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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세일즈맨' 尹 상상 속 '그랜드 바겐 세일', 현실은?

[박세열 칼럼] 이명박 전 대통령 전철 밟는 윤석열 대통령

박세열 기자  |  기사입력 2023.03.17. 15:50:21

 

"이념 편향적인 죽창가를 부르다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던 윤석열 대통령은 한일 관계를 전임 정부가 망친 것처럼 얘기했지만, 일제 식민지배가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라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정세 인식이 우려스러운 것처럼, 실상은 매우 복잡하다.

 

윤석열 대통령 본인이 2021년 6월 29일 정치 개시 선언문에서 "이 정부 들어와서 망가진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문제, 한일 간 안보협력이나 경제·무역 문제 이런 현안들을 전부 다 같이 하나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그랜드 바겐'을 하는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지금은 한국 정부의 '바겐세일' 간판에 일본 고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갑을 꽁꽁 여미는 모습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가 있기 불과 일주일 전, 일본 정부는 시마네현 마쓰에시에서 열린 '다케시마의 날' 행사에 차관급 공무원을 파견하고, 일본 정부 대변인인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은 "다케시마는 역사적 사실에 비춰도,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한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3월 16일 윤석열 대통령은 '미래로 가자'며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오무라이스를 먹고 일본 맥주에 한국 소주를 타 마셨다. 일본 총리의 입에서 "사과" 한마디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것도 없었다. 냉탕에서 곧바로 온탕으로.  

 

정치권 이력 없이 '특채'로 고용된 대한민국 '1호 세일즈맨'의 단순한 영업 방식은 수십년 베테랑 거래처 입장에서 보면 당혹스러운 꽃놀이 패다. 오늘날 윤석열 대통령의 '담대한 결단'을 평가하기 전에 우린 시간을 최소 20여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여기까지였다. 

납북일본인 문제가 부상하고, 우정 민영화와 같은 국내 정치 상황을 돌파해야했던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 우익들의 독도 영유권 도발, 역사 왜곡 교과서 논란 등을 방치하다 2006년 국내 강경 여론에 완패를 선언한다는 듯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다. 고이즈미 담화 1년만의 야스쿠니 참배는 냉온탕을 오간 그의 외교 행보를 그대로 보여줬다. 이후에 노골적으로 극우 세력을 등에 업은 1차 아베 내각이 출범하며 한일관계는 경색된다. 한일 관계가 경색된 것을 한국의 탓으로 보기는 어렵다. 미국 '네오콘'과 부시 정부, 그리고 일본 내각의 우경화는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으로 인해 더욱 강화됐다. 남북미일 4국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다.

 

마치 지금의 상황과 묘한 기시감이 감도는데, 2008년 일본 정부는 이명박 정부의 출범에 대해 높은 기대감을 표하고 있었다. 이 전 대통령은 2008년 2월 취임식 직후 '한일 관계 복원'을 내세우며 한일 정상회담에 연 데 이어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방일 이후, 3년 4개월 만인 2008년 4월 2일 일본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한다. 당시에도 일본 언론은 이 전 대통령의 방일을 대서특필하며 한일 관계 개선에 희망을 잔뜩 품었다. 이 전 대통령과 자민당의 후쿠다 야스오 총리는 정상회담에서 과거사 보다 미래의 비전을 중시하는 '신시대' 개척에 합의한다. 이 전 대통령은 "큰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은 한일 신협력시대를 열어 나가자"고 했고, 후쿠다 총리는 "한일 관계는 일의대수(一衣帶水·옷의 띠만큼 좁은 강)"라고 화답했다. 

 

그런데, 일본은 한국을 가지고 놀았다. 2008년 7월, 일본 홋카이도 토야코 주요 8개국 정상회의에서 이명박과 회담한 후쿠다 야스오 당시 일본 총리가 "일본 교과서에 다케시마 (독도의 일본명) 를 일본 땅이라고 명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자, 이 전 대통령이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라고 했다는 내용이 일본 유수 언론에 일제히 보도됐다. 청와대는 이를 부인했으나 일본 언론은 이 보도를 철회하지도 않았고 언론플레이의 '정보원'으로 의심되는 일본 정부도 손을 놓고 있었다. (NHK는 윤-기시다 정상회담에서 독도 문제가 언급됐다는 보도를 대통령실은 부인하고 있다. 이런 언론플레이, 우연일까?) 일본 정치인들은 여전히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고, 독도, 과거사 문제 관련 망언들은 이어졌다. 평화헌법 개정 움직임이 노골화됐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국무회의에 '지소미아'를 몰래 올려 '도둑처리'하려다가 후폭풍에 휩싸였다. 

