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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진보를 역행하는 3자 통합 안을 거부하라
신자유주의를 용서하는 가!
결국 진보정당은 신자유주의와 동거하는가! 지난 11월 20일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새통합연대 3자가 통합을 공식 선언했다. 그리고 지난 11월 27일 민주노동당은 당대회에서 90%에 이르는 찬성으로 통합을 확정했다. 1년 넘게 진보진영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을 위해 쌓아 올렸던 탑이 완전히 무너진 셈이다. 이들은 진보진영 대통합과 통합 진보정당 건설을 목표로 두고 2012년 총선 예비 후보 등록일인 12월 13일에 맞춰서 통합을 마무리 지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한나라당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개혁적이고 중산층의 이해를 대변했다고 하지만 결국 철저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집권동안 한미 FTA 협정을 체결했으며, 미국의 군사 세계화 전략을 그대로 추진하면서, 평택 대추리에 미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주민을 내쫓았다. 제주 강정 해군기지 또한 노무현 정부 당시 확정한 사업이었다. 복수노조 유예, 그리고 노사관계 선진화방안이라는 이름의 노동법 개악 모두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완성된 것이다. 손배 가압류의 대표적 희생자였던 배달호, 김주익 열사의 죽음은 이명박 정권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발생했으며, 스스로 ‘노빠’라고 자랑스럽게 떠버리는 유시민이 바로 그 가운데 있었다. 노동자 민중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하는 민주노동당이 과연 앞으로도 힘없는 노동자 서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지금까지 민주노동당은 민주당을 비롯한 신자유주의 세력과의 연합을 반복해왔다. 문제는 그동안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해온 민주노총 등 노동자 민중의 이해관계가 국민참여당과 같은 중도 보수의 이해관계와 맞지 않는 점이다.
국민참여당은 노무현의 신자유주의를 철저히 계승한다는 점에서나, 국민 참여당 내부에 ‘혁신과 통합’이나 민주당과 통합을 추진하는 세력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지 분명하다. 노동자 농민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민주노동당과 중도 보수를 지향하는 범 민주당 세력간의 “계급연합”인 셈이다. 두 계급 간에는 화해할 수 없고 합쳐질 수 없는 강이 있다. 이 두 흐름을 진보통합이라는 이름으로, 인위적으로, 강제적으로 합치려는 것은 ‘정치공학적 대운하’라고 비유할 만하다. 인위적인 대운하가 생태계에 미치는 파장만큼 이질적인 집단의 정치적 타협이 몰고 올 파장과 폐해가 걱정되는 이유다.
국민참여당의 전과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미래에 노동자 민중이 없는 것이 문제다
민주노동당은 유시민과 국민참여당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 몇몇 정책에 대해서 유감을 표시 한 것으로 그들이 반성했다고 말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또한 진보진영이 통합해야 정권교체가 가능하기에, 통합진보정이 절실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우리가 과거를 용서한다고 해도 미래가 쉽게 숨겨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과거 행적이 중요한 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믿음을 주지 못한다는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시민과 국민참여당 또 더 나아가 민주당이 담고 있는 진보는 무엇인가? 백번 양보해서 민주노동당이 담고 있는 진보의 미래는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미래가 함께 동거할 신자유주의 세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도달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니 도달한 만 못하다.
통합을 앞두고 있는 3자가 공유하는 지점은 오로지 반MB전선과 정권교체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난한 99%를 상대로 이익을 추구하며 무한 질주하는 신자유주의는 결코 "당"을 가려가면서 수렴되지 않는다. 지배 권력과의 결합을 통해서 다양한 형태로 변하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그리고 이명박 정권 사이에 차이는 크지 않다. 노동정책의 차이, 복지 수준의 차이, 대북 정책의 강약 차이가 날 뿐이다. 시장 규제를 상대적으로 약하게 하느냐 강하게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노무현을 계승하는 국민참여당의 노동정책이 노무현 정부 정책과 차이 날 리 만무하다. 모두 알고 있듯 노사관계 로드맵은 노무현 정부 시절 작성되어 계속 이어져가고 있다.
아니면 최소한 가진 자들의 법인세율을 획기적으로 올리겠다는 계획이 있는가? 부유세나 토빈세를 도입할 의지가 있는가! 노무현의 반 노동자적 정책을 비판할 수 있는가! 지난 정부에서 새만금 사업을 두고 ‘이미 시작된 사업이기 때문에 중단할 수 없다’던 노무현주의자들이, 수 조원에서 수 십 조가 들어가는 4대강 사업을 과연 중단할 수 있겠는가?
