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우리의 시국미사를 웃어넘기지 마시오”

성염 “우리의 시국미사를 웃어넘기지 마시오”

 

23일, ‘국가정보원 해체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전국 시국기도회’ 성염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 발언 (전문)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3.09.24 14:59:34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 성염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 ⓒ문양효숙 기자
“역시 핏줄은 못 속여!”
한가위 명절에 어딜 가나 들려온 국민의 탄식이었습니다. 지금의 정국을 염려하는 백성들의 한탄이었습니다.

 

우리는 4.19를 거치면서 목격하였습니다. 국민을 지켜주는 경찰이 이승만의 손에서 국민 학살 무기로 변했습니다. 우리는 5.18을 겪으면서 체득하였습니다. 국방의 의무를 진 군대, 그 중에서도 최정예 공수특전단이 군사반란자 전두환의 손에 쥐어진 광주 시민 학살병기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과거사위원회 5년의 조사에서 대한민국 경찰과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서 학살당한 대한민국 국민이 100만 명이라고 추산되었습니다.

또, 박정희와 전두환 · 노태우의 군사반란으로 인한 군사독재 30년을 거치면서 국민은 뼈저리게 절감했습니다.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의 수십 년 역사가 헌법을 위반한 범죄로 판결난 유신정권의 하수인으로서, 민주인사들과 노동자들에 대한 고문과 간첩조작을 일삼아 왔고, 급기야 지난 12월에는 선거 부정의 주역으로 드러났음을. “역시 핏줄은 못 속여!”라는 탄식이 가슴 아픕니다. 어쩌면 유신정권 술수 그대롭니까.

1500년 전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정의를 갖추지 못하면 공권력은 사법적 권한을 갖지 못한다!”고 외친대로, 오늘 이 자리에 우리가 모였습니다. 국가정보원이 대통령선거 부정에 앞장섰으므로 사법적 권한을 갖지 못하며, 국가정보원은 영구히 해체되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 평신도들이 오늘 여기 모인 것은 먼저 하느님과 국민 앞에 가슴을 치며 고개를 숙이기 위함입니다. 독재정치와 경제편중과 인권유린으로 점철된 지난 50년 갖가지 사회악에 눈을 딱 감고 입을 꼭 다물어온 신자들의 비겁함을 하느님과 국민 앞에 사죄하기 위함입니다. 종교는 사회악에 편승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맛보여주는 ‘중산층용 아편’이 아닙니다.

새 교황 프란치스코가 취임 첫날부터 가톨릭 신자들에게 “밖으로 나아가라”고, 사회와 국가와 환경을 책임지라고 외치고 있건만 우리는 선거철마다 “우리가 남이가?”하며 지역감정의 집단 이기심에 놀아났고, 군사반란자들과 매춘언론들이 조작하고 연출하는 ‘국가안보’라는 굿판에 놀아났습니다. 내 주먹에 쥔 것을 지켜주겠다는 집단을 무조건 지지하고, 재물의 신 맘몬을 섬기면서 우상숭배자로 살아온 죄악을 하느님과 국민 앞에 뉘우치기 위함입니다.

6.25 전후해서 남한에서만도 군경에 학살당한 민간인의 수를, 과거사위원회는 100만으로 어림잡았습니다.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나누어진 세계는 죄의 구조에 종속된 세계’(사회적 관심 36)라는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는 “자유 자본주의와 마르크스 집단주의 양편에 다 같이 비판적인 입장”(사회적 관심 21항)이라는 교황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저 100만 겨레의 무죄한 죽음을 두고도, 근자에는 용산 철거민과 쌍용자동차 부당 해고자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평화의 보루’여야 할 한국 천주교가 ‘반공의 보루’라는 수치스러운 이름으로 불린 사실을 국민들께 사죄하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무죄한 겨레들의 피가 우리와 우리 자손 위에 쏟아질까 두려워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최근 시리아에서 내란으로 죽은 10만 명의 무죄한 시민들을 생각해서 교황 프란치스코가 미국의 시리아 공격을 저지하러 나선 노력도 같은 명분에서 나왔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가르침대로, ‘정의 없는 국가는 이미 국가가 아니고 강도떼’라고, 따라서 강도떼의 주구 노릇을 해온 사실이 드러난 국정원을 해체하자고, ‘평화는 오로지 정의의 열매이며 정의 없는 질서는 감옥살이일 따름’이라고, 따라서 공안정국으로 국민주권을 말살하려는 정권을 저지하러 신앙인들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30여 년 전입니다. 저는 경향잡지에 ‘성서인물전’이라는 칼럼을 쓰고 있었습니다. 1979년 10월호에 다니엘 예언자를 다루면서 “유신정권이 아무리 겨레를 싱싱한 먹이 정도로 낮추보더라도, 아무리 경찰력에 자신이 있더라도 어느 벽엔가 ‘므네 므네 트켈 파르신’이라고 쓰는 손가락이 있나 살펴보라”고 독재자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예언자에게서 그 문자를 ‘하느님이 너의 무게를 달아보니 무게가 모자랐다. 그래서 너의 나라를 끝장내셨다’라고 풀이해 받은 칼데아 임금 벨사차르는 그날 밤으로 살해당합니다.

1979년 10월 26일 새벽, 한 달 만에 남산 지하실에서 풀려나온 저는 그날 저녁 궁정동에서 김재규의 권총 한 방에 끝장난 유신 정권을 보면서, 황소 뒷걸음질 치다 개구리 밟은 떨떠름한 심경을 지금까지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신 잔당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용산 길머리에서, 한강 두물머리에서, 강정마을에서, 대한문 앞에서 거행되는 가톨릭 사제들과 신자들의 미사를 웃어넘기지 마시오. 로마 제국 300년 박해를 이겨낸 가톨릭입니다. 이씨조선 100년에 이르는 박해를 딛고 선 천주교입니다.

이 자리는 현 정권의 회개를 비는 기도회 자리이므로 우리는 누구를 저주하지 않습니다. 다만 역사를 주재하시는 하느님의 저울에 무게가 모자랄 때, 또 국민의 매서운 함성 앞에서 총잡이들에게마저 여러분의 용도가 폐기될 때, 또다시 10.26의 총성이 들리지 않기를 우리와 전 국민이 바라기 때문에 우리가 시국기도회를 하는 것입니다.

성염 (요한 보스코)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