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24호] 나의 삶, 나의 길 3부(장혜옥/ 전 전교조 위원장)

 

 

시작부터 투쟁이다. 인터뷰 기자들이 반드시 묻는다. 남은 임기 9개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라고.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이 짧기도 하겠지만 하루를 천년의 무게로 정성을 다하겠다고, 조직의 투쟁력을 복원해야 하고, 대선, 총선 국면의 정세 흐름에 따라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가슴이 벅차다고 답하며, 하루 15시간을 써도 모자라는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4대 현안(차등성과급 저지, 교원평가 저지, 사립학교법 재개정 저지, 7.5차 교육과정 저지)으로 시작된 신자유주의 정책 거부 투쟁은 표준수업시수 법제화, 해직교사 원상 회복, 학교자치와 교장선출보직제, 아이들 살리기 운동 등 대안 투쟁과 더불어 해일처럼 부풀어 올랐다. 5월 사업 승인을 위한 대의원대회가 끝나자마자 투쟁의 불꽃이 타올랐다. 


6월초, 교육부가 있는 정부종합청사 후문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지붕도 없이 바닥에 깔개 한 장 펴고 진행하는 농성은 55일 동안 이어졌다. 땡볕과 장마비, 매연과 관료들의 비아냥을 견디며, 그 자리에서 결재도 하고, 회의와 집행도 하고, 정책 개발도 하고, 연대 사업도 했다. 정부의 외면에 참다못해 단식투쟁도 했지만 물 한 모금도 넘기지 못해 9일 만에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러나 전교조 지부, 지회, 분회 등 계선 활동가들이 전국에서 올라와 따로 또 같이 농성에 참여하고 다양한 집회를 통해 정부를 압박했으며, 마침내 터진 한미FTA 저지 투쟁과 함께, 전교조의 투쟁력은 반신자유주의 최전선을 강고히 지켜나갔다.


무엇보다 차등성과급은, 교사의 임금 제도를 평가와 결합하여 성과급제와 연봉제로 바꾸기 위해 실시되는 전 단계 방안으로써 교사들의 분노를 들끓게 했다. 8만여 명이 성과급 반납에 동참하면서 투쟁력은 뜨거워지고, 언론의 쟁점 보도도 극한점을 내달렸다. 조중동은 연일 전교조를 질타했고 기존 자유주의 언론들도 기획보도, 심층보도들을 통해 어이없고 억울할 정도로 전교조를 압박했으며 전교조의 행사와 집회를 언론이 먼저 분석하고 해설했다. 조중동 언론이 내 별명을 탈레반으로 지어 부르며 강성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색깔론으로 위협하는 와중에도 ‘참교육’을 지키기 위해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의 핵심은 ‘교원노동의 유연화(고용, 임금, 노동의 유연화)’이다. 그러기 위해 학교도 학급도 교사도 줄여야 하고, 줄이기 위한 명분으로 시험과 서열 즉 평가 경쟁은 강화해야 하고, 결국은 최소의 재정으로 최대 교육 효율을 내야 하므로 학교도 시장판으로 몰아가려는 것이다. 교육은 철저히 경제 논리에 매몰되었다. ‘이익을 극대화하는 교육’에 많은 학부모들도 찬성하면서 전교조가 고립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조직 내부에서 터져 나왔지만,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을 꿈꾸는 교사의 자존을 버릴 수는 없었다.    