무엇이든 빨아들여 가진 자들, 1%의 이익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와 결별하지 않는 한 99%의 미래를 얘기하는 진보정당은 어불성설이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민주노조 운동에서 ‘배타적 지지’라는 악법을 통해서라도 민주노동당을 지지해왔던 이유는 노동자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 사명을 다할 수 없다면, 노동자․민중․서민의 정당자격을 잃는 셈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새삼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애초 배타적 지지 방침은 뜨거운 감자였다. 그만큼 새로 출발하는 “당”에 배타적 지지라는 특권을 계승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민중 노동조합의 이해를 대변하지 않는 신자유주의 정당에게 배타적 지지라는 독점적 지위를 계승해 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민주노조 운동이 신자유주의의 세력과 함께 하는 정당을 배타적 지지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을 넘어서, 자기파멸에 가깝다.
노동자 민중을 위한 진보정당이란 노동조합원을 당원으로 가지고 있다고 해서 주어지는 자격이 아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노동조합이 지지하는 정당이기 때문에 진보정당이라는 논리 또한 설득력이 없다.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구체적인 방향과 정책을 제시할 때 노동자 민중을 위한 진보정당이라 할 수 있을 게다.
3자 통합은 충격적인 현실이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 삼아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에도 대 수술을 가할 필요가 있다. 이제 정치의 주도권을 “당”이 아닌 현장으로 가져와야 한다. 노동조합이 의회에서 표를 찍을 수는 없지만, 어떤 의원, 어떤 정당에게 투표할 지 선택할 수 있는 권력은 있다.
어제의 친구가 신자유주의와 한 배에 오른 지금, 민주노조운동 진영이 왕성한 정치활동으로 반 신자유주의를 분명히 한다면 그 배는 심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나눠져 있던 시기에 노동조합에서는 “둘 다 비슷해서 현장에 어느 당을 지지해야하는지 알려주는 것이 힘드니 통합하라”고 하소연 했다. 이 말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색깔의 차이가 없다는 의미기도 했지만, 바꿔 말하면 노동조합 스스로 정치적 지향이 불분명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노동조합이 분명하게 갈 길을 간다면, 노동자 민중에게 표를 얻고자 하는 정당 스스로 더 나은 정책, 더 계급적인 입장을 밝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 민주노총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민주노조 운동이 신자유주의와 동거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대안을 찾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그 출발은 어렵지 않다. 애초 원칙도 없었던 정치방침이자, 이미 효력을 상실한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철회하는 것에서 출발하면 된다.
지금 민주노총에 필요한 것은 특정 정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다른 모든 것에 우선에서 배제한다는 원칙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배타적 배제를 천명한다면 노동조합에서는 다양한 진보정치와 연대 연합하는 것은 물론 선택의 폭도 넓어질 것은 자명한 이치다.
2011년 12월 1일
조대환(이윤보다인간을) / 2007년11월28일 12시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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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환(이윤보다인간을) / 2007년09월05일 17시27분
지난 연말, 올 연초 이벤트로 책 선물받기 행사를 했다. 주기가 아니고 받기.
많은 이들의 동정과 격려, 동참 속에 여러권의 책을 받았는데 예상했던 대로 진도가 영 안나간다. 올해 다른 책을 사서 읽기는 퍽 힘들어 보인다.
더 분발해서 앞으로도 남은 책을 더 읽어야 겠다. 아직도 몇권 더 남았다.
남은 책은 스피노자 관련책인데 이해나 할런지 모르겠당.
더 큰 문제는 스피노자 맑스주의도 모르겠는데, 이번엔 헤겔 맑스주의가 등장한단다. 이론가나 학자들을 쫓아갈 생각도 그들의 연구에 보조를 맞출 생각도 없고, 현실운동의 속도와 이론변화의 속도를 동일시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숨가쁜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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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산자와 죽은자 대빵 두꺼운 책이다. 다행이 소설이다. 프랑스판 민중-노동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 초반 읽었던 노동문학을 읽는 듯한 생동감이 다가온다. 한국 소설에서는 담지 않았던 사랑의 문제도 양념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일게다.
그래도 현재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는 자본과 권력의 지배방식,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이 어떤 것이고 어떻게 투쟁해야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현장 내에서의 타협주의와 전투적 조합주의 등 우리의 운동 일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등장한다.
