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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데스크 칼럼

데스크Desk 칼럼Column




숨가쁜 레이스, 그러나...


연일 대선주자들의 행보가 스포츠 중계하듯이 보도되고 있는 가운데, 정말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실감이 나는 요즘입니다. 이명박은 대운하를 건설하겠다, 대한민국을 747비행기에 태워 경제성장을 이루겠다는 둥 호언정담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 여권이 새로 꾸리 좌판인 민주신당 경선에는 파리가 날릴 지경이고, 그러는 동안 ‘착한CEO’를 표방한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이 유력한 대선후보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는 신영복 선생이 써 주신 “사람이 희망이다”를 자신 있게 들어보이며, 사람중심 경제를 펼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의 신선한 이미지가 먹혀들어가는지, 네티즌들과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문국현에 대한 인기가 치솟고 있다고 합니다.



아, 그러나 이 지겨운 래퍼토리를 어찌하면 좋을까?


그런데 저는 왜 문국현 후보의 이런 캐치프레이즈를 들으면서 흘러간 유행가의 진부한 한 소절을 듣는 것처럼 어쩌면 이렇게 낯간지럽고 우스운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강조하는게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닐뿐더러, 그 속내도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21세기 지식기반사회를 선도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존 발전전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발전전략” 이라는 화려한 수사들은 이미 김영삼 정권에서 <5.31교육개혁안>을 내걸면서, 김대중 정권에서 <신지식인>이라는 담론을 만들어 내면서 해 왔던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는 사람중심경제라는 것은 또 다시 경제성장이라는 미명하에 그들이 착취 가능한 노동력을 잘 육성하고 포섭하기 위한 전략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멋진 “평생교육”이라는 말도 자본의 이윤추구를 위한 가용될 수 있는 노동력이 되도록 끊임없이 적응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지난 정권이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로 개명한 이후 벌여온 온갖 만행들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평생학습사회? 평생고통을 거부하는 적극적인 실천을 벌여내자!


지난 8월 16일, 대통령 산하 기구인 교육혁신위원회에서는 “학습사회 실현을 위한 <미래교육 비전과 전략(안)>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안은 지난 김영삼 정부가 95년에 발표한 5.31개혁안을 후속하는 것으로 신자유주의 교육개혁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낳고 있는 실정입니다. 스스로 평생학습사회를 만드는 것을 주요공약으로 내걸고 있는 문국현이나, 한반도 남녘땅을 토목국가, 개발지상국가로 만들기 위해 전국민동원체계를 만들려는 이명박에게 <미래교육 비전과 전략(안)>이 솔깃하게 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번 호 투데이는 그래서 <미래교육 비전과 전략(안)>에 대한 비판을 집중적으로 다뤘습니다. 평생학습사회를 추구하려는 위 안의 핵심적인 내용을 분석함은 물론, 이것이 향후 교원양성임용체계에 미칠 영향을 분석했습니다. 또한 이 교육혁신위의 안과 별 다를 것 없는 계획을 갖고 운동을 벌이고 있는 現전교조 본부의 <교육복지실현을 위한 범국민운동>을 비판하면서 신자유주의적 교육-복지 개혁의 모순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또한 현재 전국을 비정규직 투쟁으로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랜드 투쟁 참가 후기와 지난 여름에 예비교사운동모임 페다고지 주최로 진행된 “여름교육활동 <더불어 숲>”의 후기들도 담았습니다. 지난 호들에 비해서 분량이 많이 줄었지만, 대선을 앞두고 교육을 다시금 자본의 이윤추구에 맞게 재편하려는 이들의 시도를 분석하고 이에 맞서는 실천들을 고민하기 위한 단초들을 담는데 주력했습니다. 부디 미약한 투데이가 그 소중한 실천들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07. 09. 18.