8-10월 지부별 연수와 지회 분회 등을 찾아 전국 대장정을 벌이며 입장의 동일함과 투쟁력의 연속성을 지켜가려 애썼다. 따뜻하게 맞이하고 힘을 북돋아주는 동지들을 전국에서 만나며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우리 전교조가 앞장 서 지켜가자고 호소했고, 11월 ‘연가 투쟁’을 결의했다. 합법적이고 당연한 권리 행사인 ‘연가 투쟁’이건만, 불법 논쟁 속에 대단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노동3권 중 행동권(파업권)이 없는 전교조가 결국 파업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으름장을 놓으며 정부는 참여자 전원을 징계하겠다고 협박하고 언론은 침소봉대로 우리 투쟁을 폄하했다. 1년 만에 3명이나 바뀐 교육부 장관처럼, 교육부의 입장도 제멋대로 흔들렸고, 3번째 교육부장관은 제 치적을 세우듯 전교조를 적대시하며 징계의 칼날을 휘둘렀다. 더구나 2004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탄핵반대 선언을 한 사실을 들어 1,2심에서 국가공무원법 위반으로 경미하게 다루던 법정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대법원에서 파기 환송하더니 선거법으로 걸어 그예 해고 시켜 버렸다. 느닷없는 해고로 뒷통수를 맞았지만 투쟁은 거침없이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전교조 13대 선거를 치러야 했다. 동지들은 투쟁의 파고를 이어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다시 출마해야 한다고 뒤를 밀었고, 시작한 투쟁 마무리져야 한다는 책임감에 다시 후보로 나섰다. 해고 조합원이 위원장이 된다는 건 전교조 역사에서 큰 획을 긋는 일이다. 전교조의 정치력을 몇 단계 상승시킬 것이며, 조합원들의 강고한 정치력과 단결력에 정부 정책은 큰 타격을 받고 뒷걸음 칠 개연성이 대단히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조합원들은 바로 그 점을 힘들어 했다. 상대 후보들이 정부와 타협하고 합의하며 국민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세워보자고 호소하는데 마음들이 흔들렸다. 전교조 13대 집행부는 거리 투쟁을 하지 않겠다고 공약하며 들어섰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한나라당이 사활을 걸고 사립학교법을 개악하겠다고 덤벼들고 열린우리당이 마지못해 협조해 주는 마당을 투쟁 없이 비껴갈 수는 없었다. 다시 달마다 전국 집회가 잡히고 농성과 시위가 이어졌다.


나의 공식적인 직함은 ‘전교조 지도자문위원’이다. 위원장을 했던 경험과 의지를 살려 중앙 단위에서 할 일이 꽤 있을 거라 판단하고 있었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집행부는 경북지부에서 일하라고 공식 명령을 내렸다. 경북지부 연대사업국장을 맡았다. 사무실이 구미에 있어 내 집이 있는 풍기와는 1시간 30분-2시간 거리이지만 즐겁게 다니며 경북의 각 단체들과 소통과 연대를 활발히 이루기 위해 애쓰고 있다. 물론 하던 일들이 있어 다른 지역에도 주1회 이상 다니게 되니 교통비용이 엄청나다.

가장 역점을 두는 일은 ‘민중교육개편운동’이다. 많은 분들이 합의하고 연대하여 사회적 담론으로 만들어 가고자 하는 교육의 새로운 방향은 ‘교육의 공공성을 실현하기 위한 민중 교육 개편’이다. 입시 철폐와 대학 평준화, 무상교육 등이 가장 핵심 이슈가 될 것이고 그 외 행정에서 학교정책, 교육과정, 학제까지 두루 새로운 얼개를 짜고 있다. 연구원들이 주 1회 이상 모여 연구와 토론, 합의와 전망들을 내오고 있다. 2004년 범국민교육연대와 참교육연구소가 함께 만들었던 ‘공교육개편안’을 수정 보완하여 대선, 총선 시기에 사회적 담론으로 적극 제출하는 것으로써, 노동자 농민 서민 즉 민중을 위해 근본적인 교육 혁명이 일어날 수 있도록 불쏘시개를 만드는 일이다.

가능할까?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회의한다. 보수의 물결은 너무 강하고, 경쟁력 중심의 시장화 전략은 너무 압도적이고, 돈, 이익, 승리, 성공 신화는 너무 대세고, 10대 90의 사회는 너무 당연해서 벗어날 기미가 없는데 헛꿈 꾸는 것은 아닐까? 의기소침해 지기도 한다.

그러나 ‘옳다’고 판단한 길을 가는 것이 ‘운동’이다. 교육을 존재 근거로 하기에 ‘교육운동’의 길을 가며, 노동자가 존재 조건이기에 ‘교육노동운동’의 길을 간다. 교육이 참교육으로 가고, 노동이 진정한 해방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하여 가는 길! 죽음이 올 때까지 그 길에 있게 될 것이며 우리가 죽은 후에는 다른 이들이 또 그 길을 걸어갈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3호] 나의 삶, 나의 길 2부 : 새롭게, 또 새롭게 새로움은 나의 힘(장혜옥/ 전 전교조 위원장)

[특집 : 나의 삶, 나의 길] 2부

새롭게, 또 새롭게

새로움은 나의 힘

 

장혜옥/ 전 전교조 위원장

 

교실을 떠난 나의 하루는 어색하다. 햇살 가득한 거리에서 편한 자유를 즐기지만 그 시간들이 당황스럽다. 내 존재 조건 그 자체였던 교실을 이젠 세상으로 바꾸어야 했다. 안동에서 해직된 교사는 나 외에 6명, 그들과 함께 전교조의 실체를 만들어 가야 한다. 우리는 매일 학교 방문에 나섰다. 작은 차에 꼭 끼어 타고 경북 북부 산골 골골을 돌아다녔다. 전교조 신문과 선전지, 우리들의 말이 무기였다.

