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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장’ 부르짖지만...기업 ‘쪼인트 까는’ 윤석열 정부 구시대 모순

식품기업 불러 ‘가격인상 자제’ 압박...“시장에만 맡길 수 없다고 인정한 것”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 11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농협 하나로마트 양재점에서 채소 물가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2022.08.11. ⓒ뉴시스
고물가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정부가 식품·외식 기업을 여러번 불러 가격인상 자제를 압박하고 있다. 입만 열면 자유·시장경제를 강조하는 모습과 대비된다. 더 큰 문제는 효과다. 철저한 원인 분석에 기반한 대책은 보이지 않는다. 기업 쪼인트만 까다 보니 가격 안정화 효과가 일부 제품에만 한정되고, 다른 제품 가격이 오히려 급등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난다. 


윤석열 정부의 기업에 대한 가격인상 자제 압박은 연초부터 나타났다. 올해 2월 맥주에 대한 세율이 1ℓ당 30.5원, 탁주 세율이 1.5원 오르면서 업계가 주류 가격을 큰 폭으로 올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소주 또한 물류비와 재료비 상승분 등이 반영돼 출고가가 인상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다.

이에 서민들이 주로 찾는 소주·맥주의 식당 판매 가격이 6,000원을 넘길 것이란 우려가 나왔다. 그러자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직접 나섰다. 추 부총리는 당시 "소주 등 국민이 정말 가까이 즐기는 그런 품목(의 가격 인상)에 대해서는 업계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린다"며 업계에 가격인상 자제를 요청했다. 이후 기재부는 주류에 대한 인상 요인을 집중 점검했고, 주무 관청인 국세청까지 나서 주류업체들과 비공개로 접촉하는 등 전방위로 압박을 가했다.

결국 하이트진로, 오비맥주 등 주류업계는 추 부총리가 공개적으로 가격인상 자제를 언급한 지 일주일여 만에 소주, 맥주 등 가격을 당분간 동결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음 타깃은 라면이었다. 지난 6월 18일 추 부총리가 방송에 출연해 "지난해 9~10월 (라면값이) 많이 인상됐는데 현재 국제 밀 가격이 1년 전보다 약 50% 내려갔다. 기업들이 밀 가격 하락에 맞춰 적정하게 판매가를 내렸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공개적으로 가격 인하를 요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덕수 국무총리도 "공정거래위원회가 담합 가능성을 더 열심히 들여다봐야 한다"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이후 정부는 기업들을 불러 모아 직접 가격 인하를 압박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추 부총리의 '라면 발언'이 나온 지 일주일여만인 지난 6월 26일 CJ제일제당, 대한제분, 삼양사 등 한국제분협회 회원사 7곳을 불러 간담회를 열고, 밀가루 가격 조정을 요청했다.

정부의 압박에 결국 라면 업계는 '백기'를 들었다. 라면 업계 1위인 농심은 지난 6월 27일 신라면과 새우깡의 출고가를 인하하기로 했다. 삼양식품 역시 삼양라면 등 12개 대표 상품 가격을 평균 4.7% 인하하기로 했다. 추 부총리의 '라면 발언'이 나온 지 열흘이 채 되지 않은 시기였다.

이에 제분업계도 역으로 압박을 받는 모양새가 되면서 밀가루 가격을 인하했다. 라면업계의 가격인하 발표 뒤 대한제분은 밀가루 주요 제품에 대해 가격을 평균 6.4% 내린다고 밝혔다. CJ제일제당도 농심 등과의 거래에서 판매장려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밀가루 인하에 해당하는 조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7월 원윳값 인상에 따른 '밀크플레이션'(밀크+인플레이션) 우려가 나오자 정부가 이번에는 우유업체들을 불러모았다. 낙농진흥회는 지난 7월 29일 흰우유 등 음용유용 원유의 기본 가격를 ℓ당 88원 오른 1,084원으로 결정했다. 지난 2013년(106원 인상) 이후 10년 만에 가장 큰 인상 폭으로 오르면서 흰우유 1ℓ 제품의 가격이 3천원을 넘길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이에 농식품부는 원윳값 인상이 결정되기 전날 우유업계를 모아 간담회를 열고 가격 인상 자제를 요청했다. 이에 서울우유는 오는 대형마트에 납품하는 서울우유 '나100%우유' 1ℓ 제품의 출고가 인상률을 3% 수준으로 하겠다고 밝혔다. 소비자 가격은 2,900원 후반대로 겨우 3천원을 넘지 않는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원윳값이 ℓ당 49원 올랐을 때 우유업계가 흰우유 가격을 10%가량 인상했던 것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매일유업과 남양유업도 서울우유와 비슷한 수준으로 흰우유 가격을 인상할 예정이다.