그러나 끝이 너무 밋밋하다 못해 아니올시다라고 밖에 답이 나오지 않는다. 결론이 문제가 아니라 끝맺는 방식이 문제인 듯 하다. 나만의 평가일 수도 있으나....
두번째 책이자 세권째 책, 거의 다 읽어가는 책이다. 오래 전부터 보려다 못본 책이기도 하다.
자본의 흐름과 노동의 대응에 따라 산업구조와 핵심 지역이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잘 알려준다.
그에 따른 노동자의 연대가 어떤 식으로 작동했는지, 어떻게 자본에게 승리 혹은 패배했는 지를 역사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자본의 통치 방식에 유효한 투쟁은 무엇인지 더 사고해야한다는 고민을 안겨준다.
자본 혹은 산업이 이동하고 옮겨 가는 경로와 향후 노동 소요의 중심이 노동 투쟁의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 지를 고민해야 하고 그에 대한 대응을 연구해야 한다.
자본주의 역사강의는 백승욱 교수의 강의록이다.
내용은 상당히 중요한 지점을 쉽게 잘 다루고 있다는 강점이 있다. 하지만 강의록을 책으로 엮는 고질적인 단점인 산만하고 중언부언에 핵심을 드러내지 못하는 부분이 아쉽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기도 혹은 잘못 서술한 부분도 있어보이는데 강의야 그렇다쳐도 교정과정에서 놓친 부분은 아쉽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역사적 자본주의가 무엇을 말하는지, 역사적 자본주의 자본주의세계체제론자들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지를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한다.
특히 신자유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고민과 국가간 체계의 고민에서 일국적차원의 사회구성체논쟁의 재 해석이나 재 접근은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발전시켜야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노신이 허광평에게 ]
인생이라는 장도에는 큰 난관이 두 개있다. 갈림길과 막다른 궁지가 그것이다.
갈림길에서는 묵자선생도 통곡하고 돌아갔다고 하지만, 나는 울지도 돌아가지도 않고 우선 갈림길 앞에 앉아 쉬거나 한숨자고 괜찮을 만한 길을 택해 계속 걸어갈 것이다.
가다 정직한 사람을 만나면 음식물을 달라해서 허기를 달래되, 길을 묻지는 않으련다. 내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그 길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호랑이라도 만난다면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 놈이 배고픔을 참다 못해 제 갈 길을 가면 그 때 내려올 것이고, 끝내 가지 않는다면 나무 위에서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혁대로 몸을 꽁꽁묶어두고 시체마저도 놈에게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가 없다면 놈에게 잡아먹히긴 먹히되, 놈을 한 입 물어 뜯어도 무방할 것이다.
다음으로 완적선생도 대성통곡하고 돌아갔다는 막다른 궁지에서는 다른 길에서처럼 성큼 걸어갈 것이고, 가시밭길이 가로막는다해도 여전히 걸어갈 것이다.
다만 온통 가시밭뿐이어서 결코 갈 수 없는 길은 분명 한 번도 맞닥뜨려 본 적이 없다. 그러고보면 세상에 본래 막다른 궁지란 것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다행히도 아직 그런 지경에 데이지 않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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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이 제자이자 부인이었던 허광평에게 썼다는 글이다.
선택과 궁지는 어느 시대 어느 누구에게나 닥치는 문제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개인이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 진실이 혼란 스럽고 과학이 승리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착취와 계급투쟁이라는 역사과학이 인정 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노신의 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고민해보면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갈림길과 막다른 궁지를 "치명적 실수, 비과학적 오류"라는 문제는 제외하고 글이 전하는 감동을 느끼고자 한다면 새로운 시대를 '우리' 스스로 건설해 가는 주체의 정치, 구성의 정치를 고민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이 중요 한 것이 아니고 그 길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그 길에 놓는 발걸음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가 중요하다.
붉은사랑님의 [몇가지 에피소드] 에 관련된 글.
진짜 에피소드! 집회는 왜 하는가?
[.....]힘 미치지 못해 쓰러지는 것을 개의치 않고 꺽이는 것을 거부한다[.....]
유명한 야스다 강당 낙서중 일부다. 원래 이 문구보다는 "연대를 구해~~~~"뭐 이런 말 전체를 쓰기는 하지만 이번엔 이 일부분이 더 현실감 있어 보인다.
5월4일 전날 대추리로 들어가지 못한 관계로 아침부터 성명서 쓰고, 다른데 필요한 원고 쓰고, 11시 국방부로 갔다. 국방부 집회를 마치고 평택으로 이동 본정리 앞에 도착하니 민주노총 방송차량을 이용한 집회가 한창이었다.
