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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의 ‘반국가사상’ 탄압, 윤석열의 “반국가세력”으로 계승되다

반국가세력 100년사, 일제의 사상적 무기 꺼낸 윤석열 정권

권종술 기자 epoque@vop.co.kr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룸에서 국정브리핑 및 기자회견 하며 물을 마시고 있다. 2024.08.29. ⓒ뉴시스

“우리 사회 내부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 1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을지 및 제36회 국무회의에서 한 말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 “반국가세력이 곳곳에 암약하고 있다”며 “북한은 개전 초기부터 이들을 동원하여, 폭력과 여론몰이, 그리고 선전, 선동으로 국민적 혼란을 가중하고 국론 분열을 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0일 뒤인 지난 8월 29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은 ‘반국가세력’ 발언이 누구를 말하는지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간첩 활동을 한다든지, 국가기밀을 유출한다든지, 북한 정권을 추종하면서 대한민국 정체성을 아주 부정한다든지, 그런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야권이나 야당을 지칭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엔 웃음을 지으며 답변을 피했다.

하지만, 지난 2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열린 김용현 국방장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국민의힘 강선영 의원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저서 ‘이재명, 대한민국 혁명하라’는 책에 등장하는 ‘혁명’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7년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이 연상됐다”고 말하며 “현재 대한민국에 이런 사상을 가진 분들이 다수당의 대표로 국회를 장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강 의원은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떼려고 하는 세력은 우리의 주적인 북한이 주장하는 인민민주주의와 유사한 체제를 지향하는 반국가세력이라고 생각한다”며 이 대표와 야당들을 향해 ‘반국가’라는 낙인을 찍었다. 윤 대통령이 말한 ‘반국가세력’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강 의원이 나서 부연 설명한 셈이다.

이후에도 윤 대통령은 비슷한 발언을 이어갔다. 이번엔 ‘반대한민국 세력’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10일 서울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해외지역회의에서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평화통일 추진은 대한민국 헌법이 대통령과 국민에게 명령한 신성한 책무”라며 “북한의 선전 선동에 동조하는 우리 사회 일각의 ‘반대한민국’ 세력에 맞서 자유의 힘으로 나라의 미래를 지켜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930년대 일제의 국가총동원 체제와 함께

등장한 ‘반국가사상 척결’ 구호

“국민의 정신적 일치결합” 강조

윤 대통령이 애용하는 ‘반국가세력’이란 단어가 우리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으로 전 세계 경제는 휘청거렸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군부와 우익세력은 이런 경제적 혼란이 거세던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했다. 일본엔 파시즘이 득세했고, 일본의 우익과 군부세력은 ‘국가총동원 체제’를 만들자고 역설하기 시작했다. 1933년 일본 육군이 발표한 국가총동원을 위한 농촌, 사상, 교육 관련 3대 대책에 ‘반국가’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1933년 10월 16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일제는 “반국가·반군사상(反國家反軍思想)의 인쇄물을 일소하고 황도정신(皇道情神)을 철저케 함”과 “국민의 정신적 일치결합”을 통해 ‘국가총동원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말하는 국가는 바로 ‘일본’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반국가’라는 표현은 독립운동가들을 향한 것이었다.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경성일보, 1940년 9월 4일 자)던 춘원 이광수와 같이 생각하는 이들과 철저히 구별하기 위한 단어였다. 때문에 ‘반국가’는 독립운동가들에게 훈장과도 같은 표현이었다.

사상전선강화를 위해 반국가적 사상을 파쇄격멸하라고 강조하는 조선총독부의 입장을 보도한 동아일보 1938년 10월 7일자.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하며 국가총동원 체제를 본격화했다. 1938년엔 일본 열도와 한반도 등 식민지에서 물자를 최대한 많이 수탈하기 위해 ‘국가총동원법’까지 만들었다. 노동력, 물자, 자금, 시설, 사업, 물가, 출판 등을 통제해 일본 군부의 뜻대로 일사불란하게 사회가 움직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일제는 ‘국론통일’을 강조했다. 국론이 분열되는 것은 국가총동원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고, 일본 정부나 군부를 향해 비판하거나,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반국가’이고, 이런 노선에 따르지 않는 이들을 ‘비국민’이라고 몰아세웠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 주둔했던 일본군 조직인 ‘조선군’ 보도국이 1938년 12월 15일 중일전쟁 1년을 맞아 조선일보에 기고한 ‘조선청장년과 시국에 대한 각오’라는 글을 보면 이런 일제의 주장을 잘 알 수 있다.

