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르포
서민들의 전쟁터 ‘소액사건 재판정’
소송금액 3000만원 이하 민사사건을 소액사건이라고 한다. 소액이라지만 한푼이 절박한 서민들은 사활을 건다. 게티이미지뱅크
소송금액 3000만원 이하 민사사건을 소액사건이라고 한다. 소액이라지만 한푼이 절박한 서민들은 사활을 건다. 게티이미지뱅크

 

▶ 개인 간 다툼이 해결되지 않을 때, 우리는 법원으로 갑니다. 그래서 법원은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과 억울함이 한곳에 모이는 현장이기도 합니다. 서민들의 삶과 가장 가까운 법정, 소액사건 재판정을 들여다봤습니다. 소송금액의 많고 적음이 억울함의 크고 작음과 비례하진 않았습니다.

 

 

 

 

 

소송금액 3000만원 이하 재판 
한푼 절박한 서민들의 다툼이라
대리인 없는 나홀로 소송도 많아
“절차 묻거나 신세한탄만 하기도”

 

 

‘고분쟁’ 사건은 집중심리부 배당
최근 펫분쟁·소비자권 증가 추세
“분쟁 과정에서 상처가 낫기도
양쪽 자존심 세워주는 게 중요”

 

 

 

 

“판사님, 저는 돈을 안 준 적이 없어요. 답변할 가치를 못 느낍니다.”(이아무개)

 

“아니 정말, 외상돈 안 준 거 맞잖아요! 술 드시고 나서 본인이 낼 이유 없다며 안 냈잖아요.”(박아무개)

 

지난해 11월17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의 한 법정에서 고성이 터졌다. 1년 넘게 못 치른 술값 100만원 때문이다. 술집 주인 박아무개씨와 평생 외상이라곤 해본 적이 없다는 손님 이아무개씨의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5분째 이어지는 공방에 판사가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만 말씀하셔도 되겠다”, “예 또는 아니요로 답하라”는 말로는 조율되지 않았다. 박씨가 이씨 서명이 담긴 계산서를 내밀었다. 처음에 “기억나지 않는다”던 이씨는 “내 서명은 아니지만 필체는 맞는 것 같다”며 꼬리를 내렸다. 이번엔 이씨 쪽이 카드 결제내역을 제출하겠다고 했다. “항상 카드를 이용하기 때문에 돈을 안 줬을 리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해줄 자료라고 했다. 이들은 재판이 끝난 뒤에도 법정 밖에서 한마디씩 주고받았다. “외상하고 거짓말하고, 그러는 거 아니죠, 아휴.” “단골인데 내가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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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형, 괘씸형, 정의형… 민원실 된 법정

 

 

소송금액 3000만원 이하 소액재판 법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소액이라고 하지만 한푼이 절박한 서민들은 사활을 건다. 재판이 끝난 뒤에도 판사실에선 ‘서류전쟁’이 일어난다. 소액재판은 보통 1~2분 안에 끝나는 까닭에 법정에서 못다 한 말을 서면에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 낸다.

 

소액재판 상당수는 대리인 없이 ‘나홀로 소송’으로 진행된다. 2016년 전국 법원에서 처리된 소액사건 67만7024건 가운데 대리인이 없는 사건은 56만8783건(84%)이나 됐다. 일부 소액사건은 변호사가 아닌 사람도 법원의 허가를 얻어 대리할 수 있다. 서면 한 건에 적어도 10만~20만원씩 하는 법조타운 물가가 이들에겐 적잖은 부담이다. 결국 전문가의 코칭을 받지 못한 이들은 법리주장을 논리정연하게 펼치기보단, 감정적 호소나 정돈되지 않은 주장을 앞세울 때가 많다. 저마다 억울하다고 호소하고, 상대방에 대한 원망을 토해내는 식이다.