집회장인지 종합병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머리에, 이마에 붕대를 감은 사람, 팔에 깁스를 한사람. 여기저기 피멍이 든 사람 투성이었다.
집회 참석 중 다른 사람들과 할 이야기가 있어 정신 없이 왔다 갔다 하다보니 군사차량이 대추리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잠시 정신이 없어서 다른 일을 하고 마침 지나가는 안면 있는 두 동지들에게 반 농담, 반 진담으로 우리는 못들어가는데 저차들은 왜 들어가야 하느냐? 왜 그냥 두느냐고 했다. 두 동지는 그걸로 이미 한판 했다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대추리로 다시 들어간다고 해서 인사를 나누고 돌아섰다.
그 때까지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순간 머리가 돌아버리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여기에 왜 와있는가? 집회는 왜하는가?
유혈군사작전, 군사기지반대 투쟁을 하고 있는데 군사작전차량이 옆을 버젓이 통행하고 있는데 집회는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알고 있던 동지들과 군용트럭을 막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후미에 있던 집회 참석자들도 동의하고 나섰다.
역시나 기동대, 정보과 등등 **같은 인간들이 왔다. "다 이야기 된 것이니 길을 열어라. 지도부와 이야기 했다."
물론 우리들 입에서 돌아간 말은 있는 그대로 상상하시라. 결국 3차례 협박 "연행하겠습니다. 연행하겠습니다. 연행하겠습니다"를 던진 후 돌아가자. 기동대들이 한쪽 차선으로 전진하기 시작했고 집회대오와 충돌이 생겼다.
다음 그림은 당연하게 민주노총 관계자분들이 오셨다. 집회를 하기 위해서 합의했다. 총연맹하고 **당하고 **단위 대표자들이 결정했다는 것이 주요한 이야기의 요지였다. 누구를 위한 합의냐? 집회를 해서 뭐햐냐? 경찰이 밀고 들어오느것 안보이냐? 등의 질문에 그분들 말씀이 차를 막으니까 경찰이 오느것 아니냐?
그러면 집회를 못하니까? 타협한것 아니냐?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군대 차량 스스로 후진하고 돌아가서야 사태는 진정되었다. 물론 사태가 끝난 후 경찰 지휘관이 차량저지한 사람 찾아내 체포하라는 말에 긴장되긴 했지만.....
피범이된 황새울 들판을 지척에 두고 군사작전 차량을 들여보내는 것이 내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그 차량은 어디로든 들어갈 차량이고 모든 길을 우리가 막을 수도 없다. 거기서 길을 막아봤지 경찰에 의해 연행되거나 해산당할 것도 뻔하다. 그 민주노총관계자 말처럼 집회를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을 두고 좌익모험주의는 한탕주의니, 장기적인 계획이 없느니 하는 것은 맞지 않다.
모든 것에 힘 다할 수도 없고 모든 것을 다 이룰 수도 없다. 단순하게 쇠파이프를 들었냐 안들었냐, 화염병이 나왔냐? 물리력을 써서 승리했느냐가 강력한 투쟁, 원칙적인 투쟁을 판단하는 기준은 분명 아니다.
그 당시 원칙적인 투쟁은 내 힘다하지 못하고, 내 눈 미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내 눈 앞에서 벌어지는 군사작전을 묵인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지음님의 [고진주의자가 되다] 에 관련된 글.
지난해 읽고 나서 아직도 정리를 못하고 있다. 게시판에 "용감하게 책 읽기"를 만들고 첫 정리로 생각했는데 지음의 글을 보고야 한번 진짜 용감하게 고민을 정리해 본다. 잘 될지는 모르겠다. 읽기도 어렵게 읽고 시간도 3개월이상 이나 지났다.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가라타니 고진의 "맑스주의 그 가능성의 중심.."이라는 책도 흥미 있는 책일 것이다.
트랜스 크리틱을 읽고 나서 칸트와 맑스의 연결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 했을 때 누군가 읽오보라고 권해준 책이다. 고진의 사상적 괘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언제 읽을 수 있을지 참 요원하다.
나는 이책에서 칸트에 대한 부분이 난해함으로 다가오는 반면 맑스는 여전히 어려운 부분으로 다가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맑스 이야기는 들어 봤다는 정도다. 그리고 결론에 대해서는 그 이행 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이책을 부정적으로 읽지는 않았다. 굉장히 흥미진지하게 읽고 생각할 지점도 많았다. 다만 내가 정리할 능력이 안되고 책을 읽고 바로 정리하지 않아서 이미 책에 대한 내용이 다 날아가 버렸을 뿐이다.
