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5/03/14 09:34
Filed Under 이미지적 인간

정혜는 상처를 안고 사는 여자다. 아니, 상처가 저절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물기를 기다리는 여자다. 어쩌면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받은 상처는 영원히 치유가 불가능 한 것일수도 있다. 사람을 만날때 마다 비슷한 상황에 처할때 마다 다시 기억되고 머릿속에 남는 상처일테니 치유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아픔의 정도가 달라질 수는 있어도 아마 온전히 몸에 각인되어 있는 상처일 것이다.

 

이런 상처 때문에 정혜가 식물처럼 사는걸까? 혼자서 집과 직장을 오가고 직장동료들 이외에 따로 만나는 사람도 없고, 혼자서 컵라면에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하염없이 홈쇼핑 채널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를 저어하는 것이 온전히 그 상처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는...  

 

그렇기 때문에 찌르기 위해 가져간 칼에 자신의 손이 베고, 눈물을 흘리고 난 후 마치 용서와 극복을 했다는 듯이 버린 고양이를 찾아 뛰어가고, 한 남자로부터 이름을 불리운다. (아마 영화내내 '정혜'라는 이름이 나오는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상처가 용서되고 극복됨으로 인해 '정혜'가 '정혜'로 불리우고 세상과의 접점을 열고 있다고 이 영화는 이야기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랐다. 그녀의 일상은 이미 많은 사람들의 일상과 다를바가 없는 것이었다. 그냥 혼자사는 많은 사람들의 일상일 뿐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 주변에 그렇게 자폐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지만 분명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제법 있다. 그녀의 생활자체가 어떤 경로를 통해 왔는지 확인할 길이 없어 단정 짓기는 난망하지만 정혜의 삶은 그냥 일부의 삶이고 일상일 뿐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사는것은 그 상처로 인한 아픔과 자기보호라기 보다는 사회적 소외에 더 가까운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가 받은 상처는 용서와 극복으로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있는 것이 더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그녀가 기억을 극복하고 용서하면서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좀 우스웠다. 그녀의 상처는 극복되거나 치유될 수 있는게 아닌것 같기 때문이다. 계속 재경험되고 아픈 상처다.

 

정혜는 찌르려고 가져간 칼에 자기 손이 베일것이 아니라 찌르든 법적으로 처벌을 하든 사과를 받든 했어야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과거를 다시 재경험하게되는 잔인한 과정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열지 않고 다시 상처를 닫은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한건 상처가 용서되거나 극복된 것이 아니라 그냥 닫힌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상처를 닫아 버리는 것 역시 그녀의 선택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영화는 일상의 섬세함과 감정의 흐름을 매우 예민하게 잡아내고 부유하는 '살아내기'에 대한 묘사가 훌륭했다. 목이 매우 긴 김지수는 외로운 '살아내기'를 적절하게 잘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그렇게 극복되고 또 다른 남자로부터 이름을 불리운다 해서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정혜는 상처를 닫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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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4 09:34 2005/03/1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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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그녀는... <여자, 정혜>

    Tracked from / 2005/03/26 00:29  삭제

    ♡ 이 글은 해미님의 [[여자, 정혜] 극복 또는 치유되는 상처?] 에 관련된 글입니다. &lt;여자, 정혜&gt; 포스터_씨네21에서 이미지퍼옴 이번주에 보지 못하면 못볼 것같다는 불안감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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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mlist 2005/03/15 0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 번 보고 싶은 영화에요. 구독하는 필름2.0에서 아주 열띤 논쟁을 했더라구요. 진짜진짜 궁금한 영화....^^

  2. 미류 2005/03/15 1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도 오랜만에 영화나 한편 볼까? 알엠, 같이 볼까요? ㅎㅎ
    생각해보고 싶은 얘기가 많군. 이래저래... ^^;;

  3. 해미 2005/03/15 1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알엠/ 필름 2.0에서 어케 논쟁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함 기사를 찾아 읽어봐얄듯...
    미류/ 맞어 생각해보고 싶은 얘기가 많더라. 알엠하구 영화 같이 보고 셋이 만나 수다나 함 떨어보는건 어때? ㅎㅎ

  4. rmlist 2005/03/15 14: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미/아마도 다음 주에나 볼 수 있을 걸요. 인터넷에는 한 두 주쯤 후에 올라오니까.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제가 마음상했던 황진미씨의 입장이 해미와 비슷해요.그런데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역시나 평론가들의 자리를 다시금 확인했다고나 할까..
    미류/영화보고 싶지만 아기들 때문에.. 혹시 신림역 프리머스에서 볼 수 있다면 영화보는 2시간 정도 한별이를 누구한테 맡기면 좋을 걸. 그런데 여자,정혜는...프리머스같은 데서는 절대로 안할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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