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6/08/21 09:03
Filed Under 손가락 수다방

한 석달만에 참세상 칼럼에 올린 글이다.

 

오늘 아침부터 온몸이 으슬으슬 춥고 머리가 깨질것 같고, 온 몸에서 열이나는데 병원에 전공의들은 전부 연수가고 교수님들은 전부 휴가와 회의로 출타 중이신지라 무의촌을 만들수 없어 버티다 보니 내가 화병에 걸릴것 같다. 

 

한 한달동안 이 이야기를 써야지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이렇게 상황이 안 좋은날 쓰고 말았다. 왠지 의학전문기자 삘이 나는 딱딱한 글이다. ㅠㅠ

 

어쩔수 없는 나의 게으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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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후반부터 논의가 되어 체계적으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주로 여성에게 나타나는데 남편의 외도 등 강한 스트레스를 적절하게 해소하지 못하고 참고 인내하는 데서 오는 가슴이 답답한 증세를 가리킨다. 1996년 미국 정신과협회에서는 이 화병을 한국인에게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으로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공인한 바 있으며, 문화결함증후군의 하나로 등재하고 있다. 화병의 영어표기는 ‘Hwabyung’이다.


온 국민이 애용(!)하는 모 포털 사이트의 백과사전에 실린 화병의 정의이다. 이미 외국에서 한국인에 특이적으로 나타나는 질환으로 정리한 것이 화병이다. 물론 화병은 고부갈등이나 원만하지 못한 결혼 생활 등을 이유로 하여 여성이 소위 ‘한’을 품어 나타나는 질환이라고 이야기되어 왔다.


여성으로 병의 발병을 국한 지은 것은 뭔가 음모(헉... 난 음모론자인가? ㅡ.,ㅜ)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을 학부 수업시간에 가졌던 기억이 있다. 병의 주요한 원인이 되는 가부장적인 가족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와 투쟁을 막는 대신에 어쩔 수 없는 병으로 규정짓고 ‘치료’ 받는 것으로 만족하게 하는 그런 음모 말이다. 더군다나 ‘문화결함증후군’이라는 이상한 용어를 갖다 붙이면서 문화라는 뭔가가 부족해서 생기는 질병처럼 몰아간 것도 탐탁지 않았다. 


하여간 병명을 짓고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고 하지 않았나!) 의료계의 속성상 치료를 받아야 하는 질환인지 자체는 의심스러울 수 있으나 우리 주변에 이런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특히 최근에는 활동가들 사이에서 이런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5월이었다. 한 금속 사업장을 방문해 위원장을 만났다. 평상시에 쉽게 흥분하는 일 없고, 언제나 조용조용 차분하게 일을 처리하기로 유명한 동지였다. 위원장 선거를 준비 중일 때는 선동은 젬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자기식의 진심이 담긴 선동을 개발할 정도로 전통적인 선동가 혹은 다혈질의 모습이 약한 동지였다.


하여간 이 동지가 “요새 이상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사연을 듣자하니 5월 4일에 군부대가 평택 대추리를 침탈한 날 연대투쟁을 갔다 오고 나서부터라고 했다. 5월 4일 경찰과 군인들의 무지막지한 진압과 대추분교의 침탈 현장의 아비규환속에 있으면서 가슴이 울컥하면서 뜨거운게 올라왔다고 했다. 그러더니 그 다음부터 때때로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화가 자주 나기도 한다고 했다. 분명 평상시 위원장의 모습과는 매우 다른 현상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화병이네”라고 이야기했다. 어쩌겠는가? 증상이 교과서에 나오던 ‘화병’과 같으니 말이다. 하여간 위원장 동지와 ‘즐겁게 사는 게 최선’이라며 술잔을 부딪혔다. 증세가 심각해지면 다시 이야기하라는 당부를 남기면서 말이다.


그리고 몇 개월이 흘렀다. 그 동안 위원장은 평택에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화병의 증상이 심해질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죽기를 각오한 구조조정 투쟁을 시작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기조하에 폐업위기에 처한 현장을 살리기 위한 투쟁이었다. 이길 수 있을지 걱정이 많이 되는 투쟁이었다. 하지만 조합은 결국 인력조정 없는 신규투자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면서 승리를 하게 되었다.


승리를 자축하고 이후 과제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들을 나누던 자리, 불현듯 위원장이 이야기했다. “저 화병 다 나았어요. 이제 그런 증상 없네요.” 허걱... 결국 활동가의 화병은 투쟁의 승리로 치료되는 것이었다! 자본과 정부의 폭압과 탄압 때문에 생긴 병이니 자본과 정부를 이기면 치료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요즈음 활동가들의 정신 상태에 대한 농담 섞인 이야기를 들을 때가 많다. ‘잘 되는 일 하나도 없고’, ‘뭘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계속 ‘당하고만’ 있다 보니 우울, 불안을 동반한 화병이 안 생기는게 더 희한한 일일지도 모른다.


결국 활동가들에게 만연한 ‘화병’의 증상들은 투쟁의 희망속에서 치료될 수 밖에 없다. 화병의 원인이 되는 자본과 정부의 싸움에서 승리 하는게 활동가들이 건강을 증진시키는 일이 아닐가 싶다. 당장에 큰 싸움에서 이기지 못 하더라도 작은 것이라도 현장에서 일상의 희망을 찾아내가는 것이 활동가들의 정신상태를 온전히 보전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덧니 : 다음은 국내에서 개발한 화병의 진단기준이다. 아래의 12개 증상중 하나의 증상이라도 6개월 이상 지속되면 신경정신과를 방문해 정밀한 진단을 받아보라고 권할 수 있다고 한다. 


▶가슴이 매우 답답함을 느낀 적이 있다.

▶숨이 막히거나 목, 명치에 뭉쳐진 덩어리가 느껴진다.

▶열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낀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거나 뛴다.

▶입이나 목이 자주 마른다.

▶두통이나 불면증에 시달린다.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자주 느낀다.

▶마음의 응어리나 한이 있는 것 같다.

▶뚜렷한 이유 없이 화가 나거나 분노가 치민다.

▶자주 두렵거나 깜짝깜짝 놀란다.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삶이 허무하게 느껴진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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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1 09:03 2006/08/2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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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eoScrum 2006/08/24 17: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입과 목이 자주 마른다'만 빼고,
    모두 제가 군대 있을 때랑,
    민주노총을 그만 두기 전 2년간 느끼던 증상들이네요. 헤휴..

  2. 해미 2006/08/24 18: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오/ 그만두고 캐나다에 있는 지금은 좀 어때요? 좀 좋아졌어야 할 터인데.

  3. NeoScrum 2006/08/25 02: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년 '안식휴가'를 이용해서 베네수엘라에 갔던 거였는데, 안식휴가 들어가는 날부터 거의 괜찮아졌어요. 휴가 직전까지 하루에 거의 담배 3갑, 매일 혼자서 맥주 대여섯병을 먹고 잤었는데, 휴가 들어가자마자 술은 거의 끊다시피 했고, 담배는 1갑으로 줄었어요. 반갑으로 줄이려는 중.

    http://blog.jinbo.net/neoscrum/?pid=154
    이게 딱 당시에 블로그에 썼던 거네요. 아마 지금까지 있었으면 미쳐버렸을꺼에요.

  4. 해미 2006/08/28 1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오/ 정말 상태가 어~~엄청 안 좋았네요. 다행이에요. 그래도 많이 나아진듯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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