“왕왕 동포 중에 욱일승천의 세에 있는 흥륭(興隆) 일본의 세계적 세력을 인식하지 못하고 기회주의적 사상하에 배타적 주의에 취하야 풍선구와 같은 부동적 태도로서 칩거적 태도를 취하는 자 만약 일인이라도 존재할 시 이야말로 비국민으로서 단연매장해야 할 것이다,”

정부의 생각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 국론을 분열시킨다면서 반국가 또는 비국민이라 낙인을 찍은 일제의 행동은 윤석열 대통령의 “반국가세력이 곳곳에 암약”하고 있으며 “북한은 개전 초기부터 이들을 동원하여, 폭력과 여론몰이, 그리고 선전, 선동으로 국민적 혼란을 가중하고 국론 분열을 꾀할 것”이라고 주장과 닮아있다.

일제강점기 친일부역 경찰과 군인

해방 이후 반공을 매개로 다시 활동

친일 세력이 과거 독립운동 세력을

‘반국가세력’이라 공격한 역사적 아이러니

아울러 ‘반국가세력’이란 표현은 일제강점기부터 ‘반공주의’와 맥을 같이했다. 조선의 독립운동가와 일본 본토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며 싸웠던 이들의 상당수가 ‘사회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다. 1938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주도해 만든 ‘조선방공협회’는 설립 취지서에서 “반국가적 사상을 극복하여서 일본의 정신을 세계에 선양”하는 것을 자신들의 목적으로 밝히고 있다.

같은 해 일제에 전향한 좌익운동가 등이 주도해 만든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은 결성식에서 “우리들은 황국신민으로서 일본정신의 앙양에 노력하고 내선일체의 강화 철저를 기한다. 우리들은 사상국방전선에서 반국가적 사상을 파쇄·격멸하는 육탄전 전사가 되기를 기약한다. 우리들은 국책 수행에 철저적으로 봉사하고 애국적 총후 활동의 강화 철저를 기약한다” 등 3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한 바 있다.

일제의 이런 반공 정책에 협력한 조선인 경찰과 군인들도 많았다. 독립운동가들을 붙잡아 고문한 친일 경찰과 일본군, 관동군 등으로 복무하며 무장활동을 벌인 독립운동가들을 소탕하는데 가담했던 친일 군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반민족 행위에 앞장섰지만,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미 군정에 의해 ‘반공’을 매개로 군인과 경찰로 다시 일하게 되었다. 일제시대 반민족 행위는 지우고, 자신들을 ‘반공투사’이자, 뉴라이트 세력이 주장하는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으로 포장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입장에선 ‘반국가세력’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아이러니하게도 해방 이후 권력을 잡고 과거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이들을 향해 ‘반국가세력’이라고 공격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반정부’는 곧 ‘반국가’라고 주장한 이승만

이승만식 주장 그대로 이어받은 수구보수정권

해방 이후 반공을 활용해 신분을 세탁한 그들은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제가 자주 쓰던 반국가세력이란 표현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고 있다. 아울러 이승만 정권은 국가 그 자체를 반대하는 ‘반국가’라는 표현과 정부를 비판하며 반대 목소리를 내는 ‘반정부’라는 전혀 다른 두 개념을 뒤섞어 ‘반정부=반국가’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이승만은 1948년 11월 5일 열린 정례기자회견에서 ‘반정부와 반국가는 다르지 않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우리 정부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그것(정부)과는 다른 것이다. 영불 등은 내각책임제인 만큼 얼마든지 내각을 갈아낼 수 있으나 우리 정부는 4년간은 대통령 책임하에 정무를 보게 되는 것이니 현 정부를 전복하려 하는 것이니 이러한 행동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용허할 수 없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 ⓒ뉴시스

이후 군사정권부터 지금의 윤석열 정부에 이르기까지 수구보수 성향의 정권들은 ‘반정부=반국가’라는 이승만식의 해석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런 해석을 바탕으로 정권 퇴진, 대통령 탄핵 등의 내용을 담은 각종 시위와 정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에 ‘반국가’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고, 이런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반국가세력’으로 낙인찍는 것이다.

반국가세력 낙인찍기 위해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본떠 만든

국가보안법과 박정희의 반공법

‘반국가세력’으로 낙인찍기 위해 이승만 정부가 들고나온 건 ‘국가보안법’이다. 국가보안법은 일제가 체제 유지를 위해 만든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삼았다. 일제는 천황 통치 체제를 부정하는 운동을 단속하는 단속하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1925년 5월 12일부터 1945년 10월 15일까지 시행했다. 그리고, 이 법을 기초로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이 태어났다. 치안유지법 제1조 “국체변혁을 목적하여 결사를 조직한 자”와 국가보안법 제1조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라는 표현이 흡사하다는 것만 보아도 두 법의 관계를 잘 알 수 있다.

