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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노동이야기] 마트노동자 쉴 권리, ‘좋아요’ 숫자로 정하자는 윤석열 정부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국민제안 TOP 10 투표

호시탐탐 ‘노동시간 규제 완화’를 노려온 윤석열 정부가 이번엔 마트 의무휴업에 손을 댔다. 노동자와 시민 안전에 직결되는 화물차 안전 운임제 논란이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서, 대통령실이 ‘국민제안 TOP 10 투표’라는 이벤트를 개최해 일을 벌인 것이다. 

이 투표는 7월 21일 시작해 오는 31일 종료되는데, 현재 대통령실 행사 초대, 대통령실 시계, 온누리상품권을 경품으로 걸고 국민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대통령실은 10개의 제안을 올려놓고, 이 중 국민들의 호응이 높은 3가지를 정책에 반영하겠다고 한다.

10개의 제안을 정한 것은 대통령실 국민제안심사위원회 위원 11명이라는데, 이들이 누구인지 어떤 절차를 거쳐 의제를 골랐는지 공개되지 않았다. ‘국민투표’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투표인데, 대상이 된 의제들이 누구의 요구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재벌과 기업의 요구를 올려놓고 국민의 이름을 갖다 붙여 기만하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국민제안 TOP10 ⓒ국민제안 홈페이지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진행하는 투표인데, 방식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 사이트 로그인 절차도 없고 단지 ‘좋아요’ 버튼만 누르면 끝이다. 투표 취소는 안 되고 중복 투표도 가능하다. 노동자와 시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의제들인데, 장난감처럼 다뤄지고 있는 모양새다.

그렇게 투표 대상이 된 의제 중 하나가 ‘대형마트 의무휴업 폐지’다. 현재(28일 오후 12시 기준) 57만 6천여개의 ‘좋아요’를 받아 1위를 달리고 있다. 대형마트 의무휴업 제도는 소상공인 살리기와 노동자 건강권 보장 측면에서 도입돼 긴 시간 어렵게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어떤 사회적 논의나 전문적 검토도 거치지 않은 채, 별안간 ‘폐지’ 라는 꼬리표를 달고 투표 대상이 되었다.

마트 의무 휴업이 가진 다양한 사회적 가치에 주목해야 
노동강도 완화, 사회적 관계 보장, 기후 정의 실현과도 관련 


대형마트는 한 달에 겨우 2일 문을 닫는다. 현행 유통산업발전법은 대형마트 영업시간을 10시부터 24시까지로 제한하고, 매달 2일의 의무휴업일을 지정하게 하고 있다. 2012년 시행을 시작해, 올해로 딱 10년을 맞이했다. 당초 소상공인 살리기가 제도 도입 근거였지만 마트 노동자의 노동시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 10년 동안 의무휴업일은 그대로였다. 최근 급속도로 확대되는 대형마트 온라인 배송 노동자들의 상황까지 감안해, 다시 제대로 마트 노동자의 쉴 권리가 논의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노동자들은 개별적으로 휴무를 사용할 수 있지만, 해당 마트 전체가 쉬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마트노동자들은 마트 전체가 쉬는 날인 의무휴업일이 ‘진짜 쉬는 날’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정부가 나서서 폐지를 언급하고 있다.
 
대형마트 의무휴업 자료사진 ⓒ뉴시스

전체가 다 같이 쉬는 것은 노동강도 완화 측면에서 중요하다. 이와 함께 고려해 볼 것은 ‘사회적 휴일’이란 개념이다. ‘사회적 휴일’은 주로 남들이 쉬는 때 쉬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사회적 관계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남들이 쉴 때 쉬는 사회적 휴일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사회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다. 마트 노동자를 포함한 대다수 교대 노동자들은 남들이 쉴 때 일해야 하니 가족, 친구와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 중요한 행사나 모임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 인간관계가 소원해지게 되는 것이다.

대형마트는 평일보다 주말이나 명절, 공휴일에 더 바쁘다. 명절 기간에도 명절 당일만 쉬는 곳이 대부분이다. 의무휴업일은 지자체마다 다른데, 그러다보니 주말이 아니라 평일에 쉬는 곳이 많다. 이런 측면까지 고려해보면 의무휴업일은 일요일이나 명절까지 포함해 더 강화될 필요가 있다.

2019년에 열린 ‘마트 여성노동자의 노동실태와 쉴 권리 찾기 토론회’ 발표 결과를 보면, 노동자들은 쉴 권리 보장을 위할 필요 조치 중  1순위로 ‘의무휴업 확대’를 뽑았다. 특히 정기의무휴업 확대 요구는 고용 불안에 시달리고 노동조건과 환경이 열악한 비직영 노동자,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서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마트에는 다양한 협력업체, 입점업체 노동자들도 근무하고 있다. 이들을 포함해 그 가족까지 연계해 생각하면, 의무휴업이 사회에 가져오는 긍정적 영향력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즉, 휴일은 일하는 사람이 사회적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증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권리인 것이다. 대형마트들이 노동자의 쉴 권리와 사회적 관계를 보장하지 않으면, 건강하지 않은 일터가 될 수 밖에 없다. 
 