오히려 이전에 해왔던 현실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하게 되었다. 90년대 중반부터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과 운동의 전화와 혁신을 고민하면서 토론했던 느낌이 담겨 있기도 하다.물론 여러 수준에서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그 수준이라는 것은 누구(고진과 "우리")의 지적수준이 우세하느냐가 아니다. 체제변혁적인 중심인가 관계변화적인 중심인가일 뿐이다. 그리고 이 지점도 단순하게 내가 생각하는 문제일뿐 고진의 사상을 내 맘대로 "개랑"이리 이런 언어로 평가절하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럴 문제도 아니다.
아무튼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를 다시 정리해보아야 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핵심적인 문제는-이 지점은 이전부터 나왔던 이야기인데, 가라타니 고진의 발생인지 고진이 다른 곳에서 차용한 것인지 몰라도-코페리니쿠스적 "전회"라는 부분이다. 전회(회전, 자리바꿈)이라는 이 어렵게 쓴 쉬운 말은 칸트가 차용가능느냐, 맑스를 올바르게 해석했느냐 이전의 문제설정이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립지점은 천동설 수준의 과학의 발전에서, 즉 양적전화에서 지동설이라는 질적전화로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발상자체와 과학의 입장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었던 지점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은 고전적으로 양질전화의 법칙을 사회와 역사의 발전경향에 대한 대입으로인류 역사가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할 것이라는 목적론-경제결정론의 시각을 다시한번 교정시켜 준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안에서는 자본주의적으로 생활하고 움직이면 공산주의는 요원하다는 것이다. 그 꿈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서는 코페리니쿠스의 전회처럼 자본주의가 아닌, 자본주의와 다른 체제로 "자리바꿈"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지금까지와 다르게 다른 시각으로 칸드를 돌아보고 새롭게 해석할 부분을 새롭게 해석해서 맑스와 연결시킨다고 볼 수 있다. 제목 trans와 <cri·tique〔〕 n. (문예·미술 작품 등의) 비평, 평론>의 합성어인 것도 아마 이런 이유이지 않을까!
그런 전회를 위해서 칸트가 기존 사상에서 뛰어 넘으려 했던 지점을 그리고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는데 필요한 도덕성을 찾아 새롭게 해석하고 맑스의 상품과 자본 잉여가치에 대한 과학과 연결시키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아마 근대 최고 과학적 성과이자 혁명적 사상을 살리는 것은 그 과학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학이 확장되고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하나하나 만들어 가야 한다.
그 방편 즉, 고진이 칸트와 맑스의 자리바꿈을 통해서 얻은 결론,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 넘어서는 새로운 혁명적 자리 바꿈을 가져가는 운동으로 제시하는 것이 대안화폐운동과 노동(자)소비자 운동이다.
이것을 가능성이나 편견을 배제하고 본다면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내는 문제라고 본다. 자본의 축적은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거치면서 형성이 되는데 상품이 생산되고 이윤이 축적되는 그리고 잉여가치가 착취되는 공간이 있다면 이런 것이 가능한 순환구조라는 시간 흐름이 있다.
우리 사회를 아주 단순한 사회구조라고 보았을 때 이런 흐름은 착취가 없는 공동체 경제라는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며 상품과 자본의 시간적 순환의 고리를 끊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소비자 운동, 고진이 이야기하는 노동자로서 소비자운동이 무엇인지 이전에 대중적 반감과 거부감이 심한 것은 분명하다. 또 그 가능성도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다고 본다. 이와 함께 생태운동이나 다른 사회운동과 결합되면서 그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다고 고진은 보는 듯 하다.
소비자라는 언급은 여러 논쟁의 여지가 있고 나 또한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 그것은 나중의 문제다. 나는 혁명, 혁사, 사회주의 이런 언어적 유희를 즐기는 사람들이 느끼는 거부감과는 좀 다른 거부감이 있다. 그것은 고진이 말하려고 했던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다른 체제를 바로 실천하는 것이 소비관계만의 문제로 구축이 가능한가이다.
또한 신자유주의 체제(축적체제)가 근본적으로 이윤율의 지속적인 하락 속에서 금융부문의 확장을 통해서 그것을 상쇄(왜곡 위장)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즉 고진의 말대로 잉여가치는 노동자가 상품을 생산하는 순간이 아니라,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그 상품을 소비(구입)하는 순간 생긴다는 주장은 자본주의가 자신을 재생산할 이윤을 상품관계에서 끌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 되면서 생산부문(물질적확장)을 통한 이윤추구는 사실상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점을 더 고민해 보아야 한다.
