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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계, ‘R&D 예산삭감·입틀막’에 부글부글...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

“후배·제자에게 월급을 주지 못하게 되는 상황 등 우려”, “연구과제 신청 기간 등 겹쳐”

지난 2월 16일 오후 대전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열린 2024년 학위수여식에서 한 졸업생이 졸업식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에게 항의하자 경호원들로부터 제지를 당하고 있다. (대전충남공동취재단) 2024.2.16 ⓒ뉴스1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이 현장에서 여러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도 과학계에서 강하게 반발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목소리를 냈다가 연구실 동료나 후배, 제자들에까지 피해가 전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서울대학교 이공계 A 교수는 지난달 28일 “예산 삭감되어서 국회 출장 가거나 해외 학회에서 발표하는 일을 2번에서 1번으로 줄이는 문제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연구원이나 학생에게 월급을 못 주게 되는 상황은 모두에게 힘든 일”이라며 “목소리를 냈다가 대학원생이나 연구원이 피해를 보면 어쩌지 하는 게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렇다 보니 교수들이 적극적으로 행동을 못 하게 되고 위축되는 게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B 교수도 3일 “교수가 받는 연구비로 월급이 나가는 구조”라며 “문제가 생기면 교수 자신보다는 후배나 제자들이 다칠 수 있다는 염려는 당연하다”라고 말했다.

 

 

 

당장 연구 시작해야하는데, 계약 갱신 여부 몰라
R&D 예산 삭감, 현장에서는 2~3배 삭감된 느낌
“인건비는 지급해야 해서, 재료비·활동비서 주로 삭감”
다른 국가 연구기관과의 협업도 차질 “창피”


2월 28일부터 3월 3일 사이에 민중의소리와의 전화인터뷰에 응한 이공계 대학교수 등에 따르면, 보통 매해 초 학기가 시작하기 전 연구과제 신청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올해 일부 연구과제 신청은 지난해 R&D 예산 삭감 논란을 겪어서 그런지 그 시기가 한 달가량 지연되는 경우가 발생했다. 그만큼 연구비 지급이 늦어져 연구를 시작해야 할 시기가 닥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인건비와 계약 연장 여부다. 연구실에서 일하는 박사 연구원들을 연구비에서 월급이 나오는데, 3월 1일부터 연구를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서 3월이 다 되도록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말지 결정이 안 된 경우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A 교수는 “엊그제, 모 박사 연구원분들은 3월부터 월급을 받고 일해야 하는데 2월이 되어도 계약을 갱신할지 아니면 잘리는 것인지 통보를 받지 못했다고 들었다”라고 말했다.

또 어떤 연구의 경우 예산이 20%만 삭감됐어도, 실제 현장에서 체감하는 삭감의 정도는 40~50%라는 얘기도 나온다. 연구비가 삭감됐다고 기존 연구원의 인건비를 삭감할 수는 없으니 활동비와 재료비를 삭감하다 보니, 활동비와 재료비 예산을 두 배로 삭감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A 교수는 “박사 연구원들 같은 경우 30대 초반쯤 된다. 보통 결혼을 막 했거나, 이제 막 애가 있는 가장이다. 이런 연구원들에게 인건비를 줄여야 한다고 할 수 없지 않나”라며 “실제 저희와 함께 일하는 연구소의 경우 이번에 연구비가 일괄적으로 20~30%가량 삭감됐는데, 연구원과 대학원생 인건비를 보전하려다 보니 재료비는 50% 가까이 삭감됐다”라고 설명했다.

 

 

 

 

 

 

외계행성 탐색시스템(KMTNet) ⓒ한국천문연구원 홈페이지


윤석열 정부가 이번에 R&D 예산을 전체적으로 16% 삭감하면서도 ‘글로벌 R&D’ 분야 예산은 대폭 증액했는데, 반대로 다른 나라와 협업하는 연구과제 중 이번 R&D 예산 삭감의 영향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남아프카공화국, 호주, 칠레 등 3개국에 대형 망원경을 설치해 24시간 은하를 관측하는 외계행성 탐색 시스템(KMTNet) 사업이 대표적이다. KMTnet 성능을 유지하려면 부품을 주기적으로 교체해 줘야 하는데, 예산 부족으로 시스템 개선은 고사하고 기존 성능 유지도 어렵게 된 것이다. 호주는 우리 기술을 믿고 사업에 동참했으나, 갑작스러운 예삭 삭감으로 기대 이하의 결과를 받아보게 됐다. 관계자는 “창피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부에서 다년간의 연구과제 포기 신청도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여러 해 동안 연구를 진행 했어도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특정 금액 이상이 반드시 필요한 연구도 있는데, 연구비 삭감으로 결과를 내지 못하게 된 경우도 있을 수 있어서다. B 교수는 “여러 해 동안 진행한 연구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놓고, 새로운 연구과제 신청을 받는 것”이라며 황당해했다.

이공계 졸업생들과 교수들은 이 같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과학계가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구조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혜민 전 카이스트 총학생회장은 지난 26일 카이스트 입틀막 사건 규탄 기자회견에서 “연구과제 신청과 관련해서 아무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사실상의 무언의 ‘입틀막’을 강요당하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김 전 총학생회장은 지난 28일 통화에서 “동문 중에 교수가 된 분들이나 스타트업에서 근무하는 분들에게 직접 들은 내용”이라며, 연구과제 신청 기간 등과 겹쳐서 공개적으로 행동하거나 목소리를 내는 일에 동참하기를 주저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A 교수와 B 교수는 실제 구조적으로 과학계가 적극적으로 행동하거나 목소리를 내는 데에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공개적으로 비판적으로 목소리를 냈다가, 자신 또는 공동의 연구과제 연구비가 삭감되거나 주변 동료 및 제자, 연구원들의 인건비를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는 것이다.

A 교수는 서울대 교수지만 지난 16일 카이스트 졸업생 ‘입틀막’ 사건을 보면서 “분개했다”고 말했다. 그는 “최소한 자연대나 공대에서는 (교수들이) 시국성명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며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게 “부끄럽다”고 했다. 또 “적극적으로 행동을 해도 얻을 게 없다는 그런 절망적 상황이, 그런 행동을 취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B 교수도 ‘입틀막’ 사건을 보고 다들 분노했다고 말했다. B 교수는 “70~80년대도 이러진 않았다. 국부 정권 때도 과학에 대한 투자를 꺾지는 않았지 않나”라며, R&D 예산 삭감에 대해 “대한민국 미래를 죽이는 일”이라고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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