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영구 전쟁국가의 탄생

[전쟁국가 미국] NSC-68과 한국전쟁 <상>
2018.02.18 13:38:05
 

 

 

 

2차 대전 후 미국의 세계 패권이 완성된 결정적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을 통한 전면적 재무장에 의해서였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국방비를 일거에 4배 가까이 증액했고 군사 물자 생산도 7배로 늘렸다. 서독과 일본 등 과거 적국의 재무장을 단행했다. 

미국이 대대적 재무장에 나선 것은, 그것만이 미국 중심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수립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의지를 세계에 관철시키려면 압도적 군사력이 필요했다. 이를 위한 청사진이 1950년 4월 작성된 국가안보회의 문서 68(NSC-68)이다. 

그러나 전시도 아닌 평시에 국방 예산의 3~4배 증액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마치 기적과도 같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이것이 가능해졌다. 북한의 남침을 소련 주도에 의한 세계 공산화의 시발점으로 간주한 미국 지도층은 국민들에게 전면적 재무장을 설득했고 이를 실현할 수 있었다.  

미국은 재무장을 통해 압도적 군사력을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서유럽과 일본 등 자본주의 선진국을 미국의 경제권에 통합했으며, 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을 봉쇄했고,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등 제3세계의 혁명운동을 진압했다.  

이후 미국은 영구 전쟁 국가로 변모했다. 건국 이후 처음으로 외국과 군사동맹을 맺었고 서유럽과 동아시아 등 세계 수백여 곳에 미군 기지를 운용했다. 또한 한국전쟁을 비롯하여 베트남전쟁, 아프간전쟁, 걸프전쟁 등을 수행했으며 아직도 중동지역에서 18년째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미국 경제는 핵무기를 비롯해 폭격기와 미사일 등 전쟁물자 생산이 계속되지 않으면 지탱될 수 없는 전쟁경제로 전환됐다. 이러한 미국의 전쟁 국가적 면모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 2010년 림팩 훈련에 참가한 미군 함정들. ⓒnavy.mil


2차 대전 발발 직후부터 전후 목표 구상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은 세계 최강국으로 떠올랐다. 절대무기인 원자탄을 독점했고 세계 경제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의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확보했다. 미국은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에야 2차 대전에 참전했다. 하지만 전쟁 발발 직후인 1939년 9월부터 전후 목표를 구상하고 있었다. 정부가 아닌 재계 주도에 의해서였다.

2차 대전 발발 열하루만인 9월 12일, 미 재계의 두뇌집단(Brain Trust)으로 불리는 외교협회(CFR)가 국무부에 대해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이 추구해야 할 목표들에 관한 공동연구를 제안했다. 공동연구는 12월 6일 록펠러재단이 첫해 연구비 4만 5000달러 지원을 약속하면서 1940년부터 본격 시작됐다. '전쟁과 평화 연구(The War and Peace Studies)'가 그것이다. 

'전쟁과 평화 연구'에는 주로 CFR 소속의 학자, 지식인, 언론인, 관료 등 100여 명이 참여했으며 1940년부터 45년까지 6년간 362차례 회의에서 682개 정책문서를 작성해 대통령과 국무장관 등 최고위 관리들에게 보고했다. 연구보고서는 대통령 2부를 비롯해 모두 25부만 작성됐을 정도로 고도의 비밀 속에 진행됐다. 록펠러재단은 6년간 30만 달러의 연구비를 지원했다. 

'연구'의 핵심 목표는 처음부터 미국 경제의 세계적 확장이었다. 1930년대의 대공황을 겪은 미국의 경제 엘리트들은 미국의 과잉 농산물과 공산품, 그리고 과잉 자본이 진출할 해외 시장을 원했다. 수요 부족, 즉 시장의 결핍이 대공황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과잉 상품과 자본을 받아들일 해외 시장을 확보해야 미국의 자유와 안보, 번영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 등의 배타적 폐쇄적 경제권을 해체해야만 했다. 배타적 경제권으로 인한 세계 시장의 분열은 곧 2차 대전의 원인이기도 했다.

'연구'의 처방은 세계적 자유무역 체제의 수립이었다. 즉 미국의 상품과 자본이 세계 어디로든 진출할 수 있는 국제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1899년 미국의 중국 시장을 목표로 발표한 문호개방(Open Door) 정책을 전 세계로 확대한 것이다. 

