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함께 영화 <1987>을 보았다. 당시 대학생이던 남편은 1987년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이야기했다. 그해 경찰에 세 번 잡혔다는 남편의 이야기를 들은 초등학생 막내가 나에게도 물었다.
"엄마는? 엄마는 안 잡혀갔어?"
나? 나는 경찰에 잡힌 적이 없다. 게다가 그해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라 2년이 지나서야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본문
형사 조력자 된 선생님, 16살 소녀가 겪은 슬픔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엄마는 달리기 잘해서 한 번도 안 잡혔어."
영화 <1987>엔 등장인물이 많다. 그중 가장 눈에 잡힌 인물은 고 박종철 열사의 가족이다. 부검 장소에 뒤늦게 나타난 삼촌은 부검을 지켜보며 눈이 충혈된다.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면서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킨다. 도망가고 싶지만 도망갈 수 없는 자리가 삼촌이 선 자리였고 '운동권 가족'의 선 자리이기도 하다.
누군가 민주화 운동을 할 것인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운동권 가족'이 될 것인가는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다. 가족은 다만 당하고 견디고 버텨내야 한다. 수많은 가족이 모욕을 당했고 두려움에 떨면서 '운동권'을 뒷바라지했다.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다.
'운동권' 아들 뒷바라지 했던 엄마
엄마는 어느 날, 난생 처음으로 아들이 다니는 대학교 교수님의 전화를 받는다.
"지금 ○○이가 교정에서 미친X처럼 날뛰고 있으니 빨리 오셔서 데려가세요."
순진한 엄마는 그 전화를 받고 가슴이 덜덜 떨렸다. 가게 문을 닫고 자식을 잡으러 학교로 쫓아갔다. 그 뒤로 엄마는 전화벨만 울리면 한동안 가슴이 벌렁거렸다 한다.
어떤 날, 집에 왔는데 엄마가 없었다. 문 앞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는데 형사 아저씨 둘이 왔다.
"왜 안 들어가니? 열쇠 없니?"
아저씨가 물었다.
한 아저씨가 윗집 슈퍼에 다녀와서 또 물었다.
"슈퍼사장님 말씀이 너 방금 집에서 나왔다던데 열쇠 있으면서 우리 때문에 안 들어가는 거지?"
거짓말을 하는 아저씨의 모습이 너무 기가 막혔다. 슈퍼 아저씨가 없는 말을 만들어서 했을 리는 없으니 거짓말은 형사들이 하는 게 분명했다. 더 이상 말대꾸하기 싫어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 집으로 향했다. 아저씨들은 내 뒤통수에 대고 '버릇이 없네' 하는 말을 했다.
또 한번은 집에 압수수색을 하러 형사들이 닥쳤다. 형사들은 책장과 서랍을 뒤지더니 책 몇 권을 가져갔다. 그들이 가고 아버지는 책이란 책을 다 꺼내서 던져 버렸다. 집안엔 비명이 쏟아지고 물건이 부서졌다. 그 난장판은 결국 엄마가 치웠고 우리는 그렇게 '운동권 가족'이 되어갔다.
"오빠 직장이 어디니?" 담임쌤의 질문
1986년, 담임선생님이 날 교무실로 불렀다. 나의 고1 선생님은 대학원을 갓 졸업한 새내기 남자 선생님이었다. 큰 키에 마른 몸매로 손가락까지 길고 하얬다. 가르치는 과목은 내가 좋아하는 수학이었다. 선생님은 길고 하얀 손에 분필을 잡고 칠판에 그래프를 척척 그려냈다. 우리는 모두 선생님의 솜씨에 감탄했다.
우린 화이트데이 때 선생님께 사탕을 사 달라고 졸랐다. 종례 시간에 선생님은 사탕이 가득 든 봉투를 들고 오셨고 교실엔 환호성이 터졌다. 선생님은 얼굴이 발개지도록 쑥스러워하시곤 교실서 나가셨다.
