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극우들의 ‘빨갱이 프레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밝힌 글

[제주 4.3 항쟁 70주년] 金益烈장군 실록유고 ⑩
 
[마지막 글] 극우들의 ‘빨갱이 프레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밝힌 글
 
편집국  | 등록:2018-04-02 11:14:58 | 최종:2018-04-02 12:04:2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편집자의 글

제주 4.3 항쟁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았습니다. 4.3항쟁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백과사전에서는 담담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근현대사에서 차별받고 소외를 받았던 민중들의 피맺힌 한이 담겨 있습니다.

4‧3과 김익렬(金益烈) 장군 - 부언 설명하자면 김익렬 장군은 조병옥의 모함으로 9연대장에서 해임되었으나 6.25때 많은 무공을 쌓은 후 3성장군이 되고 국방대학원장까지 역임한 우리나라의 정통 보수이자 후배 군인들이 손꼽는 참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군사독재에 부역하지 않고 전두환 시대에 죽음이 다가오자 이 회고록을 집필하고 자신의 사후에 발표하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그의 유족들은 그 이후의 정권에서도 발표를 못하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주 제민일보의 한 눈 밝은 기자에 의해 그의 유고가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그 스토리도 재미있습니다만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여러 드라마에서도 나왔던 당시의 스토리, 즉 김 연대장이 김달삼과 산중에서 담판을 짓기 위해 본인의 부인을 인질로 보내겠다고 했던 그 미망인께서 아직 생존해 계십니다.

이 글은 그 시절 군인이 썼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잘 정돈된 명문인데다 읽는 재미까지 있는 글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글이 갖는 의미는 4.3이후에 이 나라 극우들의 자양분이 되었던 ‘빨갱이 프레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밝힌 글이라는 점에서 현재의 상황과 떼어놓을 수 없는 기록이라는 점입니다. <진실의길>은 김익렬 장군님의 회고록을 10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회고록을 제공해 주신 트위터리언 @Jin6148님께 감사드립니다.

 

 

 

24. 암살범의 군법회의

1948년 7월 말 박진경 대령 암살범인 주범 문상길 중위와 하수인 2명의 군법회의가 개최되었다. 장소는 지금은 남산도서관이 된 경비대 군기감 본부였다. 일제 때는 일본 신사(神社) 자리였다. 재판장은 이응준(李應俊) 대령, 범무사는 김완룡(金完龍) 소령이었다(이응준 대령은 초대 육군참모총장이며 김완룡 소령은 육군법무감을 역임하고 소장 예편함). 나는 참고인 자격으로 출석하였다. 이 군법회의는 군인들과 그 관계자들만 참관‧방청할 수 있는 군법회의였으나 사건이 워낙 컸고 정치적인 성격도 띠어 연일 초만원이었다.

그러나 재판은 예상하였던 것보다 간단하게 끝났다. 검찰관의 심문에 범인들은 3인 모두 죄상 전부를 순순하게 인정하였으므로 재판은 1시간도 못되어 끝났다. 그들은 범행동기에 관하여 자기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다른 정치적 목적도 없었고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는 군인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해치는 민족반역자를 총살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이 군인의 임무라고 끝끝내 주장하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사고를 저질러서 본의 아니게 김익렬 연대장에게 피해를 주어 죄송하다”고 사과하였다.

재판장 이응준 대령은 범인들에게 최후로 법정에서 진술할 말은 없느냐고 물었다. 범인들은 사전에 심적으로 서로 상의하여 두었던지 문상길 중위가 3인을 대표하여 “진술할 말은 별로 없으나 재판장 이하 전원과 김익렬 연대장에게 최후의 부탁이 하나 있으니 들어 주겠느냐”고 하였다. 재판장은 “들어줄 만한 말이면 들어줄 터이니 말하여 보라”고 하였다.

문상길 중위는 정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박진경 연대장님을 사살하였으나 본인 개인에 대해서는 대단히 죄송하게 여긴다”(처음으로 ‘연대장님’이라는 존칭어를 썼다. 그 전에는 줄곧 ‘민족반역자’라 하였다)고 말하고,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의 총애를 받은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 안다. 우리 3인에게 총살형의 선고를 내리는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 이 법정의 성격상 당연히 총살형이 선고될 것이며 우리는 그 선고에 마음으로 복종하며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하 전원과 김연대장도 장차 노령하여지면 저 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 세상 하나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하여도 하나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나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을 하여주기를 부탁한다”.

