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미군의 남한 점령과 미군정 체제의 수립

9월 9일 8시부터 미 24군 본진이 서울역에 도착해 총독부를 비롯한 서울시내 중심부 요소에 배치되었다. 주요 위치마다 일본군이 늘어선 가운데 미군의 행진이 계속 되었다. 군중들은 조용히 미군의 행진을 지켜보았다. 미군 부대는 주요 시설에 분산, 배치되었다. 미군 비행기들이 굉음을 내며 비행함으로써 조선인과 일본인 모두에게 미군의 군사적 힘을 과시하였다.

9월 9일 오후 4시 연합군과 일본측 사이에 항복문서 조인식이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렸다. 미국측은 재조선 미군사령관 하지 육군중장과 미해군 대표 킨 케이드 해군대장이, 일본측은 조선군관구 사령관 카미츠키 요시오 육군중장, 진해만경비사령관 야마쿠치 기사부로 해군중장,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육군대장 출신)가 참석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25분에 걸쳐 영문과 일문으로 된 항복문서에 일본측과 미국측이 서명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4시 45분, 일본기가 내려오고 성조기가 올려졌다. 일본을 대신해 미국이 남한의 통치자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조치였다.(주1)

1945년 9월 서울에 진주한 미군과 시민들.
1945년 9월 서울에 진주한 미군과 시민들.

한편, 양측이 서명한 항복문서 제5조에는 “일본의 문무관은 면직되지 않는 한 현직에 유임한다”고 되어 있었다. 미군은 조선총독부 기구를 그대로 유지하고 이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남의 모든 행정권은 본관(맥아더)에 귀속된다’는 9월 9일자 맥아더 포고 제1호와 배치되었다. 미 점령군은 남한 주민들의 일본에 대한 반감 등을 고려하여 군정체제를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 내각을 존속시킨 채 간접통치를 시행했으나 한국에는 그럴만한 정부가 없다는 것이 미국의 판단이었던 것이다.(주2)

그러나 남한에는 이미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인민공화국(인공)을 비롯해 각 지역에는 인민들이 자주적으로 조직한 인민위원회가 사실상의 권력기관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미군은 이를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북한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이 건준이나 인민위원회 등을 통합해 좌우합작 형태의 인민정치위원회 등으로 개편하도록 하여 간접통치를 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남한의 경우, 그렇게 하면 좌익이 주도권을 쥐게 될 것이기 때문에 미군으로서는 직접 통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북한에서 소련이 했던 것처럼 기존의 인공과 우익을 결합시켜 좌우합작 형태의 자치기관을 조직하도록 하고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이 있었지만 미국으로서는 그렇게 해서 남한의 정치적 주도권을 확실히 장악할 수 없었다. 이남지역에서 혁명을 방지하고 미국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미군정을 통한 직접 통치 방식 밖에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9월 12일 하지 중장은 아베 총독과 경무국장 니시히로츄우난을 정식으로 해임하고, 제7사단장 아놀드 소장을 38선 이남의 군정장관에, 조선주둔군 헌병대장 쉬크(L. E. Shick) 준장을 경무국장에 임명했다. 군정장관으로 임명된 아놀드 소장 또한 행정 경험이 전혀 없는 야전군인 출신으로 1946년 1월 4일 러치 소장에게 인계할 때까지 114일 동안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짓는 데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아놀드는 군정장관 자리를 아놀드에게 넘겨주면서 “총독부는 일본인이 착취하기 위한 기구였지만 당분간 사용할 기관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미군정의 행태를 합리화했지만 이는 한국인의 의사와 실정을 무시한 지극히 기능적이고 편의적인 발상이었다.(주3

한편, 하지는 별도의 지시가 없으면 모든 관리들은 그 직책에 계속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일본인에 대한 해고는 계속되었다. 9월 15일 재조선 미육군사령부는 경성의 명칭을 ‘서울’로 통일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수도 명칭이 ‘서울’이 된 것이다. 9월 16일 한국인 전규홍이 군청부 법부국 특별감찰청장에 임명되었으며, 경무국장 쉬크는 군정부포고령 위반자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주4)

9월 15일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 엔도 정무총감과 국장들을 해고하고 그 자리를 미군 장교들을 임명했다. 정무총감에 해리스(C. S. Harris) 준장, 재무국장에 고든(C. J. Gordon) 중령, 광공국장에 언더우드(J. C. Underwood) 대령, 농상국장에 마틴(J. Martin) 중령, 법무국장에 우달(E. J. Woodall) 소령, 학무국장에 라카드 대위, 교통국장에 해밀턴 중령, 체신국장에 헐리(W. J. Herlihy) 중령 등을 임명했다.(주5)