선생님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 나는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선생님이 싫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오라고 하신 거다. 선생님은 내가 낸 가정환경 조사서에 오빠 이름 옆 칸을 손으로 가리키셨다. 오빠가 대학을 졸업한 이후였다.
"여기 직장이 어디인지 안 썼더라. 직장이 어디니?"
내 몸의 모든 촉수가 곤두섰다. 여태까지 학교에서 부모님의 직장에 대해선 자세히 물어도 내 형제자매에 대해 자세히 묻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오빠는 형사가 압수수색까지 한 인물이다. 형사가 찾아온 거 같았다.
"어디 다니긴 하는 거 같은데. 회사 이름은 잘."
"아니, 이상한데 어떻게 고등학생이나 된 동생이 그걸 모를 수가 있어? 이상하지 않아? 선생님은 이상한데."
선생님은 날 몰아세웠다. 갑자기 화가 났다. 이렇게 윽박지르면 내가 그걸 술술 말할까? 내가 그리 순진하게 보이나?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어졌다.
"동생이 그런 거 모를 수도 있지 뭘 그러세요."
"아니, 넌 선생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담임은 내게 화를 냈다. 형사의 부탁으로 담임이 나에게 내 형제의 행적을 물었을 것이라는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게 된 건 그 이후에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선생님, 교수님... 당신들 잊지 않겠습니다
얼마 뒤, 형사들은 결혼한 큰 언니의 시댁까지 찾아갔다. 외국에 사는 언니가 친정에 무슨 일이 있냐며 국제전화를 해서 형사가 사돈댁까지 찾아 갔다는 걸 우리도 알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관계가 사돈이 아닌가? 사돈댁까지 형사가 찾아갔다니 우리 학교 찾아 오는 건 일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학교에 찾아온 형사가 담임에게 무언가를 부탁했다면 담임은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 86년은 전두환 독재 정권 시절이니까. 그것까진 이해하겠다. 하지만 선생님은 제 형제가 어느 회사에 다니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나에게 '이상하다'며 윽박지른 것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꼭 그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의 바닥을 나에게 보였어야 했을까?
나는 열여섯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제일 슬펐던 것은 고등학생인 내가 선생님을 아무 이유 없이 마냥 좋아하는 그 마음을 더 이상 품을 수 없게 되었다는 거다. 결국, 난 선생님도 믿지 못하는 학생으로 자랐다.
그해 연말에 오빠는 구속된다. 엄마는 오빠를 면회 가다가 고 박종철 열사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엄마가 느꼈을 고통을 나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몇 개월 뒤, 오빠는 집행유예를 받고 나온다. 고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은 6월 9일 이후로 시내에는 시위 때문에 한동안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엄마는 아침에 고등학생인 나를 위한 도시락을 두 개 싸주고 집에 안 들어오는 오빠를 위한 도시락을 싸서 집을 나섰다. 서울역에서 신촌까지 걸어갔다. 자식의 생사를 확인하고 자식에게 밥을 먹이고 엄마는 또 그 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께 저녁을 차려 드려야 했으니 엄마의 발걸음은 급했다.
서둘러 걷던 엄마는 시내방향으로 걸어가는 아줌마 무리를 만난다. 수십 명의 아줌마들은 네 명씩 줄지어 명동 성당 쪽으로 가고 있었다. 엄마는 저이들은 식구들 저녁도 안 짓고 어디를 가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저렇게 많은 엄마가 저녁도 안 짓고 나섰으니 세상이 정말로 바뀌긴 바뀌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민가협 어머님들이 아니었을까? 엄마는 그렇게 회상한다.
1987년 '운동권' 가족들은 이런 일을 겪으면서 살았다. 우리 집 말고도 더 많이 고생한 가족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그 수많은 엄마, 아버지, 배우자에게 애 많이 쓰셨다. 그리고 고생하셨다. 위로의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
그리고 형사의 조력자로 나섰던 우리 담임 선생님.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 한 교수님. 독재에 조력했던 일부 교육자들은 영화 <1987> 보고 언제가 되든지 꼭 한번은 반성했으면 좋겠다. 팔순의 우리 엄마도 당신의 전화를 잊지 못하고 당신이 함부로 윽박지르던 학생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당신이 한 행동을 잊지 않고 있으니.
