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수립 100일도 되지 않아 이승만 정권은 좌익세력을 처벌하겠다며 국가보안법을 제정·공포했다.(1948.12.01.)

친일청산과 국가보안법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해결할 최대 과제가 친일청산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제헌의회도 곧바로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반민족행위처벌법(1948.09.07.)'을 제정해 친일청산에 나섰다.

하지만, 친일청산보다 좌익처벌을 더 시급한 과제로 설정한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이듬해 6월 6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습격해 명단을 불태웠다. 곧이어 국회에서 반민법을 개정해 수사 기간을 축소하는 등 반민특위 활동은 사실상 무산시켰다.

김원웅 조국광복회 회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반민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기득권을 가진 친일세력은 가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한다는 자는 공산당 주구다”라며 9월23일에는 친일청산을 반대하는 반공국민대회를 서울운동장에서 열었다. 또한 반민특위를 지지하는 이문원 의원 등 소장파 국회의원들을 남조선노동당(남로당) 프락치로 몰아 구속기소했다. 1949년 5월에는 이문원·최태규·이구수 의원, 6월에는 황윤호·김옥주·강옥중·김병희·박윤원·노일환·김약수 의원, 8월에는 서용길·신성균·배중혁 의원이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국회에서 프락치 활동을 한 혐의로 구속됐다.

이처럼 미군정 하에서 탄생한 이승만 정권이 출범과 동시에 국가보안법을 제정한 첫 번째 이유는 좌익세력 처벌을 빌미로 친일청산을 막기 위해서다.

트루먼 독트린과 국가보안법

국가보안법을 제정한 두 번째 이유는 냉전의 시작을 알린 트루먼 독트린 때문이다.

1947년 3월 트루먼 미 대통령은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자’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한다.

세계대전 이후 미국외교정책의 기본원칙인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미국은 공산주의 색출 열풍(매카시즘)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공산주의 팽창을 막기 위한 반공방위지대(反共防衛地帶)를 구축했다.

 

미국은 그리스와 터키, 남베트남에 친미반공 정권을 수립하고, 일본과 서방세계를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반공 체제로 편입했다.

미국은 소련의 남하를 막고 국공내전 중인 중국 국민당 장제스를 지원하기 위해서라도 미군정 하의 38선 이남을 강력한 반공 전초기지로 개조해야만 했다.

실제 해방 직후 38선 이남은 77%가 사회주의를 신봉했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좌익세력을 처단하지 않으면 트루먼 독트린을 관철할 수 없었다.

▲광복 1년된 시점인 194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의 보도를 보면, 미군정청 여론국이 전국 8,453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 자본주의(1,189명, 14%), 사회주의(6,037명, 70%), 공산주의(574명, 7%), 모른다(653명, 8%)였다.
▲광복 1년된 시점인 194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의 보도를 보면, 미군정청 여론국이 전국 8,453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 자본주의(1,189명, 14%), 사회주의(6,037명, 70%), 공산주의(574명, 7%), 모른다(653명, 8%)였다.

당시 사회주의자는 독립운동가 출신이 많았고, 자본주의를 신봉한 14%는 대부분 친일파였지만, 미국의 외교정책 관철에서 이런 사정은 고려되지 않았다.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첫해 친일 경찰을 앞세워 대대적인 검거 열풍을 일으켰고, 1949년 한해 동안 11만8621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일본에선 사회주의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재일동포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졌다.

요컨대 이승만은 정권 유지를 위해, 미국은 패권 강화를 위해 국가보안법을 제정했고, 이를 이용해 반민족행위자인 친일세력이 독립운동가를 처벌하는 반역을 용인했다.

이렇게 탄생한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일본 군국주의를 옹호하고 외세에 굴종하는 자들을 처벌할 대신 자주통일운동에 재갈을 물리고 있다.

 강호석 기자 sonkang11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