한편, 남한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9월 12일 오후 2시 반 부민관에서 조선의 각 정당 대표들을 초청해 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한국인들이 시위를 그만 두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임무가 일본의 항복 접수와 법과 질서의 회복이라면서, 카이로회담에서 조선의 독립이 적절한 시기에 이뤄질 것이라고 했지만 시간이 필요하고 만일 무리하게 독립을 달성하려고 하면 도리어 원치 않는 혼란과 파국이 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맥아더 장군이 언론과 출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선언했으나 조선인들이 그것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주6)

무장한 차량을 타고 미군들이 서울 시내를 지나가고 있다.
무장한 차량을 타고 미군들이 서울 시내를 지나가고 있다.

** 미군군표를 법화로 사용한다는 내용을 담은 ‘포고령3호’. 통화권 장악은 국민생활의 실질적인 기초가 되는 경제 질서를 장악하는 것이고, 이는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물질적 사회적 토대인 것이다. 군대와 경찰, 그리고 통화권 장악은 미군정의 일차적인 출발점이었다.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포고 제3호

조선주민에게 포고함.
본관은 태평양육군최고지휘관으로서 아래와 같이 포고함.

제1조 법화
제1항 점령군에서 발행한 보조군표인 “A”인(印)의 원(圓) 통화는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에서 공사의 변제에 사용하는 법화로 정함.
제2항 점령군에서 발행한 보조군표 “A”인의 원 통화와 현재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에서 통용되는 법화인 보통의 원 통화는 일본은행과 대만은행에서 발행한 태환권을 제외하고는 액면대로 교환 가능함.
제3항 기타의 통화는 북위 38도 이남의 지역에서는 법화로 인정하지 않음.

제2조 일본군표인 원 화폐
제4항 일본제국정부나 또는 일본육해군에서 발행한 군표와 일본점령군이 사용한 통화는 모두 무효, 무가치하고, 또한 이와 같은 통화의 유통은 어떠한 거래에서라도 금함.

제3조 통화의 수출입금지
제5항 지폐, 보조화폐 또는 채권의 수출입을 포함한 대외금융거래는 본관의 허가한 경우 이외에는 금함.
제6항 금융거래는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내에서 시행하는 것을 제외하고 다른 것은 대외금융거래로 간주함.

제4조 다른 통화에 관한 법규
제7항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에서 현재의 통용되는 법화인 보조군표나 또는 원 지폐 외에 다른 통화의 유통은 본관의 허가없이는 이것을 금함.

제5조 처벌
제8항 이상의 군정포고조항을 범한 자로서 점령군군율회의에서 유죄의 판결을 받은 자는 동 회의의 정한 바에 의하여 이를 처벌함.

1945년 9월 7일
태평양미국육군최고지휘관미국육군대장 D.맥아더

미군정의 한국인화 정책과 ‘고문정치’ ‘통역정치’의 폐해

미군의 진주 이후 총독부 고위관리들을 해고하고 그 자리에 미군 장교들을 앉히면서 미군정 체제가 등장, 가동하기 시작했는데, 9월 20일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약칭 ‘미군정청’)이 설립되어 미군사정부(미군정)의 남한 통치가 본격화했다. 미군정청은 처음 일본인을 행정고문에 임명했으나 이들에 대한 의존을 줄이기 위해 10월 5일에는 한국인 고문 11명을 임명했다. 그 11명은 김성수, 전용순, 김동원, 이용설, 오영수, 송진우, 김용무, 강병순, 윤기익, 여운형, 조만식 등이었는데, 여운형을 제외하면 한민당 일색이었다. 이들 가운데 평양에 있던 조만식은 이북에서의 일이 바빴던 탓에 서울로 오지 못했고, 여운형은 한민당 일색인 것에 항의하며 10월 14일 사임하고 말아 한민당이 모두 장악한 꼴이 되었다. 미군정은 1945년 12월 한국인의 역할을 늘리기 위해 미국인과 한국인의 양국장제를 시행하고, 1946년 가을부터는 각부서 책임자를 한국인으로 임명하고 미군은 자문역으로 물러앉음으로써 한국인화를 가속화했다. 또한 1947년 2월 민정장관으로 안재홍이 취임하고 같은 해 5월 17일 군정청을 남조선 과도정부로 개칭함으로써 군정의 한국인화 정책이 결실을 맺었다.(주7)