검소하고 청빈한 삶, 자본주의 관계 밖으로 과감하게 탈출해서 새로운 시스템으로 살고자하는 그 자체로 자본주의 붕괴시키는 혁명적 운동을 생활 속에서 진행할 노동자가 얼마 나 존재하지에 대한 의문도 고진의 문제의식에 동의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지점 중 하나다. 그것은 노동자의 지적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운동 또한 문화적 감수성이 필요한데 노동자계급에게는 이런 문화적 감수성마저 빼앗겨서 표출하기 어려운(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점이 있다. 그래서 소수의 운동으로 제안될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노동자 민중이 펼쳐나가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한 문제다.
아무튼 공산주의가 미래의 도달할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서의 운동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나로서는 여러가지 경우의 수와 비판적인 지점이 있지만 고진의 주장은 새겨볼 만하다고 본다. 현실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중요성을 주장한 댓가로 단계론을 폐기하고 단계로서의 피티독재를 폐기했지만 피티독재 자체를 폐기한 것으로 오해 받아온 시간이 있었고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문제는 내가 인정받느냐 오해를 푸느냐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서 어떻게 운동하고 새로운 시스템-그것이 안되면 관계라도-을 구축하려고 하느냐이다. 그것을 위해서 고진을 받들지는 않아도, 고진의 이야기에 재미를 붙여 보는 것은 많은 활동가들에게 유의미 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이런 문제의식을 확장하는데 역사발전 5단계론의 시각이 아닌 다른 시각의 역사해석 소위 "문명사"에 대한 고민을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전혀 딴 소리 같고 생소하겠지만 내 기준으로 고진의 문제의식 속에는 고진의 의도와 무관하게 맑스와 엥겔스의 5단계론을 비판하면서 공산주의운동의 현실운동, 현실 가능성에 주목이 있다.
이것은 맑스 스스로도 공산주의를 현실에서의 운동이라고 했으면서도 5단계론을 펼친 것에 대한 고민(그 조건)에서 우리 안에 있는 서구 중심 사고를 벗어나야 하는 점이기도 하다.
이런 지점은 문명사와 관련한 책, "총, 균, 쇠" 가 읽을만 하다고 한다. 또 유목민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목민의 역사는 여러 해석의 차이가 있어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새로운 문명이 기존의 문명을 대체한다는 점에서 역사발전이 단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중앙과 변방에 동시대 적으로 존재하고 상호 경쟁, 투쟁하는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사회가 발전하는 지 역사가 흐르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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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뻐꾸기님의 [한 협력업체 아줌마 노동자의 두 가지 병] 에 관련된 글입니다.
사실 많은 남성들은 사회운동을 하는 활동가이건, 노동조합 간부이건 깨어 있는 지식인이건, 여성권의 문제에 대해 완벽한 이해를 얻기 힘들어 보입니다.
저도 남성이지만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있는 것을 현실에서 부딪힐 때 그대로 실천할 자신이 없습니다. 가사노동의 경우 그나마 노력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결국 자기가할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도와준다는 사고가 크기 때문이지요.
이런 구조는 아주 일반적인 가정에서는 더 심하겠지요. 그러니 여성노동자가 현장에서 노동권을 쟁취하는 것은 고사하고 가정에서 여성의 권리를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것이 힘든 것 아닐까하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현장에서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를 찾아가고자 하는 주체의 가능성이 가정에서부터 억압당한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잘은 모르지만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가족의 역할을 계속 강조하는 건 아닐까요?
이중의 역할을 지워주면서 저항할 기력마저 빼앗고 그런 이중의 역할을 근거로 여성노동을 열등하게 치부하고......
노동하는 인간이 편히 쉴 수 있는 세상, 좀더 정확하게 피폐해지지 않고 노동할 수 있는 세상이 언젠가는 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가져 봅니다.
이도 아니면 여성도 노동으로 지친 육체와 정신을 (가정에서(?))편히 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이것이 처음이자 끝이 아닐까요?
댓글 목록
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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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훈훈하게 사회운동포럼을 회상할 수 있었어요.하이하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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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처럼/ 고마워요! 몇 안되는 방문자이자, 덧글 남겨주시는 분이네요. ㅋㅋ 이참에 블로그 한번 만들어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