상충되는 두 가지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등장하였다. 여기서 학교는 사회개혁을 위한 핵심적 수단으로 이해되었다. 왜냐하면 학교는 하층계급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공간인 동시에 경제적 격차를 초월하여 모든 개인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통합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진보주의 교육관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듀이(J. Dewey)는 생활교육과 학생중심주의에 입각해서 학교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옹호한다. 그는 학교교육이 생산적 노동자의 양성과 같은 외부적 목표에 부합해야 한다는 통념을 반박하면서 직업교육 중심의 교육을 비판한다. 또한 그는 교육이 개인의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키고 이렇게 변화된 개인들이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학교교육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한다.

여기서 학교의 자율성은 교사와 교육전문가의 자율성으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교사와 교육전문가는 학생의 능력과 발달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학생 개인의 학업성취도를 평가하고 학교교육이 학업성취도에 미친 효과를 측정할 필요성이 부각된다. 이를 위해 적성검사․지능검사를 포함하는 각종 시험제도가 도입되고 교육과정은 능력에 따라 분리된다. 여기서 학생중심주의라는 것은 지식의 독점에 따른 지적차이의 위계의 문제를 회피한 채, 실용적인 문제해결적 지식의 습득으로 이해 될 뿐이다. 이는 학생의 능력에 대한 과학적 평가에 입각한 교육을 통해 실현된다. 결과적으로 진보주의 교육관은 성과주의(또는 업적주의; meritocracy)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는 것이다.7)

“교육 안에서의 복지”라는 것도 학생들의 ‘행복’의 기준에서 평가받는 교육체계라고 말하지만, ‘행복’이라는 단어는 매우 몰가치적인 것이다. 학생주도의 학습방법의 채택, 혼합반 제도, 개방적 교실과 발견학습 등 이른바 진보주의 교육 방식의 내용들이 신자유주의 교육재편의 신호탄이었던 95년 <5.31교육개혁안>에서 주장하던, ‘열린교육’, ‘수요자 중심 교육’이라는 담론과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가? ‘행복’을 만드는 과정을 교실 안에서 교사의 미시적 실천에 가둬두는 것은 학생중심주의를 신자유주의적 논리에 포섭되게 할 것이다. 이들은 학생의 ‘행복’이 구성될 수 있는 조건은 사회, 경제적 요소들을 포함한 매우 복합적인 것임을 불구하고 “교육을 통해 사회 불평등의 감소가 구체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응답할 필요도 없고, “오직 교육자와 학습자가 교육을 통해 만족하고 행복하면 그만이다”라고 자족할 뿐이다.8) 게다가 “사실상 교육이 책임 질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질책으로부터 교육을 해방”(119p)시킨다는, 주객이 전도된 발언으로 교원‘노조운동’으로서의 최소한의 책임감마저 포기하겠다는 적극적인 선언을 하고야 만다.



3. 교육을 통한 사회적 평등의 달성인가, 성과주의의 심화인가?


둘째, 국민 개인의 가치관과 품성의 수준을 보편적으로 증진시켜 사회적 일체감과 통합을 추구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셋째, 교육은 계층적 수직이동을 가능케 하는 장치로서 사회적 평등화에 기여하는 제도가 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평등을 완화해주고 불평등의 고착화로 인하여 치려야 하는 엄청난 사회비용을 감소시켜 주는 중요한 수단이 교육이다. (강조는 인용자)

- 교육복지국가 건설국민운동 제안의 편지 10page


권재원은 위에서 교육이 교육받는 자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면서 빈곤을 해소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계층적 수직이동을 통해 해소될 수 있는 것인가? 계층적 수직이동이 활발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계급/계층으로 위계화 되어있는 사회가 좀 더 평등해 질 수 있음을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 이는 개별적 대중들의 지위상승 욕망을 실현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즉 차별화된 지위간의 위계 구조가 철폐되지 않은 채로, 이들 간의 활발한 상호 이동만을 강조하는 것은 하위 계급/계층 대중들의 내부 경쟁만을 부추길 뿐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교육 기회 보장이라는 것은 경쟁의 대열에 뛰어들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것으로 뒤바뀌고 만다.