그러나 이처럼 외형적으로 한국인을 주요자리에 앉혔다고 해서 군정청(남조선 과도정부)을 한국인의 자주적인 기관으로 인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구개편은 형식적인 차원에서는 성공적이었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한국인의 대표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미군정 기관에서 일본인은 점차 배제되었지만 일제 시기 일본인들 아래서 협력했던 친일파들이 주요 위치를 차지하면서 친일파들이 친미파로 변신하는 형태만 바뀌었을 뿐 외세의 앞잡이 노릇을 한 인간들이 권력기관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내용은 거의 유사했다. 미군정의 정책자문 역할이 점차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바뀌었지만, 처음 일본인들이 친일파를 천거했고, 친일파들이 다시 친일파를 천거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군정에서 한국인 통역의 역할이 막강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미국이나 유럽 유학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다. 이런 사실은 미군정당국도 인정했다. 하지의 정치고문이었던 랭던(William R. Langdon)은 국무장관 앞으로 보낸 1945년 11월 26일자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군정에서 대중적인 좌익인사들을 배제시키면서 부호들을 끌어들인 점에 대해서는, 사실 초기에 우리가 지나치리만큼 부호와 보수적인 인사들을 많이 선발했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생면부지의 민중 가운데서 누가 누군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현실적인 목적 때문에 우리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을 임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사실 영어란 것이 한국인들 사이에선 사치스러운 것이었을 만큼 이들 인사들과 동료들은 자연히 돈 많은 사람들 중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입니다.”(주8)

그런데 미군정이 영어를 아는 부자출신들을 기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우리가 인정하더라도 그 ‘통역정치’의 폐해가 너무 심각했다는 점을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45년 11월 8일자로 관방정보과장보로 발령받은 이묘묵의 경우이다. 미군은 시러큐스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코리아타임즈 창간 기자로 활동했으며 연희전문학교에서 영어와 역사를 가르쳤던 이묘묵에 대해 단순히 영어를 하는 수준을 넘어 일정한 자격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보고 신뢰하여 하지의 통역 겸 고문역을 맡겼는데, 국내정치에 대한 판단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에 크게 의존하였다. 그런데 이묘묵이 하지를 만나자마자 ‘여운형이 친일파’라고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장장 8쪽에 걸친 보고서를 제출하며 음해 활동을 하였다. 조선주둔 일본군과의 무선 통신을 통해 받은 나쁜 인상도 있었던 하지는 여운형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는 순간부터 그는 미군의 안전을 위협하는 ‘음험한’ 공산주의자 내지는 ‘악질적인’ 친일파로 인식되었던 것이다.(주9)

하지는 이묘묵의 이런 보고서를 바탕으로 여운형에 대해 아주 나쁜 판단을 하고 있었으나 여운형이 이끄는 인민공화국이 남한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세력이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가져야 했다. 10월 5일에야 여운형을 만난 하지 중장의 첫 질문은 “왜놈과 무슨 관련이 있지?”였다. 여운형이 ‘아무 관련 없다’고 대답하자 “왜놈으로부터 돈을 얼마나 받았지?”라고 물었다. 남한 점령군사령관 하지를 비롯하여 미군정 지휘부는 이묘묵 등이 여운형을 친일파, 일제의 앞잡이, 공산주의자, 일본인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공금을 횡령한 자 등으로 모략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1946년 12월 중앙청에서 열린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식에서 연설하는 존 하지 중장. 하지 중장의 왼쪽은 하지의 통역 겸 정치고문인 이묘묵이고, 뒤쪽에 의장 김규식의 모습이 조금 보인다. 앉은 사람은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대표인 브라운 소장(왼쪽)과 아처 러치 군정장관을 대신해 참석한 찰스 헬믹 준장이다. 앞쪽은 전규홍 사무총장이다.(주10)(사진=국사편찬위원회/ 한겨레, 2019.7.20.)
1946년 12월 중앙청에서 열린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식에서 연설하는 존 하지 중장. 하지 중장의 왼쪽은 하지의 통역 겸 정치고문인 이묘묵이고, 뒤쪽에 의장 김규식의 모습이 조금 보인다. 앉은 사람은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대표인 브라운 소장(왼쪽)과 아처 러치 군정장관을 대신해 참석한 찰스 헬믹 준장이다. 앞쪽은 전규홍 사무총장이다.(주10)(사진=국사편찬위원회/ 한겨레, 2019.7.20.)

