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남쪽 끝자락은 '필운대(弼雲臺)'라 부른다. 조선시대에 봄이 되면 이곳의 꽃이 아름다워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필운대'라 이름 지은 것은 조선중기 문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항복이 이곳 필운대 아래에 살아서 그의 호인 '필운(弼雲)'을 빌어 이곳 지명을 붙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 큰 바위에는 '필운대'란 세 글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 동네를 '필운동'이라 부른다.
▲ 필운동 배화여자고등학교 ⓒ 황정수
필운대 아래쪽에는 오래된 학교가 하나 있다. 이 학교는 1898년 미국 남감리교 여선교사 캠벨(Josephine Campbell)이 세운 배화여자고등학교이다. 캠벨은 고간동(현 내자동)에 여학생 2명과 남학생 3명을 모아 '캐롤라이나 학당'을 창설한다.
1910년에 학교 명칭을 '배화학당'이라고 바꾸고, 1916년 현재의 과학관 건물로 학교를 이전한다. 1926년 캠벨 기념관이라 불리는 현재의 본관을 신축하여 학교가 완성되었다. 1938년부터 배화여자고등학교라 이름을 바꾸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학교는 한국 여성 교육에 앞장 선 선구적인 학교였다. 기독교 사상에 입각한 완전한 여성을 키우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한글 교육에 앞장을 섰고, 또 한글 서예 발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교사로 재직하며 한글 서예를 연구한 두 사람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한 사람은 독립운동가로 한글 글씨를 잘 썼던 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 1863-1939)이었고, 또 한 사람은 교육학자로 남궁억의 영향을 받아 한글 서예 발전에 남다른 노력을 했던 야자(也自) 이만규(李萬珪, 1889-1978)이다.
한글 서예를 연구한 남궁억과 이만규
▲ 남궁억(좌) /이만규(우) ⓒ 황정수
남궁억은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여기에 영어까지 익혀 조선 최초의 영어통역관이 되어 고종의 통역을 맡았던 인물이다. 또한 그는 1895년 궁내부의 토목국장이 되어 '탑골공원'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 관계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와 '황성신문' 사장이 되었다. 1905년에는 성주목사, 이듬해에는 양양군수로 있으면서, 양양에 현산학교를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교육월보'를 간행하고 관동학회 회장을 하였다.
1910년 10월에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바로 배화학당의 교사가 되어 한글과 역사를 담당하였다. 배화학당 교사로 있으면서 '가정교육', '신편언문체법' 등의 교과서를 지었고, '우리의 역사', '언문 체법', '가정교육' 등의 책을 발간하였다. 또한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애국 가사를 보급하였으며, 한글서체를 창안하여 보급하는데 힘썼다.
그는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세'로 시작하는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을 비롯한 노래와 시 등을 작사 작곡하였다. 또한 나라꽃인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노동과 애국심을 주제로 한 찬송가와 시, 가사 등을 지어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들에 보급하였다. 특히 그가 지은 창가 가사 '무궁화동산', '기러기 노래', '조선의 노래' 등은 민간에 널리 유행하였다.
남궁억보다 15년 정도 늦게 배화여고보에 부임한 이만규는 본래 경성의전을 나온 의사였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 두고 교육학과 한글을 공부하여 교사가 되었다. 그는 호를 '야자(也自)'라 하였는데, 천자문의 마지막 글자 '야(也)'로서 '자신(自)'을 낮추고 겸손함을 표현하여 지었다고 한다.
이만규는 1889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한문과 서예를 수학하다가 16세가 되어 경성에 올라와 경성의학교에 다닌다. 졸업 후 개성에서 의사 생활을 하던 중, 1913년 윤치호의 권유로 송도중학교에서 교육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교사 생활 도중 반일 내용의 노래를 보급하고, 또한 3·1운동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수감되기도 한다.
