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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나의 삶, 나의 길 3부(장혜옥/ 전 전교조 위원장)

 

 

시작부터 투쟁이다. 인터뷰 기자들이 반드시 묻는다. 남은 임기 9개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라고.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이 짧기도 하겠지만 하루를 천년의 무게로 정성을 다하겠다고, 조직의 투쟁력을 복원해야 하고, 대선, 총선 국면의 정세 흐름에 따라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가슴이 벅차다고 답하며, 하루 15시간을 써도 모자라는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4대 현안(차등성과급 저지, 교원평가 저지, 사립학교법 재개정 저지, 7.5차 교육과정 저지)으로 시작된 신자유주의 정책 거부 투쟁은 표준수업시수 법제화, 해직교사 원상 회복, 학교자치와 교장선출보직제, 아이들 살리기 운동 등 대안 투쟁과 더불어 해일처럼 부풀어 올랐다. 5월 사업 승인을 위한 대의원대회가 끝나자마자 투쟁의 불꽃이 타올랐다. 


6월초, 교육부가 있는 정부종합청사 후문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지붕도 없이 바닥에 깔개 한 장 펴고 진행하는 농성은 55일 동안 이어졌다. 땡볕과 장마비, 매연과 관료들의 비아냥을 견디며, 그 자리에서 결재도 하고, 회의와 집행도 하고, 정책 개발도 하고, 연대 사업도 했다. 정부의 외면에 참다못해 단식투쟁도 했지만 물 한 모금도 넘기지 못해 9일 만에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러나 전교조 지부, 지회, 분회 등 계선 활동가들이 전국에서 올라와 따로 또 같이 농성에 참여하고 다양한 집회를 통해 정부를 압박했으며, 마침내 터진 한미FTA 저지 투쟁과 함께, 전교조의 투쟁력은 반신자유주의 최전선을 강고히 지켜나갔다.


무엇보다 차등성과급은, 교사의 임금 제도를 평가와 결합하여 성과급제와 연봉제로 바꾸기 위해 실시되는 전 단계 방안으로써 교사들의 분노를 들끓게 했다. 8만여 명이 성과급 반납에 동참하면서 투쟁력은 뜨거워지고, 언론의 쟁점 보도도 극한점을 내달렸다. 조중동은 연일 전교조를 질타했고 기존 자유주의 언론들도 기획보도, 심층보도들을 통해 어이없고 억울할 정도로 전교조를 압박했으며 전교조의 행사와 집회를 언론이 먼저 분석하고 해설했다. 조중동 언론이 내 별명을 탈레반으로 지어 부르며 강성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색깔론으로 위협하는 와중에도 ‘참교육’을 지키기 위해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의 핵심은 ‘교원노동의 유연화(고용, 임금, 노동의 유연화)’이다. 그러기 위해 학교도 학급도 교사도 줄여야 하고, 줄이기 위한 명분으로 시험과 서열 즉 평가 경쟁은 강화해야 하고, 결국은 최소의 재정으로 최대 교육 효율을 내야 하므로 학교도 시장판으로 몰아가려는 것이다. 교육은 철저히 경제 논리에 매몰되었다. ‘이익을 극대화하는 교육’에 많은 학부모들도 찬성하면서 전교조가 고립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조직 내부에서 터져 나왔지만,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을 꿈꾸는 교사의 자존을 버릴 수는 없었다.    