투데이 편집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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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사진으로 다시 보는 여름교육활동 <더불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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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여름교육활동 '더불어 숲'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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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두 가지 '길들이기'(페다고지 칼럼)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길들이기’라는 말을 섣불리 썼다가는 봉변당하기 쉬울 것 같다. 하지만 길들이기도 뜻 나름이란 사실을 아는가? 사전에서는 길들이기를 ‘~일에 익숙해지다’라고 정의한다. 경상도 지역의 노인분들은 고어의 영향으로 ‘길’ 대신 ‘질’을 사용하여 ‘질들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길들이기’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대략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길들이기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익숙해지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길들이기’의 대명사는 뭐니 뭐니 해도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이다. 모 대학교 논술에 나왔다고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일제히 공부를 해야 했던 바로 그 텍스트다. 이 책에서 사막에서 만난 여우는 어린 왕장에게 ‘길들이기’의 의미를 말해준다. 영화 라디오스타에서 쌍팔년도 가수왕을 차지했지만 속된 말로 ‘한물 간 가수’ 최곤(박중훈)이 매니저 박민수(안성기)와 지란지교를 맺는 것 같이. 이런 점에서 길들이기는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것’, 곧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지구 반대 편에서는 또 다른 의미의 ‘길들이기’가 벌어진다.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에게 폭력과 억압으로 인한 공포를 내면화할 때, 우리는 그것을 ‘길들이기’라고 표현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맘에 들지 않으면 ‘죄가 있든 없든 박살낸다.’는 것을 보여줄 때, 우리는 이것을 ‘길들이기’라고 규정했다. 한국도 ‘길들이기’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다. 반세기 동안 미 헤게모니 하에서 한없이 착하고, 모범적인 나라가 되었으니.

한미FTA의 4대 선결조건으로 명성이 높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허용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K모 방송사의 문제아 이강택 PD가 사고를 쳤다. 감히 공장형 쇠고기 농장에서 생산(!)되는 미국산 쇠고기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파헤친 것이다. 한미FTA 앞두고 미국 정부가 미국축산자본의 이익을 대변하여 한국 정부를 길들이려 하는데, 이강택 PD는 딴지를 걸었다.


사실 이강택 PD는 초범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 이후 북미지역의 현실을 고발하더니, 그 직후에는 베네수엘라를 찾아 미국이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차베스를 취재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축산자본의 압력에 굴복하고 있는 모습을 고발하여 또 한 번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이렇게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들도 있나보다.


요즘 교육부가 하는 ‘길들이기’는 참 가관이다. 교육부는 예비교사들도 길을 들이려는 것 같다. 얼마 전 교육부에서 교대 총장들 만나서 학생들 반발 그만하게 대책 좀 세우라고 한 모양이다. 중장기 교원수급계획을 재검토하겠다고 달래는 걸 보면 어지간히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다. 주기적으로 터지는 교원양성임용 문제가 자신들의 잘못이라는 생각은 안하고, 그저 예비교사들이 길들여지지 않아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교육부는 이참에 아예 교원노조 위원장 선거에도 직접 개입한다. 교육부는 장혜옥 위원장 등 3팀이 출마한 전교조 선거에서, ‘장혜옥 후보는 (해직자이기 때문에)교사가 아니므로 조합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아예 전교조 위원장을 자신들이 임명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자신들이 전교조 선거관리위원회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 어이없는 일이 전교조 길들이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사람들은 싸우면서 미운정, 고운정이 든다는데 어찌 된 것이 교육부와 예비교사, 교육부와 교사간에는 별로 미운정, 고운정이 드는 것 같지 않다. ‘옛말에 틀린 것 하나도 없다.’는 말은 어쩌면 틀린 모양이다. 교육부의 ‘목 꼿꼿하게 세우고, 지지 않겠다고 까불어?’라는 식의 태도를 보면 부모님이 하시던 ‘나라에서 하는 일 반대하지 마라.’는 말이 통용되던 시대로의 회귀를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린 너무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다. 호랑이로 태어났으나, 오랜 세월 학교에서 길들여져 고양이로 자라왔다. 우리는 호랑이를 고양이라 착각하고, 고양이는 호랑이라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순응에 익숙해진 예비교사들이여 가끔 길들여지지 않아도 좋다. 체제에 순응하는 것이 길들여지는 것이라면, 길들여지는 것을 거부하자. 우리 안의 우애로운 관계를 맺는 그런 길들이기에 익숙해지자. 두 가지 길들이기, 상반되지만 무척 재미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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