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5/05/23 10:26
Filed Under 이미지적 인간

얼마전 우연한 기회에 '열대야'를 보았다. 조합원들을 좌지우지 하고, 항상 선거와 임단협의 쟁점이 되는 '고용안정'이라는 슬로건의 이데올로기화의 과정을 분석하고 활동가들의 변화된 모습을 살펴 문제 인식을 던져보고 물의(?)를 일으킬 필요가 있다는 야심찬(?) 계획속에 98년 현차 정리해고반대투쟁에 대한 상황과 사실로부터 접근의 내용과 방향을 잡아보고자 보게된 다큐였다.

 

195분이라는 만만치 않은 시간동안 함께 일하는 동지들과 숨죽여 다큐를 보았다. 얼굴이 익숙하고 가끔 술한잔 하는 현장 활동가들의 7년전의 앳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왜 지금 이러한지, 우리가 무엇을 잡아내야 하는지 그 단초를 확인할 수 있었다.

 

블록에 몇 줄이라두 감상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바쁘단 핑계로 넘어 갔었다. 근데 어제 인디포럼2005 소개 기사를 보니 '열대야'가 인디포럼에선 상영되지 않았지만 다시 관객을 만나야 한다고 평가되는 프로그램 선정작('아웃 오브 인디포럼')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게되었다. (상영일은 5월 30일 저녁 6시, 6월 1일 오후 12시 반이다) 다시 그날의 느낌이.. 비록 간접적으로 보기는 했지만 98 투쟁의 뜨겁고도 처참한 느낌과 2005년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던 활동가들의 발언이 떠 올라 늦었지만 몇자 남기기로 했다.

 

다큐는 마지막의 소개글처럼 98년 정리해고반대투쟁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일상을 중심으로 엮어진다. 앳되 보이는 김광식 전 위원장부터 식당아줌마들의 어린 아이들까지... 당시 투쟁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차분하게 쫓아간다. 인터뷰에서 인터뷰로 장면에서 인터뷰로 넘어가며 '사람'을 쫓는다. 처음의 희망퇴직부터 정리해고 발표, 천막투쟁, 고공농성, 그리고 패배... 로 이어지는 모습에서 7년전 정말 열심히 싸웠던 동지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밥/꽃/양의 주인공인 식당아주머니들과 정리해고 통보를 받았던 활동가들... 이들은 결국 정리해고와 무급휴직이라는 칼을 맞게 된다.

 

정리해고가 현차에서 '수용'되는 것에 대한 사회적 의미에 대한 논란과 '최소화'를 이야기하며 눈물을 떨구던 김광식 당시 위원장으로 대표되는 조합의 입장과 이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민투위로 대표되는 현장의 활동가들...

 

그 뜨거웠던 여름, 투쟁의 과정은 강력했고 (여전히 고공농성을 하고, 천막을 치고, 관을 짜는 현실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힘찼다. 하지만 왠지 조합원이 안 보이는 느낌이었다. 정리해고 대상자들과 활동가들로 구성된 농성대오에 카메라가 집중된 탓도 있겠지만 조합원들은 당시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현장 활동가들의 말을 빌자면 조합원들의 상태는 '미안함'과 '두려움'이었던것 같다. 천막에 가끔씩 먹을것을 손에 들고 찾아오지만 회사에서 동원하는 '야유회'등의 회합에는 빠질 수 없었던...

 

자본의 힘은 너무나 강력했고 고립된 투쟁을 하던 당시 조합의 고충과 회환도 이해가 가기는 했다. 하지만 더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정리해고 수용에 대한 입장을 밝힌후에 저항하는 식당아주머니들과 무급휴직자들, 현장활동가의 모습이었다. 눈물이 핑 돌만큼 마음이 아프고 에려왔다. 그렇게 힘들게 그리고 당차게 투쟁을 했건만 결국 정리해고라는 것을 받아 안게 된 것이다. 피해 최소화라는 명분하에 이를 식당 아줌마들로 집중하는 가부장적인 조합의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는 차치하고서라도 당시의 패배감과 절망은 눈물겹게 아팠다.

 

결국, 지금 조합원들이 고용안정이라는 단어에 휘둘리며 벌 수 있을때 벌자고 과로사를 각오하며 죽도록 일하는 것은 98의 경험이 집단적 트라우마로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 정책 속에서 그나마 현대자동차는 잘 나가는 (벌써부터 GT-3에 대한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대기업이다. 비정규직을 방패막이 삼아 이미 정규직들의 고용은 상대적으로 보장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충격적/일방적 구조조정의 시기에서 일상적/('소위')합리적 구조조정의 시기로 넘어오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아닌가?

 

2000년 이미 (비정규직을 방패막이 삼기는 했지만) 고용안정 협약을 체결하였던 조합에서 매년 임단협때마다 고용안정을 얘기하는 것은 '고용안정' 상태에 대한 조합원들의 불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 불신은 98년 그렇게 뜨겁고 힘차게 싸웠으면서도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활동가들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이라고 생각한다.

 

단협에 '고용안정' 또는 '고용보장'을 명시한다고 할 지라도 이것이 한낱 글자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조합원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조합원들 뿐만이 아니라 활동가들 역시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합이 아무리 확실한 고용안정을 회사와 합의 하더라도 이 불신을 없애지 않는 이상 노동자들은 불안에 떨며 죽기 일보직전까지 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현장 노동자들의 불안의 근원은 투쟁에 대한 신뢰와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인것 같았다. 정말 미친듯이 군대처럼 싸워도 협상에 나오지 않는 울산플랜트나 하이닉스를 보면서 다시 재경험되고 확인될 것 같다. 이런 불신과 신뢰의 경험을 만들어 가기 위한 활동가들의 노력이 현장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이루어져야 할 것 같았다. 정말... 고민하면 할 수록 어렵다.  

 

그래서 그 투쟁은 너무나 뜨겁지만 잠못들 정도로 외로운 열애야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 아닐까?

 



'올해의 인권영화상'은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에 대한 장편 다큐멘터리 <열대야>에게 그 영예가 돌아갔다. 이 작품은 98년 부산KBS에서 근무하다 구조조정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이근호 씨가 2달 동안 현대자동차 정리해고반대 투쟁을 벌이는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제작한 1인 제작 다큐멘터리이다. 이제까지 제작된 '노동운동' 다큐멘터리와 판이하게 다른 영상문법을 구사하고 있는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생존권 투쟁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울산 현장의 구석 구석을 누비면서 수많은 노동자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 토해내는 그 목소리를 여과없이 담아냈다는 점이다. "방송 시스템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교활한지 아는 나로서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하는 이 감독은 195분이라는 위험스러운 작품 길이로 한국의 '독립 다큐멘터리'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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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3 10:26 2005/05/23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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