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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 최강자 미국, '빨갱이 공포'를 내면화하다

[전쟁국가 미국·3강-⑨] 현존위험위원회(CPD)와 반공군사주의
2019.09.14 10:36:31
 

 

 

 

공화당의 반격과 CPD의 대응

1951년 1월 5일 아이젠하워는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서 현지 실태 조사를 위해 유럽으로 떠난다. 같은 날 공화당 출신의 전 대통령 허버트 후버는 미군의 유럽 추가 파병은 "또 다른 한국전쟁을 초래"할 것이라며 나토 결성을 강력 반대한다.

후버는 공군과 해군력만으로 미국을 지킬 수 있다면서 유럽이 스스로를 지킬 의지가 있음을 확인한 이후에 군사원조와 미군 파병을 단행해도 된다고 강조했다. "유럽을 잃는다 해서 우리 안보나 미래에 대한 확신을 잃고 히스테리에 빠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공화당의 로버트 태프트 상원의원도 이날 2시간 30분에 걸친 의회 연설을 통해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의회 승인 없이 미군의 해외파병이 가능한가? 둘째, "러시아가 유럽을 공격할 의도가 있다"는 증거가 있는가? 셋째, 유럽에 미군을 파병하면 오히려 러시아를 자극하는 것 아닌가? 등이다.  

사실 해외 파병은 의회 승인 사항이다. 그런데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의 남침을 막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경찰 행동(police action)이라는 이유로 의회 승인 없이 한국전쟁에 개입했다. 그런 전례가 반복되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는 얘기다. 또한 미군의 유럽 파병은 오히려 소련을 자극해 전쟁의 가능성을 높인다는 지적이다. 

그는 "평화에 대한 최대의 현존하는 위험은 트루먼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 정부의 행동, 특히 미국인 장군 아이젠하워가 지휘하는 통합 유럽군대의 창설"이라면서 대규모 미군의 유럽 파병은 "엄청난 재정적자와 인플레, 미국의 병영국가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생존해 있는 유일한 전 대통령과 공화당의 양심으로 불리는 태프트 의원의 경고는 대중들의 여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다음 날인 1월 6일 부어리스는 워싱턴에서 CPD 회의를 소집해 "유럽에 대한 미 군사정책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후버 전 대통령의 제안이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 그의 제안을 지지하는 편지가 의회에 쇄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월 7일 CPD는 유럽은 "소련이 노리는 다음 먹잇감"이라고 맞받아쳤다. 소련이 유럽을 먹는다면 이는 "2억 명, 그것도 대부분 고도로 산업화된 주민들이 미국에 대항하는 공산 제국에 흡수되는 꼴"이라는 것이다. CPD는 "미국의 성공적 방어는 유럽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 이를 1,2차 대전을 거치면서 뒤늦게 깨달았다"면서 트루먼의 유럽 파병을 적극 옹호했다.

1월 8일 트루먼 대통령이 연두교서를 발표했다. 그는 "남한 침략은 세계를 단계적으로 접수하려는 소련 공산 독재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서유럽이 소련 침공에 무너지면 소련의 석탄 생산량은 2배, 철강 생산량은 3배로 늘어날 것"이며 "미국이 유럽을 외면하면 소련은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소련이 유럽과 아시아의 자유국가들을 집어삼키면 미국으로서는 감당조차 할 수 없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우리를 압박해 올 것"이며 "그런 상황이 되면 소련은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도 자신의 의지를 세계에 강요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한반도에서는 제한전을 수행하는 한편 지구적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한국전쟁의 승리보다는 핵심 산업지역인 서유럽과 일본의 재무장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트루먼은 "우리는 유럽 국가들에 대한 경제 원조를 계속할 필요가 있다. 그 원조는 이제 그들의 국방 건설과 연계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2월 7일 코난트는 전국 라디오 연설을 통해 "미국이 위험에 처해 있다. 분명히 군사적 위협이다. 우리는 즉각 국가적 위험에 대응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모든 국민들은 의회와 행정부에 대해 현 위기 상황에 대한 즉각적이고도 적절한 대응 조치를 취할 것을 청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결국 상원 외교위와 군사위는 유럽 파병에 관한 합동 청문회를 개최한다. 2월 20일 청문회에서 마셜 국방장관은 미군의 유럽 파병은 이미 1950년 9월 트루먼 대통령이 군부의 조언을 받아 결정한 사항이라면서 4개 사단 증파 방침을 기정사실화 했다. 이에 대해 후버 전 대통령은 2월 27일 증언에서 "미군의 유럽 파병은 러시아와의 승산 없는 지상전, 그리고 미국 청년들의 학살"로 이어질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처럼 의회에서 찬반 양론이 팽팽한 가운데 CPD는 3월 4일부터 매주 전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대국민 직접 설득에 나선다. 국민들의 의식을 바꿔 의회 반대파들을 압도한다는 전략이다. 3개월간 지속된 방송 캠페인의 첫 번째 연사는 과학계의 거물인 바네바 부시였다.