8-10월 지부별 연수와 지회 분회 등을 찾아 전국 대장정을 벌이며 입장의 동일함과 투쟁력의 연속성을 지켜가려 애썼다. 따뜻하게 맞이하고 힘을 북돋아주는 동지들을 전국에서 만나며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우리 전교조가 앞장 서 지켜가자고 호소했고, 11월 ‘연가 투쟁’을 결의했다. 합법적이고 당연한 권리 행사인 ‘연가 투쟁’이건만, 불법 논쟁 속에 대단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노동3권 중 행동권(파업권)이 없는 전교조가 결국 파업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으름장을 놓으며 정부는 참여자 전원을 징계하겠다고 협박하고 언론은 침소봉대로 우리 투쟁을 폄하했다. 1년 만에 3명이나 바뀐 교육부 장관처럼, 교육부의 입장도 제멋대로 흔들렸고, 3번째 교육부장관은 제 치적을 세우듯 전교조를 적대시하며 징계의 칼날을 휘둘렀다. 더구나 2004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탄핵반대 선언을 한 사실을 들어 1,2심에서 국가공무원법 위반으로 경미하게 다루던 법정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대법원에서 파기 환송하더니 선거법으로 걸어 그예 해고 시켜 버렸다. 느닷없는 해고로 뒷통수를 맞았지만 투쟁은 거침없이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전교조 13대 선거를 치러야 했다. 동지들은 투쟁의 파고를 이어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다시 출마해야 한다고 뒤를 밀었고, 시작한 투쟁 마무리져야 한다는 책임감에 다시 후보로 나섰다. 해고 조합원이 위원장이 된다는 건 전교조 역사에서 큰 획을 긋는 일이다. 전교조의 정치력을 몇 단계 상승시킬 것이며, 조합원들의 강고한 정치력과 단결력에 정부 정책은 큰 타격을 받고 뒷걸음 칠 개연성이 대단히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조합원들은 바로 그 점을 힘들어 했다. 상대 후보들이 정부와 타협하고 합의하며 국민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세워보자고 호소하는데 마음들이 흔들렸다. 전교조 13대 집행부는 거리 투쟁을 하지 않겠다고 공약하며 들어섰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한나라당이 사활을 걸고 사립학교법을 개악하겠다고 덤벼들고 열린우리당이 마지못해 협조해 주는 마당을 투쟁 없이 비껴갈 수는 없었다. 다시 달마다 전국 집회가 잡히고 농성과 시위가 이어졌다.


나의 공식적인 직함은 ‘전교조 지도자문위원’이다. 위원장을 했던 경험과 의지를 살려 중앙 단위에서 할 일이 꽤 있을 거라 판단하고 있었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집행부는 경북지부에서 일하라고 공식 명령을 내렸다. 경북지부 연대사업국장을 맡았다. 사무실이 구미에 있어 내 집이 있는 풍기와는 1시간 30분-2시간 거리이지만 즐겁게 다니며 경북의 각 단체들과 소통과 연대를 활발히 이루기 위해 애쓰고 있다. 물론 하던 일들이 있어 다른 지역에도 주1회 이상 다니게 되니 교통비용이 엄청나다.

가장 역점을 두는 일은 ‘민중교육개편운동’이다. 많은 분들이 합의하고 연대하여 사회적 담론으로 만들어 가고자 하는 교육의 새로운 방향은 ‘교육의 공공성을 실현하기 위한 민중 교육 개편’이다. 입시 철폐와 대학 평준화, 무상교육 등이 가장 핵심 이슈가 될 것이고 그 외 행정에서 학교정책, 교육과정, 학제까지 두루 새로운 얼개를 짜고 있다. 연구원들이 주 1회 이상 모여 연구와 토론, 합의와 전망들을 내오고 있다. 2004년 범국민교육연대와 참교육연구소가 함께 만들었던 ‘공교육개편안’을 수정 보완하여 대선, 총선 시기에 사회적 담론으로 적극 제출하는 것으로써, 노동자 농민 서민 즉 민중을 위해 근본적인 교육 혁명이 일어날 수 있도록 불쏘시개를 만드는 일이다.

가능할까?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회의한다. 보수의 물결은 너무 강하고, 경쟁력 중심의 시장화 전략은 너무 압도적이고, 돈, 이익, 승리, 성공 신화는 너무 대세고, 10대 90의 사회는 너무 당연해서 벗어날 기미가 없는데 헛꿈 꾸는 것은 아닐까? 의기소침해 지기도 한다.

그러나 ‘옳다’고 판단한 길을 가는 것이 ‘운동’이다. 교육을 존재 근거로 하기에 ‘교육운동’의 길을 가며, 노동자가 존재 조건이기에 ‘교육노동운동’의 길을 간다. 교육이 참교육으로 가고, 노동이 진정한 해방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하여 가는 길! 죽음이 올 때까지 그 길에 있게 될 것이며 우리가 죽은 후에는 다른 이들이 또 그 길을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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