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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응시하는 고대 이집트의 서기관

 

 

 

 
주원준 2013. 06. 27
조회수 1029추천수 1
 
 
 
<고대 근동 신화의 풍경 ③>
영원을 응시하는 고대 이집트의 서기관
 
 
 
 
들어가며
지난 글에서 고대 근동 문명을 만든, 진흙 관련 3대 직업을 보았다. 이 글에서 다루는 서기관은 벽돌공과 옹기장이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글을 다루었다. 이들은 거의 모든 고대 근동 문헌을 작성했다. 우리에게 전해진 고대 근동의 신화, 전례, 지혜, 시, 탄원, 찬미, 호소, 회계, 칙령, 연대기, 외교문서, 각종 목록, 수학, 과학, 마술문 등은 모두 이들의 손에 의해 기록되었다.
필자는 고대 근동의 서기관을 크게 두 부분으로, 곧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로 나누어서 살펴보겠다. 두 지역은 고대 근동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오늘 살펴볼 이집트 서기관의 모습은 고대 이스라엘의 서기관과 크게 차이 나지 않을 것이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에 크게 영향을 끼친 나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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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의 서기관. 대개 이런 모습으로 묘사된다. 카이로 박물관 /저작권 : 주원준
 
 
선비이자 관리
영어로 scribe, 독일어로 Schreiber로 표현하는 이 직업을 우리말로 대개 서기관(書記官) 또는 필경사(筆耕士)로 옮긴다. 두 낱말 모두 이들의 본질을 잘 드러낸다. 이들은 종합적인 지식인으로서 선비(士)였고, 매우 비중있는 관리(官)였다. 단순 복사자라는 의미에서 필경자(筆耕者, 영: copyist, 독:Kopist)와는 거리가 멀다. 이들은 글자를 쓰는 사람(pen man)이 아니라 종합적 지식인이었다.
 
파피루스와 오스트라콘
고대 근동의 문자 체계는 크게 이집트의 선형 문자 계열과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설형문자) 계열로 나뉜다(그 차이와 발전상은 다음 기회에 다루겠다). 쐐기문자는 토판에 철필(stylus)로 ‘눌러 찍는’ 것이었고, 선형문자는 붓을 잡고 파피루스에 ‘그리는’ 것이었다.
 
파피루스는 그리스어 ‘파퓌로스’(πάπυρος)의 음역인데, 이 말은 다시 고대 이집트어로 ‘파라오의 것’(p3y pr-ˁ3)이란 낱말의 음역이다. 비교적 후대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파피루스가 국가의 독점 사업이었던 데서 이 말이 유래했다. 물론 그 이전 시대에도 파피루스는 귀한 물건이었다.
워낙 고가의 물건이기에 파피루스는 널리 재활용되었다. 오래된 잉크를 씻어 버리고 다시 쓰는 일은 흔했고, 사적 용도의 편지는 아예 여백을 잘라 만든 재활용 파피루스를 선호하기도 했다. 이렇게 비쌌기 때문에 간단한 메모나 글씨 연습은 토기조각이나 돌조각을 이용했다.
이렇게 글자를 쓴 토기나 돌조각을 오스트라콘(ostracon)이라고 하고, 이집트 밖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이 그리스어 전문용어는 복수형 ostraca를 단수로 잘못 사용하는 일이 잦다). 당대에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였고 현재도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대개 글의 수준은 파피루스에 비해 떨어진다.
 
태초에도 검은 잉크와 붉은 잉크였다.
고대 이집트의 서기관들은 ‘갈대(골풀) 붓’으로 파피루스에 문자를 썼다. 세계 최초의 문자를 쓰는 재료는 잉크였다. 고대 이집트에서 잉크을 만드는 장인, 곧 묵장(墨匠)이 사용한 재료와 방법은 놀랍게도 우리 전통의 먹을 만드는 방법과 닮았다. 검은 잉크는 그릇의 밑바닥에 붙은 검댕에서 채취했고, 이를 점성있는 물질(젤라틴, 밀랍 등)과 섞은 다음 말려 떡처럼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먹을 물에 개어 사용했는데, 잉크와 먹을 만드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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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의 갈대 붓과 휴대용 케이스/저작권 : 위키
 