국가보안법은 해방 뒤 정치적 격동기에 ‘비상시기의 비상조치’로 만든 ‘한시법’이었다. 형법이 제정되면 국가보안법은 형법으로 흡수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정권을 확보한 이들은 형법 제정 후에도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보안법은 더욱 확대되고 보강되었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국가보안법과 별도로 반공법을 만들었다. 쿠데타 직후인 5월 19일 군사혁명위원회 장도영 의장 명의로 발표한 ‘군사혁명위원회 포고 제18호(반국가행위의 규제)’를 통해 “본관은 공산주의의 강령과 활동이 국헌을 문란케 하며 국가안전에 대한 명백하고도 계속적인 위험성이 있음을 확인하고 그 활동을 철저히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녕과 질서 및 국민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하여 다음 각항에 해당되는 행위를 하였을 때에는 그 직책에 따라 엄중처벌할 것을 포고한다”면서 “다음 각항에서 반국가단체라함은 공산당 및 이에 동조한다고 인정되는 단체를 지칭한다”고 규정했다.

1961년 7월 3일엔 ‘반국가행위의 규제’를 담은 군사혁명위 포고를 기초로 반공법을 제정했다. “반공체제를 강화하여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자나 이들에 대해서 협조하는 자 등을 일반법보다 무겁게 처벌하여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공산계열의 활동을 봉쇄한다”는 것이 이 법의 핵심 내용이었다. 반공법은 반국가단체에 가입 권유,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에 대한 찬양‧고무‧동조, 이적단체의 구성‧가입, 이적표현물의 제작, 반국가단체에 편의 제공과 ‘불고지’ 등 매우 포괄적인 규제 내용을 담았다. 국가보안법과 겹친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박정희 정권은 국가보안법만으로는 대한민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강행했다.

반국가단체에 동조하면 처벌하고, 찬양 고무행위 금지 등의 내용이 담긴 반공법 초안을 소개한 경향신문 1961년 3월 10일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반공법의 별칭은 ‘막걸리 반공법’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걸려들 수 있는 법이었기 때문이다. 철거반원을 향해 ‘김일성보다 더한 놈들’ 운운했다는 이유로, 공화당이 공산당보다 못하다며 욕을 했다는 이유로, 영화에 등장하는 인민군이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됐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으로

반국가세력 양산하며

정적을 제거하고, 위기를 돌파하며

자신의 권력 유지한 박정희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처벌할 수 있었던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박정희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무기로 삼았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은 권력 유지에 방해되는 이들을 반국가세력으로 낙인찍는 수단이 되었다. 반독재 민주화운동, 민중운동을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을 적용하여 가혹하게 탄압한 것이다. 반공법이 제정된 1963년부터 박정희 집권 마지막 해인 1979년까지 국가보안법으로 1651명이 검거됐고, 반공법으로 4031명이 검거됐다.

박정희 정권 집권 시기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검거 인원은 정권의 정치적 위기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1969년 삼선개헌부터 1971년 제7대 대선, 1972년 유신헌법 제정까지 4년 동안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커졌고, 이를 막기 위해 구속자가 급증했다.

이런 정치적 목적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1차 인혁당 사건(1964년), 동백림사건(1967), 통혁당 사건(1968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1974년), 민청학련 사건(1975년), 통혁당 재건위 사건(1979년), 남민전 사건(1979년) 등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벌이던 정치조직들을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이적단체로 규정해 대량구속 했고, 사형, 무기 등 중형을 선고했다.

정적 또는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기도 했다. 1966년 5월 민사당은 창당발기인 대회를 열고 서민호 전 의원을 대표 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그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반대해 국회의원을 사퇴한 뒤 새롭게 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서신교환과 기자·문화인 교류 등 남북교류를 당의 통일정책으로 채택했다. 서 전 의원은 그해 5월 27일 창당준비 확대대회에서 한일기본조약의 폐기, 주월 한국군의 철수와 함께 “내가 만약 집권한다면 북한의 김일성과 국제기구를 통하거나 해서 면담, 대결할 용의가 있다”고 발언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꼬투리 잡아 1주일 후인 6월 3일 그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의 박정희 ⓒ자료사진

남북대화 등을 주장한 서 전 의원에게 박정희 정권은 반국가 낙인을 찍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 전 의원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인물이고, 그에게 반국가 낙인을 찍은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일본 관동군에서 근무한 친일 군인 출신이었다. 당시 1심 재판부는 김일성과 만날 수 있다는 서 전 의원의 주장이 “반국가단체의 수괴를 자신과 대등한 위치로 끌어올림으로써 반국가단체인 북괴를 합법 정부인 대한민국과 동등하게 취급했다”는 이유로 징역 2년과 자격정지 2년을 선고했다. 2심에서 결국 무죄로 판결을 바뀌었지만, 박정희의 정치적 목적은 이미 달성된 뒤였다.