S.보울스와 H.진티스는 『자본주의와 학교교육』에서 대중교육이 확대되는 것이 어떻게 대중의 지식에 대한 권리와 유리된 채로 대중 내부의 성과주의 경쟁으로 귀결되었는지를 분석한다. 20세기초에 자본가들은 수많은 노동자들을 관리․감독․훈련시킬 필요성이 높아졌고, 한편으로는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각종 소요사태들이 발생했다. 자본은 이런 대중들의 불만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생산구조 내에서 자신들의 특권과 권력의 손상을 최소화하는 범위 내에서 교육과 지식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요구를 수용한다.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교육개혁가였던 호레이스 만(Horace Mann)은 학교교육을 “위대한 평등화의 장치”라고 부르며 보통교육의 확대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학교의 훈련이 아동들을 공장노동자로 준비시키는 데 대단히 적합하다고 생각했고 이를 통해 지식보다는 정서를 강조하고 순종과 복종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은 더 많은 교육을 받게 되지만 학교교육의 내용과 형태를 통제하지는 못한다. 또한 자본의 구조적 위기가 심화되면서 실업과 빈곤이 증가하여 노동시장 내부의 경쟁이 심화된다. 그러나 자본은 교육기회를 고등교육으로까지 확대해서 이에 따른 대중의 불만을 무마하려 한다. 대학과 대학원 입학비율이 높이지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는데, 그러나 이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노동시장의 차별적 구조는 온존한 채로 고학력 소지자만이 대거 증가한 것이기 때문에, 대중 내부의 성과주의 경쟁은 더욱 심해지는 것이다.


이미 한국사회에서 교육기회는 무한하게 팽창되어 있다. 대학 진학률도 약 20여년 만에 급격하게 팽창하였고, 이제 학력을 자랑하고 싶으면 대학원 정도는 가 줘야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한 교육기회의 보장은 사회적 불평등 해소에 전혀 기여할 수 없다.9) “교육 안에서의 복지”를 주장하는 권재원은 교육이 사회 불평등의 감소 여부를 구체적으로 입증 할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회피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현재 한국사회에서 교육은 불평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이제 교육권의 확대는 단순히 학교의 양적 확대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재정을 지출하는 구체적 방식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자들은 교육의 효율성이라는 관점에서 교육 재정의 조직화나 교육의 목표집단과 같은 ‘교육의 미시경제적 문제’를 중요시한다.(그들의 협소한 의미에서의 학생중심주의) 또한 교육의 질은 교사의 자질에 관한 문제로 이해되고 교원평가제처럼 교사의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안들이 모색된다.10) 여기서 교육의 내용과 질에 대한 실질적 통제권은 결국 국가와 자본이 쥐고 있을 수밖에 없다. 교육복지가 아무리 결과의 산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의 ‘행복’에 의해 평가받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들, 이 ‘행복’을 수업에서의 단순한 ‘즐거움’의 문제로 협소화시키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교육을 탈(脫)정치화하게 되고, 결국엔 ‘행복지수’따지기 위해 또 다른 세련된 평가기준을 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육이 실질적으로 사회 불평등의 해소하는 기능을 갖기 위해서는 노동자로서의 (학생)시민이 공동체와 노동과정을 실질적으로 통제하면서 교육 내용 자체가 자본의 무한 이윤추구를 끊어낼 수 있는 해방의 무기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은 (무상)교육을 확대하는 것을 포함함은 물론, 이를 뛰어넘는 것이어야 한다.11)