영화 <1987>엔 등장인물이 많다. 그중 가장 눈에 잡힌 인물은 고 박종철 열사의 가족이다. 부검 장소에 뒤늦게 나타난 삼촌은 부검을 지켜보며 눈이 충혈된다.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면서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킨다. 도망가고 싶지만 도망갈 수 없는 자리가 삼촌이 선 자리였고 '운동권 가족'의 선 자리이기도 하다.
누군가 민주화 운동을 할 것인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운동권 가족'이 될 것인가는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다. 가족은 다만 당하고 견디고 버텨내야 한다. 수많은 가족이 모욕을 당했고 두려움에 떨면서 '운동권'을 뒷바라지했다.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다.
'운동권' 아들 뒷바라지 했던 엄마
▲ 영화 <1987>의 한 장면.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가 아들의 영정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고 있다. | |
ⓒ CJ엔터테인먼트 |
엄마는 어느 날, 난생 처음으로 아들이 다니는 대학교 교수님의 전화를 받는다.
"지금 ○○이가 교정에서 미친X처럼 날뛰고 있으니 빨리 오셔서 데려가세요."
순진한 엄마는 그 전화를 받고 가슴이 덜덜 떨렸다. 가게 문을 닫고 자식을 잡으러 학교로 쫓아갔다. 그 뒤로 엄마는 전화벨만 울리면 한동안 가슴이 벌렁거렸다 한다.
어떤 날, 집에 왔는데 엄마가 없었다. 문 앞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는데 형사 아저씨 둘이 왔다.
"왜 안 들어가니? 열쇠 없니?"
아저씨가 물었다.
한 아저씨가 윗집 슈퍼에 다녀와서 또 물었다.
"슈퍼사장님 말씀이 너 방금 집에서 나왔다던데 열쇠 있으면서 우리 때문에 안 들어가는 거지?"
거짓말을 하는 아저씨의 모습이 너무 기가 막혔다. 슈퍼 아저씨가 없는 말을 만들어서 했을 리는 없으니 거짓말은 형사들이 하는 게 분명했다. 더 이상 말대꾸하기 싫어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 집으로 향했다. 아저씨들은 내 뒤통수에 대고 '버릇이 없네' 하는 말을 했다.
또 한번은 집에 압수수색을 하러 형사들이 닥쳤다. 형사들은 책장과 서랍을 뒤지더니 책 몇 권을 가져갔다. 그들이 가고 아버지는 책이란 책을 다 꺼내서 던져 버렸다. 집안엔 비명이 쏟아지고 물건이 부서졌다. 그 난장판은 결국 엄마가 치웠고 우리는 그렇게 '운동권 가족'이 되어갔다.
"오빠 직장이 어디니?" 담임쌤의 질문
1986년, 담임선생님이 날 교무실로 불렀다. 나의 고1 선생님은 대학원을 갓 졸업한 새내기 남자 선생님이었다. 큰 키에 마른 몸매로 손가락까지 길고 하얬다. 가르치는 과목은 내가 좋아하는 수학이었다. 선생님은 길고 하얀 손에 분필을 잡고 칠판에 그래프를 척척 그려냈다. 우리는 모두 선생님의 솜씨에 감탄했다.
우린 화이트데이 때 선생님께 사탕을 사 달라고 졸랐다. 종례 시간에 선생님은 사탕이 가득 든 봉투를 들고 오셨고 교실엔 환호성이 터졌다. 선생님은 얼굴이 발개지도록 쑥스러워하시곤 교실서 나가셨다.
선생님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 나는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선생님이 싫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오라고 하신 거다. 선생님은 내가 낸 가정환경 조사서에 오빠 이름 옆 칸을 손으로 가리키셨다. 오빠가 대학을 졸업한 이후였다.
"여기 직장이 어디인지 안 썼더라. 직장이 어디니?"
