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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가족'으로 살아야 했던 '1987'

형사 조력자 된 선생님, 16살 소녀가 겪은 슬픔

'운동권 가족'으로 살아야 했던 '1987'

18.02.01 20:59l최종 업데이트 18.02.02 09:28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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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 영화 <1987>을 보았다. 당시 대학생이던 남편은 1987년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이야기했다. 그해 경찰에 세 번 잡혔다는 남편의 이야기를 들은 초등학생 막내가 나에게도 물었다. 

"엄마는? 엄마는 안 잡혀갔어?"

나? 나는 경찰에 잡힌 적이 없다. 게다가 그해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라 2년이 지나서야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엄마는 달리기 잘해서 한 번도 안 잡혔어."

영화 <1987>엔 등장인물이 많다. 그중 가장 눈에 잡힌 인물은 고 박종철 열사의 가족이다. 부검 장소에 뒤늦게 나타난 삼촌은 부검을 지켜보며 눈이 충혈된다.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면서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킨다. 도망가고 싶지만 도망갈 수 없는 자리가 삼촌이 선 자리였고 '운동권 가족'의 선 자리이기도 하다. 

누군가 민주화 운동을 할 것인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운동권 가족'이 될 것인가는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다. 가족은 다만 당하고 견디고 버텨내야 한다. 수많은 가족이 모욕을 당했고 두려움에 떨면서 '운동권'을 뒷바라지했다.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다.

'운동권' 아들 뒷바라지 했던 엄마
 
 영화 <1987>의 한 장면.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가 아들의 영정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고 있다.
▲  영화 <1987>의 한 장면.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가 아들의 영정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고 있다.
ⓒ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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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어느 날, 난생 처음으로 아들이 다니는 대학교 교수님의 전화를 받는다.

"지금 ○○이가 교정에서 미친X처럼 날뛰고 있으니 빨리 오셔서 데려가세요."

순진한 엄마는 그 전화를 받고 가슴이 덜덜 떨렸다. 가게 문을 닫고 자식을 잡으러 학교로 쫓아갔다. 그 뒤로 엄마는 전화벨만 울리면 한동안 가슴이 벌렁거렸다 한다.

어떤 날, 집에 왔는데 엄마가 없었다. 문 앞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는데 형사 아저씨 둘이 왔다.

"왜 안 들어가니? 열쇠 없니?" 

아저씨가 물었다.

한 아저씨가 윗집 슈퍼에 다녀와서 또 물었다.

"슈퍼사장님 말씀이 너 방금 집에서 나왔다던데 열쇠 있으면서 우리 때문에 안 들어가는 거지?" 

거짓말을 하는 아저씨의 모습이 너무 기가 막혔다. 슈퍼 아저씨가 없는 말을 만들어서 했을 리는 없으니 거짓말은 형사들이 하는 게 분명했다. 더 이상 말대꾸하기 싫어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 집으로 향했다. 아저씨들은 내 뒤통수에 대고 '버릇이 없네' 하는 말을 했다.

또 한번은 집에 압수수색을 하러 형사들이 닥쳤다. 형사들은 책장과 서랍을 뒤지더니 책 몇 권을 가져갔다. 그들이 가고 아버지는 책이란 책을 다 꺼내서 던져 버렸다. 집안엔 비명이 쏟아지고 물건이 부서졌다. 그 난장판은 결국 엄마가 치웠고 우리는 그렇게 '운동권 가족'이 되어갔다.

"오빠 직장이 어디니?" 담임쌤의 질문

1986년, 담임선생님이 날 교무실로 불렀다. 나의 고1 선생님은 대학원을 갓 졸업한 새내기 남자 선생님이었다. 큰 키에 마른 몸매로 손가락까지 길고 하얬다. 가르치는 과목은 내가 좋아하는 수학이었다. 선생님은 길고 하얀 손에 분필을 잡고 칠판에 그래프를 척척 그려냈다. 우리는 모두 선생님의 솜씨에 감탄했다.

우린 화이트데이 때 선생님께 사탕을 사 달라고 졸랐다. 종례 시간에 선생님은 사탕이 가득 든 봉투를 들고 오셨고 교실엔 환호성이 터졌다. 선생님은 얼굴이 발개지도록 쑥스러워하시곤 교실서 나가셨다. 