부시는 이제 소련과의 대결에서는 "모든 군사력에서의 우위"가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 소련의 핵개발 이전까지는 미국의 핵 독점으로 소련의 군사행동을 억지할 수 있었으나 핵 독점이 무너진 이후에는 핵무기 및 재래식 군사력의 우위를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 NSC-68의 핵심 요지로 이후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 독트린이 된다. 즉 군사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대외정책을 이끌어가겠다는 것이다. 1996년 클린턴 행정부가 천명한 '전방위 지배(Full Spectrum Dominance)'는 바로 이러한 정책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이어 3월 11일에는 로버트 패터슨 전 전쟁부 장관이 "공산주의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응책은 전면적이고 신속한 대외 군사 원조"라면서 아이젠하워가 주도하는 나토 결성을 전폭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3월 18일에는 윌리엄 도노번 전 OSS 국장이 심리전 등 비밀공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CPD는 라디오 연설 내용을 소책자로 발간하는 한편 '쫄면 죽는다(The Danger of Hiding Our Head)'라는 제목의 만화 10만부를 배포하고 '현대 무기와 자유인(Modern Arms and Free Men)'이라는 선전영화를 제작했다. 기업계는 이러한 선전 책자를 확대 보급했다.

CPD의 대국민 선전 작업은 <뉴욕타임스> 등 주요 언론의 우호적인 보도 덕택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부어리스 부의장은 자체 평가를 통해 전국 라디오 연설은 "CPD의 활동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국민들에게 우리가 처한 위험을 일깨우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고 밝혔다. 

결국 1951년 4월 5일 의회는 10만 미국 병사의 유럽 파병을 승인하는 한편 대통령에게 대외 및 군사정책에 대한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한다. CPD의 대국민 선전이 이뤄낸 개입주의의 승리였다. 

맥아더 해임 

그런데 바로 이날 또 하나의 폭탄이 의회에서 터진다. 하원 공화당 원내대표 조셉 마틴 의원이 중국 본토 공격을 주장하는 맥아더의 편지를 공개한 것이다. 중국 국민당 병사 80만을 동원해 중국 대륙에 대한 제2전선을 열자는 것이었다. 즉 한국전쟁을 중국대륙으로 확대해 중국 공산정권까지 무너뜨리자는 것이다.  

그는 유럽의 운명은 아시아의 반공전쟁에서 결정된다면서 "공산주의 음모가들은 아시아를 세계 정복의 주전장으로 택했다. 우리 군인들은 이곳에서 유럽을 대신해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그곳의 외교관들은 여전히 말싸움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극동에서의 전쟁에서 패한다면 유럽의 상실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맥아더는 1월 중순경 중국군을 저지하고 반격하기 위해 만주에 원폭 공격을 가하는 한편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를 동원해 중국 본토를 공격해야 한다고 정부에 제안했다. 그러나 이미 제한전 방침을 굳힌 트루먼 행정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게다가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유엔 결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미국 단독으로 확전을 결정할 수도 없었다. 유엔 결의에 참여한 유럽 국가들이 3차 세계 대전을 의미하는 확전에 동의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승리를 포기한 정부 방침에 분노한 맥아더는 자신의 복안을 야당에 알리면서 사실상 항명 행위를 한 셈이다. 4월 11일 트루먼은 맥아더 해임을 발표한다. 이로써 미국의 대외정책 논쟁은 개입주의 대 불개입주의에서 유럽우선주의 대 아시아우선주의로 바뀐다.  

