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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과 트럼프, 그 사악한 공통점에 관하여

[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이준석과 트럼프, 그 사악한 공통점에 관하여

솔직히 고백하겠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여성가족부에 이어 통일부 폐지론으로 정가를 달궜을 때, 나는 공포를 느꼈다. 이 대표가 펼친 논리가 너무 무식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의 수장이 무식한 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반겨야 할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의 무식함을 도저히 반길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무식한 주장이 일정정도, 아니 어쩌면 상당한 강도로 효과를 발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앞섰기 때문이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그 무식함 속에 숨어있는 광기의 선동성이었다.

수평폭력과 수직폭력

수평폭력이라는 개념이 있다. 평생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해방투쟁에 바쳤던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정신의학자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1925~1961)이 정립한 이론이다.

파농은 폭력을 수평폭력과 수직폭력으로 구분했는데 수직폭력은 우리가 잘 아는 폭력, 즉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을 말한다. 직장 상사가 부하 노동자에게 갑질을 하거나,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거나,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수탈하는 것 등을 말한다.

 

반면 수평폭력은 약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이다. 예를 들어 당시 파농이 거주했던 알제리에서는 민중들 사이에서 극악한 폭력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가난한 남성 노동자가 가난한 여성 노동자를 강간하거나, 역시 가난한 민중들이 가난한 상점 주인을 살해하고 물건을 약탈하는 등의 일 말이다.

그런데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이 두 폭력은 본질적으로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것이 파농의 통찰이었다. 즉 약자들끼리 서로 치고받는 수평폭력의 원인은, 그들이 강자들로부터 지독한 수직폭력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폭력을 당하면 그 응어리를 풀어야 한다. 보통 응어리를 푸는 방식은 자기가 맞은 만큼 누군가를 때리는 것이다. 문제는 수직폭력을 당한 민중들 대부분이 강자에게 대들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데 있다. 식민지배를 받던 알제리 민중들이 감히 프랑스에 맞설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수평폭력이다. 강자에 맞설 힘은 없으나 나는 누군가를 때리고 싶다. 이러면 자연스레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눈길이 간다. 그리고 그들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알제리 민중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폭력에 대한 파농의 설명이 이렇다.

“굶주림, 집값을 못내 집 주인에게 내 쫓기는 사람들, 어머니의 말라붙은 젖가슴, 해골이 앙상한 아이들, 폐쇄된 작업장, 심장 곁을 까마귀 떼처럼 따라다니는 실업자들, 이 속에서 원주민은 매일 살인의 유혹을 받게 된다. 몇 파운드의 밀가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가?”

샌더스와 트럼프가 선정한 타깃

2016년 미국 대선은 수직폭력과 수평폭력의 위력(!)이 만천하에 드러난 선거였다. 기억하다시피 이 선거는 미국 대선 역사상 길이 남을 ‘아웃사이더의 선거’였다.

민주당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민주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는 출마 선언 장소에 지지자가 고작 10여 명 모였을 정도로 철저한 무명이었다. 그런데 그런 샌더스가 딱 한 달 만에 당시 대세론의 주인공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을 따라잡는 기적을 선보였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경선에서 패배했지만, 만약 샌더스가 그 조금의 격차를 극복해 민주당 후보가 됐다면 대통령 자리는 그의 차지였을 것이다. 당시 샌더스는 트럼프와의 가상대결 여론조사에서 거의 20%포인트 가까이 앞서고 있었다.

반대쪽 공화당에서는 트럼프가 돌풍을 일으켰다. 트럼프는 경선 유세 때마다 온갖 헛소리(!)를 남발해 공화당 주류를 충격에 빠뜨렸다. 공화당 주류는 이 또라이(!!)가 후보가 되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으려 했지만 공화당원들은 그를 선택했다. 트럼프는 본선에서도 힐러리를 꺾어 마침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이 두 아웃사이더가 돌풍을 일으킨 원인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36년 동안 신자유주의에 당한 미국 민중들의 수직폭력이었다. 신자유주의는 악랄하게 민중들을 약탈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민중들은 그나마 대출로 마련한 집 한 채마저 다 날렸다.