통일사회당 대표였던 김철 씨도 반국가 낙인을 피하지 못했다. 김철 씨는 윤석열 대통령이 임명한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의 아버지다. 김철 씨는 1970년 통일사회당을 만들고 당대표로 선출된 뒤 중립화 평화통일안을 내세우면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1971년 “잠정적으로 남북이 다 같이 유엔에 가입해야 한다” “북한정권의 현실적인 통치형태의 존재를 인정하여 북괴라 부르는 대신 북한정권이라고 호칭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주장이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했다며 구속됐다. 그리고, 재판을 통해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반국가·이적단체 조직 사건으로

정권 위기 돌파해온 전두환 정권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반국가’ ‘공산주의자’ 낙인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광주 학살을 거쳐 정권을 잡은 전두환도 박정희의 수법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전두환 집권 시기인 1980년부터 1987년까지 국가보안법 관련 통계를 살펴보면 박정희 집권 시기와 마찬가지로 정권의 위기마다 구속자가 급증했다.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잡은 1980년부터 1981년까지 국가보안법 관련 구속자가 급증했고,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타오르던 1986년과 1987년에 다시 급증했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운동세력을 향해 반국가단체 또는 이적단체를 구성했다는 혐의를 적극적으로 적용했다. 광주항쟁 이후 민주화운동은 이론화·조직화되면서 활발해졌고, 전두환 정권은 수많은 조직사건을 만들며 대응에 나섰다. 1981년 전민학련, 전민노련 등이 반국가단체 혐의로 처벌을 받았다. 1985년엔 삼민투위, 민주화추진위원회(깃발사건) 등이 반국가단체로 처벌받았다. 1986년 9월엔 미국 유학 중 북한 공작원에 포섭된 뒤 국내에 잠입해 학생들의 반정부 폭력시위를 주도하면서 간첩 활동을 했다고 조작해 이른바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전두환 정권이 만든 수많은 조직사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바로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이다. 계엄사령부는 1980년 5월 17일부터 수사를 벌여 7월 4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민주화 운동가 37명이 북한의 사주를 받고 내란을 획책했다면서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당시 계엄사령부의 수사발표를 보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괴상한 주장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계엄사령부는 “국민연합을 주축으로 방대한 사조직을 형성, 주로 복학생을 행동대원으로 하여 대중선동에 의해 학원소요사태를 일으키고 이를 폭력화, 전국적인 민중봉기를 일으켜 유혈혁명 사태를 유발케 하여 현정부를 폭력으로 전복한 뒤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권을 수립, 집권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형이 선고됐다는 동아일보 1980년 9월 17일자 기사와 사형수로 복역하던 당시의 김대중 전 대통령 모습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김대중평화센터

계엄사령부는 또 “김대중은 8.15해방직후부터 좌익활동에 가담한 열성 공산주의자로서 73년 8월에는 반국가단체인재일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연맹(한민통)을 발기, 수괴인 의장으로 추대돼 북괴 노선을 지지 동조하는 반국가 활동을 했고 북괴 또는 조총련으로부터 받은 불순자금을 불법으로 반입해 사용했으며 계엄기간 중 포고령을 의도적으로 위반”했으며 “10.26사태가 자신의 집권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확신, 신민당 복귀를 통한 합법적 집권투쟁과 사조직을 통한 대중선동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합법적 비합법적 투쟁의 양면전략을 추진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계엄사령부의 수사발표와 함께 언론과 방송도 거들고 나섰다. 김대중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씌우기 위한 특집 보도가 이어진 것이다. “선동·권모술수로 얼룩진 「위선의 화신」 김대중을 벗긴다”(경향신문) 등 그를 좌익 공산주의자이며 북괴를 도와 반국가 활동에 나선 인물이자 각종 비위를 일삼아 온 믿을 수 없는 인물로 묘사했다.

결국,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사면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그에게 씌워진 반국가 등 부정적 이미지는 오래도록 그를 괴롭혔다. 지금도 수구보수세력 가운데 일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향한 이런 주장을 아직도 되풀이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전두환 정권이 찍은 반국가 낙인의 위력은 대단했다.

여소야대 국회로 주춤했던 노태우 정권

문익환 목사 방북 등 빌미 공안정국 조성

“대한민국 안전 위태롭게 한 반국가활동”

1987년 6월항쟁 이후 직선제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노태우는 1988년 2월 취임사를 통해 “경제성장과 국가안보를 구실삼아 인간의 자유와 권리가 등한시되던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강압과 밀실 안에서의 고문이 묵인되던 날들도 이젠 지나갔습니다”라고 밝혔다. 말뿐일 수 있지만, 과거 정권과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정권이 자신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반국가’ 낙인을 찍는 시대를 마감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커졌다. 1988년 4월 치러진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되면서 국가보안법 개정 시도 등 세상이 변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금방 허물어졌다. 1989년 통일운동의 열기가 거세지며 황석영 작가(3월20일), 문익환 목사(3월25일), 임수경 한국외대 학생(6월30일), 문규현 신부(7월25일)가 잇따라 방북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정부만 대북 접촉을 할 수 있다면서 창구단일화론 주장하고 있었고, 이런 정부의 방침을 벗어나 북한과 대화하거나, 북한을 방문하는 등의 행위는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하는 행위라며 처벌했다. 아울러 공안정국을 조성해 학생운동, 노동운동 등을 향해 전방위적인 압박에 나섰다.

