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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 붕괴 후, 부와 권력의 '강남'이 등장했다

 
[강남공화국의 민낯15] 강남과 강북의 단절

17.10.15 11:02 | 글:전상봉쪽지보내기|편집:장지혜쪽지보내기

1994년은 대형 사건사고로 얼룩진 해였다. 그해 1월 4일 경북 달성취수장 수돗물에서 악취가 나면서 시작된 낙동강 식수오염사고는 1월 6일 경남 마산의 수돗물에서, 1월 8일 부산의 수돗물에서 악취가 발생하는 사고로 이어졌다. 석 달 뒤인 4월 12일에는 전남 목포의 몽탄정수처리장 상류에서 물고기 수천마리가 폐사하는 오염사고가 발생하여 국민들을 불안케 했다.

그해 5월 19일 새벽 0시께, 서울 강남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끔찍하게 살해한 후 집에 불을 지른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을 저지른 박한상은 100억 원대의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자신의 부모를 끔찍하게 살해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믿을 수 없는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사람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 대형 사건사고로 얼룩진 1994년 7월 8일 북한 주석 김일성이 사망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 자료 촬영 ⓒ 전상봉

기상 관측 사상 최고의 무더위가 전국을 달군 그해 여름, 북한의 절대 권력자 김일성이 사망했다. 대통령 김영삼과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던 7월 8일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사망이 소식이 전해지자 큰 파장이 일었다. 민주당 국회의원 이부영이 국회 정보위에서 정부 차원에서 조문단을 파견할 의향이 없는지 질의하자 민자당과 보수언론은 이를 빌미로 한바탕의 조문논쟁을 일으켰다.

추석을 하루 앞둔 9월 19일 지존파 조직원 5명이 검거됐다. 지존파 일당은 사회 불만과 부자에 대한 증오심으로 무고한 시민들을 납치 살해하는 연쇄 살인사건을 저질렀다. 이들은 아지트에 창살 감옥과 시체 소각시설을 만들어놓는가 하면, 사체를 토막 내 인육을 먹는 엽기적인 연쇄 살인 행각을 벌여 온 나라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해 세밑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12월 7일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서 가스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는 지하철 건설 공사를 하던 중 가스저장소의 가스관을 잘못 건드려 일어났다. 마치 폭탄이 투하된 것처럼 사고 현장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날 사고로 12명이 사망하고 60여 명이 다쳤으며 6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서울 정도 600년
 
▲ 1993년부터 서울시는 정도 600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이원종 서울시장(가운데)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정도 600년 기념 조형물 제막식 모습. 서울도서관에 전시된 사진을 촬영했다. ⓒ 전상봉

1994년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한지 600년이 되는 해였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1394년 8월 도읍지로 한양을 낙점하고, 그해 10월 25일 개경을 떠나 10월 28일 한양에 당도했다. 한양에 도착한 이성계는 가장 먼저 종묘와 사직을 짓고, 법궁인 경복궁을 건설한 다음 한양도성을 쌓았다.

서울시는 1993년부터 대대적인 정도(定都) 60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했다. '서울, 그 새로운 탄생'이라는 모토 아래 '정도 600년 사업 특별위원회'를 결성하는 한편, 그해 11월 29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 6백년 자료전'을 개최했다. 또한 경희궁 터에서는 서울역사박물관 건설을 위한 기공식이 열렸다.
 
▲ 남산한옥마을에 매설된 ‘서울 1000년 타임캡슐’은 보신각종을 본떠 높이 1.7m, 직경 1.3m 크기로 만들어졌다. 600점의 물품을 담은 타임캡슐은 정도 1000년이 되는 2394년 개봉될 예정이다. ⓒ 전상봉

'서울 1000년 타임캡슐' 매설 행사는 시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사업이었다. 1994년 11월 29일 남산한옥마을에 매설된 '서울 1000년 타임캡슐'은 보신각종을 본떠 높이 1.7m, 직경 1.3m 크기로 만들어졌다. '1994년 서울의 인간과 도시'라는 주제로 600점의 물품을 담은 타임캡슐은 정도 1000년이 되는 2394년 개봉될 예정이다.

8.15해방과 한국전쟁, 그리고 경제개발이라는 격동의 세월을 거치면서 서울은 폭증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몸부림친 도시였다. 정도 600년 행사는 부수고, 짓는데 골몰했던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는 계기였다. 동시에 경제성장과 민주화라는 성과 속에 치러진 정도 600년 행사는 서울의 역사적 가치와 인문학적 탐색을 시작한 하나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정도 600년 행사는 수도 서울의 역사를 한성백제(위례성)로 소급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서울시가 정도 600년 사업을 추진하자 일부 학자들은 수도 서울의 역사는 2000년이라는 반론을 펼쳤다. 그후 1997년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풍납토성에서 한성백제 유적과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수도 서울의 역사는 600년이 아닌 2000년으로 공인 받게 되었다.

운명의 날, 1994년 10월 21일

정도 600년 기념일을 일주일 앞둔 1994년 10월 21일 충격적인 사고가 발생했다. 그날 아침 7시 40분께 성수대교 10번과 11번 교각을 잇는 상판 48m가 붕괴한 것이다. 다리가 붕괴하면서 그 위를 달리던 승합차 1대와 승용차 2대가 상판과 함께 추락했고, 또 다른 승용차 2대는 물속으로 떨어졌다.