미군이 38선 이남을 점령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조선총독부는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것으로 보고 공산당과도 통할 수 있는 여운형과의 협상을 통해 일본인의 안전을 확보하려 하였다. 총독부의 요청에 여운형은 정치범과 경제범 석방, 식량 확보, 치안 활동에 대한 간섭 불허 등 5개 요구요건을 내걸고 이를 받아들였고, 이에 총독부는 여운형의 활동에 협조하는 차원에서 재정지원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묘묵은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하지에게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해 ‘일제의 앞잡이, 친일파, 민족반역자, 공금횡령자’ 등으로 중상모략과 악선전을 했던 것이다. 이묘묵은 1945년 9월 10일 음식점 명월관에서 미군 장교와 미국 언론인들을 초청한 연회 자리에서 “건준지도부에 대해 공산주의자라고 왜곡”하고 “해방 후 남한 정세를 왜곡해 브리핑”하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주11)

하지의 두 번째 물음에 또 다시 여운형이 “그런 적 없다”고 대답하고 자리를 뜨려 하자 하지는 “군정청 고문이 되어 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여운형이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미군정 고문으로 임명된 11명 중 조만식은 평양에 있어서 올 수 없었고, 나머지 10명 중 여운형을 제외한 김성수, 송진우 등 9명은 하나로 움직여 9대 1의 구도가 형성된 상황에서 여운형은 의미가 없다고 보고 10월 14일 군정 고문을 사임하고 말았다.(주12)

하지의 통역 겸 정치고문이 된 이묘묵이 1945년 9월 10일 미군장교와 미국 언론인들에게 남한 정세를 왜곡하고 건준의 여운형 등을 비방하는 내용의 8장짜리 보고서 중 마지막 부분. 마지막에 이묘묵(Myo-Mook Lee)의 이름이 보인다. 이묘묵의 이글 첫 페이지 상단에는 ‘연희전문학교’라는 머리말이 타자되어 있다. 이 보고서의 절반가량은 일본 패망 이후 조선이 당면한 문제들, 법과 질서의 유지, 식량과 연료 확보, 일본인 귀환과 그들의 조선내 재산의 처리, 통화량 증발과 인플레, 재일조선인 귀환 등 일제의 패망에 따른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다루었으나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은 ‘건준’에 대한 왜곡이었다.(주13)(사진=정용욱/ 한겨레, 2019.7.20.)
하지의 통역 겸 정치고문이 된 이묘묵이 1945년 9월 10일 미군장교와 미국 언론인들에게 남한 정세를 왜곡하고 건준의 여운형 등을 비방하는 내용의 8장짜리 보고서 중 마지막 부분. 마지막에 이묘묵(Myo-Mook Lee)의 이름이 보인다. 이묘묵의 이글 첫 페이지 상단에는 ‘연희전문학교’라는 머리말이 타자되어 있다. 이 보고서의 절반가량은 일본 패망 이후 조선이 당면한 문제들, 법과 질서의 유지, 식량과 연료 확보, 일본인 귀환과 그들의 조선내 재산의 처리, 통화량 증발과 인플레, 재일조선인 귀환 등 일제의 패망에 따른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다루었으나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은 ‘건준’에 대한 왜곡이었다.(주13)(사진=정용욱/ 한겨레, 2019.7.20.)

미군정의 성립과 국가구조

미군정의 남한통치는 우선 미군이 남한 전지역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완료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미 전술군(전투와 작전을 위한 군의 단위부대)의 38선 이남 지역의 점령은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뒤 서울·경기 일원에서 시작해 11월 10일 제주도를 점령하기까지 단계적으로 전개되었다.

제1단계는 9월 12일부터 23일까지 사이에 서울 주변 50마일 둘레의 개성·춘천·수원 등에 대한 점령을 완료하였다. 제7사단의 3개 연대와 24군단지원단(인천지역)이 중심을 이루었다. 제2단계는 경남북지역의 점령이었다. 4개 연대, 727명의 장교, 1만2,939명의 사병으로 구성된 40사단이 9월 22일 인천으로 들어와서 10월 15일까지 경남북지역의 점령을 완료했다. 이 시기 7사단의 점령지역도 확대되어 10월 10일까지 경기 전지역과 강원 전지역이 작전지역에 포함되었다. 제3단계는 제96사단 대신 들어온 제6사단 1만3,584명이 10월 25일까지 전남북 지역의 점령을 완료하였다. 제6사단 20보병연대가 11월 10일 최종적으로 제주를 점령함으로써 미전술군의 남한 배치는 완료되었다. 미군의 군사적 점령은 시, 도, 군, 읍, 면의 순으로 확대되었다. 서울과 부산, 전주에 각각 사단사령부를 두었고, 주요도시에는 연대본부를 두고 예하 각 대대가 수개 군의 관할지역을 담당하면서 관할지역 내의 시, 읍에 분견대를 두었다.(주14)

