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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과 성을 다해 자주언론을 후원해준 박노익 선생을 추모하며

열과 성을 다해 자주언론을 후원해준 박노익 선생을 추모하며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8/02/03 [02:1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자주민보 후원인 박노익 선생     ©자주민보

 

▲ 박노익 선생이 어려운 형편에도 귀중한 후원금을 자주민보에 보내 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 애독자가 박노익 선생의 건강을 위해 써 달라면 보내온 성금 100만원을 당시 자주시보 이정섭 대표가 박노익 선생에게 전달하는 모습     ©자주민보

 

필자가 자주민보 기자로 활동하던 당시 박근혜 정부는 자주민보 전 기자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혹은 불구속 수사를 벌이는 등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한 바 있다.

 

그때 충주의 박노익 선생이 적지 않은 정성어린 후원금을 보내주어 그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북이 고향인 박노익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 고향을 등지고 남녘으로 피난 온 일을 두고 고향 사람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품고 평생을 살아왔는데 통일이 되면 산골이었던 고향마을에 수도를 놓아주기 위해 한 푼 두 푼 돈을 모았는데 그 돈을 자주민보 후원금으로 전해주었다.

 

하도 고마워서 틈나는 대로 충주에 들러 인사를 드렸는데 가서 보면, 한 겨울에도 전기장판 한 장에 의지한 채 두꺼운 조끼를 껴입고 생활하시며 정부에서 주는 생활보조금을 여러 통일운동, 시민운동 단체 후원금으로 보내주고 있었다.

 

그렇게 북녘 고향에 가고 싶어 자주민보, 자주시보에 올라온 미래과학자거리 등 북녘 사진을 일일이 프린트해서 보고 또 보고 하던 박노익 선생이었다.

 

그러던 박노익 선생이 더는 거동이 불편해져서 2016년 청주의 한 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인사를 드리러 갔었는데 "바쁠텐데 이런 곳까지 왜 왔냐"고 하면서도 그렇게나 반가워하였다.

싸들고 간 과일도 깍아드리고, 먹고 싶은 것 사 드시라고 용돈 좀 드리고, 말벗도 해드리다 다시 찾아오겠다며 인사드리고 나오는데 그렇게 두 손을 꼭 부여잡고 통일을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해 달라며 눈굽에 맑은 눈물이 어리었다.

 

그 뒤 찾아간다 간다 하면서 거의 1년 넘게 시간을 내지 못하다가 새해도 되고 해서 어제야 과일을 사들고 청주로 차를 몰았다. 

병원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퇴원을 했다고 알려주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가족들에게 전화를 해보니 몇 달 전에 별세했다고 알려주었다.

 

한 동안 귀가 멍했다.

 

몇 달만 먼저 왔어도 선생님을 뵐 수 있었을텐데...

얼마나 반갑게 손을 부여잡고 좋아하셨을텐데 한 없는 자책이 밀려왔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과 가족 친지들을 다시 못 보고 어찌 눈이나 제대로 감으셨을지...

왜 이다지도 분단이 길어지는지...

왜 이 찬란한 21세기에도 우리 민족은 이런 그리운 고향에도 못가고 보고 싶은 혈육들도 만나지 못하는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뜨거운 가슴을 삭힐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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