실제 고대 이집트의 서기관은 다양한 색을 사용했다. 하지만 가장 많이 사용한 색은 검은색과 붉은색이었다. 필자는 이런 점을 볼 때 마다 참 재미있다. 지금으로부터 5천년전에도 결국 글씨는 대개 검은색으로 쓰고, 이따금 붉은 색으로 강조하든가 제목을 단 것이다. 빨간 잉크는 붉은흙이나 산화물에서 채취했는데, 만드는 방법은 위와 거의 같았다.
글을 쓰다가 글씨의 색을 바꿀 때는, 붓을 바꿔썼다. 붓을 빨아 색을 바꿔가며 묻히지 않고, 색에 따라 여러 개의 붓을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동안 다른 붓을 귀에 꽂고 있기도 하였다.
 
서기관 교육
고왕국의 서기관은 대부분 가정에서 길러졌다. 아버지의 일을 아들이 물려받던 시대였다. 많아야 서너명을 집에 모아 놓고 글자를 가르치는 방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들’이란 말은 ‘학생’을 의미했고, ‘선생’은 ‘아버지’였다. 아들이 없던 서기관은 ‘영적 아들’(spiritual son), 곧 양자를 들였다.
어느정도 교육 체계가 잡힌 것은 중왕국(약 기원전 20세기-18세기) 부터였다. 대개 아들이 10세가 되면 신전이나 관청에 딸린 학교에 보냈다. 소규모 도제식 교육이다. 말을 안들으면 매질을 했다. ‘젊은이의 귀는 등에 있다’는 고대 이집트의 속담으로 미루어 보아, 등짝을 때렸던 것 같다.
소규모 도제식 교육의 장점은 실전형 인재를 필요한 수 만큼 길러낸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수학, 회계, 기하, 기타 기술 등을 익혔다. 고대 이집트 문헌 가운데 대략 10%가 이런 기술 문헌이라고 한다. 특수한 경우에는 외국어와 외국의 지리 등도 익혀 외교에 참여했다. 교육과정을 끝낸 학생들은 신전이나 관청에 취직되었고, 이따금 지방에서 일하기도 했다.
 
독송법 - 전통의 공부 방법
공부하는 방식은 대개 목소리를 맞춰 교재를 크게 읽는 것이었다. 우리 전통의 서당 문화를 떠올리면 된다. ‘하늘 천 따 지’ 하듯이 리듬에 맞춰 몸을 가볍게 흔들면서, 읽어 내려가는 방식이다. 이렇게 독송을 통해 암기한 다음, 그 내용을 조용히 땅바닥이나 오스트라콘에 썼다. 파피루스는 연습지로 쓰기엔 너무도 고가품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연습지로 쓴 오스트라콘의 문장은 실수와 오류가 잦다.
사실 침묵중에 개인적으로 독서하는 공부법이 확산된 것은 르네상스 이후였다. 그 배경에는 ‘개인’의 발견과 인쇄술의 발명과 보급이 있다. 현재 그리스도교는 독송법(讀頌法)을 거의 잊었다. 개신교는 말할 것도 없고, 천주교도 성경을 고대의 운율에 따라 잘 읽을 수 있는 성직자가 드물다. 이따금 전례문의 독송을 들을 때면 어색한 감을 떨칠 수 없다. 그런데 지금도 유다교와 이슬람에서는 아이들에게 독송법을 가르친다. 어렸을 때 부터 가르쳐야 전통의 운율을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종합 지식인
서기관은 글이 관련된 일이면 거의 모두 참여했고, 실질적인 권력을 누렸다. 농업이 근간인 고대 이집트에서 서기관은 소출을 계산하고 그에 따라 세금을 산출하는 중요한 일을 맡았다. 이는 단순한 장부 기입 이상의 권력을 의미했다. 실질적인 세리였다. 농노의 저항이 없을 수 없다. 서기관은 곤봉으로 무장한 하급 관리를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서기관은 군대에서 일했다. 주로 군사와 무기를 세고, 정해진 기준에 맞춰 징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문맹자를 위해서 글을 써 주고 돈을 받는 일은 서기관의 고유한 영역이었다. 이들은 편지를 대신 써 주거나 세금 관련 문헌을 작성해 주기도 했다. 또한 소송에 관련된 사람을 위해 소장이나 변론 등을 작성했다. 종합 대서소의 역할이었다.
때로 이들은 외교에 참여했다. 외국어에 능통한 서기관들은 고대 근동 세계의 외교전에 깊숙히 관여했다. 물론 각종 문헌의 복사와 보급은 이들의 주된 임무였다.
고왕국이 무너지면서 지방에도 점차 많은 서기관이 늘어났다. 앞서 언급했던 학교의 발전은 서기관 보급에 큰 역할을 했다. 지방 서기관들은 농노들에 견주어 매우 우월한 위치였고, 일부 서기관은 큰 토지를 소유하기도 했다.
서기관은 명실공히 고대 이집트의 엘리트 집단이었다. 그 지위를 칭송하는 문헌은 많다. 법적·사회적·경제적 지위는 상당했고, 이름이 알려진 서기관도 제법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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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니스의 신전 부조. 붉은 색 잉크를 사용한 흔적을 볼 수 있다/저작원 : 주원준
 