 

“가라(가짜) 증거 내놓지 말라”, “어거지(억지) 쓰지 말라” 같은 말도 심심찮게 튀어나온다. 고성과 삿대질이 오가며 법정이 왁자지껄한 시장통으로 변하기도 한다. 법조계에서 소액재판 법정은 ‘민원실’로 불린다.

 

이들이 법원에 오는 이유도 각양각색이다. 신뢰를 저버린 상대방이 괘씸해서 법원 판단을 구하는가 하면, 공공의 이익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정의형’도 있다. ㄱ결혼정보회사와 소송 중인 김아무개(45)씨도 “또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 소송을 낸 경우다. 그는 2014년 9월 10차례 만남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290여만원을 냈다. 6차례 만남 끝에 김씨는 회사 서비스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판단하고, 서비스 중단과 함께 남은 가입비 95만원 상당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ㄱ사로부턴 이미 횟수를 다 채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ㄱ사는 “5차례 만남에 290만원을 지불한다”고 쓰인 계약서를 내밀었다. 개별상담을 통해 10차례 만남을 약속받은 그는 답답할 노릇이었다. 결국 그는 지난해 5월 소장을 썼다. 회사의 ‘기망행위’를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전 처음 해보는 소송은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법리적으로 정리해 오라”는 판사의 지적을 받고 헛걸음하기 일쑤였다. 김씨는 틈틈이 대한법률구조공단과 한국소비자원 누리집을 찾아 소송절차를 익혔다. 인터넷에 있는 준비서면 예시를 보며 서면 쓰는 법을 연습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11일 공성봉 판사 심리로 열린 7번째 재판.

 

“원고가 청구취지를 많이 정리해 오셨네요.”(판사)

 

“법적 근거를 들라고 해서 나름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처음에는 손해배상인 줄 알았는데, 가입비를 내고 제공받지 못한 서비스에 대한 부당이득금 반환으로 봐야 할 거 같네요.”(김씨)

 

“피고는 5차례 만남이 다 소진됐다는 주장인데요.”(판사)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계약서에 5회라고 쓰여 있어도, 서비스 제공자와 별도 합의한 게 10회이면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돼 있습니다.”(김씨)

 

“…계약서에 5회라고 명시돼 있습니다.”(ㄱ회사 대리인)

 

“계약서를 깔끔하게 하시지 그랬어요. 분쟁의 여지를 남기셨네요.”(판사)

 

이번엔 회사 쪽이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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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1건당 1분30초 ‘시간과의 싸움’

 

 

김씨 같은 이가 흔치는 않다. 대부분은 까다로운 법률 용어에 익숙지 않다. 소송을 당한 피고의 경우 사정은 더하다. 예고 없이 날아드는 소장에 까막눈인 경우가 많다. 지난 24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2별관 203호 법정에 피고로 선 박아무개씨도 비슷한 처지였다.

 

“이쯤에서 제가 종결하고 판결 선고하는 게 어떨까 하는데요.”(장동민 판사)

 

“판결 선고하신다는 게 뭐예요?”(피고 박씨)

 

“계속 이 사건을 할 수 없으니까 제가 판단을 하는 거죠.”(판사)

 

“판단하시는 근거가 어떻게 되는데요?”(박씨)

 

“원고 말이 맞는지, 피고 말이 맞는지, 누구 주장이 더 타당한지 보는 거죠. 판단한단 얘기는 판결을 선고한다는 뜻이에요.”(판사)

 

“판단하신 다음에 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요?”(박씨)

 

“원고가 이기거나 피고가 이기거나 둘 중 하나로 결론이 날 텐데, 당연히 한쪽이 불복할 수 있죠. 그러면 또 재판을 받아볼 수 있어요. 우리나라는 3심제거든요. 저 말고 다른 판사님들이 다시 또 재판을 하는 거예요. 다만 기간 제한은 있죠. 2주 내에 내셔야 돼요.”(판사)

 

“그럼 저는 계속 서울로 와야 하나요?”(박씨)