당시 재판부는 문익환 목사가 북한을 방문해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이라고 호칭하고, 북한과 함께한 만찬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동지의 만수무강을 위해 축배하자”는 축배사를 하며 함께 잔을 들었다는 이유로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찬양고무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정부의 승인없이 잠행입북해 북한의 연방제통일안 국가보안법 폐지, 주한미군 철수, 팀스피리트훈련 반대 등 북한 주장에 동조한 것은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태롭게 한 반국가활동”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문익환 목사는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최초로 반국가단체로 규정된 ‘사노맹’

“무장봉기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 건설하려 했다”

검찰 박노해 백태웅에 사형 구형

민간의 통일운동을 빌미로 노태우 정권은 공안몰이에 나섰다. 1989년부터 크고 작은 조직사건을 발표했고, 1990년 여소야대 국회를 뒤엎고, 민정-민주-공화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이 창당된 뒤엔 국가보안법 구속자가 급증했다. 3당 합당에 항의하는 대학생 등의 시위가 거세졌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동원한 것이다.

거대 여당 민자당의 행보는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유명 드라마 제목을 따 ‘한지붕 세가족’이라고 불릴 정도로 계파간 갈등이 심했다. 민자당 창당 직후 벌어진 4월 재보궐선거에서 텃밭인 대구에서 겨우 과반을 넘겼고, 충북 진천·음성에선 3당 합당에 동참하지 않은 민주당 계 정당인 이른바 ‘꼬마민주당’에게 의석을 넘겨주는 등 참패했다. 이후 내부 갈등을 더욱 커져만 갔고, 이런 민자당의 위기 속에서 노태우 정권은 대규모 조직사건을 발표했다.

1990년 당시 정형근 안기부 수사국장이 사노맹 사건을 발표하고 있다. ⓒ월간 말

1990년 10월 30일 국가안전기획부는 기자회견을 열고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반국가단체라고 주장했다.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운동단체가 반국가단체로 지목된 것은 사노맹이 처음이었다. 안기부는 사노맹이 전국의 노동현장과 대학가 등지에서 노동투쟁 폭력시위를 배후조종해온 반국가단체라며 조직원 1백50여 명을 수배 중이며 조직체계도가 수록된 워드프로세서 및 컴퓨터디스켓을 압수했다고 발표했다.

안기부는 조사결과 ‘사노맹이 전국에 1천6백여 명의 조직원으로 거대한 지하조직망을 구축했으며 조직원은 점조직형태로 가명·음어·무인포스트를 사용하고 자살용 독극물까지 개발하려 하는 등 최대규모의 사회주의 혁명지하조직’이라고 주장했고, ‘광주사태가 실패한 것은 민중이 무장력을 갖추지 못한 때문이라고 분석, 자체 폭발물개발과 무장봉기 시 무기고탈취계획까지 수립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안기부와 검찰 등은 사노맹이 북한과 어떠한 연계도 없었지만, 북한과 연계가 있는 것처럼 주장했고, 결국 주범으로 몰린 박노해와 백태웅에게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다.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지만, 박노해는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백태웅은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선 징역 15년이 확정됐다. 두 사람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출소했다.

쌀개방과 연이은 대형참사로

위기 맞은 김영삼 정권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과

“정당·언론에도 주사파 있다”는

서강대 박홍 총장 발언으로

시작된 신공안정국

1993년 2월 김영삼 정권이 출범했다. 민주자유당이 재집권한 것이지만, 오랜 군부독재를 거쳐 군인 출신이 아닌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서 출범한 ‘문민정부’였다. 집권 초기 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 안기부 개혁 등 여러 변화가 있었고, 한때 김영삼 대통령 지지율이 90%에 육박할 정도로 국민적 지지도 높았다. 아울러 국가보안법 구속자도 줄어들면서 ‘공안 정국’은 이제 막을 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권의 위기가 닥치자 김영삼 정권의 선택도 과거 군사정권과 다르지 않았다. 1993년 말부터 쌀시장 개방 논란 때문에 농민을 비롯한 여러 국민의 불만이 커졌다. 대형 참사도 잇따르면서 김영삼 정권의 위기감을 키웠다. 3월 구포역 열차 전복 사고로 78명이 사망하고 198명이 다쳤다. 7월 26일 목포행 아시아나 여객기가 추락해 66명이 사망하고, 44명이 부상을 당했다. 10월 10일엔 전북 부안군 위도 앞바다에서 서해훼리호가 침몰해 292명이 목숨을 잃었다. 김영삼 정권의 지지율은 추락했다.