정부는 이달에는 외식업계를 불러 모았다. 지난 4월 주요 외식기업들과 간담회를 가진 후 5개월여 만이다. 농식품부는 지난 8일 식품·외식업체들을 모아 간담회를 열고 가격인상 자제를 요청했다. 간담회에는 국내를 대표하는 20여개 식품업계와 외식 프랜차이즈 업계가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농식품부는 구체적으로 가격 부담 완화에 동참해 줄 수 있는지 물었고, 기업들도 최대한 가격 인상을 억제하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간담회에 참석한 교촌, BBQ, bhc 등 치킨프랜차이즈들은 언론 인터뷰에서 가격인상 계획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정부가 기업에 대해 가격인상 자제를 요청하는 모습 자체가 이전 정부에서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올해 윤석열 정부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올해 2월 주류업계로 시작해 6월 라면·제분업계, 7월 우유업계, 9월 식품·외식업계 등 거의 분기별로 기업들을 직접 만나 가격인상 자제를 직접적으로 요청하는 모습이다.

식품 관련 업계에서는 정부의 요청에 대체로 응하는 모습이지만, 이 같은 요청에 계속 응하기는 쉽지 않다는 반응도 나온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하반기 들어 국제 유가도 오르고 있어서 원가 상승 압박이 전과 다름없거나, 더 심해지고 있어서 난감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대형마트에 진열된 맥주들 ⓒ뉴시스

"윤석열 정부의 시장 개입...시장에만 맡길 수 없다는 걸 인정한 것"


정부의 요청으로 소비자들이 자주 찾는 일부 제품의 가격이 동결되거나 인하됐지만, 나머지 제품의 가격은 더 크게 오르는 '풍선효과'가 발견되기도 한다.

맥주의 경우, 국내 주류업체가 유통하는 수입맥주의 가격 인상은 막지 못했다. 하이트진로는 지난 6월말 자사가 수입·유통하는 기린이치방, 크로넨버그 1664 시리즈, 써머스비 등 맥주의 편의점 가격을 평균 9.6% 인상했다. 오비맥주도 지난 3월 자사 수입 맥주인 버드와이저, 스텔라아르투아, 호가든, 코로나 등 맥주의 출고가를 평균 9.1% 인상했다.

라면 업계에서도 신라면, 삼양라면 등 주요제품은 인하됐지만, 신제품들의 가격이 기존 제품에 비해 높게 정해졌다. 농심이 지난달 한정 판매한 '신라면 더 레드'의 가격은 1,500원으로 기존 신라면(950원)보다 57.9%나 비싸다. 비슷한 시기 오뚜기가 내놓은 '마열라면' 역시 1,500원으로, 기존 열라면(950원)보다 57.9% 오른 가격이다. 삼양식품의 신제품 '맵탱'의 가격은 1,300원으로, 기존 삼양라면 매운맛(910원)보다 42.9% 가격이 상승했다.

우유제품도 흰우유의 대형마트 가격은 3천원대를 넘기지 않았지만, 다른 유통라인이나 가공유, 유가공제품 등 다른 제품의 가격이 크게 올랐다. 서울우유는 편의점에 출고되는 흰우유 1ℓ 제품 가격을 종전 3,050원에서 3,200원으로 4.9% 올릴 예정이다. 대형마트 판매 가격을 약 3% 인상한 것보다 인상 폭이 크다. 특히 요거트 제품인 '비요뜨'의 편의점 판매 가격을 기존 1,800원에서 2,300원으로 27.8% 인상한다. '꼼수인상'이라는 비판이 나오자 서울우유는 비요뜨에 대한 인상 폭을 300원으로 축소하기로 했다.

매일유업, 남양유업의 사정도 비슷하다. 두 곳 모두 흰우유 1ℓ 제품의 인상 폭은 4%대로 정했지만, 가공유, 유가공제품의 인상 폭은 더 크게 잡았다. 매일유업은 가공유 제품은 5∼6%, 발효유·치즈 제품 가격은 6∼9% 각각 인상할 예정이다. 남양유업은 다른 유제품의 출고가를 평균 7% 인상할 계획이다.
 
편의점에 진열된 우유 제품(자료사진) ⓒ뉴시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정부의 가격인상 자제 압박이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런 식으로 정부가 시장의 개입하는 것은 왜곡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서 "정부가 구조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일부에만 개입하는 방식은 기업들이 가격은 낮추면서도 양을 줄인다든가, 납품업체의 팔을 비튼다든가 다른 쪽으로 부작용을 만들게 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기업에 대한 규제 철폐를 추진하면서도 한편에서는 가격인상 자제를 압박하며 시장에 개입하는 윤석열 정부의 태도가 모순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석열 정부의 '엇박자'에 대한 지적은 여권 내에서도 나온다. 김병준 전국경제인연합회 고문은 지난달 국민의힘 연찬회에서 "대통령은 규제를 철폐하고 시장자유를 키워야 한다고 말하는데 내각은 규제를 더 강화하는 걸 내놓는다"며 "(경제부처는) 라면값을 내리라고 하고, 금리를 제한한다"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정부가 규제 완화를 외치면서도 가격 결정에 개입하는 식으로 시장 개입하는 것은 모순되는 모습"이라며 "결국 윤석열 정부도 시장에만 맡기면 (기업이) 가격을 과도하게 올린다는 걸 인정한 것 아니겠느냐"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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