미국의 경제 엘리트들은 모든 국가들이 공평하게 상품과 자본을 수출할 수 있는 체제가 만들어진다면 단연 미국이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믿었다. 미국은 이미 1차 대전 이후부터 세계 최대 채권국이자 농산물 생산국이었으며 2차 대전 이후에는 세계 공산품의 절반을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세계적 자유무역 체제의 수립이란 곧 미국 주도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복원을 의미했다.  

세계 패권 수립의 어려움  

그러나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도 세계를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로 재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각자도생을 모색했고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제3세계에서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혁명의 기운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특히 두 차례 세계 대전이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선진국 간 갈등의 결과라는 점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하려는 나라는 거의 없었다.  

일례로 해방 후 남한 지역에서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70%가 사회주의를 바람직한 사회 체제로 꼽았다. 또한 역대 헌법 중 제헌 헌법이 노동자 이익균점권을 규정하는 등 가장 진보적 성향을 띤 것도 전쟁 직후의 세계적 분위기를 말해준다. 

미국의 세계 자본주의 복원 프로젝트는 세 단계로 진행됐다. 첫 번째는 다자주의적 무역 제도를 수립하는 것이다. 1944년 미국 주도로 수립된 국제통화기금(IMF)과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1995년 세계무역기구 WTO로 개칭)이 그것이다. 미국은 이들 국제기구를 통해 자유무역을 촉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다른 나라들은 자유무역을 할 여력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들 국가에는 미국 상품을 수입할 달러가 턱없이 부족했다. 국제제도만으로는 자유무역을 실현시킬 수가 없었다. 

마셜 플랜 

다음으로는 서유럽에 대한 대대적 경제원조였다. 유럽 재건 계획(ERP : European Recovery Program)이 그것이다. 1947년 6월 5일 조지 마셜 당시 국무장관이 하버드대 졸업 연설에서 제창했다는 이유로 마셜 플랜으로도 불린다. 1948년부터 51년까지 4년간 130억 달러를 서유럽 국가들에 원조해 자본주의 경제를 부흥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사실상 실패했다. 우선 국내의 반대가 극심했다.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은 물론 국민들도 퍼주기라며 강력 반발했다. 당초 290억 달러로 책정됐던 원조 액수가 1949년 말 130억 달러로 반토막 난 것도 국내 반발 때문이었다.  

결정적으로 4년간의 경제 원조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의 달러 갭(달러 부족)이 해소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1948년 미국의 수출은 134억 달러로 대부분 서유럽에 수출됐는데, (마셜 플랜이 끝난 이후인) 1952년 유럽의 달러 보유액은 고작 20억 달러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됐다.  

미국 상품을 사들일 달러가 부족한 서유럽의 선택은 자명했다. 계획경제, 배급경제와 같은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을 시행하거나 소련 및 동구권과 물물교환 형태의 교역을 할 수밖에 없다.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러나 이는 곧 자본주의 경제, 미국 세력권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달러가 없는 서유럽은 친소련, 또는 적어도 중립 노선을 취할 수밖에 없다. 미국으로서는 결단코 막아야 할 사태이다. 미국은 자본주의 선진국인 서유럽 국가들과 일본을 세계 자본주의 복원의 핵심 파트너로 지목하고 이들을 미국의 세력권 안에 묶어두려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의 핵심 동맹국 영국은 1949년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로 경제가 휘청거렸다. 또한 프랑스는 서독의 경제부흥에 한사코 반대했다. 숙적 독일의 재기를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1949년까지 서유럽의 통합 및 경제 부흥은 요원한 일처럼 보였다.

당초 미국은 마셜 플랜을 제창하면서 소련 및 동구권에 대해서도 경제 부흥을 위한 자금 지원을 제안했다. 미국의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를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 아래 두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1947년 7월 미국의 제안을 거부했고 동구권 위성국가들에게도 미국의 지원을 받지 말도록 지시했다. 미국의 자금 지원은 자국의 주권을 침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로써 미소 간 대결은 첨예해진다.  

소련의 핵실험과 중국 공산화  

세 번째 시도가 바로 대대적 재무장에 의한 세계 경제 재편이었다. NSC-68이 바로 그것이다. 

1949년까지 미국 주도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 부활이라는 미국의 프로젝트는 실현 가능성이 극히 낮아 보였다. 특히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고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미국의 세계 전략은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소련과 중국, 유라시아의 두 공산 대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 공산화의 유령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첫 핵실험을 비밀리에 단행했다. 며칠 후 미국은 이 사실을 탐지했고, 9월 23일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의 핵실험을 공식 확인했다. 이로부터 열흘이 채 되지 않은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이 텐안먼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특히 소련의 핵실험 성공은 미국에 큰 충격이었다. 미국의 핵 독점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핵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일방적으로 세계를 경영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었다. 핵을 내세워 소련의 이해관계와 의사를 무시한 채 일본을 단독 점령하고 독일의 분단을 밀어붙였으며 (에너지 자원의 보고인) 중동지역에 대한 소련의 진출을 저지했다. 그러나 이제 소련도 핵무기를 가진 만큼 더 이상 미국의 일방주의는 통할 수 없게 됐다.

