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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번의 구조 신호, '앙심' 두 글자로 요약한 재판부

김희원(가명, 여)씨와 이무영(가명, 남)씨는 교제관계였습니다. 김씨는 2019년부터 경찰에 31회 교제폭력 피해를 신고했습니다. 그리고 2024년 5월 11일, 이씨는 사망했습니다. 김씨가 불을 질렀습니다. 도화선, 한자로 풀이하면 불을 이끄는 줄이란 뜻입니다. 불이 더 커지지 않도록 하는 게 공권력의 역할입니다. "교제폭력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때까지 우리 사회는 무엇을 했을까". 항소심 김씨 대리인 이한선 변호사의 질문입니다. 그 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1심 재판부는 김희원(가명)씨의 범행 동기를 '앙심'으로 요약했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특별기획 '교제살인' 일러스트 ⓒ 이강훈

1심 재판부는 김희원(가명, 여)씨의 범행 동기를 단 두 문장으로 요약했다.

"피고인은 평소 피해자의 반복된 폭력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 피해자가 잠이 든 틈을 이용해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반면 2심은 같은 범행 동기를 14줄에 걸쳐 설명했다.

"피고인은 교제하던 피해자로부터 약 4년간 반복된 폭행을 당했다. (중략) 사건 당시도 상당한 수준의 폭행을 당했다."

형량은 달라졌다. 1심은 김씨가 "벌금형을 초과하는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없다"는 점만 참작해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2심은 김씨가 "오랜 기간 이씨의 폭행에 노출됐고, 사건 당일에도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다"고 판단해 징역 10년으로 감형했다.

경찰은 사건 직후 작성한 조사 보고서에서 화재 현장을 "김씨와 이씨 사이 교제폭력으로 수회 신고 접수된 곳"이라고 기재했다. 접수된 사건은 '상습폭행', '특수상해' 등이었다.

31번의 신호

112 신고 이력 조치에 따르면 김씨의 첫 신고는 2019년 7월 29일이었다. 이후 2023년 5월까지 이어진 신고 기록에는 한 달에 많게는 다섯 차례 신고한 적도 있었다. 사진은 2026년 7월 3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앞에 경찰차가 주차돼 있는 모습. ⓒ 연합뉴스

2019년 초, 김씨는 이씨와 교제를 시작했다. 이씨는 술에 취하면 폭력을 휘둘렀다. 김씨는 "교제 초반에는 이씨가 때려도 신고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김씨가 지난 4월 <오마이뉴스>에 보내온 답변)"고 했다.

112 신고 이력 조치에 따르면 첫 신고는 2019년 7월 29일이었다. 이후 2023년 5월까지 이어진 신고 기록에는 한 달에 많게는 다섯 차례 신고한 적도 있었다. 신고가 멈춘 시기는 이씨가 다른 범죄로 교도소에 수감됐던 때였다.

김씨의 신고기록과 의무기록에는 이씨의 폭력 행위가 담겨 있었다. 처음에는 주먹으로 때렸다. 그 다음에는 맥주병을 들었다. 이씨의 폭력은 점점 심해졌다. 담뱃불로 배를 지졌고, 목을 졸랐다. 부엌칼 옆면으로 머리를 때리다 김씨의 오른팔을 긁은 날도 있었다.

"살려주세요(2022년 6월 11일, 10월 23일)", "와주세요 제발(2023년 5월 6일)" 김씨의 신고 문자에는 이런 문장이 남아 있었다. 그는 전화를 걸어 "남친한테 맞아서 도망 나와 있다", "만나는 사람에게 좀 전에 맞았다", "같이 있던 남자한테 맞았다"고 말했다.

전화를 걸고도 아무 말을 하지 못한 날도 있었다(2023년 4월 25일, 2023년 5월 8일). 대신 통화를 끊지 않았다. "이씨와의 대화 소리를 듣고", "신고를 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경찰이 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다시 전화할게요"라며 전화를 끊은 날도 있었다(2022년 7월 10일).