1926년 개성 생활을 정리하고 경성의 배화여고보 교사로 부임한다. 한편으론 조선어학회에 가입하여 간사, 위원장을 맡으며 정열적으로 한글 운동을 한다. 국어 철자법을 통일하고 보급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이만규가 이렇게 한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젊어서 관동학회에서 활동할 때 받은 남궁억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관동학회를 세운 남궁억은 인품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궁체에 바탕을 둔 한글 서예에 독보적인 실력을 갖춘 뛰어난 예술가이기도 하였다. 이만규는 이곳에서 남궁억의 감화를 받아 한글 서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이만규는 직접 한글 글씨를 쓰며 궁체에 대한 연구에 집중한다. 두 사람이 경성의 같은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한 것도 또한 인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만규의 특별한 한글 사랑
▲ 이만규·이각경 ‘새시대 가정 여성훈’ 1946년 ⓒ 황정수
이만규는 6남매를 두었는데, 그 중에 딸이 넷이었다. 그는 선각자적 교육열로 당시로서는 드물게 네 딸을 모두 전문학교를 다니게 하였다. 첫째는 임경(姙卿), 둘째는 각경(珏卿), 세째는 철경(喆卿), 네째는 미경(美卿)이다. 이중 각경과 철경은 쌍둥이였다. 첫째 이임경은 경성사범학교를 다녔고, 이각경은 이화여전 가사과를 다녔으며, 이철경과 이미경은 이화여전 음악과에서 피아노를 전공하였다.
그는 네 딸에게 모두 한글 서예를 가르쳤다. 주로 체본을 보고 글씨를 쓰는 방법으로 지도를 하였다. 때로는 상궁들이 쓴 글씨를 낙선재 등에서 빌려 직접 보고 쓰도록 하는 등 열성을 보였다. 특히 이각경과 이철경은 뛰어난 재주를 보여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경성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였던 큰언니 이임경도 막내인 이미경에게 글씨 지도를 할 정도로 네 자매가 모두 한글 서예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이만규는 특히 서예를 본격적으로 한 이각경, 이철경, 이미경 3자매의 호를 '봄뫼', '갈물', '꽃뜰'로 지어주기도 하였다. 또한 '비단 땅', '비단 마음', '비단 글', '비단 글씨' 등 자매들이 사용한 아름다운 인장 문구 또한 모두 이만규가 지어준 것이다. 이들 호와 인장의 문구는 어느 하나 뺄 것 없이 모두 우리글을 사랑했던 이만규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들이다. 세 딸은 아버지가 지어준 호와 인장의 글귀를 평생 사용한다.
이각경, 이철경, 이미경 세 자매의 활동과 작품
네 자매 중 이각경, 이철경, 이미경 세 사람은 모두 배화여고보를 다니며 한글 서예를 수련한다. 이들은 모두 전문학교에 진학해 자신의 전공이 따로 있었음에도 평생 한글 글씨를 놓지 않는다. 이들의 노력은 한글 궁체가 서예라는 예술의 중요한 분야로 자리 잡게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각경과 이철경 두 사람은 1914년 개성에서 쌍둥이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글 서예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개성의 호수돈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5학년 때 부친의 전근으로 경성의 배화보통학교로 전학한다.
최고 명문 여학교인 경성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 전신)에 함께 입학하였으나, 2학년을 수료한 후 아버지가 근무하는 배화여고보로 전학한다. 우수한 두 딸을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학교로 유치하려는 생각과 좀 더 가까이에서 한글 공부를 시키려는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배화여고보의 이각경과 이철경. 동아일보 1931.2. 8일자 ⓒ 황정수
두 사람의 활동은 여고보 시절부터 장안의 화제였다. 당시 동아일보에서 두 사람의 우수한 성적과 서예 활동에 대해 크게 보도할 정도였다. 또한 고보 졸업 후 이화여전에 동시에 입학한 것 또한 화제가 되었다.