4. 나아가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재 전교조 본부가 추진 중인 교육복지운동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수사만 남겨놓은 채 완전히 우회하여 오히려 신자유주의 교육개혁을 위한 안전판 구실을 하고 있다. “교육복지”라는 개념은 김대중 정권시기 등장한 생산적 복지(productive welfare)와 다르지 않은 것들이고, 현재에는 노무현 정부가 추진 중인 사회투자국가정책에 적극 조응하고 있다. 또한 사회적 맥락을 초월한 학교교육의 자율성을 주장하면서, 자본주의 한국사회에서 교육이 갖는 핵심적 모순을 간과하고 있다. 이는 다시 성과주의라는 이름으로 사회 불평등을 확대 재생산하는데 이용되어 온 대중교육의 모순을 외면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지난 8월 16일 교육혁신위에서 제출한 『미래교육 비전과 전략(안)』은 앞으로 정부가 보여주게 될 신자유주의 교육개혁, 아니 교육 파탄의 예고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국민들이 앞으로 지식기반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평생교육, 아니 평생고통을 받을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의 새로운 이윤추구를 위해 노동력을 다른 방식으로 통제하고 훈육하려는 전략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90년대부터 진행된 신자유주의 교육개혁에 대해 많은 운동진영들은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오히려 열린교육, 학생중심교육이라는 화려한 수사에 넘어가 정부 정책에 동조하는 흐름을 보이기도 했다. 요즘엔 전교조가 스스로 논술교육사례를 연구하고, 교육희망 신문에 논술업체 광고를 게재 하는 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보이고 있는 형편이다.

지식기반사회, 신지식인, 평생교육과 같은 담론의 홍수 속에 밀려들고 있는 신자유주의 교육재편에 대한 분명한 대립각을 세우지 않고서는 이 땅 교육운동의 미래는 없다. 교원노조운동, 예비교사운동도 철저한 성찰과 혁신을 통해 반신자유주의 교육운동으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 심성보, 「한국의 교육복지, 어디로 가야하는가」, 『교육복지실현국민운동 공개워크샵 자료집』, 49p

   권재원, 「복지로서 교육: 공교육의 패러다임 전환」, 같은 자료집, 113p

 

2) 천보선, 「신지식인 교육 패러다임의 신자유주의적 본질과 문제점」, 『진보평론 5호』, 93p

 

3) 심성보, 앞의 글, 49p

 

4) 이는 복지를 시장의 생산성 확대에 종속시키는 미국식 복지체제의 전통적인 형태이다. 미국에서는 이를 이란 이름으로 진행한 바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 진행되고 있다.

 

5) 노무현 정부의 저출산․고령화 대책이 여성의 권리를 어떻게 배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저출산대책에 여성은 있는가”, 『Today 21호』참고.

 

6) 권재원, 앞의 글, 109p

 

7) 박상현, 「대중교육의 이론과 쟁점」, 『대중교육: 역사․이론․쟁점』, 공감, 2005, 64-65pp

 

8) 권재원, 앞의 글, 118p

 

9) 물론 모든 민중이 성별, 사회․경제적 배경 등에 얽매임 없이 보편교육에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공교육의 주체에서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는 장애인과 민족적 차이에 의해 교육에 대한 접근권이 배제되어 있는 이주자들의 교육기회를 확보하는 것은 강조되어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육의 내용과 형태를 이들이 실질적으로 통제 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10) 박상현, 앞의 글, 70-71pp

 

11)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마오쩌둥이 발표한 「5.7지시」의 내용중에 “대학의 학제를 단축한다”는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엘리트들에 의한 지식독점을 비판하고 지식을 대중의 것으로 돌리려 한 시도였다. 생산현장과 유리된 대학교육제도를 철폐하고, 대학을 생산현장으로 내려보내려 한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농민/병사 중에서 학생을 선발할 것과, 이들이 4년이라는 오랜 기간이 아니라 형편에 따라 다닐 수 있는 중단기의 대학과정을 만들 것을 요구한 것이다. 사실 4년의 대학과정은 그것이 지식적 요구에 필요한 만큼의 기간이라기보다는 그 기간과 간판만큼의 사회적 차별의 제도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승욱, 『중국의 노동자와 기억의 정치』, 폴리테이아 (근간) 에 관련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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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잔치는 끝났다. 두 번째 이야기. (최고봉/ 교사)

잔치는 끝났다. 두 번째 이야기.