중국의 공산화도 문제였다. 당초 미국은 중국을 영국, 소련과 함께 전후 세계 경영의 주요 파트너로 상정했다. 이른바 '세계의 네 경찰관(four policeman)'이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 장졔스를 참석시킨 것도 루스벨트의 이러한 구상에 따른 것이었다. 그랬던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소련 진영에 합류했으니 미국으로선 큰 타격이었다.  

더 큰 문제는 중국의 공산화 이후 일본의 안보와 행로가 불투명해졌다는 점이었다. 미국의 정책 엘리트는 중국보다는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훨씬 더 높게 봤다. 일본의 산업 능력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고도의 숙련 노동자와 산업 능력을 가진 일본이 소련에 넘어간다면 공산권의 세력은 엄청나게 강화될 터였다. 반면 미국에겐 뼈아픈 손실이 된다. 동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설사 일본이 미국 진영에 남는다 해도 공산 중국이 버티는 동아시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일본 경제를 지탱해주었던 식민지를 잃었기 때문이다. 전쟁 이전 일본 자본주의는 대만, 조선, 만주 등의 식민지를 통해 원자재와 노동력, 그리고 시장을 확보했다. 또한 중국과의 교역 규모도 만만치 않았다. 수입의 17%, 수출의 27%가 대중국 교역이었다. 

패전으로 식민지를 잃고 중국 공산화로 중국 시장을 빼앗긴 일본 자본주의의 활로는 오직 동남아뿐이었다. 만일 일본이 동남아지역과 경제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연간 5억 달러에 이르는 무역적자를 메울 길이 없었다. 그 경우 일본이 살 길은 공산 중국과 교역을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는 미국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일본을 미국 세력권 안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동남아를 일본의 배후지로 만들어줘야만 했다.

문제는 동남아에서도 혁명의 기운이 뜨거웠다는 점이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영국 식민지 말라야와 네덜란드 식민지 인도네시아 등에서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를 향한 혁명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베트남 북부에서는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독립을 선포했으며 1950년 초 중국과 소련은 이를 승인했다. 인도네시아와 말라야에서는 중국계 시민들이 독립투쟁에 대거 참여했다. 중국 혁명의 영향이었다. 방치할 경우 중국 혁명의 여파가 동남아 전역으로 퍼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공산 아시아의 외딴 섬이 될 것이고 생존을 위해서는 공산권과의 공존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NSC-68 

미국으로선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우선 1950년 1월 수소탄 개발에 착수했다. 과학계 자문위원들의 일치된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내려진 결정이었다. 핵 독점이 무너진 데 따른 자신감의 상실을 만회하기 위한 조치였다.  

1945년 이후 미국이 자신의 세계 전략을 마음 놓고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핵 독점 덕택이었다. 핵 독점이 무너진 이제 보다 강력한 무기를 가져야만 했다. 그래야만 잃어버린 자신감을 회복하고 외교적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50년 1월 31일 트루먼 대통령은 국무부와 국방부에 소련 핵실험과 중국 공산화가 미국의 대외정책에 미칠 영향과 이에 대한 대응 방침을 연구할 것을 지시했다. 국무부 정책기획단장 폴 니츠를 의장으로 한 연구 그룹은 4월 7일 NSC-68을 작성해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한다. 
 

▲ NSC-68 보고서 ⓒTruman Library

'미국의 국가 안보를 위한 목표와 계획에 관한 국무 및 국방 장관 보고서'라는 제목의 이 문서는 소련이 세계 정복이라는 광신적 믿음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은 군사력의 총체적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소련은 이전의 패권 추구 국가들과는 달리, 미국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새로운 광신적 믿음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전 세계에 대한 절대적 권위의 확보를 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소련과의 갈등은 불가피하게" 됐으며 "군사력의 총체적 우위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봉쇄 정책은 공허한 허풍이 될 뿐"이라고 밝혔다.

이제까지 소련과의 냉전이 정치외교적 대결이었다면 앞으로는 군사적 대결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니츠는 핵전력의 압도적 우위를 강조했다. 