동아일보는 두 사람의 입학을 대서특필하며 '공부 질하고 글씨 잘 쓰는 미모의 쌍둥이 형제'라는 제목과 함께 두 사람과의 대담을 실었다. 특히 두 사람의 서예 실력을 칭찬하였는데, 이각경의 한문 글씨와 이철경의 한글 글씨를 실어 두 사람의 재능이 비범함을 칭찬하였다.
▲ 이각경의 글씨 ⓒ 황정수
언니 이각경은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일본 도쿄로 유학을 다녀 온 후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의 비서가 된다. 이때 마침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비를 만드는 일이 있었는데, 여운형이 이각경을 추천하여 비문을 쓰게 한다.
당시 여성이 비문을 쓰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라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이 일로 이각경은 일약 유명세를 타며 서예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를 계기로 초등용 습자책 <어린이글씨체첩>과 중등용 습자책 <가정글씨체첩>을 발간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1950년 한국 전쟁이 나자 이만규와 함께 월북한다.
이각경의 글씨는 전형적인 궁체로 유연하기보다는 필선이 강한 강단이 있는 글씨이다. 서예 작품으로서의 필체라기보다는 궁중에서 서사 상궁들이 책을 베끼며 쓰던 필체에 가깝다.
실용적인 글씨인 궁체가 현대 서예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초기 형태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현대 한글 궁체에서 보는 세련된 맛이 적고 예전 궁체의 날 것 그대로가 남아 있다. 이런 이각경의 필체는 훗날 북쪽에서 '각경체'라 불리며 북한 한글의 중심이 된다.
▲ 이철경의 글씨 ⓒ 황정수
이에 비해 남쪽에 남은 이철경은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한 후 배화·이화 등 여러 여학교 교사를 한다. 1960년 이후에는 금란여고 교감과 교장을 지낸다. 그는 교직에 있으며 저명한 여류명사로 활동하였으며, 서예가로서도 뛰어난 업적을 쌓는다.
일찍이 문교부 검인정교과서 검정위원과 서예교과서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갈물한글서회'를 창설하여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는데, 한국 한글 서예 발전은 모두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밖에 수많은 여성 단체 회장을 맡으며 여성운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철경의 글씨는 언니 이각경의 글씨에 비해 훨씬 부드러운 느낌이 든다. 비록 같은 체본으로 함께 공부하였으나 타고난 품성에서 나오는 개성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철경의 글씨는 '갈물체'로 불렸는데, 쌍둥이 언니 이각경의 '각경체'와 함께 남북의 한글 서예를 대표하는 필체가 되었다.
▲ 이미경의 글씨. ⓒ 황정수
막내인 이미경도 언니들과 마찬가지로 배화여고보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하였다. 음악교사 생활을 10년 하였으나 역시 한글 서예를 잊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 두고 서예에 전념한다.
그의 글씨는 강약과 완급을 조절하며 조화를 이룬 흘림체 궁서로 일가를 이뤘다. 이미경의 한글 글씨는 실력에 비해 언니들의 명성에 가려진 느낌이 든다. 그러나 실제 한글 글씨를 쓰는 능력에 관해서는 많은 전문가들이 오히려 언니들에 비해 더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한때 필자는 같은 동네에 살던 언론인 성재(誠齋) 이관구(李寬求, 1898-1991) 선생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선생은 나즈막한 목소리로 "한글 글씨는 '꽃뜰'이 좋지" 하며 빙그레 웃으시었다. 그만치 이미경의 글씨는 이미 원숙한 경지에 있었다.
어찌 보면 언니들의 화려한 명성에 가려져 빛을 더 발하지 못한 것 같다. 특별한 언니를 둔 동생의 숙명 같은 것이라 할까? 그러나 음악을 전공하였고, 시조도 잘 짓고, 글씨 또한 경지에 이른 이미경의 예술 세계는 분명 대단한 경지에 있음을 세상은 잘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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