최고봉 | 전교조 예비교사지원국장



○ 잔치는 끝났다.

학급총량제가 언론에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8월이 되면서부터이다. 부산광역시 교육청이 중기학생수용계획을 발표하면서, 또 강원도 교육청이 매년 80명씩 총 240명의 중등교사를 수도권 타 시도로 강제 전출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 알려지면서부터였다.

학급총량제에 따라 학급수가 감소하고, 더불어 신규 임용 교사수가 감소하면서 언론에서는 ‘좋은 시절 끝났나?’라는 물음을 던지는 등 교원임용 대란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애초 교․사대가 함께 추진하려 했던 9월 예비교사한마당은 예비교사 총궐기로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총궐기의 핵심쟁점, 위기의 한복판에는 학급총량제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2020년까지 중등교원 감축계획을 마련한 부산시 교육청, 당장 내년에 초등 43학급을 감축할 제주도 교육청, 앞으로 교사감원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 강원도 교육청, 그리고 급격한 신규교사 임용 축소가 예측되는 영남지역까지. 연일 들려오는 나쁜 소식에 예비교사들과 교원단체들은 대응방안을 모색하며 8~9월을 보냈다.

학급총량제 도입에 따른 지역의 저항, 비판도 만만치 않다. 특히 학급총량제로 교원감축, 상치교사 증가, 소규모학교 통폐합이 벌어질 일부 도에서는 도교육청과 지역 언론, 교원단체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현재 계획대로라면 지역교육이 희생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잔치는 끝났다’며 오늘의 위기에 대해 합의했다.


○ 임계를 만나다.

잔치는 끝났으되, 여전히 잔치인줄 아는 사람들도 간혹 있는가 보다. 디지털 문명의 진화로 수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지만, 사람들은 카더라 통신이나 유언비어, 부정확한 정보를 더 신뢰하기도 한다. 필자는 사람들이 임계에 달했으나, 임계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현재의 위기가 구조적 위기가 아니라, 일시적인 현상이기 바라는 것은 어쩌면 사람의 당연한 심리일 것이다.

하지만 교원양성임용의 위기가 임계에 달했음은 지난 몇 년 동안 교육운동 진영에서 분석 주장했던 부분이다. 새판짜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새판짜기가 학급총량제일 수는 없다. 과잉양성, 교대 통폐합도 대안이 아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과거에 집착하고 있다. 새판짤 역량도, 새판짜기의 필요성도 못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필자는 이번 사태를 맞으며 새판짜기의 필요성을 예비교사들이 인식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어차피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기존 상황에 대한 기대도 사라질 수밖에 없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저절로 임계를 인식하지는 않을 터. 페다고지 측에서 좀 더 활발한 노력으로 오늘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려나갔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 남들은 다 아는데, 예비교사만 모르는 위기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교육단체, 언론은 다 아는데 예비교사들만 현재의 위기에 대해 둔감한 것 같다는 점이다. 원래 이런 사안은 당사자들이 급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예비교사들은 ‘매년 나오는 집회, 올해도 하는 것 아니냐’는 식이다. 그 동안의 관성적이었던 교원양성임용투쟁, 상대적으로 임용이 잘 되었던 것 때문인지 위기를 체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실제로 올해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태반인 것 같다.

특히 교대 4학년들의 경우 미발령 교대 특별편입생에 대한 과도한 판단 때문인지 ‘학급총량제’의 위험성을 경시하는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학급총량제’는 작지도, 약하지도, 쉽게 철회되지도 않을 정책이다. 학급총량제는 교육부가 몇 년(어쩌면 몇 십 년)을 내다보고 추진하는 핵심정책이다. 또한 학급총량제는 교육재정, 구조조정, 각종 교원정책이 걸려있는 복잡한 정책이다. 가을에 한반도를 내습하는 태풍 정도의 위력이라고나 할까.