그 중 한 분은 울분으로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다. 그가 남긴 시를 읽으며 우린 매일 울었다. 착하고 아름다웠던 또 한 분은 산골 누추한 방에서 연탄가스중독사를 당했다. 배낭에 신문이며 선전지를 가득 담고 산골 학교를 누비던 그 맑은 눈망울이 서럽고 서러워, 최초의 전교조장으로 예를 갖춰 보내드렸다. 하늘에선 비를 뿌렸고 전국에서 모인 해직교사들도 목 놓아 울었다. 해직의 부당함을 외치며 집회, 농성, 시위하는 나날이 월례 행사로 이어졌고 그 때마다 닭장차에 끌려가고 유치장에 갇히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고, 기쁨이고, 위로였다. 그래서 우린 ‘동지’였고, 이름 뒤에 ‘선생님’ 대신 ‘동지’라 붙여 불렀다.


1년 동안 학교 방문을 하며 조합원을 일구고, 후원회원을 조직하는 일을 하며 안동 땅을 섭렵하고 나니 경북 전체는 어떨까? 궁금해졌다. 마침 권유도 있어, 경북 지부 정책실장을 맡게 되었다. 경북엔 101명의 해직교사가 대부분 활동하였으며 이미 18개의 지회가 사무실도 갖추고 있었다. 그 때 경북 지부 사무실은 동대구역 근처여서 안동에서 동대구까지 기차로 통근했다. 왕복 4시간의 통근 시간은 고마운 독서 시간이다. 정책실장이란 직책의 엄중함 때문에 독서를 엄청나게 했다. 하루 2-5권은 읽었으니 웬만한 사회과학 책은 그 때 다 읽은 셈이다. 덕분에 눈이 몹시 나빠져 그 해 이후론 차에서 책 읽는 일은 되도록 안 한다. 특별한 학습 소모임도 여럿 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 공부하고 헤어지는 일도 많았다. 도대체 왜 전교조에 가입했다고 해직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독서와 학습은 하루 10시간씩 투자해도 모자라는 온전한 열망이었다. 경북의 여러 지회를 다니며 만나는 동지들은 사람에 대한 신뢰의 아름다움을 알게 해준 새로운 힘이었다. 


1년이 지나니 이젠 전체가 궁금해졌다. 전교조는 전국 조직인데 전국은 어떨까? 원하면 통한다던가! 마침 경북 출신의 위원장께서 본부 활동을 권유하여, 본부가 있는 서울로 자리를 옮겼다. 교육선전국원이 되어 어렵기만(?) 한 286 컴퓨터와 씨름하며 실무를 하면서도, 전교조를 키워나가는 훌륭한 지도 동지들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큰 자부심이었다. 본부에서 일하는 100여명의 동지들은 나이를 떠나 내겐 모두 선배였고 스승이었다. 정책 지향을 뚜렷이 달리하는 두 그룹이 함께 이룬 통합 집행부여서 더 배울 것이 많았다.

서울 생활의 또 다른 의미는, 독립 선언을 하고 부모님 곁을 떠난 지 16년 만에, 다시 부모님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키워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단식 농성하던 명동 성당까지 찾아오셔 해직의 과정을 따뜻한 긍정으로 받아들여 주신 아버지와 바깥으로 나도는 딸에게 단 한 번도 비난 말씀을 안 하시고 무조건 신뢰해 주신 어머니에게 감사드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본부 해직 교사 중 뜻밖에 ‘지음지기(知音知己)’를 만나, 젠더 마인드 친구로서 인생의 큰 조언자를 얻게 된 것은 하늘의 선물이었다. 이후 우리 마음 맞는 비혼들은 명절이며 휴가 때에 더불어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 확대 가족의 기쁨을 이어가고 있다. 

처음으로 술도 배웠다. 격렬한 논쟁이 수시로 터졌고, 으레 술자리로 이어졌다. 맥주 1잔으로 시작한 술이 소주 2-3병으로 1년 만에 급성장할 만큼 나는 매일 격렬했다. 그 와중에 여성 동지들과 멘토링을 갖게 된 것은 여성주의 인식을 실천에 옮기는 소중한 과정이었다.