전쟁 도중 지휘관을 교체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게다가 한국전쟁이 교착상태인데 유럽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고 군사원조를 한다? 대중들은 분노했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트루먼은 진짜 이유를 밝힐 수 없었다. 애치슨 국무장관과 마셜 국방장관,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지금은 전면전을 치를 수 없다. 준비가 안 돼 있다'며 제한전 방침을 고수했다. 미국과 서유럽의 군사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1951년 당시 미군 지휘관들은 소련과의 전면전에서 승리를 낙관할 수 없었다고 한다.  

맥아더 서한이 공개되면서 공화당은 총공세에 나섰다. 태프트 상원의원은 한반도에서 유화정책을 버리고 승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선택은 "애치슨인가 맥아더인가...애치슨을 해임하고 국무부 내의 공산주의 동조 분위기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 나라의 단합은 없다"고 역설했다. 

윌리엄 제너 상원의원은 "오늘날 우리나라는 소련의 지령을 받는 비밀요원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우리는 즉각 우리 정부 내의 암적 음모 집단을 통째로 들어내야 한다. 트루먼 대통령을 탄핵하고 우리나라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보이지 않는 정부를 색출해내야 한다"고 촉구했다. 

닉슨은 트루먼 대통령을 견책해야 한다면서 '맥아더 해임은 세계 공산주의에 대한 유화책'이라고 주장했다. 매카시는 트루먼에 대해 '개새끼(son of bitch)'라고 막말을 퍼부으면서 이제 온 나라가 붉게 물들 것이라고 개탄했다. 4월 12일 공화당 하원 정책위원회는 성명을 통해 "뮌헨을 능가하는 거대한 유화책이 트루먼-애치슨-마셜에 의해 준비되고 있는가?"라고 공격했다. 

5월 3일, 이른바 맥아더 청문회가 시작된다. 트루먼의 맥아더 해임이 정당한가를 따지는 청문회였다. CPD는 교묘한 여론전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다. 부어리스는 맥아더 해임 논쟁으로 공산주의의 위험이 새롭게 부각된 것은 오히려 좋은 징조라면서 여론전을 지휘했다.

우선 4월말 <뉴욕타임스>를 통해 무엇보다 국민적 단합이 중요하다면서 유럽 우선이냐, 아시아 우선이냐는 부차적 문제라고 물타기를 시도했다. 특히 미국이 한국전쟁을 우선시 할 경우 유엔과 나토의 단합이 무너져 자칫 미국 혼자 반공 성전에 나서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5월 14일부터 세 차례에 걸친 전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맥아더의 주장을 무력화시킨다. 첫 번째 방송에서 부어리스는 맥아더 휘하 극동사령부의 2인자인 클라크 아이첼버거 장군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전쟁에 대한 트루먼 대통령의 대응은 적절했다, 그러나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유럽 방위라는 답변을 받아냈다.  

그리고 5월 20일의 두 번째 방송에서 결정적 한 방을 이끌어낸다. 이날 출연자는 맥아더의 절대적 지지자인 두 명의 반공 신부였고 그중 한 명은 매카시에게 빨갱이 사냥에 나서도록 권유한 에드먼드 월시 신부였다. 그는 맥아더와 장시간 대화를 나눴으며 맥아더가 "자신의 극동 전략이 아이젠하워의 유럽 동맹 결성을 소홀히 하라는 뜻은 아니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다른 이의 증언을 통해 맥아더의 본심을 뒤바꿔버린 것이다.

이것으로 사실상 논쟁은 끝이 났다. 맥아더는 내심 유럽보다는 아시아를 우선해야 한다고 믿었다. 즉 나토 결성보다 한국전쟁에서의 승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공을 위해 단합해야 하며 아시아 우선이냐, 유럽 우선이냐는 부차적 문제라는 CPD의 원론적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못했다. 결국 의회는 "맥아더 해임은 대통령의 헌법적 권리에 속한다"며 트루먼의 해임 조치를 추인했다. 

이로써 1951년 1월 시작된 미 대외정책의 대논쟁은 유럽에서의 반공을 우선하는 개입주의의 승리로 사실상 끝이 났다. 또한 1951년 10월 10일 유럽에 대한 경제 원조를 군사 원조로 대체하는 내용의 상호안보법이 통과되면서 CPD는 자신의 모든 임무를 완수한다. 이 법은 사실상 CPD가 주도해서 만들었다. 군사 원조 위주의 상호안보법이 제정됨에 따라 1952년 미국의 대외원조는 73억 달러로 늘어난다. 1948-51년 마셜 플랜에 따른 연간 원조액 40억 달러의 두 배 가까운 수치다. 즉 서유럽에 대한 원조 확대로 이들 국가들을 미국 진영에 묶어둘 수 있게 된 것이다.  