경제민주화민주화전국네트워크 등 시민사회단체 소속 회원들이 13일 오전 서울 중구 롯데마트 서울역점 앞에서 '대형마트·백화점·면세점 명절연휴 의무휴일 지정·확대 촉구 기자회견'을 열어 발언하고 있다. ⓒ임화영 기자

일부 언론에서는 대형마트 의무휴업이 기업의 경쟁력을 저하하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 건강권 측면에서는 물론이고, 지금보다 더 잘 쉬면서 일하는 방법이 무엇인가가 사회적으로 다뤄져야 할 의제다. 쿠팡, 마켓컬리와 같은 유통업체 배송 기사들의 과로사 문제가 끊이지 않자 ‘나의 편의가 누군가의 장시간 노동에 기대어 있지 않은가’ 하고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는 성찰적 목소리가 나오는 게 실정이다. 

의무휴업 도입 당시 시민들이 매우 불편해 할 것으로 우려했지만, 제도가 정착된 현재는 노동자들이 온전하게 쉴 수 있도록 생활과 계획을 조정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휴점일엔 지역 시장이나 소규모 마트에 가 장을 보거나, 전날 미리 방문하는 식으로 쇼핑 패턴이 바뀐 것이다. 이처럼 시민들의 노동안전보건 감수성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휴점일을 없애 대형마트 노동시간 규제를 풀겠다는 생각은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다.

소상공인들도 유통 대기업의 횡포에 방패가 되어준 의무휴업 제도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정부의 입장도 그랬다. 몇 년 전 공개된 정부 산하 국책연구원 보고서에선 ‘유통산업발전법상 영업시간 제한 및 의무휴업일 지정은 지역 상권과의 조화 및 상생협력의 차원에서도 타당성이 높은 규제’라고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마트 노동자들의 쉴 권리가 확대되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유럽의 경우 오래전부터 일요일에 정기 휴점하고 특정 요일을 별도 지정해 의무 휴점 하는 곳이 많다. 유럽에 다녀온 한국 사람들이 ‘평일 밤과 일요일에 문 닫은 가게를 보고 많이 당황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이렇게 해외에서 유통 소매점 영업 요일, 영업시간을 규제하는 것은 노동자 휴식, 지역 상권 보호, 종교적 권리, 가족 간의 유대 등을 보장하자는 취지다. 일터의 기준을 노동자의 몸과 삶으로 삼느냐, 자본의 생산성·이윤으로 삼느냐에 따라 마트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등이 28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오는 31일 종료되는 ‘국민제안 TOP10’ 투표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마트 의무휴업은 기후 위기 측면에서도 더 확대되어야 할 제도다. 최근 전세계에 심상치 않은 기후변화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뜨거워진 공기 탓에 산불이 잇따르고, 영원할 것 같았던 만년설이 녹아내리고 있다. 기후 변화로 인한 재난으로 난민과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막대한 자원을 투입한 과생산과 과소비로 유지되는 자본주의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기업들이 노동시간 관련 규제 완화를 요구하는 것은 오로지 ‘이윤 추구’ 때문이다. 더 많은 상품을 365일 쉴틈 없이 판매하기 위한 전략이 바로 마트 의무휴업 폐지인 것이다. 그런 전략은 실제 필요 이상의 상품을 소비하게 하고, 한쪽에서는 팔리지 않는 물건을 폐기하게 해 에너지·토지·물·탄소배출 측면에서 생태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노동자의 건강권을 침해하며 무한 영업을 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기업이 기후위기의 주범인 셈이다. 이렇게 노동시간 단축과 쉴 권리 보장은 기후 정의와 만난다.

노동자가 더 안전하고, 더 건강하고, 더 잘 쉴 수 있는 마트에 가고 싶다

상황이 이러니 지금 투표에 부쳐야 하는 건 ‘마트 의무휴업 폐지’가 아니라, ‘윤석열 정부의 반노동 정책 추진’에 대한 평가다. 노동자가 며칠 온전하게 쉬는 최소한의 권리 박탈의 문제를  ‘좋아요’ 투표로 취급하는 정부라니, 정말 괜찮은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윤석열 정부는 시대에 역행하는 국정운영을 할 게 아니라, 노동자가 보편적인 노동권을 보장받으며 적절한 생활 임금을 받고 제대로 쉬는 삶을 사는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고민하는 흔적을 보여줘야 한다.

지금 우리는 일하는 사람이 더 안전하고, 더 건강하고, 더 잘 쉴 수 있는 마트에 가고 싶다.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 맞는 마트의 모습이다. 

 

“ 이나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 ” 응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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