이런 민중들에게는 당한 만큼 누군가를 때려주고 싶은 심리가 발동한다. 그런데 당시 대세론을 주도했던 힐러리 클린턴은 “누군가를 때리자!”는 말을 할 강단 있는 위인이 못 됐다. 평생을 주류에서 살았던 힐러리는 매사에 그저 뜨뜻미지근했던 후보였다.

반면 아웃사이더였던 샌더스와 트럼프는 거침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우리 힘을 합쳐 누군가를 때립시다!”라고 외쳤다.

물론 두 사람이 겨냥한 대상은 완전히 달랐다. 샌더스의 총구는 민중들을 수탈한 월가에 겨눠졌다. 그가 내세운 “월가를 해체하겠다”는 공약은 미국 그 어떤 대통령 후보도 내세우지 못했던 파격적인 것이었다.

반면 트럼프의 총구는 이민자, 난민, 약소국을 향했다.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세우겠다”는 황당한 공약은 이런 선동의 백미였다. 샌더스는 진실을, 트럼프는 선동을 무기로 삼았지만 이 두 무기의 공통점은 “맞은 만큼 때리고 싶다”는 민중들의 심리를 정확히 짚었다는 것이다.

이준석의 선동은 계속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그 선거는 트럼프의 승리였다. 그리고 이후 4년 동안 미국 사회는 트럼프가 내뱉는 온갖 오물에 버무려져 마비되다시피 했다.

지난해 대선에서 트럼프가 패했지만 그가 물러났다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다. 아직도 트럼프의 혐오 선동이 미국 사회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유색인종에 대한 미국 백인들의 혐오 범죄가 그 어느 때보다 기승을 부리는 것이 그 증거다. 그들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두들겨 팸으로써, 자기가 당한 수직폭력의 한을 풀려 한다.

“여가부와 통일부를 폐지하자”는 이준석 대표의 무식한 주장이 두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논리는 하나도 두렵지 않다. 특히 “보수는 원래 작은 정부를 좋아한다”며 시작한 그의 논리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1.07.05ⓒ정의철 기자/공동취재사진


코로나19 이후 세계 그 어느 나라도 작은 정부를 추구하지 않는다. 자유무역에 미쳐있던 서구 열강들조차 글로벌 최저 법인세를 도입해 재정 확대에 열을 올리는 판이다. 신자유주의의 선구자였던 국제통화기금(IMF)도 큰 정부, 확대 재정을 세계 각국에 권고한다. 그런데 지금 작은 정부 이야기를 꺼낸다? 타이밍이 구려도 이렇게 구릴 수 없지 않나?

그런데 이준석 대표가 이 사실을 몰랐을까? 몰랐다면 그는 그냥 정말 무식한 거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의 목적이 작은 정부가 아니라 “나보다 약한 놈을 두들겨 패자”라는 수평폭력 선동이라면?

이러면 이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진다. 수직폭력에 오래 노출된 사람들일수록 누군가를 더 때리고 싶어한다. 이때 이 대표는 이들의 분을 풀어줄 타깃을 명확히 제시한다. “여성과 북한을 때리자! 쟤들을 반쯤 죽여 놓고 당신들의 기분을 풀어라!”라고 말이다.

이런 종류의 수평폭력 심리 자극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이미 트럼프가 미국 사회를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는지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줬다. 하지만 사람들을 선동하는 일에 눈이 먼 자들은 그런 결과를 개의치 않는다. 분노한 사람들이 “죽여라!”를 외칠 때 자기들의 지지율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상컨대 이준석 대표의 저 간교한 선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수평폭력 심리를 없애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심리를 유발하는 원인, 즉 우리에게 가해지는 수직폭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파농이 알제리 민중들에게 “식민주의는 생각하는 기계도 아니요, 이성을 갖춘 신체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이며, 더 큰 폭력 앞에서만 항복할 것이다”라고 외치며 항거를 주장한 이유도 이것이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이준석 대표가 빌붙어있는 그 기득권 카르텔과의 싸움에서 더 격렬하게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 민중들에게 “우리를 힘들게 만든 것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수직폭력의 가해자이다”라는 사실을 더 열정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사회적 이성을 마비시키려는 이 대표의 그 비열한 선동에 결연히 맞서야 한다. 이 싸움의 결과에 한국 사회가 트럼프의 뒤를 쫓는 저열한 사회가 되느냐, 21세기 복지의 시대를 선도하는 빛나는 이성의 사회가 되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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