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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위로 떠오른 ‘이재용 가석방’, 청와대·여당의 방기와 책임 회피

법 절차를 가장한 정치 행위, 과연 정당한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김철수 기자

 정부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석방하는 절차에 본격 돌입했다.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구치소가 법무부에 보고한 광복절 가석방 심사 대상자 명단에 이 부회장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남은 핵심 절차는 가석방심사위원회(심사위)의 최종 심사다. 심사위가 표결로 가석방 여부를 결정한 뒤, 법무부 장관이 허가하면 절차는 마무리된다. 법무부 장관이 심사위 결정을 거부한 사례는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법무부 예규상 가장 기초적인 가석방 요건은 형기의 60% 충족 여부다. 법무부는 이달부터 가석방 요건 복역률을 60%로 완화했다. 이 부회장이 요건을 갖추려면 8월이 되어야 한다. 복역률 요건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심사 대상에 오른 것도 이례적이다.

기초 요건만 놓고 보자면 이 부회장이 8월 가석방 심사 대상에 오르는 것이 별다른 문제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유죄가 확정된 이 부회장의 핵심 범죄가 정권 교체의 시발점이 됐던 ‘박근혜 국정농단’의 핵심인 정경유착이라는 자체만으로도 가석방의 정당성이 결여된다. 이 부회장의 재판 과정에서는 경영권 승계를 목적으로 정치권력과 부정한 청탁과 돈이 오간 사실이 인정됐다. 이 부회장이 지난 1월 18일 파기환송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기간이 고작 6개월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수형 생활이 ‘모범적’이었는지 판단할 근거도 충분치 않다. 정당성을 넘어 다른 수형자들과의 형평성에 위배된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롭기 어렵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이날 입장문을 내 “대통령 탄핵을 불러온 국정농단과 경영권 승계 등을 위한 사익편취와 뇌물공여 등 범죄의 중대성, 교화 가능성, 재범가능성 등을 고려해도 가석방 논의는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석연찮은 가석방 논의 과정, 정치가 법 절차에 개입하는 행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회장의 가석방이 수면 위로 떠오른 과정과 집권세력의 태도는 매우 석연치 않다.

이 부회장의 실형이 확정된 이후 보수 야권을 중심으로 지난 봄 무렵부터 이 부회장의 사면론이 거론되기 시작됐다.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 속에서 ‘반도체 강자’인 삼성의 역할과 국가 이익을 위해서는 이 부회장의 사면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청와대와 여당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4월 말 삼성 일가가 12조 원의 상속세 납부 및 사회환원 계획을 발표한 이후 여론을 살피기 시작했다.

미중 반도체 패권경쟁 과열과 삼성의 상속세 납부라는 여러 가지 상황들이 맞물리면서 이 부회장 사면에 대한 찬성 여론도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대통령의 통치 행위인 만큼, 아무리 여론이 뒷받침을 해준다고 하더라도 사법정의 측면에서의 정당성 부재, 사후 역사적 평가 등 리스크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청와대는 선뜻 사면 여론에 특정한 입장을 드러낼 수 없었다.

뜻밖에도 민주당 대선 주자였던 이광재 의원이 5월 중순 한 방송에서 이 부회장의 사면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여권에서 사면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한미정상회담에서 삼성 등 대기업들의 미국 투자를 약속한 직후인 6월 초에는 문 대통령이 4대그룹 대표들과의 만남 자리에서 이 부회장 사면 요구에 대해 “고충을 이해한다”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답변을 내놓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 2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4대 그룹 대표 초청 간담회에 앞서 환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구광모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문재인 대통령,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 2021.06.02.ⓒ뉴시스

이 부회장 사면에 대해 집권세력의 모호한 태도를 두고 한쪽에서는 부정적인 여론이 일었다. 취약한 정당성과 진보진영의 반대 여론 속에 집권세력에서는 사면의 대안으로 ‘가석방’이 거론됐다. 가석방은 형태상 대통령의 통치 행위와는 무관하다는 점에서 정치적 책임에서 자유롭다.

그러나 사면을 시작으로 가석방이 거론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돌아봤을 때, 과연 이번 가석방 심사가 단순히 정치 행위와 무관하다고만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특히 공정한 심사를 필요로 하는 사법 절차인 가석방이 집권세력에서 대안으로 거론된 것 자체부터가 사법 절차에 대한 정치적 개입으로 볼 소지가 충분하다. 최종적으로 가석방이 이뤄질 경우 법 절차를 가장한 정치적 판단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참여연대 정책위원인 김남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개혁입법특별위원장은 최근 민중의소리와 인터뷰에서 “가석방 심사에 권한이 없는 정치권 인사가 이 부회장의 가석방을 언급하면 심사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이 부회장 한 사람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이용해야 하는 가석방 제도의 공정성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사면’을 우회하는 방식으로 가석방이 논의되는 그간의 과정은 법 집행의 형식을 띠면서 실질적으로는 사법의 공정성을 훼손하시키는 절차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집권세력은 이러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는 모습이다.

민주당 송영길 대표는 전날 삼성전자 화성캠퍼스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 부회장이 8월이면 형기의 60%를 마쳐 가석방 대상이 될 수 있다”며 마치 이 부회장의 가석방에 정당성을 실어주는 듯한 발언을 했다.

청와대와 정부 역시 법 절차를 핑계로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날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특정 인물의 가석방 여부는 절차와 시스템의 문제”라고 했고,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법무부에서 기준과 절차에 따라 진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의당 오현주 대변인은 “법무부 장관이 법치주의의 원칙을 바로 세우지 못할망정 비겁하게 가석방심사위에 결정과 책임을 미루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같은 비판은 청와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이 부회장의 가석방이 집권세력의 정치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상식적인 의구심은 가석방 심사 결과로 그 진위가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

경실련은 “형집행법에 따른 가석방 요건을 충족해 추진한다는 핑계도 용납돼선 안 된다”며 “심사위는 이 부회장의 가석방을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심사 대상에서 배제할 것을 요구한다. 박 장관도 만약 심사위가 이 부회장의 가석방을 신청하더라도 불허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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