○ 예비교사여, 잔치는 끝났다.

강조하지만 이제 잔치는 끝났다. 이제부터 첩첩산중의 어려움을 뚫고 나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각 단체들은 단체별 사안이 너무 많아 이 사안이 깊이 어필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잔치가 끝났음을, 00일보가 주장하듯 ‘좋은 시절’이 갔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다. 그러나 위기 징후를 감지한 소수의 사람들도 있다. 총궐기를 조직할 때까지, 이들은 분명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예상하건대, 이 사태를 풀어나갈 핵심에는 예비교사의 역량이 99% 차지할 것이다. 교원단체도 있고, 각종 연대단체와 대학생단체도 관심을 기울이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비교사들이 고립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일 뿐이다. 교원단체들도 현안으로 인하여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분명한 현실이다. 그래서 예비교사 운동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판단된다.

듣자하니 교대에서는 동맹휴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과잉양성에 힘들어하던 사대는 아마 이 사안으로 동맹휴업까지 가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과 차원에서 교사가 양성되는 유아교육과나 특수교육과 역시 사안의 심각성을 이해한다고 해도 대규모 저항으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도 분명 투쟁의 고리는 존재한다. 그 고리를 찾는 것에서 올 하반기 교원양성임용투쟁의 승패는 판가름날 듯하다.

 

 

2006년 9월호(통권 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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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3불 정책 논란과 한미FTA의 닮은꼴 구조

3불정책 논란과

한미FTA의 닮은꼴 구조

 

 

하재근/ 학벌없는 사회 사무처장

 

3불정책은 대학입시에 대한 국가의 규제다. 이것을 폐기하라는 것은 대학입시를 자유화하라는 소리다. 여기서의 자유화는 시장화를 의미한다. 각 개별주체의 이익극대화와 선택의 자유를 국가가 제한하지 말하는 것이다. 한미FTA도 개별 경제주체들의 이익극대화와 선택의 자유를 확대하는 시장화 정책이다. 그러므로 3불정책 폐기 주장과 한미FTA는 본질적으로 그 사고방식이 같다.

한미FTA는 서비스업에 개방과 자유화라는 충격을 줘서 구조조정을 촉발하고, 소비자의 선택권을 넓혀 소비자에게 이익을 주겠다는 정책이다. 3불정책 폐지라는 충격파는 교육서비스업에 충격을 줘서 구조조정을 촉발하고, 소비자의 선택권을 넓힐 것이다.

한미FTA 추진측은 구조조정으로 경쟁력이 향상될 거라고 한다. 3불정책을 없애자는 이른바 일류대들은 3불정책 폐지로 대학경쟁력이 살아날 거라고 한다. 자유시장에서의 자유선택이 촉발하는 무한경쟁이 경쟁력을 향상시켜줄 것이라는 논리다.

무한경쟁은 국가의 규제상태에선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급자(투자자)의 자유로운 경영권과 소비자의 자유로운 선택권이 보장될 때에만 무한경쟁이 가능해진다. 무한경쟁이야말로 경쟁력 향상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시장화 세력은 자유화와 소비자 선택권 확대를 만사형통의 주문으로 여기게 된다.

한국 교육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건 세상이 다 안다. 문제의식은 공유할 수 있으되 그 해법은 제각각이다. 시장화 세력은 자유화와 소비자 선택권 확대로 이 문제를 풀자고 한다. 국가의 규제로부터 교육을 시장에 ‘개방’하자는 것이다.