이렇게 날마다 새로운 격정으로 채워가는 1년이 끝날 무렵, 옆집에서 난 불이 옮겨 붙으며 우리 집을 몽땅 태워버렸다. 부모님의 70 평생 재산이 잿더미가 되었고 아울러 내가 가지고 있었던 럭셔리 취향의 모든 것들도 다 사라졌다. 깨끗해졌다. 친구가 사 준 골덴바지와 스웨터 두 벌로 겨울을 나면서 오히려 가벼워진 새로움을 느꼈다. 아버지 병은 깊어지셨고 쓸쓸히 돌아가신 후에야 복직이 되었다.


영주는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되었다. 소백산의 깊은 아름다움과 순후한 풍경, 따뜻한 농촌의 정겨움은 곧 운명 같은 존재의 땅이 되었다. 호주 독립을 하고 호적도 옮겼다. 이제 공문서 상 완전히 독립했고, 영주 ‘풍기 사람’이 되었다. 1학급짜리 작은 학교 아이들은 그냥 ‘꽃’이었다. 그 꽃밭에 어우러져 나도 꽃이 되었고, 아이들 사랑만으로 넘치는 나날을 보냈다.

지부 대의원, 전국 대의원 등을 계속하면서 조직의 의결 구조를 배우고 지회 운영 활동을 하면서 전교조 합법화를 맞이했다. 10년, 눈물겨운 투쟁의 역사적 산물이었다.

다시 인문계 여고로 전근하면서 ‘투쟁할 꺼리’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7차 교육과정이 문제였다. 수준별, 선택형 교육과정은 무한 경쟁의 고리였고 비현실적인 정책들이 교사를 억압했다. 경북지부 ‘7차 교육과정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민주화 정부 교육개혁’의 허상에 저항하는 일선에 서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시장 만능주의’ 정책들이 어떻게 교육과 인간을 유린하는지 공부하고, 교사들에게 알려 나가면서 밀려들어오는 교원정책(성과급 제도 등)들과 맞서며 투쟁의 의지가 높아졌다. 그 사이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남겨준 재산 때문에 형제들끼리 작은 다툼도 생겨 가족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전교조와 만나지 14년, 늘 새롭게 새롭게 배우며 변화해 가는 세월 끝에 이제 권한과 책임을 지는 선출직에 나섰다. 영주 지회장은 나의 첫 선출 ‘관직(?)’으로서 일선 조직의 책무를 감당하는 중대한 지위였다. 겸손할 것과 정성을 다할 것, 사람을 귀히 여길 것을 다짐하며 겨우 1년을 감당했는데, 전교조 10대 수석부위원장 선출직에 나설 것을 제의 받았다. 추천해 주신 동지들이 고마워 겁 없이 나섰고 당선되어 다시 서울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서울, 본부에서 책임과 권한을 갖고 투쟁 일선에 선다는 것은 엄격한 각오를 가져야 했다. 끊임없는 독서와 미디어 읽기, 투쟁 전선을 열성으로 지켜가는 것은 절대 임무였다. 기간제 여교사에게 차 심부름을 시킨 교장의 횡포에 저항하다 터진 일명 ‘보성초 사건’으로 이데올로기 폭력을 당하며 시작한 집행부 활동은, 학생 정보 인권을 인터넷에서 유통하려는 ‘네이스(NEIS, 학생정보시스템)’를 교육부가 밀어붙이는데 저항하면서 2년간의 긴 투쟁으로 이어졌다. 긴 농성과 시위, 연가 투쟁이 있었고 공권력은 무섭게 억압하며 들어왔다. 우리 집안 5대 전체에 걸쳐 현재까지 유일하게 ‘법정에 서게 된 경험’은 무척 새로웠다. 

예년과 다른 언론의 관심 속에 여러 차례 미디어 토론에 참여하게 되었다. 미디어 5사(KBS, MBC, SBS, EBS, K-TV 등)에 2-3차례 나가고 각 라디오 방송사에 수없이 출연하면서 길거리에서도 알아보는 이가 생길 만큼 유명(?)해지기도 했다. 각종 타 조직의 지위를 맡게도 되었고, 중앙노동위원회 노동자위원 역할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을 나누는 소중한 경험으로 쌓여갔다.

