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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 제안, 역사의 대세 막을 수 없다

할아버지가 못 이룬 꿈, 손자들이 이루기를…
 
김갑수 | 2018-02-12 12:10:4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정상회담 제안, 역사의 대세 막을 수 없다
- 문재인 정권의 분투를 열망한다


기대 반 예상 반이었던 남북정상회담 제안이 북측에 의해 가시화되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악화일로로 치달았던 남북관계와 북의 핵무력을 놓고 벌어진 북미간의 첨예한 긴장 대치를 감안할 때 이번 제안은 놀라울 정도로 창조적이다.

사실 역사의 이면에 묻힌 탓으로 우리가 잘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남북정상회담은 남과 북 정권 공히 끊이지 않고 시도해왔다. 남측 정부는 이승만과 윤보선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북정상회담을 시도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박정희는 물론 전두환, 노태우 정권도 남북정상회담에 뜻이 있었으며 심지어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도 남북정상회담을 아주 외면한 것은 아니다.

이 중 전두환의 정상회담 제안은 북측이 거부했고 박정희와 노태우의 제안은 북측이 수용했지만, 미국의 방해책동으로 성사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명박의 정상회담 시도는 천안함 문제에 가로막혔고 박근혜는 말로만 정상회담을 언급했을 뿐 최소한의 진정성마저 북측에 전달되지 않아서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북측의 이번 정상회담 제안은 과거의 사례들과 확연히 다른 양상으로 이루어졌다. 이번 정상회담 제안은 공개적 특사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정상회담의 공개 특사 제안은 위험 부담이 크다. 이것이 거부될 경우 돌이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북은 왜 공개 특사 방식을 선택한 것일까? 북측은 남측이 미국과의 협의 없이는 정상회담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없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비공개로 제안했을 경우 역시 비공개적인 미국의 반대가 있을 것이고, 이것을 문재인 정권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올림픽이 막 시작한 시점을 택한 것이 아닐까 한다. 다시 말해 문재인 정부로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시점에 제안을 해서 즉각 수락 확정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긍정적 반응을 얻어내 전 세계에 공개함으로써 미국이 함부로 방해할 만한 명분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계산은 맞아 떨어져 문재인 대통령도 “앞으로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키자”라고 화답했다.

다음은 오찬장의 남북대화 내용이다.

김여정 특사 : “문 대통령께서 통일의 새 장을 여는 주역이 되셔서 후세에 길이 남을 자취를 세우시길 바란다. 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 많은 문제에 대해 의사를 교환하면 어제가 옛날인 것처럼 빠르게 북남관계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문 대통령 건배사 : “오늘 이 자리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남북에 거는 기대가 크다. 어깨가 무겁고, 뜻 깊은 자리가 됐으면 한다. 10·4 정상회담 때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총괄책임을 지고 있었고, 백두산 관광도 합의문에 넣었는데 실현되지는 않았다. 오늘 대화로 평양과 백두산에 대한 기대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역시 이런 문제는 역사와 결부시켜 논의할 수밖에 없다. 나는 우리 민족의 분단 정세를 3기로 나눠볼 수 있다고 본다. 전후 한반도에서 구축된 '김일성-이승만·박정희'의 냉전체제가 제1기였다면, 6·15 선언을 도출한 ‘김대중-김정일’의 화해체제가 제2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남측의 김대중에 이어 북측의 김정일까지 유명을 달리함으로써 2기 화해체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제3기 체제는 ‘김정은-문재인’ 체제이다. 이 체제는 1기는 물론 2기보다도 한층 진전되는 양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진전’이라 함은 ‘민족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는 바람직한 진행’을 의미한다. 김일성과 이승만·박정희는 전쟁 직접 체험세대, 김대중과 김정일은 전쟁의 추체험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2012년 북에 새롭게 등장한 김정은과 2017년 남에서 탄생한 문재인 정권은 완전한 전후세대의 정권이다.

2011년 북의 김정일 위원장이 서거했을 때 북은 ‘특별 방송’에서 “우리는 김정은 동지의 령도에 따라 슬픔을 힘과 용기로 바꾸어 오늘의 난국을 이겨내 주체혁명의 위대한 새 승리를 위하여 더욱 억세게 투쟁해나가야 한다. 혁명의 길은 간고하고 조성된 정세는 준엄하지만 위대한 김정은 동지의 현명한 령도 따라 나아가는 우리 당과 군대와 인민의 혁명적 진군을 가로막을 힘은 이 세상에 없다”고 공언했고 그들은 공언대로 실천했다.

문제는 오히려 우리에게 있다. 남은 북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이지만 북을 잘 모르는 기득권자들과 국민이 득실거리는 나라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는 결국 낙관적이다. 역사에는 대세 또는 대운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김정은은 완벽한 전후세대다. 그의 주변은 젊고 새로운 인물들로 교체 또는 보강되었다.

지구촌은 냉전체제로 돌아갈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국주의가 복고되어야 할 터인데 21세기의 지구촌에서 왕년의 영·불·독·이·러·미의 어느 한 나라만큼이라도 국제무대에서 무례하게 발호할 저력을 가진 나라는 없다. 그리고 더 이상 순순히 피지배를 허락할 약소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당위적 대세의 선봉에 북이 있다.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다. 우리 민족에게는 다른 민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범한 저력이 있다. 다만 문제가 북측에 있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여전히 문제는 남측에 상존한다. 그렇기에 새로운 역사를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는 역설적이게도 남측에 달려 있다. 하여 문재인 정권의 분투를 열망하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못 이룬 꿈, 손자들이 이루기를…

대남 특사 김여정 부부장의 청와대 방명록 필체가 화제에 오르고 있다. 왠지 눈에 익은 필체다. 할아버지의 필체를 닮은 것이다. 손녀의 필체는 75년만큼 현대화된 것 같다.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은 1912년생, 손녀 김여정 부부장은 1987년생으로서 75세 차가 난다. 김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2,3,4,5권에는 그의 친필이 담겨 있다. 아래 사진은 2권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집무 모습도 조금 닮은 것 같다.

김일성 주석은 과로로 인한 심근경색으로 1994년 7월 9일 묘향산 집무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1994년 4월 15일에 김 주석을 마지막으로 만난 내 집안 어른은 그가 매우 건강하고 활달해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김 주석은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과 회담을 시작한 후 무려 17번이나 각종 외부 행사에 직접 나섰다. 회고록 집필로 인한 누적된 피로도 있었을 것이다. 직접 집필한 회고록 마지막 권인 6권에는 그의 친필이 없다.

김 주석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16일 앞두고 서거했다. 김 주석은 남북정상회담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는 백화원 영빈관에 가서 김영삼 대통령이 앉을 자리에 직접 앉아 보고는 더 편한 의자로 바꿀 것을 지시하기도 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기울이며 회담을 준비했다.

김 주석은 서거 3일 전 경제개발 국가회의를 주재했다. 그는 정상회담 준비 차 묘향산 집무실로 옮겨가 밤늦게까지 서류들을 검토했다. 82세 노구로서는 무리한 일정이었다. 심근경색이 왔고 신속한 헬기 후송이 필요했지만 그날 밤 따라 몰아친 폭우가 한 거인과 민족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2018년 그의 손자에 의해 제안된 남북정상회담과 통일의 꿈이 조속히, 반드시 결실되기를 소망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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