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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서평 - 지하생활자의 수기(김정훈/ 고려대 국어교육과 06)

[서평] 지하생활자의 수기

 

김정훈/ 고려대 국어교육과 06, 독자

 

 


내가 어느 정도로 도스도예프스키에 미쳐 있는지 이쯤되면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은 책을 읽은 것은 아니라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소설'에 있어서 이 작가보다 나에게 더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아직 없었고 이후로도 없을 것 같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에서는 지하 생활자의 사상이 나오고, 2부에서는 그런 사상이 확립되기 전까지의 그의 비참한 생애가 나온다. 2부를 통해서 1부를 돌아보며, 1부를 통해 2부를 해석하는 이중의 재미가 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문학 분석의 능력이 부족해서인지 1부만 보아도 충분하지 않나 싶다.


여기서 '지하'란 '궁전'과 대비되는 의미다. 궁전이 인간의 이성의 발전의 산물이며 절대선으로서 아름다움을 지닌, 진=선=미가 결합된 근대의 이성과 그에 따른 정상성을 상징한다면, 지하란 비이성적인 제반 모든 것으로서의 비정상성을 상징한다. 즉, 지하 생활자는 이성이 진리이며 법칙이므로 인간이 이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정언적 명제를 과감히 거부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매우 복잡한 존재이므로 이성이 인간에게서 차지하는 것은 지극히 미미한 부분이며 그것만으로 인간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에 따른 객관적 법칙 - 책에는 2X2=4로 예시가 되어 있다. - 따위는 모조리 무시되며,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과 감정이다. 그래서 지하 생활자는 인간의 삶을 규정화하고 이성의 법칙에 따라 발전시키려는 모든 시도들 - 대표적으로는 과학,사회주의 등등 - 을 부정한다. 지하 생활자에 눈에는, 사회주의란 이성에 의존한 절대적 법칙성에 따라 사회가 발전한다는 가정 하에 인간을 몰개성적이고 기계적인, 자유가 없는 노예적 존재로 만드는 '개미집' 따위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비판은 확실히 이성 절대주의라는 근대 철학의 장벽을 뛰어넘지 못한 맑스에게는 유효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놓여진 객관적 조건 하에서 주체적으로 상황을 인식하여 그를 자신의 필요에 맞게 변화시키려 한다. 이를 간단히 말하면 '자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유를 추구하려 하므로, 모든 인간이 자유를 누림에 있어서 가능한 한 덜 제한이 가해지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 법칙과 신의 대변인으로서의 이성에 근거한 '절대적 발전'은 없을지 몰라도, 인간의 필요에 근거한 '존재적 발전'은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바로 절대적 발전이 아니라 존재적 발전을 추구하는 운동이며, 이 필요성엔 도스도예프스키가 말한 인간의 여러 다양한 욕망들과 비이성적인 것들도 포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필요에 의한 자유는 아직 불완전하다. 여기에는 객관적 조건에 의한 자유의 제약 외에도,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점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적 제약 또한 있다. 모든 이는 경험해 온 물적 토대가 다르며, 이에 따라 물적 토대를 인식하는 방식 또한 다르다. 게다가 인간은 자신의 인식을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 따라서 개인 간의 필요의 자유가, 다른 말로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된다. 인식 공유의 불가능성은 인간이 타인에 의존할 수 없이 독립적으로만 세계를 인식하게 만드는 자유의 토대이기도 하지만,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보편적 의미의 자유를 이룰 수 없게 만드는 규제이기도 한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대' 혹은 '협력'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모든 이의 자유를 최대한도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자유의 실현을 위해 공동체로서 협력해 나가는 방식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물론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는 과도기적으로 '계약'이라는 체제를 사용하여 이것이 유일한 해결책인양 선전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사회 주체 간의 권력 관계가 불평등하며 자유 경쟁이 불가능한 조건이라면,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계약 따윈 존재할 수 없다. 계약이란 계약 당사자들의 입장이 동등할 때나 가능한 것인데, 사실상 자유 경쟁 상태는 절대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대와 협력을 통해서 이러한 권력 관계를 무효하고 모든 이가 실질적으로 평등한 지위를 획득한 가운데, 최대한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게 해야한다. 사회주의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이다.


만인이 행복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인간의 비합리성, 다른 말로는 인간에 대한 합리적 이해에 대한 어려움은 분명 고려되어야 하며, 개개인의 행복에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이런 것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파편화 되어 있었던 개인 간의 연대를 통해 가능한 한 많은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을 꿈꾸는 것이다. 공동체를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함으로써, 그리고 집단적 발전을 이룸으로써 인간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범위가 확대되는 것. 또한 그리하면서 개인에 대한 공동체에 의한 규제도 점점 소멸해 가는 것, 즉 개인의 복락을 추구하기 위한 공동의 규범을 점차적으로 최소화 해가는 것. 그것이 사회주의로 딱지 붙여진 사회 변혁 이론의 골자다. 이것은 도스도예프스키가 생각하는 개미집이 아니라 수정궁이다.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주체적 인간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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