 

“(항소하면) 그렇죠. 선고 날에는 안 나오셔도 되고요, 판결문은 집으로 보내드립니다.”(판사)

 

그나마 박씨는 친절한 판사를 만난 편이다. 법정 밖에서 만난 이들 상당수는 법원을 못마땅해했다. “법리 주장만 정리해 오라면서, 방법은 알려주지 않는다” “회사에 연차휴가를 내고 왔더니 2~3분 만에 재판을 끝낸다” “판사가 서면을 안 읽어보고 재판하는 것 같다” “판사면서 말을 들어주지도 않는다”는 식의 불만이다.

 

판사들도 할 말은 있다. 주요 기관 사건을 포함해 전국 사건이 집중되는 서울중앙지법의 소액 일반사건 판사들은 한달 평균 850건(일반사건 450, 금융사건 400)을 처리한다. 일주일에 한번 재판을 열어 150~200개 사건을 심리하는데, 15분마다 10개 사건을 잡아둔다. 한 사건당 평균 1분30초를 할애하는 셈이다.

 

“소송절차를 꼬치꼬치 묻거나 무턱대고 신세 한탄을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최대한 들어주려 하지만, 이런 질문에 일일이 답하다 보면 재판이 진행되지 않을뿐더러 상대방의 반발을 살 수도 있어요. 한쪽 말만 경청한다는 의심이죠. 이러다 보면 판결에 대해서도 승복하지 못하게 되고요. 판사가 직접 나서기보다는 법률 전문가에게 의뢰하도록 방법을 알려주는 편이 적절하죠.”

 

한 소액재판부 판사의 말이다. 다만 법원도 충분히 당사자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둔다. 고분쟁 사건, 감정 및 증거조사 등 집중심리가 필요한 사건은 소액 집중심리 재판부로 재배당한다. 법조경력 10년 이상의 경력법관이나 법원장을 역임한 원로법관이 시간에 쫓기지 않고 사건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도록 한다. 2018년 1월 현재 서울중앙지법엔 6개 집중심리부가 있다. 이밖에 서울동부·남부·서부지법, 대구·인천·광주지법 등에서도 집중심리부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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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 거듭하는 집중심리…끝까지 간다

 

 

일반 소액재판이 시간과의 싸움이라면, 소액 집중심리부에선 한치 양보 없는 승부가 시작된다. 앞다퉈 감정을 신청하거나 증인신문을 요청하느라 1년을 훌쩍 넘기는 재판도 적지 않다. 다른 분쟁조정기관에서 해소되지 못한 사회적 갈등이 집중되는 곳이기도 하다. 예전에 흔치 않았던 층간소음 분쟁,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대화방에서의 명예훼손 문제, 전자담배 관련 분쟁도 접수된다.

 

요즘 소액 집중심리부 판사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으는 것은 ‘펫 분쟁’이라고 한다. 반려동물과 동거하는 인구가 늘어나고,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대하는 분위기가 퍼지면서 관련 소송도 늘어나는 추세다.

 