폭력은 후유증을 남겼다. 오른손잡이인 이씨에게 맞아 왼쪽 눈은 안와골절로 시력이 감퇴(외상성 시신경병증)했고, 왼쪽 귀는 청력이 저하됐다.

<오마이뉴스>가 신고 이력(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실 제공), 재판 기록, 병원 의무기록, 사건 증거 기록, 이씨의 전과 기록 등을 종합했다. 그는 2019년 7월부터 2023년 5월까지 최소 31번의 경찰 신고, 2번의 병원 입원으로 피해 상황을 알렸다. 그러나 폭력의 관계는 끊기지 않았다.

"맞을 거면서 왜 또 갔어요?"

주변 사람들은 김씨를 이해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이 다 그래요. 그렇게 처맞고도 왜 만나냐고(2024년 5월 11일 경찰 진술조서)." 경찰도 비슷했다. "맞을 거면서 이 집을 왜 또 왔냐"고 했다는 게 김씨의 기억이다(2025년 2월 김씨가 변호인 접견 중 한 말).

김씨의 국선변호인이었던 이한선 법무법인 와이앤비 대표 변호사는 지난 7월 28일 열린 '31번 신고해도 막지 못하는 교제폭력,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에서 "외부에서는 '왜 헤어지지 않냐'고 묻지만, 장기간의 학대는 피해자에게 학습된 무기력과 정서적 종속을 남긴다"고 말했다. 이어 "폭력과 화해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김씨가 관계를 끊지 못한 것은 피해자의 비합리성이 아닌 학대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김씨는 이씨가 때릴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했다. "저를 때릴 때 눈빛이 기억나요. 사람 죽일 거 같은 눈빛이 너무 무서웠어요. 때리면서 '여자니까 맞아야지. 네가 무슨 힘이 있어서 나를 막겠냐. 너는 맞을 수밖에 없다'고 했어요(2025년 2월 김씨가 변호인 접견 중 한 말)."

출소하고 또 찾아온 이씨

1심 재판부는 김씨가 "이씨의 반복된 폭력에 앙심을 품었다"고 판단했다. 체포영장·구속영장·공소장에도 김씨가 "앙심"을 품었다고 적시됐다. ⓒ 이주연

2023년 5월 8일, 경찰은 이씨를 체포했다. 이씨는 새벽부터 술에 취해 김씨의 얼굴을 때렸다. 경찰이 두 사람을 분리 조치했다. 쉼터 입소를 거절한 김씨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이씨는 그의 집까지 찾아왔다. 거실까지 들어와 김씨에게 "방문을 열라"고 요구했다. 김씨는 다시 112에 신고했다. 이씨는 재판에 넘겨졌다.

법원은 이씨에게 징역 12개월을 선고했다(전주지법 군산지원 2023고단OOO 등 특수상해·상해). 1년에 불과했지만, 김씨는 이들의 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맞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느꼈다고 했다.

2024년 5월 9일, 이씨는 출소한 지 5일 만에 김씨에게 "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연락했다. 이씨는 다시 만난 김씨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김씨는 당시 "이씨의 폭행으로 죽을 수 있다는 감정을 느꼈다(2024년 5월 11일 경찰 신문조서)"고 했다.

김씨는 거실에 있던 이불에 불을 붙인 뒤 집 밖으로 나왔다. 2024년 5월 11일, 경찰이 긴급체포한 사람은 이씨가 아니라 김씨였다.

방화 사건으로 기소된 김씨는 피고인이 됐다. 1심 재판부는 김씨가 "이씨의 반복된 폭력에 앙심을 품었다"고 판단했다. 체포영장·구속영장·공소장에도 김씨가 "앙심"을 품었다고 적시됐다. 국가는 이씨의 반복된 폭력보다 김씨의 범행 동기를 들여다봤다. 31번의 신고는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2024년 5월 11일 새벽, 김희원(가명)씨는 전 연인이자 교제폭력 가해자인 이무영(가명)의 집에 불을 내 그를 숨지게 했다. 같은 해 8월, 1심 재판부는 "반복된 폭력에 앙심을 품은" 김씨에게 살인의 고의가 있었다며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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