미전술군은 남한지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각 지방에 조직되어 있던 인민위원회, 치안대 등 민중정권기관과 충돌, 대립하였다. 8.15 직후 중앙의 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 등이 조직되는 것과 함께 각 지역에서 그 실정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자주적인 인민정권기관들이 건설되어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전술군은 처음 주둔과정에서 일정기간 이들 민중자치기관과 유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사실상 이중권력 상태를 형성했다. 그러나 1945년 말경에는 미군정에 우호적인 지방권력은 잔존하여 개편되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는 장갑차까지 동원한 미군의 물리력에 의해 진압, 제압되었다.

1946년 1월 14일 하지 사령관은 각 지역의 군정부대들에 대한 통제권을 전술지휘관으로부터 분리하여 군정사령관으로 이관하였다. 그동안 전술군에 의한 작전군정이 각 지역을 통제하던 것을 정치훈련을 받은 민사반 혹은 군정부대로 구성된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주한미군정’. USAMGIK: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으로 전환한 것이다. 군정청의 최고 책임자인 군정장관은 처음 아놀드 소장이었으나 1946년 1월 4일 러치 소장으로 교체되었다.

미군의 한반도 남단 점령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총독부로부터 항복을 받은 다음, 이를 대체할 미군정 국가권력을 수립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미군정 국가권력은 남한에 미국에 우호적인 정치세력을 형성, 육성하여 소련과의 협의를 통해 한반도 전역에 세워질 임시정부 또는 한국인의 정부가 미국에 적대적이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한반도 남단에서 좌익세력의 발호를 단호히 제어,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물리력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국가권력과 이를 뒷받침할 국가기구들이 필요했다. 미군정은 간단히 말해 남한 지역에 소련과 공산세력의 팽창, 발호를 제어할 수 있는 강력한 반공체제가 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미군정은 전술군의 강력한 물리적 지원을 바탕으로 억압적인 국가기구들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이 남한에 대한 통치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행정체계를 정비하고 행정 관료기구를 구축해야 했다. 미군정은 일본의 통치기구였던 총독부 구조를 최대한 활용하고 필요한 부분에서 손질하고 재편하는 방식으로 행정관료 기구를 구축하였다.

<표1> 미군정의 국가구조

(류상영, “미군정 국가기구의 창설과 성격”, 『한국사17-분단구조의 정착(1)』, 한길사, 1994, 193쪽)
(류상영, “미군정 국가기구의 창설과 성격”, 『한국사17-분단구조의 정착(1)』, 한길사, 1994, 193쪽)

미군정 국가기구의 창설, 재편

남한에서 미군 점령군의 효력이 발생한 것은 1945년 9월 조선총독이 미군 태평양 방면 총사령관 맥아더 대장의 대리인인 하지 중장에게 항복한 그 시각부터 시작되었다. 맥아더는 이날자로 ‘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포고 제1호, 제2호, 제3호를 각각 발표했는데 독립국가의 헌법에 준하는 위상을 갖고 있었다. 맥아더 사령관 포고 제1호는 38도 이남의 모든 통치권과 행정권이 맥아더 사령부의 군정 아래서 시행된다고 밝혔으며,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어떤 조직도 주권을 행사할 수 없고 미군사령부만이 배타적이고 유일한 주권의 주체라고 선언했다.(주15)

1945년 9월 12일 하지 사령관은 아베 일본 총독을 해임하고 아놀드 군정장관을 임명했으며, 9월 17일 미군사령부는 총독부 기존 기구를 활용하여 8개 국장(총무, 경무, 재무, 농림, 재무, 학무, 식산, 사정)에 미군 장교들을 임명했다. 미군정은 10월 15일 총독부 기구를 바탕으로 조직을 개편하였다.(<표2> 참조)

이후 미군정은 국가기구 개편을 통해 통치체제를 정비해갔다. 그 과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미군정의 국가기구 개편(주요 내용)