2016년 가을 주말을 맞아 반려견과 함께 주택가 산책을 즐기던 김삽살(가명)씨는 뜻밖의 봉변을 당했다. 나진돗(가명)씨 집 마당에 있던 대형견이 대문의 문틈으로 주둥이를 내밀어 삽살씨 반려견의 다리를 문 것이다. 삽살씨 개는 곧바로 치료를 받았지만, 한달 뒤 죽었다. 삽살씨 쪽은 개 치료비와 자신의 정신적 충격에 따른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반려견을 잃은 자와 반려견을 지키려는 자의 양보 없는 다툼이 시작됐다. 진돗씨는 삽살씨 개가 문틈으로 먼저 발을 집어넣은 잘못이 있다고 버텼다. 진돗씨 쪽에 잘못이 있다고 해도 삽살씨가 남의 집 주변에서 조심하지 않은 탓도 있으므로 한푼도 줄 수 없다고 버텼다. 삽살씨 개가 사고가 아닌 지병 때문에 죽었다고도 강조했다. 삽살씨는 진돗씨가 쪽문을 열어놓는 등 문단속을 소홀히 해서 사고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판사가 주목한 것은 문틈의 너비였다. 진돗씨네 집 대문의 문틈이 주둥이 크기보다 더 넓었다. 주둥이를 내밀 충분한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진돗씨 개가 삽살씨 개를 물었을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다. 게다가 개가 집 안에 있었다고 해도, 줄에 묶어두지 않고 조심하지 않은 책임도 있다고 봤다. 판사는 진돗씨가 삽살씨에게 치료비와 위자료의 일부인 50만원을 주라고 판결했다. 이밖에 개물림, 동물 의료사고, 애견카페 관리 소홀로 인한 안전사고도 빈번히 접수된다고 한다.

 

부쩍 성장한 소비자 주권이 수년간의 송사로 번진 사연도 있다. 홍수산(가명)씨는 2014년 서울의 한 수산시장에서 강경남(가명)씨로부터 멸치를 구입했다. 부산에서도 해산물로 유명한 기장군 멸치라는 말에 큰맘을 먹고 10만원 가까이 투척했다. 하지만 만족감은 얼마 가지 못했다. 수산씨가 기대한 만큼 멸치가 맛있지 않았던 것이다. 싱싱한 해산물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다고 자부하는 수산씨는 경남씨가 냉동멸치를 판 것이라고 의심했다. 사정을 따져 보니, 경남씨가 ‘부산멸치’를 ‘기장멸치’로 판 것이었다. 수산씨는 배신감에 휩싸였다. 누군가 자신처럼 속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산씨는 ‘원산지 표시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며 경남씨를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경남씨는 2년여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이번엔 경남씨가 역공을 펼쳤다. 수산씨를 상대로 2500만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수산씨가 무턱대고 자신을 고소하는 바람에 형사사건 피고인이 돼 시간을 허비했고,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는 게 경남씨 주장이었다. 수산씨는 억울할 따름이었다. 오직 공익적으로 생각했을 뿐, 경남씨한테 보상받은 적도 없고 그를 고소해 자신이 얻은 경제적 이득도 없다는 게 수산씨 입장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대리인을 선임해 치열하게 다퉜다. 경남씨의 ‘잃어버린 2년’이 수산씨의 ‘공익제보 자부심’과 맞붙은 참이었다.

 

법원은 수산씨 손을 들어줬다. 상소를 거듭해 형사재판이 길어진 것이 수산씨 잘못이 아니라는 호소도 판사의 공감을 샀다. 양쪽 모두 항소하지 않아 이 판결은 확정됐다. 비록 재판의 성격은 다르지만, 수산씨와 경남씨는 한 차례씩 승패를 주고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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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고 법정 나서기도

 

 

‘필사즉생’의 각오로 시작한 법정 다툼들이 모두 끝까지 가는 것은 아니다. 혈전을 불사할 각오로 법원에 왔지만, 조정이나 화해절차를 통해 갈등을 풀고, 서로 손잡은 채 법정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소액 집중심리부에 오는 재판은 다양하고 판례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법리공방이 아니라 자존심 대결을 벌이는 경우도 많죠. 양쪽의 자존심을 적절히 세워주는 게 중요합니다. 결론 그 자체보다는 재판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풀리거나, 마음의 상처가 치유돼 분쟁이 해결되는 경우도 많거든요.”(성기문 부장판사. 소액 집중심리부 원로법관)

 

대법원도 집중심리부를 늘리겠다는 계획이다. 대법원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전담법관이 고분쟁 사건을 맡으면서 재판 결과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높아지고, 소액 일반사건 판사들의 부담을 줄여주는 효과도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새로 충원되는 재판부는 가능한 한 집중심리부로 꾸리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