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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결제 원조' 5·18주먹밥 아짐 "나눔도 용기, 대단허지 진짜"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음식을 가지고 나와 시민군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모습(왼쪽, 이창성 기자 광주 누문동 촬영)과 지난 14일 부산 한 카페의 선결제 안내문. ⓒ 5·18기념재단/연합뉴스

그때도 "미안했고", 지금도 "미안하다"고 했다. 1980년 5월 광주에 함께 있던 시민들에겐 "주먹밥과 물만 맥여서", 2024년 12월 집회에 가는 시민들에겐 "도움을 못 주는 것 같아서"라는 말과 함께.

12·3 윤석열 내란 사태 이후 집회 참여자들을 위해 빵이나 커피를 선결제하는 문화가 생겼다는 소식에, 광주에 사는 오옥순(79)·박금옥(80)씨는 "그때 우리 마음과 같다고 봐요", "대단하네요"라며 웃음을 내보였다.

두 사람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양동시장 상인이었다. 이들은 다른 상인들과 함께 주먹밥을 만들어 계엄군에 저항하는 시민들에게 나눴다. 상인들은 주먹밥을 만들기 위해 500원, 1000원씩 돈을 걷어 방앗간을 찾아 밥을 지었다. '선결제의 원조'인 셈이다.

주먹밥은 이후 5·18 그리고 연대의 상징물이 됐다. 두 사람에게 최근 내란 사태와 '선결제 연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물었다. 이들과 각각 18일 오후 전화로 인터뷰한 내용을 일문일답으로 재구성했다.

"계엄 날 밤, 광주가 겹쳐 보이더라고"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에게 주먹밥을 나눴던 양동시장 상인들이 2021년 5월 16일 오후 광주 서구 양동행정복지센터 앞에서 당시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 연합뉴스

- 5·18 당시 양동시장에서 주먹밥을 만들며 시민군을 도우셨습니다. 최근 윤석열 내란 사태와 그 이후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박금옥 (이하 박): "지금 테레비(TV)를 보면서 우리는 아주 천불이 나요. 서울은 멀어서 못 가고 그러지만은, 계엄 소식 이후에 계속 그 관련된 뉴스만 틀어 놓고 봐요. 오늘도 일어나자니 날씨가 너무 춥더만요. (이런 날씨에) 나이 먹은 사람들은 (집회에) 못 갈 거 같고, 나이 어린 사람들은 추와서 어쩔란가 걱정했죠. 윤석열이 진짜 너무 한당께."

오옥순(이하 오) :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에 놀라 말을 할 수 없었어요. 5·18 때도, 지금도 학교에서 '정치'라는 것을 가르칠 때 그렇게 안 가르치잖아요. 현실이 배운 것과 너무 다른께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 아니겠어요? 윤석열이는 잘못했으면 반성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있고), 또 그 밑에 하수인들도 다 못 됐다 그 말이야."

- 최근 내란 사태를 보면서 5.18이 떠올랐나요?

오 :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한 그날(3일) 밤에 시민들이 국회로 가서 군인이랑 장갑차를 막았잖아요. 나는 그때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이 겹쳐 보이더라고. 우리 광주 시민들은 몸으로 막다가 많이 희생됐지만 지금은 그런 사태까지는 벌어지지 않았다는 게 참 다행이다 싶었어요. 그래도 지금 (윤석열 정부의) 상황은 너무너무 잘못됐지. 참말로 어떻게 해야 쓸란가 혼란스러워요. 책임자들은 영원히 그따위로 뻔뻔하게 살다가 뒤질랑가?"

박 : "그라제. 지금도 온 국민이 다 나섰으니까. 그때(5·18)는 계엄령 내린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이튿날 되어븐께 전두환이가 그라고 광주 시내에서 난리를 쳐부렀잖아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장사하고 있었어요. (1980년 5월) 19일부터는 포도시(겨우) 장사를 헌 둥 만 둥(하는 둥 마는 둥)했고요. 시민들은 다 시위하러 나갔어요. 다 집회에 가려고 트럭 타고 댕겼고, 우리도 그 분노하는 마음에 동의해서 주먹밥을 만들었죠.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주 쪼들려요."