 

그러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갑자기 독도를 방문하는 초강수를 둔다. 온탕과 냉탕, 이 모든 게 5년 안에 벌어진 일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냉온탕' 외교가 결국 실패로 끝난 것처럼, 이명박의 '냉온탕 외교'는 한일 관계를 더욱 경색되게 만들었다. 묘하게 닮아 있는 실패다. 

 

"최근 한일 관계가 악화된 데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내 임기 5년 동안 일본 총리가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장기적인 경기 침체와 함께 일본 정치의 불안정성은 극우 포퓰리즘이 더욱 확산되는 토양으로 작용했다. 중국의 급격한 부상으로 일본의 불안과 우려가 커진 것도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한일 과거사는 물론 중국 등 아시아와의 과거사에 대한 망언이 줄을 이었다. 그간 양국 정치인들이 한일 문제를 국내 정치에 이용한다는 비판과 반성이 있었다. 이번 일도 민주당이 3년 여 집권하고 자민당이 다시 집권하는 과정에서 일본 정치인들이 과거사와 독도 문제를 여론 정치에 이용한 측면이 크다. 아베 총리가 등장한 후 한일 관계가 더욱 악화한 것도 이같은 흐름의 결과였다."

 

이 발언은 누구의 것일까? "죽창가"를 부른다는 야당 정치인이 쓴 것처럼 보이는 이 글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15년 발간된 자신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적어내려간 글이다. 냉온탕 외교로 한일관계를 악화시킨 자신의 잘못은 언급하지 않은 채 일본 탓을 하고 있다. 

 

한일관계는 깨지기 쉬운 유리잔과 같은 것이다. 한일 관계는 분위기가 좋다가도, 일본 정치인의 작은 망언 한마디에 깨지고, 일본 초계기의 미세한 비행 항적에도 금이 간다. 피해자인 한국 국민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이성과 감정이 복잡하게 혼재돼 있다. 이것은 잠재돼 있다가 언제든지 휘발될 수 있고 증폭될 수 있다. 곳곳에 '트리거'다. 이 트리거는 언제 어떻게 격발될 지 모른다. 정치인이 한일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형성된 한국 국민의 감정과, 역사적으로 쌓여 온 한일 관계의 모든 맥락을 무시하고 제3자 변제 방식이 "나의 생각"이라며 "구상권 청구하지 않는다", "변제가 이뤄지면 논란도 수습될 것"이라고 혼잣말을 하고 있는 대통령을 우리는 우려스럽게 바라봐야 하는 감정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결단'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는 '다케시마의 날'의 예로 설명할 수 있다. 1905년 2월 다케시마가 시마네현의 행정구역으로 편입 고시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시마네현은 2005년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제정, 2006년부터 매년 2월22일 기념행사를 연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한국이 이 기념행사를 그만 둬야 일본에게 성의있는 조치를 하겠다고 요구한 적 있었나? 일본 정부는 한국의 비판에 대해 "일본은 지방 분권이 확립돼 있으며, 지자체의 일에 중앙정부가 간섭하기 어렵다"는 일관적 태도를 보여 왔다. 그런데 왜 윤석열 정부는 "한국은 3권 분립이 확립돼 있으며, 법원의 일에 행정부가 간섭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견지하지 않나. 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처럼 하지 못하나?

 

다케시마의 날, 역사교과서 문제, 일본 방위백서 문제는 항상 도사려 있었지만, 한일 양국은 어떻게든 '현상유지'를 해 왔다. 그걸 윤석열 대통령이 갑자기 지금 모든 한일관계 문제의 원인을 '강제동원' 하나로 수렴해버리고, 이 매듭을 풀어내면 모든 게 풀릴 것처럼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 것이다. 이 '1호 세일즈맨'의 저돌적 영업에 '당혹스러운 꽃놀이패'를 쥔 일본 입장에서 보면, 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 한 장을 "5년 대통령이 100년을 보다"라는 제목으로 채웠다. 대통령이 '역사와의 대화'에 빠지면 왜 위험한지 이 전 대통령은 잘 보여줬다.  

 

윤 대통령은 최근 부쩍 '역사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 같다. 위험하다. 윤석열 개인의 신념이 곧바로 국가의 결단이 된다. 그 신념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국가의 결단 앞에 힘을 잃는다. 여기에서 대화와 설득은 없다. 오로지 결단이다. 그리고 모든 공무원들이 입을 모아 '대통령이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건 '칭송'인가, '책임 회피'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청구서는 5년 짜리 단임 대통령이 받아들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은 윤석열 대통령은 '온탕'에 들어와 있다. 일본은 여전히 한국을 '가지고 놀고' 있다. 윤 대통령이 고이즈미나 이명박의 전철을 밟지 않길 바란다.

박세열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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