그러다 1994년 7월 8일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정국은 급변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과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정상회담 상대인 김 주석이 사망한 만큼 조문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야당 등을 중심으로 제기됐다. 이부영 민주당 의원은 7월 11일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 “북한을 협상의 상대로 본다면, 북한 권력층이 문제가 아니라 북한 주민의 심리적 상태를 고려해 조문단을 파견할 의사가 있는가”라고 질의하기도 했다.

서강대 박홍 총장은 주사파가 1만 5천 여명에 이르고, 정치, 언론, 교육계 등에 진출해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 1994년 8월 26일자.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하지만, 야당의 김일성 조문 관련 질의를 빌미로 당시 여당이던 민자당과 보수언론은 조문이 곧 ‘김일성주의 찬양’이라고 주장하면서 조문 논쟁은 색깔론 논쟁이 됐다. 대검 공안부는 “김일성 추도행위를 벌일 경우 국가보안법 위반(반국가단체 고무 및 찬양) 혐의로 엄단할 방침”이라며 엄포를 놓았다. 1994년 7월 18일 서강대 박홍 총장은 청와대에서 열린 대학총장 간담회에서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과 사로청이 있고, 그 뒤에 김정일이 있다”고 주장하며 분위기는 고조됐다. 아울러 박 총장은 “북한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유학생이 교수로 있다”, “정당·언론에도 주사파 있다”고 발언했다. 다음날 ‘중앙일보’가 ‘병균은 색출해야 한다’는 사설로 박 총장을 거들었다. 그리고 각종 언론과 국가기관이 총동원돼 주사파 색출 소동이 벌어졌다. 이후 ‘주사파’ 관련 조직사건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이들은 1심 재판과정에서 대부분 집행유예나 보석으로 풀려나왔으며, 안기부 검찰 등이 발표한 수사내용은 거창했지만, 실제 기소단계에서 축소되기도 했다. 해당 사건과 무관한 이들이 조직도에 끼워 넣어진 것이 나중에 밝혀지는 등 경찰과 공안 기관이 무리한 수사를 통해 과대 포장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김영삼 정권의 공안정국은 정권 입장에선 어느 정도 효과를 거뒀다. 공안세력의 칼날이 거세지자 진보진영 내에선 균열이 일어난 것이다. 많은 단체가 기자회견을 열고 “지금까지의 통일운동이 친북성향 일변도 였다”면서 “주사파 배격”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리고, 이들의 주장은 정권의 공안탄압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았고, 정권으로선 진보진영을 분열시켜 위기를 돌파하는 효과를 거둔 셈이다.

2003년 송두율 교수를 둘러싼 이념공방

여유와 포용력’을 강조한 노무현 대통령에

“적대적 행위 옹호하면

애국적 행동은 반국가적 행위가 되는 것”

총공세 나선 한나라당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했다. 전두환 정권이 내란을 획책한 반국가단체의 수괴로 지목돼 사형까지 선고받았던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는 이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다. 특히 반국가단체 혐의를 적용해 처벌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김대중 정부에선 국가보안법 개정이 논의됐고, 노무현 정부에선 국가보안법 폐지가 검토됐다. 물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진 못했지만, 정권이 나서 정적이나 정치적으로 반대의견을 가진 이들을 ‘반국가’로 몰아세우는 일은 없어졌다.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진 10년 동안 연이어 남북정상회담과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며 남북 화해 분위기와 함께 ‘반국가’라는 낙인을 찍는 야만의 정치는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반국가’라는 낙인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했다. 과거 집권세력이었던 한나라당이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민주개혁세력,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정당과 진보세력을 공격하는 무기로 여전히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2003년 송두율 교수 사건이다. 그해 9월 송두율 교수는 37년 만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초청으로 가족과 함께 귀국했다. 국가정보원은 당시 그를 노동당 서열 23위 김철수와 동일인이라며 ‘해방 이후 최고 거물급 간첩’으로 몰아세웠다. 그 과정에서 송 교수의 조선노동당 입당 사실이 밝혀졌다.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세력의 공세는 거셌다. 노무현 대통령이 10월 13일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송두율 교수 처리문제에 대해 ‘여유와 포용력’을 강조하자 박진 한나라당 대변인은 “대통령이 국기문란 행위에 대해 사실상 포용하자는 편향된 사고를 보이고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권한 남용이자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를 훼손하는 것”이라며 “노 대통령식으로 적대적 행위를 옹호하면 애국적 행동은 반국가적 행위가 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대변인은 이어 “국정 최고책임자가 실정법인 국가보안법을 일종의 악법이라는 식으로 인식, 대통령이 남북관계에서도 경계인적 사고를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우려된다”며 노 대통령을 향해서도 이념 공세를 펼쳤다.