 
 
신전 서기관
이렇게 고대 근동의 서기관은 거의 모든 지식 노동자의 조상이다. 그 가운데 신전에 고용된 서기관은 종교적 지식인, 곧 신학자나 종교학자의 조상이다. 이들은 고대 이집트의 신학, 전례, 마술 문헌 등을 작성했다. 기본 임무는 신전의 건물 관리, 전례, 문헌의 작성과 보존 등이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사자의 서, 다양한 지혜서 등 고대 이집트의 종교 문헌은 이 신전 서기관의 손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들의 글과 그림은 고대 이집트의 신전 벽을 화려하게 물들였다. 이들은 신들의 모습과 개성을 고정시켰고 신들의 대사와 행위를 묘사했다. 이들의 손에 의해 고대 이집트의 신들은 저마다 일관된 성격과 개성을 갖추었다.
특이하게도 이 신전 서기관들은, 세속 서기관과 달리 이름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이 남긴 신화의 저자는 토트, 아툼, 호루스 등 신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이들은 신들의 작품을 신들의 처지에서 신들의 이름으로 기록했다. 이들은 신들을 먼저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구약성경을 기록한 고대 이스라엘의 서기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의 체험과 고백에 우리가 기대어 있다.
 
영원을 응시하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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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의 서기관/저작권 : 주원준
 
앞에서 나왔던 이 서기관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무릎에 올린 파피루스에 글자를 적는다. 본디 손에는 갈대붓이, 무릎에는 파피루스가 올려져 있었을 것인데, 세월이 지나며 소실되었다고 본다.
특이하게도, 피라밋에서 발견된 서기관들은 거의 모두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독자들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않았는가? 사람이 글자를 쓰려면 시선을 파피루스로 향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정면을 보고 있다. 무엇엔가 골똘히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 이 자세는 글자를 쓰는 것이 아니라 쓰기 전에 생각하는 모습이나, 또는 쓰는 중의 휴지기의 모습이다. 이 서기관이 왕궁에 속했다면 파라오를 주시하며 그 말씀을 주의깊게 듣고 있는 중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다윗의 서기관(2사무 8,17)도 다윗이 말할 때는 이런 자세를 취했을지 모른다.
이집트의 유물을 보라. 거의 모든 서기관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러므로 이 자세는 고대 이집트인이 본 서기관의 본질을 전해준다. 글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글자 그 자체보다는 글자를 적는 사람의 통찰이 더 중요하다. 글씨를 쓰는 것 보다 글을 쓰기 전, 또는 글을 멈추었을 때가 더 중요하다.
만일 이 서기관이 신전 서기관이었다면, 그는 저 멀리 영원을 응시하며 신들을 체험하고 있을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서기관도 이렇게 창조와 구원의 신비를 성찰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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