네이스 투쟁은 9만 조합원 전원이 실천하며 전선에 서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대중들에게 고통스러웠다. 투쟁을 접자는 요구들이 분출했고, 탈퇴자들에게 명분이 되었다. 그 어려움 속에 11대 선거가 치러졌고, 경북 지부장으로 출마했지만 특히 네이스 투쟁을 어려워했던 경북 동지들은 내 열정을 외면했다. 부끄러운 참패를 대중의 명령으로 알고 돌아온 학교,  우리 아이들은 여전히 빛이고 꽃이었다. 아이들의 모든 일탈을 웃으며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게 되었고, 수업의 노하우는 스스로도 만족할 만큼 통합적이고 일관성이 녹아 있었다. 그러나, 동료들과 함께, 교사로서의 자부심이 겸손하게 소통되는 나날 속에 닥쳐온 정부의 ‘교원평가’ 정책은, 교사의 삶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1호] 나의 삶, 나의 길 1부 : 가르치는 삶, 그 행복한 나날들(장혜옥/ 전 전교조 위원장)

[특집: 나의 삶, 나의 길] 1부 

가르치는 삶, 그 행복한 나날들

 

 

장혜옥/ 전 전교조 위원장

 

“쌤~~~” 경상도 아이들은 ‘선생님’을 이리 정겹게 부른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부름이지만마음은 늘 부끄러웠다. 어서어서 서른 살이 되길 기다렸다. 적어도 서른 살쯤 나이를 먹으면 내 또래로 보이는 여고생들에게 넉넉히 ‘선생님’으로 대할 수 있을 듯 했다. 23살 어린 나이에 만난 고3 학생들에게 나는 ‘서울내기’ 친구였다. 그렇게 아이들과 친구처럼 어울려, ‘광주’로부터 민주화 운동의 세례를 받아들인 두려움을 숨기며, 20대 젊음을 부끄러움으로 보냈다. 아이들과 헤어지기에 토요병이 생겼고, 월요일 아침엔 설레임으로 늘 가슴이 두근거렸다. 10년의 세월, 친구 같은 애정을 지식 수업에 쏟았다. 그 무렵 내가 아이들보다 더 낫게 잘하는 것은 국어 지식 밖에 없었으므로....


30살이 되는 생일날, 아이들은 생일을 맞은 담임 한 명을 위해 42명이 연출한 깜짝무대를 꾸며주었다. 노래, 춤, 연극, 개그, 낭송 등 화려하게 펼쳐진 42개 장면에 감동하며 드디어 당당한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아이들이 부르면 “오냐! 왜?”라고 넉넉히 답할 수 있는...


교사로서 스스로의 지위는 인정할 수 있었지만, 30대는 시대 고통에서 빚어지는 달뜬 열정으로 흔들리는 나날이었다. 때때로 열사들의 죽음이 온 나라를 흔들 때에도 고작 검은 리본 하나 달고 수업하는 것으로 슬픔을 달래야만 했다.


경상도 안동 지역에서 관습과 일상생활로 뿌리내린 가부장제 의식도 고통이었다. 학급에는 말자, 말숙, 끝숙, 남숙, 남희, 후남, 후자 등 ‘남자를 기대하는’이름들이 즐비했고, 자랑스럽고 능력 높은 여학생들이 오빠와 남동생의 학업을 위해 삶을 포기하는 건 당연했으며, “여자가 왜 대학을 가?” 라며 의아스럽다는 듯 말하는 학부모조차 많았다. 경상도 땅에서 만난 ‘나의 남자’들도 그 기세가 일반이어서 ‘연애’는 번번히 무위로 돌아갔다.

변화가 필요할 즈음, 여중생들을 만났다. 전혀 새로운 신기한 경험이 나날을 행복하게도 두렵게도 했다. 여중생들은 너무도 달랐다. 순수 그 자체인, 정말 막 피어난 꽃봉오리 같은 그 아이들 때문에 열병에 걸리는 듯 했다. 교사가 마음먹기 따라 그 존재 자체가 변화할 수 있는 백지 상태! 빨간 색을 칠하면 모두 붉은 꽃이 되고, 파란색을 칠하면 모두 푸른 하늘이 되는, 웃음이 명랑한 아이들 앞에서 내 철학과 의지, 태도와 가치관 모든 것을 스스로 점검하였다. 진실로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하게 했다.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사소한 것이 되었다. 교사는 인간으로서 표상이어야 하고, 나침반이어야 하고, 무엇보다 지도자여야 했다. 그냥 진도 나가는 것이 아니라 수업 내용을 취사선택하여 큰 그림을 그리고, 아이들 개개인이 그 그림 속에서 어떻게 자기 길을 찾는지 안내 할 수 있어야 했다.