5·18민주화운동 당시 노상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시민들. 1980년 5월 22일 광주 충장로에서 나경택 기자가 촬영한 사진이다. ⓒ 5·18기념재단 제공

- 5·18 때 어떤 마음으로 주먹밥을 만드셨나요?

오 : "그때 광주에 학생들이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를 떠돌았어요. 그러면서 '시민들이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도 남의 자식이 아니라 내 자식이라는 생각으로 주먹밥을 만들었죠. 쌀을 구하려고 상인들이 500원, 1000원씩 걷었는디 그 당시에는 그것도 겁나 큰 돈이었요. 그때 양동방앗간(현 양동행정복지센터)에 세 들어 살던 염길순이라는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곳 사장님한테 염씨 아줌마가 사정사정 애원해갖고 밥을 쪄왔지."

박 : "시민들이 밥도 못 먹고 다니니까 양동시장 상인들이 나선 거예요. 주먹밥 만들라믄 쌀도 있어야 한께 양동시장 온 상인들 나서서 돈을 모으고. 그때는 시위 참여한 사람들한테 어른, 애기로 구분하지 않고 다 주먹밥을 나눠줬어요. 물도 주고. 무조건 해서 막 맥이는 거여. 주먹밥은 밥을 동그랗게 뭉쳐서 소금 뿌린 게 전부였어요. 그때 김이 어서(어디서) 나겄어요. 넣을만한 게 없었지. 그렇게 만든 주먹밥을 구루마(수레) 안에다 싣고 들고 다님서 나눠주고 그랬어요."

"이번에도 또 주먹밥 만들라 했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재표결이 이뤄지는 14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앞의 한 김밥집에 선결제 관련 안내문이 놓여있다. ⓒ 연합뉴스

- 그때 주먹밥처럼, 최근엔 빵이나 커피를 선결제하는 문화가 생겼어요.

오 : "우리 때는 주먹밥을 숨어서 만들었어요. 모르는 사람들이 5·18을 폭동이라 비난하고, '만에 하나 주먹밥 만든 게 알려지면 우리도 총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니까요. 그래도 용케 숨어서 잘 버텨서 만들었죠. 난 (선결제 하는) 요즘 사람들이 그때 우리 마음과 같다고 봐요. 나누는 것도 용기로 하는 일이에요.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고. 요즘은 몇백만 원씩도 먼저 결제해 두고 집회 참여자들 먹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면서요. 대단허지 진짜."

박 : "예전에는 5·18 때 주먹밥 만든 사람들더러 '빨갱이'라는 비난도 있었어요. 그때랑 지금이랑 사회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네요(웃음). 지금은 빵이고 커피고 갖다주는디 우리는 옛날에 그런 거 해줄 줄을 몰랐잖아. 밥하고 물만 막 맥이고 그랬으니께..."

- 최근에도 주먹밥을 만든 적이 있나요?

박 : "(5·18 때처럼) 일이 닥치면 또 그럴라 했제. 근데 (계엄이) 끝나브렀자네. 그래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런 (진압) 사태가 나면 또 나서서 또 주먹밥 만들 거여. 최근에도 5·18 기념행사가 있으면 그날만큼은 장사를 안 하고 행사에 가서 주먹밥을 만들어요."

오 : "5·18 때 같은 상황은 안 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만약 시민들이 진압당하고 밥 못 먹고 그러면 얼마든 또 만들 수 있지'라고 다짐했어요. 근데 5·.18 때는 내가 30대라 젊었고 지금은 나이가 먹어서 몸이 따라줄지는 모르겠어요."

인터뷰를 마친 오씨는 잠시 뒤 다시 나눈 통화에서 "요즘 집회 가는 사람들한테 이런 말을 좀 전해 주소"라며 아래와 같이 말했다.

"밥 잘 챙겨 먹고 다니소. 추운 날씨에 자발적으로 나가서 얼마나 고생하는지 아는데 도움을 못 주는 것 같아서 미안허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이 사태가 잘 끝날 때까지 광주에서 마음 함께 하고 있을게요."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음식을 가지고 나와 시민군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1980년 5월 22일 광주 누문동에서 이창성 기자가 촬영한 사진이다. ⓒ 5·18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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