"우리가 핵전력의 압도적 우위를 달성하고 제공권을 장악했을 때, 오직 그때에만 미국의 정책 수행을 방해하기 위해 소련이 원자탄을 사용하는 것을 억지할 수 있다"

미국이 말하는 억지 정책의 핵심이 이것이다. '미국의 정책 수행을 방해하기 위해' 소련이 원자탄을 사용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즉 소련이 미국 정복을 위해 핵 공격을 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핵전력에 대한 니츠의 믿음은 거의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냉전의 고비마다 강경한 군사 대응을 주도했던 그는 1979년 소련과의 2차 전략무기제한협정(SALT2)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폭력의 최고 단계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면 낮은 단계의 모든 군사 대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한국전쟁, 베를린봉쇄, 그리고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은 전략핵무기의 우세 덕택에 전략적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니츠는 핵전력은 물론이고 재래식 전력의 대대적 증강을 촉구했다. 서유럽에 대한 미 지상군 파병도 요구했다. 미국의 재무장뿐만 아니라 동맹국에 대한 군사지원과 경제원조, 공산진영에 대한 비밀공작과 심리전 등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모든 수준의 군사력에서 소련에 대한 절대적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NSC-68은 소련이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은 세계 정복을 실현할 수 있는 군사적 능력을 개발하고" 있으며 "이미 자체 방위에 필요한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소련은 잘 무장돼 있고 "고도의 준비 태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즉각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상태이며 그 능력은 서유럽 침공, 노르만디 상륙과 같은 서방측의 반격을 저지하고 영국 공습, 그리고 중동 진출을 동시에 해낼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그러고도 군사력이 남아돌아 "다른 지역에 대한 관심 돌리기 용 침공"을 할 수 있으며 이미 미국에 핵 공격을 가할 수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소련은 1950년 당시 미국 핵 공격을 위한 장거리 폭격기를 갖고 있지 못했다. 소련이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폭격기를 개발한 것은 50년대 중반이었고 1957년 이후에야 미국에 대한 전략적 위협을 가할 수 있었다.  

1950년 중반 소련 보유 원자탄은 5개에 불과했다. 당시 미국은 299개를 갖고 있었다. 원자탄 탑재 폭격기는 264대나 됐으며 미국 본토는 물론 알래스카, 캐나다, 아조레스, 영국, 아이슬란드,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오키나와 등에 발진 기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츠가 소련의 군사적 의도와 능력을 극도로 과장한 것은 NSC-68의 처방, 즉 미국 및 동맹국의 대대적 재무장을 트루먼 대통령 등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니츠는 소련이 의도적으로 핵 공격을 가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미국의 핵 독점 상실에 따른 외교적 주도권 와해를 우려했다. 미국 당국자들을 당혹케 한 문제의 근원은 소련의 군사적 위협이 아니었다. 독일과 일본의 패배에 따른 힘의 공백을 소련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이었다. 세계 각지에서의 자급자족 경제와 계획 경제의 증가, 공산당의 성장, 그리고 제3세계에서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의 발흥을 두려워했다. 

달러 갭, 유사회경제적 혼란에 따른 유럽 통합의 부진, 중국 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 베트남 호치민의 압도적 인기 등 제3세계의 탈식민화 열풍 등 미국의 세계 전략에 불리한 상황들이 쌓여가면서 소련이 이를 이용할 것을 우려했다. 핵능력을 확보한 소련이 보다 대담한 외교 공세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보다 대담해진 소련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핵 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켜야 한다는 게 니츠의 판단이었다. 실제 전쟁 수행에 필요한 것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한다는 것이 니츠의 목표였다. 군사적 우위야말로 소련으로부터 외교적 주도권을 빼앗아오고 냉전을 수행할 다양한 옵션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국무장관 애치슨도 니츠의 판단에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소련 주위를 봉쇄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선택의 자유는 소련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 전쟁 수행에 필요한 것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국방비의 대대적 증액이 필요했다. 니츠는 내심 국방 예산의 3!4배 증액을 예상했으나 재무장에 필요한 재원 규모를 명시하지는 않았다. 재정 적자를 극도로 꺼려했던 트루먼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0년 당시 미국의 국방 예산은 130억 달러, 니츠의 계산대로라면 400~500억 달러로 대폭 예산을 늘려야 했다.  

실제로 트루먼 대통령은 NSC-68이 제시한 재무장을 원칙적으로 승인하면서도 필요 재원을 산출해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5월 초, '다음해 국방 예산은 기존보다 적어질 것'이라고 공언했다. 니츠 등이 기대했던 국방 예산의 대대적 증액은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NSC-68의 실행이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한 니츠는 6월 7일 휴가를 떠났다. (하편에서 계속됩니다.)  