송두율 교수 ⓒ영화 경계도시2 스틸컷

이러한 이념 공세는 효과를 거뒀다. 송두율 교수의 귀국을 추진했던 참여정부와 진보진영 인사들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송 교수는 “학술 활동을 위해 북한을 드나들려면 관례적으로 노동당 가입 절차를 치러야 했고, 이후 노동당원으로서 활동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노동당원임을 의식하지도 않았다”라고 해명했지만, 진보진영에서조차 진의를 의심했다. “현 상황을 원칙이나 진정성으로 생각하지 말고, 축구를 할 때 골문을 수비하는 것처럼 기술적으로 생각하라”라며 노동당 탈당과 독일 국적 포기를 종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송 교수는 결국 기자회견을 통해 노동당 탈퇴와 독일 국적 포기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7년을 받았다. 그리고 2004년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보름 만에 한국을 떠났다. 4년 뒤인 2008년 대법원에선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여론재판은 이미 끝난 뒤였다.

이명박·박근혜 연이어 집권

돌아온 전가의 보도 ‘반국가세력’

국정원 대선개입 논란 속 터진

내란음모 사건

“총기 마련해 국가시설 파괴 모의”

수구보수 세력은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을 지나 2008년부터 연이어 이명박·박근혜를 당선시키며 권력을 다시 잡았다. 다시 잡은 권력과 함께 강력했던 그들의 무기도 다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국가보안법을 동원해 이들은 집권 내내 크고 작은 조직사건과 간첩단 사건을 연이어 터트렸다. 그리고, 조직사건과 간첩단 사건은 주로 진보정당을 노렸다. 이 시기 야권은 진보세력과 개혁세력이 선거연합을 통해 2010년 지방선거 등에서 승리하는 등 위력을 발휘했고, 조직사건과 간첩단 사건을 매개로 야권연합에 균열을 만들려는 의도였다. 이명박·박근혜 집권 시기 내내 이어졌던 이런 공격의 정점이자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바로 2013년과 2014년 이어진 ‘통합진보당 해산사건’과 ‘내란음모 조작사건’이다.

2013년 8월 28일 국정원은 이석기 의원을 포함한 통합진보당 주요 당직자 10명의 자택과 의원실 등 18곳을 전격 압수수색하고 3명을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했다. 당시 박근혜 정권은 국정원의 대선개입 문제로 정통성이 의심받는 일대 위기를 맞았다. 이런 위기를 타개할 방법으로 박근혜 정권은 과거 수구보수 정권이 애용하던 무기를 다시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내란사건을 다룬 당시 언론 보도들이다. 당시 국정원을 통해 언론이 보도한 이석기 의원의 발언과 통합진보당 당원이 기자고 있던 폭탄제조법 등은 이후 재판에서 모두 허위임이 밝혀졌다. ⓒ방송화면 등 캡쳐

조선일보는 8월 30일 ‘지하조직 비밀회의 녹취록 국정원 입수’를 전했다. 이른바 지하조직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녹취록 내용이 공개되기 시작했다. 한국일보는 단독보도라며 녹취록 요약본을 실은 데 이어 전문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후 언론에선 ‘사제폭탄’, ‘기간시설 파괴’ 등 자극적 언어가 넘쳤다. 이런 총공세를 통해 이 의원 체포동의안 처리에 찬성하라고 야당을 압박했고, 또 종북세력의 국회 진출에 민주당도 책임이 있다는 발언이 당시 새누리당을 중심으로 쏟아졌다.

결국, 9월 4일 국회 본회의가 열리고, 찬성 258, 반대 14로 ‘이석기 의원 체포동의안’은 가결됐다. 민주당은 물론 한때 같은 당에 있었던 정의당마저 동조했다. 이후 국정원은 이 의원에 대한 구속영장을 전격 집행했다. 6일 정부는 ‘위헌정당 TF’를 구성했고, 새누리당은 이 의원 제명안을 제출했다.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숨은 목적을 가지고 내란 논의하는 회합”

주장하며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선고

이후 재판과정에선 당시 언론 보도를 통해 흘러나온 내용 대부분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통합진보당에 호전적 낙인을 찍었던 근거가 된 녹취록은 “구체적으로 준비하자”를 “전쟁을 준비하자”로 조작하는 등 수백 곳 넘게 오류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내란음모를 실행한 조직으로 지목받은 이른바 ‘RO’는 재판과정에서 실체가 없음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2015년 1월 22일 내란음모 혐의는 무죄로 판결했지만 ‘내란선동’과 ‘국가보안법 위반’은 ‘유죄’로 판결했다. 선동 즉 부추기는 언행이 유죄가 되려면, 그로 인해 유발되는 ‘구체적 행위’가 전제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구체적 행위없이 ‘말’ 한마디로 중형을 선고했다.