한미FTA에서 교육부분은 일단 유보되었지만, 이것은 우리 정부가 ‘지켜낸’ 것이 아니라 ‘얻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서비스업 부분 협상 결과에 불만이 있다고 했다. 우리 정부의 목표는 고등교육서비스 개방이었는데 미국 자본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결과다. 현재로선 그들이 구태여 한국에 들어오지 않아도 한국인들을 상대로 교육장사를 하는데 별반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등교육을 개방하려는 정부가 3불정책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알려지는 상황은 기괴하다. 개방의 충격파는 곧 3불정책에겐 쓰나미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미 지금도 3불정책은 쓰나미를 맞고 있다. 개방, 자유화가 정책기조이므로 대학이 사실상 본고사를 보고, 사실상 고교등급제 시행에 정부가 제동을 걸지 않기 때문이다.

 

▲ 각 대학들의 3불정책 폐지 주장에 김신일 교육부총리(사진)까지 나서서 반론을 폈다. 그러나 이 주장이 얼마만큼의 진실성을 갖는 것일까?

 

논술가이드라인이 있다는 것은 논술가이드라인만 지킨다면 본고사를 보란 얘기다. 대학들은 어떤 식으로든 특목고생들에게 특혜를 주고 있다. 고교등급제도 절반은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즉, 현재 3불정책은 절반쯤 무너진 상태다. 개방, 자유화 정책기조와 3불정책이 충돌하므로 당연한 귀결이다.

 

90년대 개방, 자유화 기조 이후 민생이 파탄 나는 사이 교육도 파탄이 났다. 이것이 개방의 결과다. 흔히 개방하면 외국에 대한 개방만을 생각하는데, 개방의 또 다른 의미는 ‘국가에 의해 보호되어 왔던 영역이 시장에 개방됨’이다. 한미FTA는 강력한 시장개방 정책이다. 3불정책 폐지 주장은 이미 상당부분 개방된 한국 입시부문을 더욱 강력하게 시장개방하자는 주장이다. 양자는 이상동몽(異床同夢)이다.



■3불정책 폐지의 미래


본고사가 전면 허용되면 대학들은 저마다 어려운 문제를 내 일류학생을 뽑으려 무한경쟁에 돌입한다. 이 어려운 문제들은 껍데기만 남은 중등교육서비스부문에 외부 충격으로 작용한다. 이에 따라 중등교육서비스부문에도 보다 어려운 입시를 위한 무한경쟁이 촉발된다. 중등부문등급제(고교등급제)는 강력한 경쟁유인으로 작용한다. 사교육서비스부문에서도 보다 어려운 문제를 위해 급속한 혁신이 이루어진다.

외부충격과 자유경쟁은 중등교육서비스부문을 구조조정에 성공한 승자와 실패한 패자로 쪼갠다. 그 기준은 당연히 일류대 진학률이 될 것이다. 등급이 다른 학교들간에 평준화는 말이 안 된다. 고교평준화는 깨진다. 기존의 고교평준화란 국가규제 때문에 선택권을 제약당했던 소비자들은 확연히 갈린 고등학교의 성적표를 보며, 그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진열된 등급별 상품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선택권을 만끽하게 된다. 소비자 후생이 증대된다.

한미FTA 추진자들은 한미FTA로 한국 경제의 비효율성이 줄어드는 구조조정이 일어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자유화 경쟁은 비효율성을 급격히 줄이는 경향이 있다. 3불정책 폐지로 확대되는 교육자유화 속에서 한국 교육의 비효율성은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즉 일류대 진학률과 상관없는 불필요한 교육은 모두 버려지게 되는 것이다. 불필요한 교육을 고집하는 학교는 고교등급 하락이라는 준엄한 심판을 맞는다. 존엄한 인간이나 창조

적인 인재를 만드는 것같은 비효율성은 폐기되고, 일류대 진학률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중등교육의 생산성이 향상된다. 교단의 비효율성인 일반 교사는 폐기되고 비정규직 입시강사나 입시강사형 교사들이 점점 늘어나게 된다.