 

'군복 입은 케인즈', 미국을 만들다
[전쟁국가 미국] NSC-68과 한국전쟁 <하>

 

2018.02.19 09:54:43
 

 

 

 

딘 애치슨, 폴 니츠 등 미국의 전면적 재무장을 원하는 세력에게 북한의 남침은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었다. NSC-68이 주장한 소련 군사력에 의한 세계 공산화 음모가 현실화 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소련의 음모가 드러난 이상 미국은 대응에 나서야 했다.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전면적 재무장이 그것이다.  

사실 북한의 남침은 미국 지도자들의 '자유 세계' 수호 의지를 시험하는 시금석이었다. 미국이 단호하게 대응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중립주의를 부추기게 될 터였다. 서유럽과 일본은 소련, 중국과의 화해를 추구할 것이다. 반면 전면적 재무장과 함께 북한을 격퇴한다면 서유럽과 일본을 미국의 세력권 안에 확실히 묶어둘 수 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트루먼 대통령은 측근에게 한반도는 "극동의 그리스다. 우리가 단호하게 대처한다면, 3년 전 그리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저들에 맞서 싸운다면, 저들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그리스 좌파 세력의 민족해방 투쟁을 저지한 것을 말한다.  

트루먼은 "남한의 공산화를 방치한다면 소련은 아시아 각국을 차례차례 먹어치울 것...나아가 아시아의 적화를 방치한다면 중동지역이 무너질 것이며 그 다음은 유럽이 될 것이라는 점은 명약관화"하다고 말했다. 

트루먼과 애치슨에게 한반도는 중요했다. 남한의 공산화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중대한 위협이었다. 핵 개발과 중국 공산화로 고무된 소련이 그 힘을 팽창하려 하고 있으며 남한이 그 출발점이었다. 소련의 팽창은 주변부에서부터 막아야 했다. 남한이 무너지면 동남아가 무너지고, 주변부가 붕괴되면 서유럽, 일본 등 핵심 산업 지역도 미국 세력권에서 벗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트루먼 등이 보기에 북한의 남침은 김일성 주도가 아니라 소련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다. 스탈린이 미국의 관심을 한반도로 돌리게 해놓고 보다 중요한 지역, 예컨대 이란 등 중동지역 또는 서독이나 서유럽을 공격할 것으로 의심했다. 
 

▲ 한국전쟁 당시 38선 경계표시판 ⓒ프레시안 자료사진


트루먼은 전쟁 발발 직후 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했고 인도차이나와 필리핀에 대한 군사원조를 증액했다. 일본과의 평화협정을 서둘렀고 서독의 재무장을 결정했다. 서유럽에 미 4개 사단을 주둔시키고 미국의 동맹국들은 경제 재건보다 군사력 증강을 우선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소련의 또다른 공격에 대한 대비였다. 소련으로 하여금 서유럽에 대해 한반도에서와 같은 군사적 모험을 감행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은 김일성 주도였다. 스탈린의 승인은 치명적 오판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스탈린은 미국의 군사행동을 촉발하지 않기 위해 극력 몸을 사렸다. 미국과의 군사력 격차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이탈리아 공산당의 무력 봉기를 억제했고 그리스 좌파의 독립투쟁도 아예 외면했다. 그리스를 영국 세력권으로 인정한 처칠과의 밀약을 준수한 것이다. 

그랬던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한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했고, 마지못한 승인이었다. 우선 스탈린은 중국 내전에서 국민당이 이길 것으로 보았고 이에 따라 공산당을 거의 지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공산당 승리 이후 스탈린은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어색한 사과를 해야 했다.  