일순간 법정은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단상과 단하의 방청객 할 것 없이 전부가 안색이 굳어졌다. 이응준 대령은 창백한 안색을 짓고 한참 말없이 앉았더니 법정휴회를 선언했다. 재판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었다. 물론 전원 총살형이었다. 총살형은 수주일 후에 수색에서 집행되었다. 나는 임석하지 못하였으나 참관하였던 군인들의 말은 총살형 집행 당시 문상길 중위를 비롯한 3인의 태도는 참으로 군인다웠다고 한다. 3인은 총살장에서도 평소와 별다른 점이 없이 하나님께 “우리들의 영혼을 받아들이시고 우리들이 뿌리는 피와 정신이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밑거름이 되게 하소서”하고 기도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최후에는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한 후 ‘양양한 앞 길을’하는 군가를 부르면서 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또 해괴한 것은 참관한 하우스만 대위가 다가가 넘어진 시체에다 자기 피스톨을 꺼내 난사했다는 것이다. 하우스만 대위는 경비대 정보책임자로 박진경 대령과 절친한 친구였으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에게 박대령을 추천한 장본인이었다. 총살현장의 광경은 참관자들의 마음 속에 이렇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문인 신문기자 중에는 그 장면을 승화시켜 감상적인 기사를 써서 경찰의 주목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25. 김달삼의 사체검진

결과적으로 제주도민 수만의 생명을 앗아가게 만든 폭동의 두목 김달삼은 그 후 제주도를 탈출, 월북하여 해주(海州)에서 공산당에 입당하고 공산주의자의 영웅이 되었으며 그 후 다시 남파되어 태백산 지구 또는 지리산 지구 공산유격대 책임자로 활약하다가 6‧25직전에 태백산 지구에서 국군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전사(戰史)에는 기록되어 있다. 나는 이러한 주장에 회의적이다. 김달삼을 직접 상면한 자는 국군 현역장교 중에 나 한 사람뿐이다. 그래서 김달삼을 사살하였다는 현장마다 내가 가서 그 사체확인을 해야 했었다. 나는 7~8회에 걸쳐서 사체확인을 하였다. 그 중에는 공비들이 김달삼을 살해하여 투항했다는 경우도 있었고 김달삼 부대를 포위 전멸시키고 김달삼의 사체를 찾아냈다는 경우 등등 10여 회에 걸쳐 ‘사체 소동’이 있었다. 공식적인 검시만해도 7~8회가 된다.

그러나 내가 사체를 확인할 결과는 공명을 노린 부대장이나 정보관들이 꾸며낸 조작극이었으며 끝내 김달삼의 사체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김달삼은 제주도에서 사망한 것이 아닌가 한다. 김달삼에 대한 그 후의 여러 가지 영웅담은 공산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인 ‘가짜 김달삼’을 내세워 선전에 이용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진짜 김일성이가 따로 있음에도 김성주(金成柱)를 김일성이로 둔갑시켰듯이, 태백산 지리산 지구의 공비두목 김달삼도 여러 명의 ‘가짜 김달삼’이라고 보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김달삼의 사상성분 등에 관하여서는 불투명한 점이 많다. 그가 골수 공산주의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나와의 담판때도 공산주의니, 사회주의니 등등의 용어는 여러차례 나왔으나 공산주의자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노동대중이니 부르주아니 착취계급이니 하는 언사는 일언반구도 사용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사상을 논할 만큼 공산주의 이론에 밝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공산주의 사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제주도민을 조직선동하여 폭동을 야기시켰다고는 보기 어렵다. 나와의 대화에서 그는 공산주의를 위해 도민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고 시종일관하여 폭동이 경찰이 도민재산을 불법 약탈하고 고문치사 강간 등을 자행하는데 항거하여 일으킨 자위수단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했었다. 거기에 군집한 폭도들도 같은 주장이었다.

설사 김달삼 일당이 공산주의자였다고 가정하더라도 폭동발생 초기의 상황에서는 공산주의 이론을 앞세워 폭도들에게 공감을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 제주도 대중의 지식수준으로 보아 공산주의 사상으로 폭도화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나는 김달삼이 유창한 서울 표준어를 사용했던 점이든지 도민의 생존과 자위 운운 했던 점 등으로 보아 김달삼은 제주도민의 전통적인 배타사상이 강한데다 객지생활에서 제주도 출신이라 하여 지방적인 차별을 당한 경험이 있어 깊은 반감을 품게된 자가 아닌가 한다. 그 점에서 그는 대다수 도민과 폭도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본다.