- 1945.8.17. 총독부기구 존속시켜 8개 국장 임명
- 1945.10.5. 군정장관의 고문 한국인 11명 임명(위원장 김성수)
- 1945.12.5. 군사영어학교 설립
- 1945.12. 한국인과 미국인 양국장제
- 1946.2.14.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하지 사령관의 자문기구로 출범
- 1946.5.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좌우합작 지원(여운형의 중간파 분리 위해)
- 1946.12.19.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의장 김규식)
- 1947.2.10. 과도입법의원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
- 1947.4.5. 중앙정부를 13부 6처로 확대 개편
- 1947.5.17. 각 부처의 장을 한국인으로 임명, 미국인 고문으로 후퇴. 미군정청, 한국인으로 운영되는 ‘남조선과도정부’로 개칭
- 1947.9.17.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
- 1945.8.15. 대한민국정부 수립(미군정 폐지)(주16)

1945년 말에는 군대를 창설하기 위해 기존의 군정청 기구에 군무국을 설치하고 기존의 경무국과 통합하여 국방사령부를 발족시켜 국가 기구의 단일 통제체제를 더욱 강화했다. 또한 1945년 12월부터는 한국인화 정책에 따라 군정청 기구에 미군 장교 1명과 한국인 관료 1명을 임명한 양국장제를 시행하였다.(<표3-1>, <표3-2> 참조)

<표2> 미군정청 기구 조직표(1945년 10월 15일 현재)

주한미군사령부, 『주한미군사 3』(HUSAFIK)(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미군사령부, 『주한미군사 3』(HUSAFIK)(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표3-1> 미군정청 중앙 조직(1945년 12월 31일 현재)

주한미군사령부, 『주한미군사 3』(HUSAFIK)(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미군사령부, 『주한미군사 3』(HUSAFIK)(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표3-2>미군정의 국가구조(1945년 말 현재)

주한미군사령부, 『주한미군사 3』(HUSAFIK)(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미군사령부, 『주한미군사 3』(HUSAFIK)(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지방행정조직의 경우 1945년 말 대부분의 지역에서 틀을 갖추었는데, 도 군정관 아래 비서처가 조직되고, 지방행정 관할기구로 6개국이 두어졌다.(<표3> 참조)

<표3> 미군정청 지방 행정 조직(1945년 12월 1일 현재)

안진, 『미군정기 억압기구 연구』, 새길, 1996, 103쪽
안진, 『미군정기 억압기구 연구』, 새길, 1996, 103쪽

전국적으로 군정 행정통치기구가 조직, 정비되면서 1946년 3월 29일 중앙조직의 경우 국(局)을 부(部)로 승격했으며, 1947년 7월 남조선 과도정부 수립과 함께 13주 6처의 기구를 갖추게 되었다.(아래 <표4> 참조)

<표4> 미군정의 중앙 조직(1947년 7월 현재)

안진, 『미군정기 억압기구 연구』, 새길, 1996, 104쪽
안진, 『미군정기 억압기구 연구』, 새길, 1996, 104쪽

입법, 사법, 행정 각 기관을 망라하여 남조선 과도정부가 성립되고 민정장관 안재홍을 비롯하여 각 부장 및 입법, 사법 기관의 관리들이 모두 한국인으로 교체되었으나 군정장관의 거부권 행사, 각 부처 내의 미국인 고문의 부결권 행사와 간섭 등으로 사실상 자율적인 행정 통제 권한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한편, 미군정은 1946년 6월 29일 한국 민족의 대표기관으로 입법기관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하였고, 군정 법령을 제정한 뒤 1946년 말에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설립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입법의원은 군정장관의 해산권 및 새 의원 임명권, 선거 요구 권한 등으로 한국인의 대표기구가 아닌 미군정 통치의 보조기관에 불과했다. 입법의원은 관선의원 45명, 민선의원 45명 등 9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관선의원의 경우 군정장관이 임명권을 갖고 있었고, 민선의원 선거 또한 10월 항쟁 와중에 좌익 정치지도자들이 모두 검거된 상황에서 이루어져 좌익의 참여가 조직적으로 배제되었다. 인민위원회 조직이 와해되지 않았던 제주도에서만 인민위원회 출신이 선출되었고, 대부분 한민당과 독촉계 등 극우인사들이 당선되었다. 한국민주당 12명, 독촉국민회 17명, 무소속 13명, 한독당 4명, 기타 4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무소속은 이승만, 신익희, 이갑성, 이종근 등 한민당과 친이승만계열의 단정지지자, 극우인사들이었다.(주17)

이에 대해 1946년 11월 4일 좌우합작위원회 공동의장인 김규식은 선거 부정이 심하고 친일파가 주류인 민선의원에 대해 재선거를 요청했으나 미소공위 미국측 대표인 브라운 소장은 이를 거절했다. 관선의원의 경우는 민선이 끝난 후 당시 좌우합작위원회의 심사위원이었던 김규식, 원세훈, 최동오, 송남헌 등이 추천한 자들 중에서 하지 중장이 최종 결정했는데, 합작위원 6명, 우익 12명, 중간파 12명, 기타 15명으로 결정되었다. 좌익의 통일전선체인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은 단정수립을 준비하는 입법기구 수립에 반대하여 선거에 불참했으며 관선의원에 지명된 민전 위원을 제명하겠다고 했다.(주18) 이렇게 해서 미군정 국가 행정기구뿐만 아니라 입법의원조차도 친일파, 한민당계, 친이승만계 등 친미세력 일변도로 구성되었다.