수업 시간 내내 연예인 사진에 심취해 있어 그 사진을 지휘봉으로 지적하자, 자신을 모욕했다며 대성통곡하는 그 마음에 사과했다. ‘모진 말’을 했다고 1년 내내 엎드려 있는 아이를 1년 내내 참아주며 화해했다. 일진으로서 친구를 하녀처럼 부려먹는 아이를 체벌로 다스리려한 용렬함은 고통스러웠고, 상담을 정성껏 한 아이에게 공개적으로 욕설을 들어야 했던 기억은 참담했다. 고교 입시가 있던 시절, 전교 1등에서 30등까지 도서실에 모아 온갖 이벤트로 입시 지도를 도맡았던 ‘능력’은 더욱 참담한 이력으로 남았다.


그렇지만 여중생을 가르친 2년, 나는 이문세의 노래를 같이 부르며, 달마다 학급 행사를 하고, 날마다 특별 학습 지도를 하면서, 눈 감고 눈 뜰 때마다 아이들의 얼굴을 삼삼하게 떠올리면서, 열병에 걸린 듯 지난 10년과는 다른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숨어서 특별한 모임도 했다. 민주화의 바람은 안동 땅 곳곳을 흔들었고, 낯선 사람들과 몰래 모여 불법 도서나 영상물을 돌려 보는 시간들이 긴박하게 흘러갔다. 작은 물결들이 거대한 강물로 흐를 날을 기다리며 숨죽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다시 시작한 학교에서 만난 남자 고등학생들은 별천지였다.


나보다 훨씬 큰 아이들은, 원피스 허리선을 슬쩍 만지며 때론 나를 여자로 대하기도 하고, 안동 특유의 가부장제 의식으로 하찮게 여기는 기색도 보였다. 60여명 남교사 중에 3명의 여교사, 그것도 학교 역사상 첫 담임 여교사라니.... 무엇보다 실력으로 승부를 봐야 했다. 실력을 과시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지도안이나 메모 없이 완벽 수업하기, 영어나 한자를 거침없이 많이 판서하기, 질문을 많이 해서 겁주기 등 졸렬해졌다. 아이들은 환호했다. 웃으면서 수업하고 존댓말을 쓰는 선생님을 처음 봤다고, 체벌 없는 수업도 처음이라고, 대화하는 수업도 처음이고, 아이들 자리 속으로 들어가 참견해주는 수업, 시를 외우고 노래를 하는 수업도 처음이라고 좋아했다. 교사로서 자신감은 더욱 커져 거침없이 사회의식을 가르치는데 까지 나아갔다. 광주의 영혼들이 담긴 사진을 게시하고, 김남주의 시를 해설했다. 저항하는 아이를 칭송하고, 비판하고 문제 제기하면 더욱 이뻐했다. 그러나 학교는 입시 교육의 늪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수능이 생기고 야간 자율학습, 보충수업이 전면화 되었다. 오직 공부, 오직 서열, 오직 일류대학이 생존 목표가 되어가고 자살하는 아이들이 생겨났다.


우리 교사들은 참교육을 하고 싶었다. 민주와 인간을, 통일과 평화를, 평등한 사회를 가르치고 싶었고 교사 스스로 주체가 되고 싶었다. 사회 민주화의 열기는 꿈틀거리며 교육 속으로 파고 들어와 교사들을 들끓게 했다. 교사협의회를 조직하고 학교민주화를 진척시켰지만 한계가 있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로 조직을 전환했고, 끝내 1500여명이 해직되었다.


나는 해직이 기뻤다. 민주화운동 속에서 체포, 구금, 고문, 죽임을 당한 열사들에게서 최소한의 부채를 나눠짊어졌다는 고마움 때문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연좌농성, 수업 거부 등으로 맞서주었고 전체 조회를 열어 장엄하게 배웅해 주었다.


14년 동안, 단 한 번도 지겹거나 지루한 적도 없었던 그 행복하기만 했던 교실을 떠나야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삶의 한 축이었던, 결혼을 전제로 한 연애도 끝내기로 했다.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세우는 것이 더 소중해졌기 때문에... ‘사랑’은 대상의 제한 없이 무한을 향해가는 무한의 에너지이기 때문에....

 

(사진출처 : 교육희망, 2006년 9월 10일자 기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