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는 가끔씩 신이 내린다.
이 신은 아~~주 무계획적이고 충동적으로 영화를 보라구 한다.
이렇게 밤에 음악들으면서 혼자 있다가, 누군가를 만나다가, 어디를 가는 길에 문득, 보고싶어지는 영화들이 있고 잠깐의 시간을 내어 영화를 휑~~ 하니 보곤 한다.
또, 어떤날은 가끔 아침에 집을 나서서 저녁까지 영화 서너편을 몰아봐버리구선 아픈 눈을 비비며 집으로 향하기도 한다. 마치 학생때 시험전날 날밤새가면서 벼락치기 시험공부를 하듯 뭔가를 비우고 싶어질때, 머리가 복잡할때, 힘든 몇일을 보내고 나면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에게 상을 주기도 한다. 거리를 혼자 걷기도 하고, 영화를 기다리면서 몇가지를 읽기도 하면서...
그러다보니 영화는 주로 혼자보게 된다. 신이 내리면 보러 가버리니까. ㅋㅋ
2002년 가을부터인가 영화를 보고나면 내 나름의 싸이버 공간에 인상적인 영화들에 대한 내 멋대로의 생각과 단상들을 적기 시작했고, 보는 영화들을 다 글로 만들지 못할때는 메모라도 하기 시작했다.
올해도 변함없이 영화신은 수차례에 걸쳐 내게 왕림하셨고, 부름에 충실하여 영화를 질렀다. 대략 몇달간의 흔적들을 오늘은 정리해보려고 한다. 수첩에 적어놓은 메모 몇 줄들...
#1.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12월 30일, 시네코아)
장애를 가지고 소외된 삶을 강요받던 조제가 세상에 나서는 과정을 그린 영화였다. 장애인에 대해 마냥 따뜻하거나 환상적이거나 연민만 있는 것이 아닌 감독의 시선이 인상깊었다.
적당한 거리두기의 미덕으로 빛나는 영화였다.
의자에서 털썩 내려앉고, 음식을 하고, 책을 읽으며 남친한테 틱틱 거리는 조제가 정말 예뻐보였다. 헤어짐을 예비하며 욕망에 당당하고 자신에게 당당한 조제에게 화이팅을 보낸다.
#2. 하울의 움직이는 성 (1월 1일, 씨네큐브)
미야자키 월드의 따뜻함과 변함없는 해피엔딩이 가슴 따뜻한 애니메이션이다. 여전한 반전의 이미지와 자유주의자적 성향 또는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 사랑에 대한 낙관론적 세계관이 묻어나는 미야자키표 애니이다.
미야자키의 애니는 정말 좋아했던 빨강머리 앤과 미래소년 코난에 대한 애정과 이미지의 친숙함과 익숙한 음악이 미야자키의 애니를 계속보게 만드는 힘인것 같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대안가족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하지만 약간의 줄거리 상의 연결고리가 빠진듯한 느낌이 드는 조금은 이해하기 어색한 영화였다. 이걸 애들이 보고 이해하는 건 더 어려울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
보는 내내 '난다'는 것과 '비상'에 대한 열망을 일깨워 주면서 패러글라이딩을 꼭 한번 해보고 싶은 개인적 욕심을 상기시키는 영화였다. 패러글라이딩이 안되면 번지점프라도 한번...
좀 생각해보고 싶었던것은 미야자키 애니에 묻어 있는 성선설에 대한 믿음이었다. 하울은 악마에게 심장을, 영혼을 팔았지만 착한 놈이다. 미야자키는 악마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스스로의 자유의지와 사랑만 있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왠지 탐탁치 않다. 세상을 그저 이뿌게만 보는 그의 시선과 성악설이 맞을 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끝내 지울 수 없는 나의 시선의 차이가 느껴졌다.
따뜻하지만 깨어짐이 분명한 환상인것 같다. 우리 시대의 나쁜 놈은 나쁜 놈 일뿐이다.
#3. 룩앳미 (1월 1일, 씨네큐브)
#4. 노맨스랜드 (1월 2일, 씨네큐브)
#5. 빈집 (1월 9일, 하이퍼텍나다)
#6. 말아톤 (1월 27일, 대한극장)
금방 망할거라 생각해서 개봉하고 얼마안되 불현듯 밤에 달려가 본 영화이다. 이 영화가 대박이 날줄을 정말 몰랐다. 조승우의 묘한 매력에 대한 개인적 편애가 작용한 영화이다.
영화를 보며 간만에 정말 많이 울었다. 울음을 강요하는 듯한 시나리오였지만 조승우와 김미숙의 연기는 울어주기에 마땅하다 생각했다. 자폐아가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감동적이 에피소드가 '엄마'라는 이름과 얽히면서 사람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자폐아에 대한 냉대와 냉소가 아닌, 따뜻함이 느껴지는 시선이 신선했다. 그러나 엄마의 자식에 대한 소유욕과 대리만족에 대한 문제제기가 영화안에서처럼 가능할 수 있다. 영화내부에서 이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짐으로 인해 영화는 정치적 아슬아슬함을 비껴가는 현명함을 발휘했다.
헌신을 한다는 것으로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헌신이라는 것과 노력이라는 것이 어떤 경과를 가지고 주체에게 관계맺음이 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헌신을 하고, 받는 관계가 아니지 않을까?
장애를 가지고 세상을 산다는 것은 내가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그 쉽지 않은 과정에 대한 또하나의 성공사례에 대한 영화화에 성공한 케이스이다. 다만 왠지 계속 인간극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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