다음으로 중국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싸웠던 조선인 병사 2만 5000명이 1949년 말에서 1950년 초에 걸쳐 북한에 들어왔다. 김일성은 노련한 전투원인 이들과 함께 남한을 공격할 경우 남한 인민들도 함께 봉기해 한 달 내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소련이 핵을 갖게 된 것도 스탈린의 자신감을 북돋았다. 마지막으로 1950년 1월 '남한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애치슨 선언도 스탈린의 모험을 가능케 했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 또는 미국 개입 전에 한반도 통일이 완수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애치슨 선언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된 오판이었다. 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이른바 애치슨라인은 소련과의 전면전에 대비한 방위선이었다. 소련과 전면전을 벌일 경우 남한(과 대만)은 미국의 군사적 보호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애치슨은 만일 한반도에 대한 국지적 도발이 감행된다면 유엔의 집단 안보를 발동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미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을 동원해 남한 방어에 나섰다. 미국의 개입에 스탈린은 크게 당황했다. 미국과의 전쟁에 연루된 데 대해 겁을 먹었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을 지원하고 도움을 주었지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겁을 집어먹었다. 미국을 무서워했다. 코를 석자나 늘어뜨렸다. 그는 미국에 대해 문자 그대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고 전한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사장될 위기에 처했던 NSC-68이 되살아났다. 급속한 재무장에 따른 재정 적자 따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한반도 위기를 계기로 서방진영 전체의 전면적 군사력 증강에 나서야 한다는 게 미국 지도자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7월 19일 트루먼은 의회 연설을 통해 군사비 100억 달러의 증액을 요청했다. 우방국 원조 40억 달러, 핵무기 개발 예산 2억 6000만 달러도 요구했다. 당시 미국 지도부는 전쟁이 1년 내에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전쟁 이후 국방비 규모는 기존의 4배로 늘려야 하며 1954년까지 미국 및 동맹국의 재무장을 완료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계획은 9월 30일 NSC-68/2에 반영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국이 치명적 실수를 저지른다.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을 결정한 것이다. 당초 북한의 남침에 대한 유엔 결의는 '국경의 원상회복'이었다. 즉 북한군이 38선 이북으로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7월부터 미 국무부는 미국 주도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구상했고 결국 9월 11일 북진을 결정한다. 9월 15일 인천 상륙에 성공한 미국은 남한군을 앞세워 10월 1일 38선을 넘었다. 이는 미국의 대소련 전략이 봉쇄(containment)에서 반격(rollback)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북한 주도의 한반도 통일이 미국에 치명적 타격인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주도의 통일은 중국, 소련이 감내하기 어려운 손실이다. 특히 건국한 지 1년밖에 안 된 중국으로서는 미국이 북한을 넘어 중국까지 침공할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10월 15일 마오쩌둥은 대부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전을 결정했다. 중국은 10월 25일 남한군에 대한 첫 공세로 미국에 경고를 보냈으나 맥아더는 이를 무시하고 북진을 계속했다. 결국 11월 28일 후방에 은신해 있던 중국군이 대대적 공세를 펼치면서 유엔군을 38선 이남으로 내몰았다. 

전쟁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미국과 중국과의 직접 군사 대결로 확대된 것이다. 특히 당시까지 패배를 몰랐던 미군이, 삼류 농민군으로 깔봤던 중국군에 밀려 치욕적 후퇴를 해야 했다. 봉쇄에서 반격으로의 정책 전환이 파탄 난 것이다.

당황한 트루먼 대통령은 11월 30일 "우리가 가진 모든 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며 원자탄을 사용할 뜻을 밝혔다. 바로 다음 날인 12월 1일 미국을 급거 방문한 영국의 애틀리 총리는 이를 극력 만류했다.  

서유럽 국가들의 최우선 관심 사항은 자신들의 방위였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원자탄을 사용할 경우 소련이 서유럽을 침공할 것을 우려했다. 재래식 군사력에서 압도적인 소련이 침공할 경우 서유럽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에게 한국전쟁은 미국 군사력의 낭비였고 유럽을 지켜야 했다. 영국은 또한 미국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사전 협의를 요구했다. 결국 핵 사용은 일단 유예됐다.  

트루먼 대통령은 12월 14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국방예산의 대대적 증액을 요청했다. 미국 및 동맹국의 재무장 완성 시기를 기존의 1954년에서 1952년 7월로 앞당기기로 했다. 미국의 모든 경제력을 군사물자 생산에 쏟아 붓고 미군 병력을 확충하는 한편 동맹국에 대한 군사원조도 대폭 증액하기로 했다.  

이러한 계획이 NSC-68/4로 작성됐고 이는 미국 재무장의 기본 계획이 됐다. 이날 열린 NSC 회의에서 애치슨 국무 장관은 전면적 재무장의 시급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부가 원하는 규모의 병력을 모두 확보한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유럽 우방국들이 원하는 군사 원조를 모두 해준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병사들을 무장시킬 무기들을 모두 생산한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총동원 체제를 갖춘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12월 15일 트루먼 대통령은 전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우리의 가정, 우리의 나라, 우리가 가치 있다고 믿는 모든 것들이 중대한 위협에 빠져 있다. 이 위험은 소련 지배자들에 의해 제기된 것"이라며 소련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5개월 전 북한만 비난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는 이어 전쟁은 한반도에서 일어났지만 실제로는 "유럽과 세계 다른 지역들도 역시 중대한 위험에 직면했다"면서 이러한 "현존하는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병력을 기존 250만에서 350만으로 늘려야 하며, 무기 생산을 대대적으로 증강하고, 유럽 동맹국들과 미국의 군대를 통합하고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트루먼(오른쪽) 대통령과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왼쪽)가 1950년 12월 4일 백악관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 뒤쪽에 애치슨 국무장관과 마셜 국방장관이 서 있다. ⓒ미국국립문서보관소


1951년 1월 8일 연두교서를 통해서는 "남한 침략은 세계를 단계적으로 접수하려는 소련 공산 독재의 일환"이라고 규정했다.  

