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는 25일 직권조사를 통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희롱 사실을 인정했다.
인권위는 “한국 사회가 20년 전 성희롱 법제화 당시 인식 수준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했다”라며 성희롱을 ‘권력 관계’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권위는 이날 전원위원회를 열고 박 전 시장의 성희롱 등에 대한 직권조사를 심의·의결했다.
이번 직권조사를 통해 인권위는 “박 전 시장이 업무와 관련해 피해자에게 행한 성적 언동은 인권위법에 따른 성희롱에 해당한다”라고 분명히 했다.
인권위는 “박 시장이 늦은 밤 피해자에게 부적절한 메시지와 사진, 이모티콘을 보내고, 집무실에서 네일아트한 손톱과 손을 만졌다는 피해자의 주장은 사실로 인정 가능하다”라며 “이 같은 박 시장의 행위는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성적 언동으로 성희롱에 해당한다”라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판단 근거로 피해자의 휴대전화 디지털 포렌식 등 증거자료와 박 시장 행위가 발생했을 당시 이를 피해자에게 들었다거나 메시지를 직접 봤다는 참고인들의 진술, 피해자 진술의 구체성과 일관성 등을 들었다.
피조사자인 박 전 시장의 사망으로 방어권 행사가 어려운 상황에서 인권위는 피해자 주장을 입증할 자료가 없는 경우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부연했다. 인권위는 일반 성희롱 사건보다 엄격하게 사실관계를 인정했음에도 박 전 시장의 행위를 성희롱으로 판단하기에 충분하다고 밝혔다.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단체 회원들이 15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앞에서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공동행동 출범 기자회견을 열고 성차별 성폭력 철폐 등을 촉구하고 있다. 2020.10.15ⓒ김철수 기자
“성차별적 비서 관행, 피해 왜곡했다”
성희롱 묵인 방조 의혹에 대해 인권위는 객관적인 증거를 확인하기 어렵다며 인정하지 않았다. 피해자가 전보를 요청했고 상급자들이 잔류를 권유한 것은 사실이지만, 박 전 시장의 성희롱 때문이라고 인지했다는 정황은 파악되지 않았다고 부연했다.
다만 인권위는 “지자체장을 보좌하는 비서실이 성희롱의 속성 및 위계 구조 등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두 사람의 관계를 친밀한 관계라고만 바라본 낮은 성인지 감수성은 문제”라고 질타했다.
이 사건 발생 원인 중 하나로 인권위는 성차별적 고정관념에 따른 서울시의 비서 운용 관행을 지목했다. 인권위에 따르면, 서울시는 시장 비서실 데스크 비서에 2~30대 신입 여성 직원을 배치해 왔다.
인권위는 “피해자는 시장의 일정 관리 및 일과의 모든 것을 살피고 보좌하는 업무 외에 샤워 전후 속옷 관리, 약을 대리 처방받거나 복용하도록 챙기기, 혈압 재기 및 명절 장보기 등 사적 영역에 대한 노무까지 수행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런 업무 특성은 그 업무를 수행하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친밀성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공적 관계가 아닌 사적 관계의 친밀함으로 오인하게 만들 수 있다”라며 “비서실 직원들이 박 시장과 피해자를 ‘각별한 사이’나 ‘친밀한 관계’로 인지하면서 이를 ‘문제’로 바라보지 못한 것이나, 피해자 또한 비서 재직 당시 적극적으로 이런 노동을 수행한 것도 그것이 비서업무로 정당화돼 문제의 본질이 왜곡됐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아울러 인권위는 서울시의 낮은 성인지 감수성을 질타하기도 했다. 인권위는 지난해 4월 비서실 직원에 의한 성폭력 사건에서 서울시가 피해자 보호 조처를 하지 않은 점, 피해자의 2차 피해 조처 요청을 외면한 점 등을 언급하며 이는 ‘2차 피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여성민우회,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의 시민단체로 구성된 서울시장위력성폭력사건공동행동원들이 15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앞에서 열린 '서울시장위력성폭력사건공동행동 출범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자의 권리보장 및 일상회복, 직장 내 성희롱·성차별 문화 근절 등을 촉구하고 있다. 2020.10.15ⓒ뉴스1
“성희롱은 권력관계에서 발생”
“박원순 사건 예외 아니었다”
인권위는 “성희롱은 권력 관계에서 발생한다. 통상적으로 권력의 우위에 있는 남성이 여성에게, 직장 내 높은 지위에 있는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성희롱을 행사하는 양상으로 드러난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박 전 시장은 9년 동안 서울특별시장으로 재임하며 차기 대권후보로 거론되는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반면 피해자는 하위직급 공무원으로, 두 사람이 권력 관계 혹은 지위에 따른 위계관계라는 것은 명확하고, 이러한 위계와 성 역할 고정관념에 기반한 조직문화 속에서 성희롱은 언제든 발생할 개연성이 있으며, 본 사건도 예외가 아니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 사회는 ‘성희롱’을 바라보는 관점을 ‘성적 언동의 수위나 빈도’에서 ‘고용환경에 미치는 영향’으로, ‘거부 의사 표시’ 여부가 아니라 ‘권력 관계의 문제’로, ‘친밀성의 정도’가 아니라 ‘공적 영역’인지 여부로, ‘피해자/가해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문화나 위계 구조의 문제’로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인권위는 “고용, 정치 등 주요 영역에서의 성별 격차는 여전하고, 성희롱에 대한 낮은 인식과 피해자를 비난하는 2차 피해는 여전히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다”라며 “피해자가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온전하게 자신의 삶을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보내길 바란다”라고 했다.
인권위는 서울시에 ▲피해자 보호 및 2차 피해에 대한 대책 마련 ▲성 역할 고정관념에 따른 비서실 업무 관행 개선 등을 권고했다. 여성가족부 장관에 ▲공공기관 종사자가 성희롱 예방 교육을 이수할 수 있도록 점검 ▲지자체장에 의한 성폭력 발생 시 독립 기구에서 조사할 수 있도록 조처 등을 권고했다.
상급기관이 없는 지자체장의 경우 성희롱·성폭력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성 평등한 조직문화 정착을 위한 원칙을 천명하는 선언이 필요하다고 봤다.
강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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