 

▲서울대 등 몇몇 대학들의 3불제 폐지 시도에 여기저기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일류대에 들어갈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므로 학교 입장에선 생산성을 저해하는 비효율성이 된다. 평균 깎아먹는 아이들을 배제해야 무한경쟁에서 승리해 등급이 올라간다. 학교는 가난한 집 아이를 기피하는 경쟁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혁신의 승자가 상위 등급 학교로서 중상층 자녀를 독식하게 된다. 일류대 입장에서도 가난한 집 아이들은 비효율성으로서 기피대상이다. 3불정책 폐지를 통해 중상층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일류고에서 일류대로 넘겨지고, 일류고-일류대를 잇는 엘리트 트랙에서 비효율성은 완벽히 제거된다.

 

지방대, 삼류대들은 3불정책이 있건 없건 아무 상관이 없다. 3불정책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건 소수 일류대와, 특목고, 자사고들, 그리고 그것을 선택하려고 하는 중상층 소비자들이다. 3불정책 폐지는 그들에 대한 교육차별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만의 성을 쌓을 수 있게 된다. 개방 자유화로 증대된다는 소비자 후생의 진정한 수혜자는 결국 부자들뿐인 것처럼 교육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

진다. 

가난한 사람들은 고교평준화 시절에는 누리지 못했던 삼류고등학교를 선택할 권한을 만끽하게 된다. 과거에 그들에겐 삼류대학을 선택할 자율권만이 주어졌었으나, 본고사와 고교등급제는 삼류고등학교를 선택할 자율권, 삼류 사교육을 선택할 자율권까지 지금보다 더욱 큰 폭으로 안겨주게 된다.

한미FTA 소비자 후생 증대 논리에는 저렴한 수입품으로 인해 일반 국민의 소비수준이 나아진다는 것도 있으나, 교육자유화 공간에서 나올 저렴한 교육 트랙엔 박탈감을 제외한 그 어떤 만족감도 없기 때문에 한미FTA보다 교육자유화가 더욱 악랄하다. 그러나, 저렴한 수입품은 결국 국내 기업 붕괴나 혹은 국내 노동자 저임금화로 귀결되어 모든 국민의 삶의 질을 박탈하고, 저렴한 교육 트랙은 그 국민의 자식들의 미래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결국 초록은 동색이다.


한미FTA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처럼, 3불정책 폐지의 교육자유화는 교육격차를 심화한다. 본고사로 팽창될 사교육에 의해 국가는 내부분단 상태가 된다. 고교등급제로 일류고 선택경쟁이 격화됨에 따라 초중등 사교육이 팽창하고, 조기 유학이 급증한다. 내부분단이 심화된다. 기여입학제는 워낙 노골적인 것이어서 달리 설명이 필요 없다.


■자유화 정책 기조를 전복해야


정부는 말로는 3불정책 지킨다면서 실제로는 자유, 개방을 정책기조로 삼고 있다. 대학이 3불정책을 어기면 처벌하면 그만이다. 처벌하지 않는 이유는 정책기조가 자유화에 있기 때문이다. 3불이 문제가 아니라 개방, 자유화 기조를 전복해야 한다. 이 기조가 있는 한 기득권 세력의 발호는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 때문이다.

한미FTA는 산업정책의 차원에선 외부에 대한 개방이 문제이지만, 공공성 차원에선 시장에 대한 개방이 문제가 된다. 정부는 이 두 가지 개방 원칙을 90년대 이래 견지해왔다. 서비스업 부문을 시장에 개방하기 위해선 국내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저항을 뚫어야 하는데(예컨대 전교조), 외부에 대한 개방은 그 전선을 손쉽게 돌파하게 만든다. 이것이 이른바 외부발 충격이다.

이런 식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지켜져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부정책기조 안에 이미 그것이 폐기될 가능성까지 내포되어 있는 3불정책이란 것 하나 가지고 일류대란 기득권세력과 대립하는 모양새를 연출하는 한국 정부. 이미 수많은 것을 얻고도 3불정책의 명시적 폐기를 통해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짜내겠다는 기득권세력은 뻔뻔하고, 3불정책 하나로 이른바 ‘서민의 편’이라는 정부의 이미지가 유지되는 한국 사회 여론지형은 기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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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토플대란, 영어 광풍의 끝은 어디인가?