나아가 "서유럽이 소련 침공에 무너지면 소련의 석탄 생산량은 2배, 철강 생산량은 3배로 늘어날 것이며 미국이 유럽을 외면하면 소련은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될 것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소련에 무너지면 핵심적 원자재의 산지들을 잃게 될 것인데 그중에는 원자탄의 원료인 우라늄도 포함돼 있다. 나아가 소련이 유럽과 아시아의 자유국가들을 집어삼키면 우리로서는 감당조차 할 수 없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우리를 압박해 올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면 소련은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도 자신의 의지를 세계에 강요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한반도에서는 제한전쟁을 수행하는 한편 세계 전략 추진을 위해 핵심 산업 지역인 서유럽과 일본을 재무장해야 한다는 게 트루먼 행정부의 전략이었다. 트루먼은 "우리는 유럽 국가들에 대한 경제 원조를 계속할 필요가 있다. 그 원조는 이제 그들의 국방 건설과 연계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제 한국전쟁의 승리는 트루먼 행정부의 목표가 아니었다. 미국과 동맹국의 전면적 재무장이 목표였다. 한반도에서 처음 시도했던 반격 정책의 실패를 받아들이고 봉쇄 정책으로 되돌아가는 한편 자유세계의 재무장에 의해 소련에 대한 압도적 힘의 우위를 달성하는 것이 목표가 됐다. 힘의 압도적 우위를 바탕으로 향후 외교의 주도권을 잡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뜻밖의 암초가 나타났다. 현지 사령관 맥아더가 다른 의견을 낸 것이다. 1951년 1월 중순 맥아더는 중국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만주에 20~30개의 원폭을 투하하며 중국을 해상 봉쇄하고 중국 국민당 군대를 동원하자고 제안했다.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승리를 원했고, 이를 위해서는 중국으로의 확전도 불사할 태세였다. 

그러나 이는 트루먼 행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트루먼 행정부는 한국전쟁이라는 국지전의 승리보다는 향후 소련과의 세계적 대결에서 주도권을 보장할 힘의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결국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해임한다. 전쟁 도중에 최고 사령관을 해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한국전쟁의 승리냐, 자유진영의 재무장이냐 하는 문제는 전쟁 중 지휘관을 해임해야 할 정도로 미국 사회의 첨예한 논쟁점이었다. 

미국의 일반 대중들에게 트루먼 행정부의 처사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전쟁이 교착 상태인데 현지 지휘관을 해임하다니. 게다가 한반도가 아닌 유럽에 미군 병력을 파견하는 등 미국과 서유럽 군사동맹(나토) 구축에 열을 올리다니. (트루먼 대통령은 50년 12월 20일 당시 콜럼비아대 총장이던 아이젠하워를 나토 최고사령관에 임명했고 아이젠하워는 다음 해 1월 5일 유럽으로 떠났다)  

공화당 의회는 분노했고 대중들은 실망했다. 공화당은 중국 공산당과의 전면전을 통해서라도 중국을 되찾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맥아더는 개선장군처럼 미국에 돌아왔고 의회에서는 맥아더 해임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 

그러나 트루먼은 진짜 이유를 밝힐 수 없었다. NSC-68이 극비 문서였기 때문이다(NSC-68이 기밀 해제된 것은 1970년대 후반이다). 애치슨 국무, 마셜 국방 장관과 브래들리 합참 의장 등 고위 관리들은 청문회에서 '중국으로의 확전은 소련과의 전면전으로 치달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전면전을 치를 군사적 준비가 안 돼 있다. 따라서 조속히 전력을 증강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서유럽의 군사력 증강이 필수적'이라는 논리로 의회와 대중을 설득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의 세계 패권은 비로소 완성됐다. 그것은 대대적 군사비 투입에 의한 전면적 재무장에 의해 가능해졌다. 1950년 회계연도의 미 국방 예산은 130억 달러였다. 한국전쟁 기간인 1951~53년 회계연도의 국방 예산은 총 1556억 달러였다. 4배 늘어난 것이다.  