한민당계·친일파의 요직 장악과 친일관료의 재기용

미군정은 통치기구를 지극히 중앙집권화된 형태로 재편했으며, 그 요직에 일제시기의 친일관료들과 한민당 계열의 인사로 충원했다. 관료 충원에 대한 군정청의 원칙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영어구사력이 있고 교육 수준이 높으며 미국의 자유주의 이념을 옹호하는 친미적 성향의 인물이어야 했다. 한국정부 수립 직전까지 행정 분야에서 영어에 유창한 인물이 400여명 가량 있었는데 이들은 대개 지주나 부농 출신으로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자들이었다. 시라큐스 대학 출신의 이묘묵, 콜롬비아 대학 출신의 오천석, 위스콘신 출신의 이훈구, 임영신 등과 같은친미인사들은 대부분 한민당 지지자들로서 인공 등을 극도로 폄하하는 극우인사들이었다. 이들 ‘통역관’ 출신들의 영향력이 컸던 탓에 에스가 스노우는 미군정을 “통역관 정부”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관료 충원에 한국인 통역관 못지 않게 영향을 미쳤던 인물들은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극소수의 미군정 요원들이었다. 개성에서 전도 사업을 했던 목사의 아들 윌리엄스(G. Z. Williams)는 한민당 간부들과 절친했고 미국에서 교제가 있었던 조병옥을 경무국장에 발탁한 것을 비롯해 관료 충원에서 큰 역할을 했다. 윌리엄스와 마찬가지로 선교사의 아들로 한국에서 출생한 윔즈(C. Weems) 또한 관료 충원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주19)

미군정의 관료 충원의 두 번째 원칙은 공산주의와 관계가 있는 한국인을 배제한다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공산주의자들은 비협조적이며 소련에 의해 조종되는 공산당의 노선에 집착하기 때문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다. 이 같은 원칙 때문에 군정 관료 충원에서 조선공산당 계열의 인물들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원칙은 행정 관료뿐만 아니라 경찰, 군, 사법부에 대해서도 일관되었다. 결국 이렇게 되면서 군정청 관료기구에는 한민당계 인사들을 비롯하여 친일파 출신들이 대부분 진출하였다.(주20)

미군정은 1945년 말까지 군정 초기 3개월간의 기간 동안에 약 7만5천여 명의 한국인 관리들을 유임 또는 신규 임용하였는데, 공개 채용이 아니라 추천에 의한 임용으로 충원되었다. 이러한 임명 방식은 좌익세력을 배제하는데 효과적이었다. 미군정은 1946년 4월 20일 군정법령 제69호를 공포하여 중앙인사행정 기관인 인사행정처를 신설하고 공개시험에 입각해 성적 위주로 임용한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그러나 미군정 전기간을 통해 공경경쟁 시험은 한 번도 실시되지 않았다.(주21)

