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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나의 삶, 나의 길 1부 : 가르치는 삶, 그 행복한 나날들(장혜옥/ 전 전교조 위원장)

[특집: 나의 삶, 나의 길] 1부 

가르치는 삶, 그 행복한 나날들

 

 

장혜옥/ 전 전교조 위원장

 

“쌤~~~” 경상도 아이들은 ‘선생님’을 이리 정겹게 부른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부름이지만마음은 늘 부끄러웠다. 어서어서 서른 살이 되길 기다렸다. 적어도 서른 살쯤 나이를 먹으면 내 또래로 보이는 여고생들에게 넉넉히 ‘선생님’으로 대할 수 있을 듯 했다. 23살 어린 나이에 만난 고3 학생들에게 나는 ‘서울내기’ 친구였다. 그렇게 아이들과 친구처럼 어울려, ‘광주’로부터 민주화 운동의 세례를 받아들인 두려움을 숨기며, 20대 젊음을 부끄러움으로 보냈다. 아이들과 헤어지기에 토요병이 생겼고, 월요일 아침엔 설레임으로 늘 가슴이 두근거렸다. 10년의 세월, 친구 같은 애정을 지식 수업에 쏟았다. 그 무렵 내가 아이들보다 더 낫게 잘하는 것은 국어 지식 밖에 없었으므로....


30살이 되는 생일날, 아이들은 생일을 맞은 담임 한 명을 위해 42명이 연출한 깜짝무대를 꾸며주었다. 노래, 춤, 연극, 개그, 낭송 등 화려하게 펼쳐진 42개 장면에 감동하며 드디어 당당한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아이들이 부르면 “오냐! 왜?”라고 넉넉히 답할 수 있는...


교사로서 스스로의 지위는 인정할 수 있었지만, 30대는 시대 고통에서 빚어지는 달뜬 열정으로 흔들리는 나날이었다. 때때로 열사들의 죽음이 온 나라를 흔들 때에도 고작 검은 리본 하나 달고 수업하는 것으로 슬픔을 달래야만 했다.


경상도 안동 지역에서 관습과 일상생활로 뿌리내린 가부장제 의식도 고통이었다. 학급에는 말자, 말숙, 끝숙, 남숙, 남희, 후남, 후자 등 ‘남자를 기대하는’이름들이 즐비했고, 자랑스럽고 능력 높은 여학생들이 오빠와 남동생의 학업을 위해 삶을 포기하는 건 당연했으며, “여자가 왜 대학을 가?” 라며 의아스럽다는 듯 말하는 학부모조차 많았다. 경상도 땅에서 만난 ‘나의 남자’들도 그 기세가 일반이어서 ‘연애’는 번번히 무위로 돌아갔다.

변화가 필요할 즈음, 여중생들을 만났다. 전혀 새로운 신기한 경험이 나날을 행복하게도 두렵게도 했다. 여중생들은 너무도 달랐다. 순수 그 자체인, 정말 막 피어난 꽃봉오리 같은 그 아이들 때문에 열병에 걸리는 듯 했다. 교사가 마음먹기 따라 그 존재 자체가 변화할 수 있는 백지 상태! 빨간 색을 칠하면 모두 붉은 꽃이 되고, 파란색을 칠하면 모두 푸른 하늘이 되는, 웃음이 명랑한 아이들 앞에서 내 철학과 의지, 태도와 가치관 모든 것을 스스로 점검하였다. 진실로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하게 했다.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사소한 것이 되었다. 교사는 인간으로서 표상이어야 하고, 나침반이어야 하고, 무엇보다 지도자여야 했다. 그냥 진도 나가는 것이 아니라 수업 내용을 취사선택하여 큰 그림을 그리고, 아이들 개개인이 그 그림 속에서 어떻게 자기 길을 찾는지 안내 할 수 있어야 했다.