또 김달삼의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나 일제 때에 고등교육을 받은 자가 그 때까지 제주도에 잔류하여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당시 제주도에서 성행하던 일본과의 밀무역에 관련된 자가 아닌가 한다. 김달삼과 동석하였던 나머지 폭도두목 대부분이 해풍에 그을고, 선원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자주 튀어나왔고, 당시 나포되어 있던 일본어선에 관한 성능과 일본까지 탈출하는데 필요한 연료의 소요량과 시간 등에 능통하였던 점 등이 나의 그런 추측을 뒷받침해 준다. 폭도들과 면밀히 내통하던 자들 중에는 선주나 선원이 많았고, 이들은 발각되면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도망쳐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나는 김달삼이 밀무역에 관계하다 쫓기는 몸이 되자 대의명분에 걸맞는 여러가지 근사한 정치적인 용어로 폭도들을 규합했던 게 아닌가 짐작하고 있다(김달삼의 본명은 李承晋. 日本 京都 城峯중학교와 東京 중앙대 예과를 다니다 학병을 기피 귀국, 부친이 살던 대구에서 8‧15해방을 맞았으며 46년 귀향, 大靜中에서 사회과 교사로 역사와 공민을 가르쳤고 남로당 대정면 조직책을 맡았음. 교편을 그만둔 뒤 47년 ‘3‧1사건’ 이후에는 남로당 도당간부로 활동했으며 4‧3발발 무렵에는 무장대의 핵심세력으로 부상했던 점 등으로 미루어 金을 밀무역 관련자로 본 필자의 견해는 주관적 체험에서 유추된 것으로 보인다 - 편집자).

26. ‘4‧3’에 대한 나의 소견

나는 제주도 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官)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民)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폭동이라고 본다. 당시 제주도경찰감찰청장이나 제주군정장관, 경무부장 조병옥씨나 미군정청장관 딘 장군 중에 한 사람이라도 사건을 옳게 파악하고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하였더라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단순한 사건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데 사건처리에 임하여 군정장관 딘 장군 이하 미국인들은 언어불통으로 정보를 오판해 결과적으로 우둔하기 짝이 없는 실책을 저질렀고, 자신들의 과실을 잘 알고 있던 경무부장 조병옥씨 이하 경찰은 사건해결 보다는 죄상이 노출되어 자기 모가지가 달아날까봐 진상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하였다. 거기에다 공명심에 눈이 어두운 박진경 대령까지 끼어들어 사건을 원인으로부터 살펴 풀어가려고 생각지 않고 각자가 사건처리와는 거리가 먼 자기의 목적달성에만 전념하다가 대폭동화한 것이다.

설사 공산주의자가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고 치자. 그러나 제주도민 30만 전부가 공산주의자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폭동진압 책임자들은 동족인 제주도민을 이민족이나 식민지 국민에게도 감히 할 수 없는 토벌살상에만 주력을 한 것이다. 당시 정치지도자들이나 군‧경 책임자들이 수만 명의 선량한 양민을 공산주의자와 구별없이 살해하고 자신의 보신과 공명만을 꾀한 것은 민족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후세 국민들은 이 기록을 보고 소수의 악인들이 저지른 죄가 수만명 국민의 불행을 초래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역사의 교훈을 삼기 바란다.

제주도 4‧3사건에 관하여 사심없이 사실을 사실 그대로 역사에 기록할 수 있는 증인으로서 나는 이 글을 썼다. 이 사건에 관련되었던 자들 중에 사건의 내막을 소상히 알 수 있었던 자는 거의 전부가 제주도민에 대하여 크건 작건 범죄적 과실을 범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죄상을 정직하게 역사에 기록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쓰여진 4‧3사건 기록을 훑어보면 자기들의 죄상을 은폐하거나 정당화한 것이 대부분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당시 천하가 알다시피 민족적으로나 제주도민에 대하여 무죄하다. 오히려 도민들을 구출하려다 갖은 박해를 당한 사람이다. 또 사건을 정직하게 기록함으로써 이득이나 손해볼 것도 없다. 역사는 정직하게 사실 그대로를 전달해야만 후세에 참고가 되는 법이다. 허위조작된 것은 역사의 가치가 없다. 나는 이러한 정신에서 이 기록을 남긴다. 그런데도 잘못된 것이 있다면 나의 무식의 소산이거나 교양부족에서 생긴 편견일 것이다.

특히 조병옥씨 일파의 죄상에 대하여 나의 규탄 질책이 지나치다고 꾸지람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고인이 된 이들의 죄상을 규탄하여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은 나의 자존심과 교양에 비추어서도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민족적 정의와 양심으로 도무지 용납될 수 없고 묵과할 수 없는 죄상들만 기록한 것이며 그들이 저지른 잘못은 내가 기록한 사실의 몇 배가 될 것이다.

나의 소감을 정직하게 털어놓는다면 조병옥씨나 박진경 대령과 같은 군인은 우리나라에서 다시는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고인의 죄상을 덮어두는 것이 인간적 예의라고 생각하나 침묵을 지키기에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나의 양심의 가책이 너무 컸다. <끝>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4447&table=byple_news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