대법 판결이 나오기 전인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이미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했다.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이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숨은 목적을 가지고 내란을 논의하는 회합을 개최하는 등 활동을 한 것은 헌법상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고, 이러한 진보당의 실질적 해악을 끼치는 구체적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정당해산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밝혔다. 국회의원직 상실과 관련해서도 위헌 정당의 해산을 명하는 비상상황에서는 국회의원의 국민대표성은 희생될 수밖에 없으므로 진보당 소속 국회의원의 의원직 상실은 위헌정당 해산제도의 본질로부터 인정되는 기본적 효력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헌재의 주장은 정부가 지난 2013년 11월 진보당 해산 청구 이후 해온 주장을 마치 녹음기처럼 되풀이한 것으로 정부 입맛에 맞춘 판결이었다.

촛불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

하지만, 여전히 건재한 국가보안법

윤석열 대통령 등장과 함께

다시 살아난 반국가세력 주장

통합진보당을 해산하는 등 공안몰이를 이어가던 박근혜 정권의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박근혜 정권은 위기를 맞았고, 2016년 10월29일부터 시민들은 “이게 나라냐”라며 19번의 촛불집회를 열었다. 그렇게 모인 함성은 결국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했다. 대선은 새롭게 치러졌고, 그렇게 촛불들의 기대를 모으며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취임했다.

문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만 같았다. 국가보안법 등 공안 악법과 국정원을 비롯한 공안기관 등을 철폐 또는 개혁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많았다. 하지만, 국가보안법 체제는 전혀 변하지 못했다. 국가보안법은 이미 사문화된 것이라며 민주당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남았던 과거의 불씨는 결국 윤 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다시 타오르게 됐다.

대학생 역사동아리연합 진보대학생넷, 청년진보당, 청년하다, 평화나비 네트워크 등 청년 대학생들이 15일 광복절 경축식이 열린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뉴라이트 인사 등용, 굴욕적 역사외교를 거부하는 대학생 기자회견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24.08.15 ⓒ민중의소리

2022년 5월 취임한 윤 대통령은 ‘공정과 상식’을 내걸고 당선된 만큼 집권 초기엔 별다른 이념적 행보를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임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지율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위기가 닥치자 윤 대통령은 ‘반국가세력’이라는 일제강점기부터 강력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주요 요직에 뉴라이트 출신을 기용하면서 이념 공세를 이어갈 준비를 마쳤고, 취임 1년이 지난 2023년 8월부터 윤 대통령의 발언은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반국가세력, 반대한민국 세력 등

윤석열 대통령의 이념 총공세

‘반국가세력’이라는 무기를

사용해온 권력의 말로 어떠했는가를 살펴

윤석열 대통령은교훈을 찾아야

윤 대통령은 2024년 8월 15일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전체주의가 대결하는 분단의 현실에서 이러한 반국가세력들의 준동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전체주의 세력은 자유 사회가 보장하는 법적 권리를 충분히 활용하여 자유사회를 교란시키고, 공격해 왔습니다. 이것이 전체주의 세력의 생존 방식”이라며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일제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광복절 기념사임에도 불구하고 비판의 화살은 일본제국주의가 아닌 북한과 대한민국의 야권과 진보세력으로 향했다.

8월 25일 열린 국민통합위원회 1주년 성과보고회에선 “시대착오적인 그런 투쟁과 혁명과 그런 사기적 이념에 우리가 굴복하거나 거기에 휩쓸리는 것은 결코 진보가 아니고, 한쪽의 날개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주장했고, 8월 28일 국민의힘 연찬회에선 “이념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전임 문재인 정부의 이념 성향을 공격했다. 8월 29일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전체주의가 대결하는 분단의 현실에서 공산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과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들은 허위 조작, 선전 선동으로 자유사회를 교란시키려는 심리전을 일삼고 있으며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산전체주의의 생존 방식”이라며 야당과 진보세력을 상대로 사상전을 벌일 것을 독려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이후 반국가세력, 공산전체주의 맹종 세력, 반대한민국 세력 등 비슷한 표현을 이어가며 야권과 진보진영을 공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공격에도 불구하고 2023년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와 2024년 총선에서 연이어 참패했다. 지지율은 더욱 떨어져 20% 이하로 떨어질 수 있을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일제를 시작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반국가세력’이라는 무기를 사용해온 권력의 말로가 어떠했는가를 살펴 교훈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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