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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노동자신분 세습이 질투 받았을까?

[인권 '제로섬-게임'을 넘어]

언제부터 노동자신분 세습이 질투 받았을까?

 

 

 

조대환(이윤보다인간을 집행위원장)

 

 

사농공상과 노비에서 노동자 계급으로!

신분을 넘어설 수 없는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신분을 탈출하는 것은 고사하고, 신분간의 사랑에도 모진 형벌이 가해졌다. ‘사농공상’과 거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군상들의 삶은 인간 이하였고, 인간이기 위한 탈출의 몸부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따지고 보면 한국 사회에서 이런 신분의 벽이 무너진 것은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다.

 

신분이 폐지되었다고 해서, 계급마저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근대 이후의 밑바닥 신분은 노동자 계급이 차지했고, 인간 이하의 이들은 언제나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기도 했다. 심지어 노동자로 불러지지도 못하고 ‘공돌이’, ‘공순이’로 불러졌으니 말이다. 계급적인 관점에서야 ‘노동자’가 자랑스럽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계급투쟁적인 관점이고, 힘의 관계에서 여전히 우위에 있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아래서, 누구도 노동자란 불림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았을 게다. 하물며 자기 자식이 노동자로 살길 원하는 부모가 어디 있었겠는가?

 

어찌 보면 우리 모두 ‘홍길동’이었는지 모른다. 부모가 노동자인 것은 말하기 부끄러워하고, 자식이 자기와 다른 신분을 얻길 원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 부모가 미치도록 교육에 투자 했을 터다. 신분의 탈출은 본인의 노력과 함께 신분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부모의 노력이 결합되었던 것이고, 자식 대에 마저 무능과 노동자 인생을 물려주는 것을 주위에서도 달갑게 보지 않았던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우리네 모습이었다.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자 ‘신분굴레’ 마저 시기하는구나!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자 신분의 세습과, 천한 노동자 신분의 세습을 시기하고 질타하는 진풍경을 만나고 있다. 얼마 전 있었던 유명한 장관 자녀의 특채야, 현대판 ‘음서제’라는 비판이 어울리기도 하거니와, 지배 계급의 이런 신분 세습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닐 터!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을게다. 그런데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자녀들이 정규직에 응시할 때, 가산점을 부여하는 요구안을 제시했다고 해서 말이 많다. 이른바 특혜채용이라는 주장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현대 자동차는 한국의 대표적인 대기업 정규직 노조다.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에 대해서 비판적이지 않은 곳은 없다. 좌파는 좌파대로 우파는 우파대로 자기들만의 이익추구에 여념이 없는 현대차 노동조합을 비난해 왔던 터라 이번 사건은 또 한 번 도마 위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슬프지만, 유래 없는 고용불안 청년실업의 시대에 현대자동차가 도를 넘어선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는 비판은 좌우를 넘나들며 시대를 공감(?)할 수 있는 ‘아이콘’이다. 이 비판에서 현대자동차 노조가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 그동안 현대자동차 노조가 보여준 모습은 정규직 노조의 기득권만 챙기기 위한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2010년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라는 대법원 판결’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 투쟁에 대해서도 정규직 노조가 미온적으로 대처한 사례가 있다. 이런 점에서 현대자동차가 사회적인 문제와 동떨어져 자기들만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비판은, 좌파적 입장에서야 십분 공감하게 된다.

 

노동조합이 사회적 의제에서 멀어지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투쟁에 함께하지 않을 때 노동조합은 이익집단으로 전락해온 것이 사실이다. 비정규직과는 절대 연대하지 않고, 자기 밥그릇 지키는데 급급해 하는 노동조합의 모습은 결국 정권과 자본의 의도대로 움직여지는 꼭두각시 노조로 가는 수순일 뿐이다.