 

토플대란,

영어 광풍의 끝은 어디인가?

 

 || 투데이 편집부 (pedalove21@hanmail.net)

 

 

이미 예고된 ‘토플대란’

한국사회에서 대학 입시를 준비하거나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면 필수적으로 영어공부에 매달려야 한다. 영어 능력만을 심사기준으로 삼아 학생을 선발하는 대학 입시전형이 있는가하면 대다수의 기업에서는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영어 점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점차 토플 토익 시험에 응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 연령대도 낮아지면서 지난 4월에는 급기야 ‘토플대란’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이런 ‘대란’은 이미 예고되고 있었다고 보는 의견이 많은데 전 세계 토플시험 응시자 54만 명 가운데 한국 응시생은 13만 명(20%)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고 이런 수요를 따라잡지 못한 결과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ETS’나 ‘광클’ 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뉴스를 통해서 한번 씩은 들어보게 되는 웃지 못 할 사태가 벌어지고 토플 출제 주관사인 ETS의 수석부사장이 한국에 찾아와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제시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사실 토플은 비영어권에 있는 학생들이 영어권 대학의 입시를 위해 활용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응시생들이 13만명에 육박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기이한 현상이다. 그러나 그 이유를 뜯어보면 외국 유학을 위해 시험을 보는 대학생들보다 국내 특목고와 대학 입학을 위해 시험을 준비하는 중 고등학생들이 늘어났고 국내 응시생 전체의 70%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에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심지어 인근의 다른 나라에 ‘원정’가서 시험을 보는 일도 생기고, 프리미엄을 붙여 응시 권을 매매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시중에는 이런 토플 교재가 수도 없이 출간되어 있다.


토플대란은 시작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토플시험을 주관하는 단체가 ETS인지 잘 모르고 있었고 게다가 사설 기업이라는 것에 놀랐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 해 토플시험 응시자가 13만 명이고 한해 195억원이 ETS에 지출된다고 하니 정말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처럼 유망한 교육시장에 기업들이 눈독들이지 않을리 만무하다. 이미 한국에서도 SAT를 응시할 수 있으며 이것 말고도 다양한 서비스를 마련해 점차 시장을 확대하려 할 것이다. 게다가 일부 대학에서는 외고출신 학생들이나 외국에 체류하던 학생들을 받겠다는 명목으로 SAT를 입학전형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대학입시 전형의 극히 일부에 반영된 토플이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킬 정도인데 앞으로 대학입시에 점차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사설 기업의 영향력이 확대된다면 그것은 토플대란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정부에서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데 있다. 게다가 한미 FTA협정이 체결된다면 오히려 규제하려고 하는 한국정부를 ‘간접수용’과 ‘이행의무부과금지’등의 조항을 근거로 국제투자분쟁조정센터에 제소할 것이기 때문에 대학입시정책이 무력화될 것이다. 토플대란이 토플대란만의 일이 아니고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교육을 돈벌이로 여기는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이 문제

교육이 대학입시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기형적인 상황에서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사설 민간업체들이 난립하고 이것을 규제할 방법이 없어진다면 교육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가 두려워질 정도이다. 비싼 사교육비와 테스팅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특정 계급의 자녀들만이 고급의 교육을 받고 대학에 진학해 지식을 독점하게 될 것이다. 이미 교육 양극화가 극심해져하는 상황인데 이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교육의 공공성은 파괴될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지속적으로 교육비를 개인들에게 전가하려 하고 있고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을 강화하면서 교육의 시장화를 촉진시키고 있다. 그리고 교육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게 전 사회를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하려하고 있으며 그 총화판인 FTA를 체결하기 위해서 발 벗고 나서고 있음에 분노를 금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토플대란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여기거나 근시안적인 해결책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흐름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맞설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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