내 몸의 모든 촉수가 곤두섰다. 여태까지 학교에서 부모님의 직장에 대해선 자세히 물어도 내 형제자매에 대해 자세히 묻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오빠는 형사가 압수수색까지 한 인물이다. 형사가 찾아온 거 같았다.
"어디 다니긴 하는 거 같은데. 회사 이름은 잘."
"아니, 이상한데 어떻게 고등학생이나 된 동생이 그걸 모를 수가 있어? 이상하지 않아? 선생님은 이상한데."
선생님은 날 몰아세웠다. 갑자기 화가 났다. 이렇게 윽박지르면 내가 그걸 술술 말할까? 내가 그리 순진하게 보이나?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어졌다.
"동생이 그런 거 모를 수도 있지 뭘 그러세요."
"아니, 넌 선생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담임은 내게 화를 냈다. 형사의 부탁으로 담임이 나에게 내 형제의 행적을 물었을 것이라는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게 된 건 그 이후에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선생님, 교수님... 당신들 잊지 않겠습니다
▲ 영화 <1987> 스틸컷 | |
ⓒ CJ엔터테인먼트 |
얼마 뒤, 형사들은 결혼한 큰 언니의 시댁까지 찾아갔다. 외국에 사는 언니가 친정에 무슨 일이 있냐며 국제전화를 해서 형사가 사돈댁까지 찾아 갔다는 걸 우리도 알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관계가 사돈이 아닌가? 사돈댁까지 형사가 찾아갔다니 우리 학교 찾아 오는 건 일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학교에 찾아온 형사가 담임에게 무언가를 부탁했다면 담임은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 86년은 전두환 독재 정권 시절이니까. 그것까진 이해하겠다. 하지만 선생님은 제 형제가 어느 회사에 다니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나에게 '이상하다'며 윽박지른 것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꼭 그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의 바닥을 나에게 보였어야 했을까?
나는 열여섯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제일 슬펐던 것은 고등학생인 내가 선생님을 아무 이유 없이 마냥 좋아하는 그 마음을 더 이상 품을 수 없게 되었다는 거다. 결국, 난 선생님도 믿지 못하는 학생으로 자랐다.
그해 연말에 오빠는 구속된다. 엄마는 오빠를 면회 가다가 고 박종철 열사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엄마가 느꼈을 고통을 나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몇 개월 뒤, 오빠는 집행유예를 받고 나온다. 고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은 6월 9일 이후로 시내에는 시위 때문에 한동안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엄마는 아침에 고등학생인 나를 위한 도시락을 두 개 싸주고 집에 안 들어오는 오빠를 위한 도시락을 싸서 집을 나섰다. 서울역에서 신촌까지 걸어갔다. 자식의 생사를 확인하고 자식에게 밥을 먹이고 엄마는 또 그 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께 저녁을 차려 드려야 했으니 엄마의 발걸음은 급했다.
서둘러 걷던 엄마는 시내방향으로 걸어가는 아줌마 무리를 만난다. 수십 명의 아줌마들은 네 명씩 줄지어 명동 성당 쪽으로 가고 있었다. 엄마는 저이들은 식구들 저녁도 안 짓고 어디를 가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저렇게 많은 엄마가 저녁도 안 짓고 나섰으니 세상이 정말로 바뀌긴 바뀌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민가협 어머님들이 아니었을까? 엄마는 그렇게 회상한다.
1987년 '운동권' 가족들은 이런 일을 겪으면서 살았다. 우리 집 말고도 더 많이 고생한 가족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그 수많은 엄마, 아버지, 배우자에게 애 많이 쓰셨다. 그리고 고생하셨다. 위로의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
그리고 형사의 조력자로 나섰던 우리 담임 선생님.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 한 교수님. 독재에 조력했던 일부 교육자들은 영화 <1987> 보고 언제가 되든지 꼭 한번은 반성했으면 좋겠다. 팔순의 우리 엄마도 당신의 전화를 잊지 못하고 당신이 함부로 윽박지르던 학생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당신이 한 행동을 잊지 않고 있으니.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