안진, 『미군정기 억압기구 연구』, 새길, 1996, 112쪽
안진, 『미군정기 억압기구 연구』, 새길, 1996, 112쪽

이렇게 해서 행정, 입법, 사법의 핵심 요직을 한민당계 인사들이 대부분 장악하였다. 1945년 10월 5일 한국인 군정 자문위원 11명을 임명했는데, 독립운동을 한 인사는 여운형과 조만식밖에 없었다. 김성수, 송진우, 김용무, 강병순, 김동원, 이용설, 오영수, 윤기익 등 한민당계가 대부분인 이 고문회의는 초기 미군정청 관료 엘리트 충원에서 큰 영향을 미쳤고, 한민당원들이 군정청 요직에 진출하는 데 교량 역할을 했다. 대법원장 김용무, 경무부장 조병옥,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문교부장 유억겸, 지방법원장 윤원상·강병순·윤명용 등이 모두 한민당원들이었다. 또한 김준연, 김도연, 홍성하 등 한민당의 핵심인사들이 5명으로 구성된 중앙노동조정위원회에, 한민당 선전부원이었던 백낙준은 경성대학(서울대 전신) 총장에 임명되었고, 중앙방송국 편성부장에 임명된 임병현, 한국상품공사 이사에 임명된 이동제, 서울시 행정처장에 임명된 이운 등도 한민당계였다. 그 외에도 대법관 김찬영, 노진설, 사법부장 김병로, 법제처장 권승렬, 형정국장 최병석, 수사국장 구자관, 경무부 공안국장 함대훈, 제주감찰청장 김대봉, 제5관구경찰부청장 강수창, 공안과장 이만종, 보안과장 박찬현, 정보과장 김헌, 여자경찰과장 황현숙, 노동부장 이훈구, 농무부장 윤보선, 보건후생부장 이용설, 체신부 총무국장 박종만, 외무처장 문장욱, 물가행정처장 최태욱, 인사행정처장 정일형, 기획처 통계국장 이순택 등 중앙조직의 핵심요직에 한민당계열 인사들이 기용되었다. 한민당 세력은 군정청의 중앙기구뿐만 아니라 지방의 도·군 행정기구에서도 핵심 요직을 장악했다.(주22)

미군정 행정 관료의 충원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총독부 친일관료들이 대거 진출했다는 사실이다. 한민당계의 친미적 인사들이 요직에 진출했지만 이들은 수적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하위 수준의 직위에는 친일관료들을 대거 기용하였다. 미군정은 포고령 1호를 통해 구총독부 관리들의 유임을 명령했고, 이에 해방 직후 친일파로 비난받아 도피, 은둔했던 중앙과 지방의 경찰·행정관료들이 재차 복귀하였으며, 대부분 하급관리였던 이들은 일본인 관료들이 해임됨에 따라 중간급 관리자로 상승할 수 있었다. 한편, 북한에서는 1945년 가을 친일파에 대한 처단이 조기에 이뤄짐에 따라 친일관료들이 대거 월남함으로써 미군정이 활용할 수 있는 총독부 출신 친일관료의 가용자원은 2배로 늘어났고, 이들은 미군정 기구의 비대화로 대부분 승진, 흡수되었다.(주23)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실은 친일관료들이 대부분 한민당 인사이거나 한민당과 연결된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모스크바 협정을 둘러싸고 신탁통치 분쟁이 벌어지면서 ‘반공애국주의’를 구실로 과거의 원죄에서 벗어나 이승만의 남한 단정노선에 기대어 국가권력을 장악, 운영하였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친일경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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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최영희, 『격동의 해방3년』,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6, 26쪽

2) 이완범, “전후 세계질서와 미국의 대한 정책”, 『한국사17-분단구조의 정착(1)』, 한길사, 1994, 157〜158쪽

3) 이완범, 앞의 글, 158쪽

4) 최영희, 위의 책, 30〜34쪽

5) 최영희, 위의 책, 35쪽

6) 국사편찬위원회, 『주한미군사 2』(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미군사 2권), 돌베개, 9〜11쪽

7) 이완범, 앞의 글, 158쪽

8) 미국무성 비밀외교문서/ 김국태 옮김, 『해방3년과 미국 Ⅰ』, 돌베개, 1984, 156〜157쪽

9)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1995, 129쪽

10) 정용욱, “두 친일인사, 우익단체 지도자와 미군 통역으로 변신하다”, 한겨레, 2019.7.20

11) 정용욱, 위의 글, 한겨레, 2019.7.20

12) 정병준, 위의 책, 148〜149쪽

13) 정용욱, 위의 글, 한겨레, 2019.7.20

14) 류상영, “미군정 국가기구의 창설과 성격”, 『한국사17-분단구조의 정착(1)』, 한길사, 1994, 190쪽

15) 안진, 『미군정기 억압기구 연구』, 새길, 1995, 98〜99쪽

16) 김광식, “8.15직후 한국사회와 미군정의 성격”, 역사비평 제1집, 1987, 57쪽

17) 안진, 『미군정기 억압기구 연구』, 106〜107쪽; 진덕규, 미군정의 정치사적 인식,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1989(개정판), 53쪽

18) 안진, 위의 책, 107쪽

19) 안진, 위의 책, 108〜109쪽

20) 안진, 위의 책, 109쪽

21) 안진, 위의 책, 110쪽

22) 안진, 위의 책, 110〜114쪽; 심지연, 『현대 한국 정당론』, 창작과비평사, 1984, 56〜57쪽

23) 안진, 위의 책, 115〜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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