 

그렇지만 현대차 노조를 비판하는 사회여론은 사회적 통념에 비추어 보자면 낯설기 그지없다. 보수언론이 주도하는 비판의 핵심은 결국 노동자가 자식에게 노동자 신분을 세습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 천한 신분의 ‘내리 흐름’을 특권이자 최악의 이기주의라는 게다.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의 신분을 세습할 경우 과연 어떤 삶을 살까? 2008년 기준 현대자동차 생산직 초임은 115(기본급)만원이었다. 생산직 전체 평균 기본급이 158만원이었다. (한겨레21 794호 참고) 얼마 전 만난 현대차 전주공장의 40대 노동자는 “지난 달에 일을 별로 못했더니 110만원 나왔다”고 했다.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상황에서… 물론 수당을 합치면 더 많은 임금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주야특근에 개인의 삶이 없고 골병드는 댓가에 비할 수 있을까!

 

비천하고(?) 고된 삶을 대물림하겠다는데 사회적 지탄을 받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코메디다. 이런 현상은 그만큼 민중들의 삶이 고되다는 증거다. 월급이 많건 적건 그렇게 일할 수 있는 행복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느냐는 비판이 들려온다.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파업에 대해서, 그 조건이면 나는 군말 없이 일하겠다며 파업 노동자들을 비난하는 모습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자식에게 같은 삶을 물려주겠냐고 묻는다면 아마 ‘아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이글을 쓰는 이유는 현대 자동차 노동조합을 두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현대 자동차 노조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비판꺼리가 많다. 현대차 정규직 노동조합에 대해서 “함께 살자”는 가치가 없다고 비판한다면야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최근 벌어진 논란은 그런 의미 있는 비판은 아니었다. 시기이자 질투지만, 막연한 시기와 질투로 매도할 수 없는, 빈곤과 불안으로 몸부림치는 대중의 절규다. 그렇기에 슬프다.

 

이제 권력자와 가진 자들은 맘이 편할지 모르겠다. 노동자들은 신분을 넘나들지 않고 그 자리를 세습하겠다고 한다. 감히 가진 자들, 권력 있는 자들의 경계선 안쪽으로 얼씬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제 사법고시 합격률에서 강남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는 뉴스는 뉴스가 아닐지 모른다. 개천에서는 용이 날 수 없다는 조소조차도 사라질지 모른다. 거기에 같은 노동자들끼리, 가진 자들이 보기에 미천한 신분을 서로 갖겠다고 공격하니 말이다.

 

노동하는 것이 부끄러워 세습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현대 자동차 노조는, 고통스러운 대중의 현실을 어떻게 끌어내야할지 몰랐다. 자신도 고통스러웠던 그 착취의 굴레를 자식 대까지 물려주겠다는 그 순진함이 문제일 뿐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은 계급을 물려주는 것에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을 통해서 그것이 깨질 때 해소될 뿐이라는 자명한 진리를 다시 기억해야 한다.

 

계급투쟁은 현재 더 많이 나누기 위한 것이고, 후대에 더 나은 삶을 물려주기 위한 것일지 모른다. 따라서 현대 자동차 노조의 결정은, 고통 받는 계급과 함께 현실의 착취를 끝내는 연대와 나눔의 투쟁에 반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착취당하지 않는 삶을 후대에게 물려주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계급투쟁에 역행한 것이다.

 

아울러 현대자동차 노조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비판하지 않는 현실은, 노예의 삶을 서로 차지하겠다는 아귀다툼에 지나지 않는다. 2011년 현금 배당금으로 정몽준이 574억 7천만원, 이건희 510억 8천만원, 문제의 현대자동차 회장 정몽구 399억 4천만원을 받았다. 이런 사회에서, 하루 12시간 휴일마저 반납한 노동의 삶을 물려주겠다고 하는 쪽이나 그것을 특혜라고 비판하는 쪽이나 가진 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소롭지 않겠는가!

 

현대 자동차 노조여! 당신들이 가진 특권(?)을 반성하지 말고 노예의 삶을 자식 대까지 물려주겠다는 순응을 반성하라. 자식의 미래가 걱정되거든 계급을 유지하지 말고, 철폐하라!

2011. 4. 25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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