인명 피해가 커진 것은 다리 위를 달리던 한성운수 소속 16번 시내버스가 추락하면서다. 다리 상판이 떨어져 나간 지점에 걸려있던 16번 버스는 차체가 뒤집히면서 상판 위로 추락, 다수의 인명 피해가 났다. 차체가 심하게 찌그러지면서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버스 추락으로 사망한 사람은 24명으로, 그중에는 무학여고 학생 8명과 무학여중 학생 1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날 사고로 총 3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당했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사고가 발생하자 국무총리 이영덕이 사임했고, 서울시장 이원종은 경질됐다. 그리고 사흘 뒤인 10월 24일 대통령 김영삼은 특별담화문을 발표하고 국민들에게 사과했다.
 
▲ 시민들의 불안감 해소를 위해 정부는 기존 성수대교를 철거하고 재건했다. 다리를 다시 짓는 데 들어간 공사비는 780억 원으로 처음 건설했을 때의 공사비(116억 원)보다 약 6.7배 많은 비용이 들어갔다. ⓒ 전상봉

성수대교는 1970년대 영동 신도시 개발에 따른 서울 동부권의 균형 발전과 강남을 부도심권으로 육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1977년 4월 착공해 1979년 10월 16일 준공됐다. 길이 1161m, 너비 19.4m의 4차선(그후 8차선으로 확장)으로 건설된 성수대교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잇는 다리이다.

성수대교는 교량의 기능에 더해 외관에도 신경을 쓴 첫 번째 다리이기도 했다. 성수대교 이전에 세워진 교량들은 공법이나 구조상의 특징보다는 기능과 건설비를 줄이는데 급급했다. 그에 비해 성수대교는 외관의 조형미를 고려하여 콘크리트 교각 위에 건설용 강철인 강재로 구성된 상부 트러스를 얹어 만들었다.

성수대교는 이전에 건설된 교량에 비해 교각과 교각 사이가 넓었고, 다리 남단과 북단을 연결하는 진출입로가 입체적으로 구성됐다. 여기에 더해 주변 환경과 조화를 위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파란색으로 도색됐다.

그런데 문제는 기술력이었다. 당시 기술력으로는 트러스 구조물을 완벽하게 시공할 수 없었다. 시공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상부 트러스 철골 구조물은 허술하게 설치됐고, 차량의 하중을 분산시키는 이음새 또한 부실하게 연결됐다. 결과적으로 외관에 신경을 쓴 성수대교의 트러스 공법이 사고를 일으킨 주된 원인이 됐다.

군사작전을 펼치듯 완공기한을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강행한 공사도 사고를 부추긴 또 다른 원인이었다. 게다가 미래의 교통수요를 적절히 예상하지도 못했다. 성수대교가 개통될 당시 12만3000대였던 서울시내 차량은 사고가 난 1994년에 이르면 190여만대로 증가했다. 특히 1980년대 말 노원구 상계동에 대규모의 아파트단지가 건설되면서 성수대교의 교통량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여기에 더해 통행 허용 한도인 32.4톤을 초과하는 과적차량이 오가면서 하중이 더해졌다. 과적차량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다리 안전을 관리하는 시스템은 아예 작동하지 않았다. 그 결과 피로 균열이 발생하여 다리 상판이 붕괴하는 실로 믿기지 않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강남과 강북의 단절
 
▲ 1997년 10월 21일 유가족들은 희생자를 기리고 사고의 재발 방지를 염원하면서 ‘성수대교 사고 희생자 위령비’를 세웠다. ⓒ 전상봉

32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성수대교 붕괴 사고는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이면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또한 제대로 된 기술력이 밑받침되지 않은 채 부실공사로 지어진 건축물이 어떤 재난을 낳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참사였다.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다리였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잇는 성수대교의 붕괴는 강남과 강북의 단절을 의미했다. 서울시가 1972년 2월 강남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강북 도심을 특정시설 제한구역으로 지정하면서 강북은 노후화의 길을 걸었다. 그 결과 강북은 낙후된 곳이 되어 오랜 세월 누려왔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강남에 넘겨줬다.

강남과 강북의 지위가 뒤바뀌자 강남·북 균형발전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서울시는 강남과 강북의 격차를 완화할 목적으로 1990년 1월 강남·북균형발전종합대책을 발표했다. 강남·북균형발전종합대책의 주요 내용은 △4대문 안의 도심 및 부도심(신촌·청량리·영등포·영동·잠실) 등 58개 지구를 생활권역별 자족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발, △4대문 안의 재개발지구의 건폐율을 강남과 동일하게 60%로 완화, △도심 내에 주거복합건물, 액화석유가스 판매·충전업소, 일반유흥업소, 위생업소 등의 신설과 이전에 대한 규제 완화, △강북 소재 고등학교의 강남 이전 금지 등이었다.

그러나 강남·북균형발전종합대책은 체계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강북지역에 관련 시설의 확충과 생활환경 개선을 위한 관계 법령의 정비와 서울시의 예산 편성이 뒤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실행된 것은 강북지역의 용적률 완화, 시설입지제한 완화, 도심 재개발 시 주거복합인센티브 제공 등에 불과했다.

강남과 강북의 격차가 한강보다 넓고 깊게 패여 있는 상황에서 서울시의 몇 가지 대책만으로 균형발전이 실현될 리 만무했다. 강남·북의 격차가 현저해지는 상황에서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 사고는 강남과 강북의 단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이날 사고 이후 한강 남쪽을 의미하는 강남은 사라졌다. 대신 경제적 부와 권력과 특권을 상징하는 강남이 등장했다. 어쩌면 성수대교의 붕괴는 강남과 강북의 넘나들 수 없는 격차를 드러내 보인 상징적인 사건인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전상봉 시민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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