선생님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 나는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선생님이 싫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오라고 하신 거다. 선생님은 내가 낸 가정환경 조사서에 오빠 이름 옆 칸을 손으로 가리키셨다. 오빠가 대학을 졸업한 이후였다. 

"여기 직장이 어디인지 안 썼더라. 직장이 어디니?"

내 몸의 모든 촉수가 곤두섰다. 여태까지 학교에서 부모님의 직장에 대해선 자세히 물어도 내 형제자매에 대해 자세히 묻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오빠는 형사가 압수수색까지 한 인물이다. 형사가 찾아온 거 같았다. 

"어디 다니긴 하는 거 같은데. 회사 이름은 잘." 
"아니, 이상한데 어떻게 고등학생이나 된 동생이 그걸 모를 수가 있어? 이상하지 않아? 선생님은 이상한데."

선생님은 날 몰아세웠다. 갑자기 화가 났다. 이렇게 윽박지르면 내가 그걸 술술 말할까? 내가 그리 순진하게 보이나?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어졌다.

"동생이 그런 거 모를 수도 있지 뭘 그러세요."
"아니, 넌 선생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담임은 내게 화를 냈다. 형사의 부탁으로 담임이 나에게 내 형제의 행적을 물었을 것이라는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게 된 건 그 이후에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선생님, 교수님... 당신들 잊지 않겠습니다 
 
 영화 <1987> 스틸컷
▲  영화 <1987> 스틸컷
ⓒ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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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형사들은 결혼한 큰 언니의 시댁까지 찾아갔다. 외국에 사는 언니가 친정에 무슨 일이 있냐며 국제전화를 해서 형사가 사돈댁까지 찾아 갔다는 걸 우리도 알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관계가 사돈이 아닌가? 사돈댁까지 형사가 찾아갔다니 우리 학교 찾아 오는 건 일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학교에 찾아온 형사가 담임에게 무언가를 부탁했다면 담임은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 86년은 전두환 독재 정권 시절이니까. 그것까진 이해하겠다. 하지만 선생님은 제 형제가 어느 회사에 다니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나에게 '이상하다'며 윽박지른 것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꼭 그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의 바닥을 나에게 보였어야 했을까? 

나는 열여섯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제일 슬펐던 것은 고등학생인 내가 선생님을 아무 이유 없이 마냥 좋아하는 그 마음을 더 이상 품을 수 없게 되었다는 거다. 결국, 난 선생님도 믿지 못하는 학생으로 자랐다.

그해 연말에 오빠는 구속된다. 엄마는 오빠를 면회 가다가 고 박종철 열사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엄마가 느꼈을 고통을 나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몇 개월 뒤, 오빠는 집행유예를 받고 나온다. 고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은 6월 9일 이후로 시내에는 시위 때문에 한동안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엄마는 아침에 고등학생인 나를 위한 도시락을 두 개 싸주고 집에 안 들어오는 오빠를 위한 도시락을 싸서 집을 나섰다. 서울역에서 신촌까지 걸어갔다. 자식의 생사를 확인하고 자식에게 밥을 먹이고 엄마는 또 그 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께 저녁을 차려 드려야 했으니 엄마의 발걸음은 급했다.

서둘러 걷던 엄마는 시내방향으로 걸어가는 아줌마 무리를 만난다. 수십 명의 아줌마들은 네 명씩 줄지어 명동 성당 쪽으로 가고 있었다. 엄마는 저이들은 식구들 저녁도 안 짓고 어디를 가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저렇게 많은 엄마가 저녁도 안 짓고 나섰으니 세상이 정말로 바뀌긴 바뀌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민가협 어머님들이 아니었을까? 엄마는 그렇게 회상한다. 

1987년 '운동권' 가족들은 이런 일을 겪으면서 살았다. 우리 집 말고도 더 많이 고생한 가족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그 수많은 엄마, 아버지, 배우자에게 애 많이 쓰셨다. 그리고 고생하셨다. 위로의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

그리고 형사의 조력자로 나섰던 우리 담임 선생님.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 한 교수님. 독재에 조력했던 일부 교육자들은 영화 <1987> 보고 언제가 되든지 꼭 한번은 반성했으면 좋겠다. 팔순의 우리 엄마도 당신의 전화를 잊지 못하고 당신이 함부로 윽박지르던 학생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당신이 한 행동을 잊지 않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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