1951년 말 CPD는 모든 임무를 완수했으나 실제 해산은 1953년에 이루어진다. 첫째 이유는 너무 일찍 해산할 경우 소련 공산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국민들의 경각심이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CPD가 주창한 반공군사주의를 실천할 지도자로 아이젠하워의 대통령 당선을 돕기 위해서였다. 결국 1차 CPD는 아이젠하워의 대통령 당선 이후 해체된다.

그리고 CPD 의장 제임스 코난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독일 고등판무관으로, 부의장 트레이시 부어리스는 나토 국방보좌관 겸 해외조달(Offshore Procurement) 책임자로 발탁된다. 즉 NSC-68의 반공군사주의를 홍보했던 사람들이 이의 집행에도 참여한 것이다.

고등판무관은 미국의 독일 점령에서 민간 부문 최고 책임자로 재무장과 경제 통합에 관한 정책들을 담당한다. 해외조달 책임자란 나토 병력을 위해 유럽에서 생산된 군수물자를 미국 돈으로 구매하는 역할을 한다. 즉 유럽 기업에 일감과 함께 달러 수입을 제공함으로써 대서양동맹을 강화하자는 취지다. 또한 미 의회와 국민들의 퍼주기 논란을 피하기 위한 꼼수다. 1954년 유럽에서의 해외 조달 액수는 23억 달러에 이른다.

반공군사주의의 확립 

1947년 냉전이 본격화된 이후 미국에서는 두 가지 빨갱이 공포가 성행했다. 하나는 공화당 우파가 유포한 것으로 '공산주의 일반'의 위협을 앞세워 국내의 반대파 척결에 나섰다. 아시아, 유럽 등 해외 공산주의에 대한 대응은 그 다음이었다. 다른 하나는 집권 민주당에 의한 것으로 '소련 공산주의'의 서유럽에 대한 위협을 강조했다. 민주당은 매카시 등의 빨갱이 사냥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으나 NSC-68을 관철해냄으로써 반공군사주의 체제를 확립한다. 요컨대 미국의 두 정치세력 모두가 '빨갱이 공포'를 정책 수행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역사가 멜빈 레플러는 2차 대전 이후 민주당과 공화당은 반공을 매개로 냉전 합의를 이룬다고 말한다. 즉 트루먼은 공화당이 자신의 대외정책을 지지해준다면 공화당 요구대로 국내의 이른바 '체제 전복 세력'과 맞서 싸울 용의가 있었다. 반면 공화당은 (국내에서의) 반공을 위해 마셜 플랜과 나토 창립, 독일 및 일본의 재건과 미군 해외 주둔에 마지못해 동의했다. 이렇게 해서 반공군사주의는 미 대외정책의 초당적 합의로 굳어지고 이 합의는 1960년대 말 베트남전쟁 때까지 이어진다.  

중요한 것은 대다수 미국인들에게 빨갱이 공포가 내면화됐다는 점이다. 1950년대는 미국의 국력이 역사상 최강, 세계에서 절대적 우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의 내면에서는 공포가 사라지지 않았다. 적어도 1960년대 중반까지 미국은 군사력과 경제력 측면에서 압도적 우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와 직장에서는 소련의 핵공격에 대비하는 민방위훈련이 실시됐고 1957년에는 폭격기 갭, 1960년에는 미사일 갭 등 미국의 군사력이 소련에 뒤진다는 불안감이 끊임없이 환기됐다. 바로 이러한 불안과 공포가 미국의 군사주의를 유지, 확대하는 자양분이 됐다.  

미국은 나토 창설 당시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그 이유로 들었다. 또한 독일이 통일될 당시 소련에게 나토가 단 1인치라도 동쪽으로 확대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은 동유럽 거의 모든 나라를 나토에 가입시켜 러시아를 포위하고 있으며 1990년대에는 유고슬라비아 해체에 나토를 동원했다. 미국의 군사주의는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응이 아니라 미국의 세계 지배를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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