수소탄이 개발됐고 원자탄도 대폭 늘어났다. 미국의 원자탄은 1950년 299개에서 1955년 2422개로 늘어났다. 소련은 5개에서 200개로 늘었다. 1950년 6월에서 1953년 1월에 이르는 2년 반 동안 미국의 군수물자 생산은 7배로 늘어났다. 3개월 마다 80억 달러 상당의 군수물자가 생산됐다. 1950년 6월 21개 편대였던 전략폭격기는 1952년 6월 37개 편대로 증강됐다. 해외 100여 곳에 미군 폭격기의 발진기지가 건설됐고 최초의 제트 폭격기 B-47이 배치되기 시작했다.  

동맹국에 대한 지원은 경제원조에서 군사원조로 바뀌었으며 액수는 2배로 늘었다. 경제원조에 대해서는 퍼주기라며 반발했던 의회와 국민들도 군사원조에는 찍소리 없이 수긍했다. '소련의 군사적 위협'이라는 부적이 신통력을 발휘한 것이다.

애치슨은 1951년 1월 10일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소련이 없다 해도, 공산주의가 없다 해도 전쟁으로 망가진 자유세계의 일부를 유지, 강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업"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즉 미국의 군비 증강은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응이라기보다는 자유세계의 결속과 경제 부흥을 위한 편법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소련에 대한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를 달성했다. 나아가 소련의 핵 보유와 중국 공산화로 잃었던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또한 서유럽과 일본을 미국 세력권에 묶어놓은 것과 함께 이들 국가의 경제를 부흥시켰다. 미국의 막대한 군사원조가 경제 재건의 마중물이었다.  

1949년부터 침체에 빠졌던 미국 경제도(1948년 하반기 192였던 제조업 생산지수는 1949년 4월 179로 하락했고 실업자 수도 22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늘어났다) 한국전쟁 이후 군사 수요에 힘입어 되살아났다. 미국인들의 표현에 따르면 '총과 버터', 즉 군비 증강과 경제 부흥을 동시에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미국은 군사국가, 전쟁경제로 변모했다. 사실 미국이 대공황을 극복한 것은 뉴딜 정책 덕택이 아니었다. 2차 대전에 따른 막대한 전쟁 수요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는 2차 대전에 2950억 달러(현재 가치 약 3조 9000억 달러)의 전쟁 비용을 지출했으며 이중 17%인 501억 달러(현재 가치 6670억 달러)는 영국, 프랑스, 중국, 소련 등 동맹국에 대한 식량, 석유, 무기 대여에 사용됐다. 렌드리스(Lend-Lease, 무기대여법)가 그것이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전쟁 수요가 미국을 대공황의 늪에서 건져 올린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본의 경제 부흥에, 베트남전쟁이 한국의 경제 재건에 기여한 바를 상기해 보라. 세계의 전쟁 물자를 거의 혼자 만들어낸 미국이 2차 대전의 전쟁 수요로 얻은 혜택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해야 할 것이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이 엄청난 군사 수요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했을 때 미국 경제는 과연 순항할 수 있었을까. 1945년 1140만이었던 미군 병력이 1947년에는 160만으로, 1945년 890억 달러였던 국방 예산이 1947년에는 190억 달러로 대폭 축소됐다. 이는 새로운 일자리 1000만개를 창출해야 하는 반면 (군사) 수요는 700억 달러 줄었음을 의미한다. 당연히 경제는 침체할 수밖에 없게 된다. 

1950년 초 NSC-68을 구상했던 미국의 정책당국자들도 당연히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 경제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대규모 군사 수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군사적 케인스주의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대대적 재무장으로 세계의 주도권과 경제 부흥을 이끌었지만 이는 끊임없는 군비 증강과 전쟁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는 위험한 길이었다.  

사실 1950년의 재무장은 2차 대전의 전시 상황을 재현한 것이나 다름없다. 1940년부터 1945년 8월까지 6년 가까이 미국의 전쟁 비용은 2950억 달러였다. 1951년에서 53년까지 3년간 국방 예산은 약 1556억 달러였다. 전쟁 기간과 거의 같은 규모의 군사비를 지출한 것이다. 이러한 군사비 지출은 이후에도 지속된다. 즉 1950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은 실제 전쟁을 하거나 아니며 전쟁 준비에 매진하는 영구 전쟁국가로 변모한 것이다.

 

inkyu@pressian.com다른 글 보기
▶ 필자 소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