수업 시간 내내 연예인 사진에 심취해 있어 그 사진을 지휘봉으로 지적하자, 자신을 모욕했다며 대성통곡하는 그 마음에 사과했다. ‘모진 말’을 했다고 1년 내내 엎드려 있는 아이를 1년 내내 참아주며 화해했다. 일진으로서 친구를 하녀처럼 부려먹는 아이를 체벌로 다스리려한 용렬함은 고통스러웠고, 상담을 정성껏 한 아이에게 공개적으로 욕설을 들어야 했던 기억은 참담했다. 고교 입시가 있던 시절, 전교 1등에서 30등까지 도서실에 모아 온갖 이벤트로 입시 지도를 도맡았던 ‘능력’은 더욱 참담한 이력으로 남았다.


그렇지만 여중생을 가르친 2년, 나는 이문세의 노래를 같이 부르며, 달마다 학급 행사를 하고, 날마다 특별 학습 지도를 하면서, 눈 감고 눈 뜰 때마다 아이들의 얼굴을 삼삼하게 떠올리면서, 열병에 걸린 듯 지난 10년과는 다른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숨어서 특별한 모임도 했다. 민주화의 바람은 안동 땅 곳곳을 흔들었고, 낯선 사람들과 몰래 모여 불법 도서나 영상물을 돌려 보는 시간들이 긴박하게 흘러갔다. 작은 물결들이 거대한 강물로 흐를 날을 기다리며 숨죽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다시 시작한 학교에서 만난 남자 고등학생들은 별천지였다.


나보다 훨씬 큰 아이들은, 원피스 허리선을 슬쩍 만지며 때론 나를 여자로 대하기도 하고, 안동 특유의 가부장제 의식으로 하찮게 여기는 기색도 보였다. 60여명 남교사 중에 3명의 여교사, 그것도 학교 역사상 첫 담임 여교사라니.... 무엇보다 실력으로 승부를 봐야 했다. 실력을 과시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지도안이나 메모 없이 완벽 수업하기, 영어나 한자를 거침없이 많이 판서하기, 질문을 많이 해서 겁주기 등 졸렬해졌다. 아이들은 환호했다. 웃으면서 수업하고 존댓말을 쓰는 선생님을 처음 봤다고, 체벌 없는 수업도 처음이라고, 대화하는 수업도 처음이고, 아이들 자리 속으로 들어가 참견해주는 수업, 시를 외우고 노래를 하는 수업도 처음이라고 좋아했다. 교사로서 자신감은 더욱 커져 거침없이 사회의식을 가르치는데 까지 나아갔다. 광주의 영혼들이 담긴 사진을 게시하고, 김남주의 시를 해설했다. 저항하는 아이를 칭송하고, 비판하고 문제 제기하면 더욱 이뻐했다. 그러나 학교는 입시 교육의 늪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수능이 생기고 야간 자율학습, 보충수업이 전면화 되었다. 오직 공부, 오직 서열, 오직 일류대학이 생존 목표가 되어가고 자살하는 아이들이 생겨났다.


우리 교사들은 참교육을 하고 싶었다. 민주와 인간을, 통일과 평화를, 평등한 사회를 가르치고 싶었고 교사 스스로 주체가 되고 싶었다. 사회 민주화의 열기는 꿈틀거리며 교육 속으로 파고 들어와 교사들을 들끓게 했다. 교사협의회를 조직하고 학교민주화를 진척시켰지만 한계가 있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로 조직을 전환했고, 끝내 1500여명이 해직되었다.


나는 해직이 기뻤다. 민주화운동 속에서 체포, 구금, 고문, 죽임을 당한 열사들에게서 최소한의 부채를 나눠짊어졌다는 고마움 때문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연좌농성, 수업 거부 등으로 맞서주었고 전체 조회를 열어 장엄하게 배웅해 주었다.


14년 동안, 단 한 번도 지겹거나 지루한 적도 없었던 그 행복하기만 했던 교실을 떠나야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삶의 한 축이었던, 결혼을 전제로 한 연애도 끝내기로 했다.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세우는 것이 더 소중해졌기 때문에... ‘사랑’은 대상의 제한 없이 무한을 향해가는 무한의 에너지이기 때문에....

 

(사진출처 : 교육희망, 2006년 9월 10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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