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위기가 발생한 1993년 3월부터 제네바 합의로 위기가 봉합된 1994년 10월 사이에 미국이 제3국과의 전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 기간에 미국은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했다. 또 1993년 6월에는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에 대한 암살 기도가 있었다"며 이라크를 공습했다. 1994년 9월에는 아이티를 침공했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결정적 부담을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미국은 여타 시기에 비해 훨씬 강한 집중력을 대북관계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이 같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북한과 미국은 전쟁을 불사할 듯한 곡예를 벌이다가 결국 제네바 합의로 사태를 봉합했다.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무승부나 다름없는 제네바 합의를 거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만, 위의 5건과 달리 이때는 미국의 굴복을 얻어내지 못했다. 미국의 대북 집중력이 높아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북한이 일대일 대결에서 승리하려면 미국과 제3국의 관계 악화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음을 뜻한다. 물론 세상 일이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므로, 미국과 제3국의 전쟁이 없는 상황에서도 북한이 미국을 꺾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객관적 조건만 놓고 보면, 제3국의 '협조' 없이 북한이 일대일 대결에서 미국을 이길 가능성이 높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것은 지금 단계에서 북한이 대미관계를 평화적으로 풀고 경제제재 해제와 북미수교를 얻으려면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플레이어가 됐든 중재자가 됐든, 북한을 돕는 누군가의 작용이 있어야만 북한의 목표가 수월하게 성취될 수 있음을 뜻한다.
플레이어든, 중재자든, 북한은 누군가가 필요하다
러시아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러시아는 아직까지는 동북아에 대한 영향력을 고도화할 만한 여력이 없다. 설령 러시아가 나선다 하더라도, 북한에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의 중재는 미국인들에게 거부감만 줄 뿐이다. 일본은 능력을 떠나 자격이 되지 않는다. 이 점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중국 역시 북한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없다는 점은 1997년 시작된 4자회담에서도 충분히 드러났다. 4자회담은 제1차 핵위기 2년 뒤인 1996년 4월 김영삼 대통령과 빌 클린턴 대통령의 한미 공동발표문을 통해 제안된 것으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출범한 남북한·미국·중국의 4자 협의체다.
▲ 4자회담 설명회에 참석한 북한 김계관 외교부 부부장(지금의 외무성 부상). 1997년 3월 6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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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이 제안했지만, 회담을 주도한 것은 미국과 중국이다. 중국이 미국과 함께 주도권을 쥐었지만, 중국의 행보는 남한뿐 아니라 북한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4자회담에 대한 각국의 입장이 상당히 드러난 시점인 1998년 8월 장공자 충북대 교수가 발표한 논문 '4자회담의 전개 과정과 전망'은 중국의 태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중국은 4자회담에 대해 원칙상으로는 지지하나 미국을 제외한 남북한 당사자 해결 원칙을 고수하며, 미국의 대(對)한반도 영향력 행사에 제동을 걸고 한반도 문제 해결에 발언권을 강화코자 한다."
- 충북대 사회과학연구소가 발행한 <사회과학연구> 제15권 제1호 수록.
4자회담에서 중국은 '한반도 문제는 남북한에 의해 해결돼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언뜻 보기에는 고마운 일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중국의 의도는 한반도 문제의 키를 쥔 미국을 견제하는 데 있었다. 북한과 미국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줘야 함에도, 남북한의 주체적 해결을 지지하는 엉뚱한 해법을 제시했던 것이다. 위 논문에 이런 대목도 있다.
"중국은 ······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기대가, 자칫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의 대중 봉쇄정책에 일익을 담당케 될 것에도 우려를 표하고 있다."
북한이 미국과의 평화협정에 지나치게 목을 매다가 미국 편이 되지 않을까를 중국이 우려했던 것이다. 그런 중국이 주도권을 잡았으니, 북한과 미국이 차분하게 논의하기 힘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4자회담의 성과를 기대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중국이 중간에 끼어봤자 북한에 이로울 게 없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 점은 제2차 북미 핵위기 때 개최된 6자회담에서도 드러났다. 6자회담은 2003년부터 2008년까지 5년간 베이징에서 열렸다. 중국의 중재 하에 오랫동안 열렸지만, 실질적 성과는 별로 없었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란 측면에서 북한이 실질적으로 얻은 것은 별로 없었다. 2009년 7월 15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6자회담은 영원히 끝났다"고 발언한 것은 6자회담이 무용할 뿐 아니라 중국의 중재도 무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러시아? 일본? 중국? 글쎄... 지난날을 돌아보면
▲ 6자회담의 한 장면. 2007년 2·13 합의 당시.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의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찍은 사진. | |
ⓒ 김종성 |
한편, 한국은 북미관계에 실질적 도움을 준 실적을 갖고 있다. 한국이 플레이어 혹은 중재자로 낀 결과, 2018년과 금년에 북한은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 역사적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회담이 실질적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북한과 미국 정상들이 한 자리에 앉았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한국이 개입한 상황에서 사상 초유의 이 같은 성과가 도출됐다는 사실은, 중국·러시아·일본이 할 수 없는 일을 한국은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최선희 부상의 플레이어 발언과 연락사무소의 일방적 철수를 통해 북한은 남한을 낮게 평가해온 전통적인 대남 인식의 일면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호전적 정권만 출현하지 않는다면 한국이 북미관계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이제까지의 역사가 잘 증거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북미관계를 하나하나 되짚어 보면, 북한이 단독으로 혹은 중국 등의 중재 하에 미국을 상대하기보다는 동족인 한국과의 협조 하에 미국을 상대하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북미관계에 남북공조가 유익하다는 점은 어느 정도 증명된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러시아·일본은 미국과의 동맹 여하를 떠나서, 한국만큼 열의를 보여주기 힘들다. 그들은 한국보다 강한 대미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런 영향력을 북한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은 대미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약하지만, 그 약한 영향력이나마 북한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피를 나눈 형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플레이어나 중재자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같은 피가 흐르는 동족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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