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의 위장 잠입 취재보다도 대학 당국이 이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은 것이 우리를 더 위험에 빠트렸다.”

영국 BBC 파노라마의 북한 위장 잠입 취재 논란과 관련해 취재팀과 동행했던 런던정경대(LSE) 학생 10명 가운데 6명이 공식적으로 학교 측의 처사를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내 BBC 편을 들었다.

밀라 아키노바 등 학생 6명은 17일 크레이그 칼훈 런던정경대 학장과 이사회 의장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BBC 기자들과 함께) 북한을 여행했던 것 보다 대학 측이 이런 사실을 공개하고 문제를 삼으면서 우리가 더 위험에 처해졌다고 판단한다”면서 “대학 측이야말로 우리의 신변 안전 문제가 걸린 사안을 두고 당사자인 우리와 단 한마디도 상의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언론보도 사실과 다른 것 많다”

이들은 공개서한에서 “언론들이 보도하고 있는 내용이 사실과 다른 것이 많다”면서 최대 논란이 되고 있는 BBC 취재팀의 사전 고지 여부와 관련해 “북한으로 출발하기 전 런던에서 BBC 기자들이 취재를 위해 합류할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으며, 이런 사실이 (북한 당국에) 발각될 경우 억류되거나 추방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베이징에서 존 스위니가 BBC 기자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이들은 “BBC 파노라마가 ‘북한 잠입취재’를 방영한 것에 대해서도 이의가 없다”며 BBC 입장을 지지했다.

학생들의 이같은 공개서한은 그동안 BBC 측이 밝혔던 취재 경위와 대략 맞아 떨어진다. 학생들에게 잠입취재의 위험성을 충분하게 고지하지 않았다는 런던정경대 측과 여타 언론들의 비판에 대해 BBC는 그동안 “학생들에게 잠입취재 사실과 그 위험을 충분히 알렸다”고 반박했었다. 런던에서 북한 여행팀을 모집할 때 개별적으로 두 번에 걸쳐 기자들이 동행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렸다는 것. 또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들어가기 전에 존 스위니 기자와 카메라기자, 그리고 이번 북한 여행을 조직한 토미코 스위니 LSE 강사가 스위니 기자의 아내로 취재팀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고지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들 학생들에게 ‘서면’으로 동의를 받지는 않았으며, 스위니 기자가 자신의 신분을 런던정경대 ‘교수’라고 기재한 것 등은 논란의 소지가 없지 않다고 밝힌 바 있다.

   
북한 현지 호텔 주변에 둘러쳐진 철조망 앞에서 몰래 리포팅하고 있는 존 스위니 BBC 기자. 동행한 대학생들을 인간방패로 활용했다는 논란 때문인지 15일 방영된 ‘북한, 잠입취재’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사진=BBC <파노라마> 화면.
 
실제 BBC는 이 취재 계획을 면밀히 추진해왔으며, 위험 지역 취재 가이드라인에 따라 ‘리스크 관리’를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베이징에서 취재팀의 구성을 동행한 학생들에게 알린 것도 그 일환이었다는 것. 당초에는 스위니 기자의 신분만 밝히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지만, 학생들 사이에서 합류한 카메라기자가 ‘스파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자 전체 취재팀의 구성을 학생들에게 알리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BBC는 이와 관련, “만약 취재팀은 물론 동행한 학생들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우려가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이런 기획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최악의 경우 ‘억류’ 혹은 ‘추방’의 상황까지를 고려해 취재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실제 이 취재 계획은 취재 보도국 최고 책임자에게 보고됐으며 승인 아래 추진됐다.

여행자거나 방문단의 일원으로 신분을 가장해 취재하는 방식은 BBC의 취재 보도 지침에서도 정상적인 취재가 불가능할 경우 ‘예외적’으로 인정된다. 다만, 동행자나 협력자들의 신상에 위험을 초래하지 않도록 최대한의 안전 조치를 취하도록 하고 있다. 또 BBC는 물론 다른 서방 언론들도 북한을 비롯해 폐쇄적인 국가나 지역을 취재할 때 이런 위장 취재 방식을 활용하곤 한다. 한국 언론들이 북․중 국경 지대나 고구려나 발해 유적지 등을 취재할 때 여행자를 가장해 취재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파노라마> 최대 시청률 기록… 잠입취재 논란 한 몫

이번에 BBC <파노라마> 취재팀의 잠입취재가 특히 논란이 된 것은 북한 측이 스위니 기자의 잠입 취재 사실을 파악하고, 런던정경대와 동행했던 학생들에게 항의 및 경고 이메일을 보낸 것이 발단이 됐다. 뒤늦게 스위니 기자의 위장 취재 사실을 파악한 북한 당국이 이메일을 보낸 것. 학생들에게는 북한의 법률을 어겼다는 이유로 학생들의 신상 정보를 공개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런던정경대는 학생들의 신변 안전 문제와 BBC가 잠입 취재 사실을 학생들에게 충분히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북한 잠입취재’의 방영 중단을 요구했다. BBC가 이를 거절하자 대학 측은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대다수의 영국 언론들은 BBC의 이번 취재 방식에 대해 학생들을 인간방패로 활용한 비윤리적인 취재방식이었다고 몰매를 가했다. 지난해 사망한 BBC 간판 진행자 지미 새빌의 미성년자 성추행 파문에 이어 정치인의 성 스캔들 오보로 BBC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상태에서 이번 사안은 자칫 BBC에 결정적인 타격이 될 수도 있었다. 스위니 기자의 잠입취재에 동행했던 다수 학생들이 BBC의 입장을 지지함에 따라 그나마 곤경을 벗어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BBC가 거센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스위니 기자의 ‘북한 잠입취재’를 방영할 수 있었던 것은 어쨌든 나름 취재 보도 윤리의 기본을 지켰기 때문이다. 동행했던 10명의 학생 가운데 2명이 ‘공개적’으로 BBC가 자신들을 인간방패로 활용했다고 비난하고 나섰지만, 다수 학생들의 증언에 비춰 볼 때 취재팀이 동행할 것이라는 점을 나름 충분히 고지한 것만은 사실로 보이기 때문이다.

BBC <파노라마>의 이번 방북 잠입취재에 대한 보다 매서운 비판은 되레 다른 데 있다. 옥스퍼드대학의 티모시 가턴 애쉬 교수는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북한의 핵전쟁 위협이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북한의 ‘현재 상황’을 취재하려 한 BBC를 매도해서도 안되겠지만, 그 프로그램이 정작 보여준 것이 뭐냐고 묻는다. 환자는 없는 텅 빈 병원, 황량한 거리 풍경 등을 화면으로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북한의 피상적인 모습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BBC <파노라마>가 “북한의 실상을 보여줄 것”이라고 호기 있게 선전했지만, 북한 현실에 대한 분석과 진단은 대부분 전문가나 탈북자에서 따온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상당한 위험부담을 감수했다지만, 과연 그만한 값어치가 있었느냐는 반문인 셈이다.

예정대로 15일 밤 방영된 30분짜리 ‘북한 잠입취재’는 평균 510만 명이 시청한 것으로 집계됐다. 평균 시청률 20.3%. <파노라마> 평소 시청자 수보다 최대 69%나 증가한 수치다. <파노라마>가 2007년 1월 방송시간대를 월요일 밤 8시30분대로 옮긴 이후 최고 시청률이다. 북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때였기도 하지만, 잠입취재 논란이 시청률을 크게 끌어올린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굳이 BBC와 런던정경대의 손익 계산을 해본다면 BBC의 압승이란 평가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