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 새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130주년 특별전'이 16일 오후 서울 강북구 4.19로 근현대사기념관에서 개막, 오는 12월 31일까지 전시를 진행한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지도에 새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130주년 특별전'이 16일 오후 서울 강북구 4.19로 근현대사기념관에서 개막, 오는 12월 31일까지 전시를 진행한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130년 전인 1894년 조선에서 벌어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은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던 우리 민족의 운명을 가른 역사적 순간이자 동아시아의 세력판도를 뒤흔든 중대 사건이었다.

'반봉건 반외세'의 지향을 뚜렷이 보여준 동학농민혁명과 조선을 둘러싼 청·일 두 나라의 격렬한 각축전이 맞물려 전개된 1894년 조선의 상황을 8종류의 지도에 새겨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펼친 전시회가 16일 개막했다.

서울 강북구청과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 주최하는 '지도에 새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130주년 특별전'이 16일 오후 서울 강북구 4.19로 근현대사기념관에서 개막, 오는 12월 31일까지 계속된다.

전시에 사용된 지도는 대동여지도, 대한여지도, 일본 점령지 실측지도, 조선내란지도를 비롯해 19세기 후반 조선과 일본에서 제작된 8종.

전시회 개막식이 16일 오후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전시회 개막식이 16일 오후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일본군 간첩대 조선 정탐지도'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어 있는 '조선전도'(朝鮮全圖)는 당시 일본 육군성 참모본부가 1880년대 초반부터 간첩대를 조직해 6명의 위관급 장교가 작성한 지도이다.

각 인물이 작성한 지역은 서로 다른 색깔로 표시하고 실선과 점선 등으로 작성 연도를 알 수 있도록 하는 등 치밀한 제작 수법이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지도는 일본이 1894년에 제작한 '조선내란지도'

이 지도에는 1차봉기가 일어난 고부지역에 별표를 그리고 그 아래로 붉은 색 빗금을 그어 '내란지역'으로 표시했다.

지도안에 사각상자로 '풍공 정한지고전장(豊公 征韓之古戰場)'이라는 제목을 달고는 '히라가나' 문자로 임진왜란 당시 '풍공'(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투를 벌였던 지역을 다시 써놓았다.
 
장원석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실장은 "일본이 꿈꾼 정한론의 뿌리가 300년전 임진왜란까지 닿아있다는 반증으로 읽힌다"고 해설했다.

일본 민간에서 만든 이 지도에는 2차 농민군봉기 이동경로를 따라 일본군이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를 특파한 3개의 경로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내란지도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조선내란지도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일본군 간첩대 조선정탐지도(조선전도)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일본군 간첩대 조선정탐지도(조선전도)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장 학예실장은 "농민군이 강원도, 함경도까지 올라가지 못하도록 호남지역으로 몰아넣어 마지막엔 대량학살로 끝내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시회에는 천도교중앙총부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과 함께 강덕상자료센터가 제공한 청일전쟁 화보집과 사진, 일본군인들이 사용하던 화투패 등 희귀 유물도 함께 선보인다.

크지 않은 전시장은 △동학창시와 교조신원운동(1892년 말) △1차봉기-사발에 담긴 농민의 꿈(1893~1894.6.11) △일본의 조선침략과 청일전쟁(1894.6~1895.4) △2차봉기-보국안민(輔國安民) 깃발들고 일어선 항일농민봉기 등 4개의 시기로, 또 11개의 전개과정으로 나누어 일목요연하게 구성되어 있다. 

△동학포교지역과 교조신원운동 발생지 △고부농민봉기 △1차봉기 농민군 이동경로 △집강소설치 합의 지역 △일본군 간첩대 조선정탐지도 △청·일군대 상륙 △일본 혼성여단 주둔지 배치도 △청일전쟁 주요 전투지 △2차봉기 농민군 이동경로 △일본군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 이동경로 △태인전투 이후 항쟁지 등 11개의 전개과정을 지도위에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어 직관적이고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동경대전(東經大全)' 인제 경진판(왼쪽)과 '용담유사龍潭遺詞)' 계사판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동경대전(東經大全)' 인제 경진판(왼쪽)과 '용담유사龍潭遺詞)' 계사판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 인제 경진판(이양재 소장)과 '용담유사龍潭遺詞)' 계사판(천도교중앙총부 소장) 등 보물급 유물과 이토 히로부미가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체결한 텐진조약 관련 보고서인 '일청 천진담판 이등특파전권대사 복명서'(日淸 天津談判 伊藤 特派全權大使 復命書)등 희귀자료로 전시되어 있다.

사진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던만큼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일본이 홍보용으로 제작한 여러 종류의 컬러 풍속화보는 아직까지 그 화려한 채색이 온전하다. 

특히 관람객의 시선을 끄는 전시물은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인들이 사용했던 화투. 종이로 만든 화투에는 평양성전투, 압록강전투, 황해해전 등  주요 전투장면이 묘사돼 있고 요즘 화투의 '오광'에 해당하는 화투장에는 황금색 배경에 일장기가 그려져 있는 것이 이채롭다.

'조선내란지도'와 함께 강덕상자료센터가 제공했으며, 이번이 첫 공개이다. 

오광은 경성점령, 풍도해전, 평양성전투, 황해해전, 그리고 마지막이 북경함락으로 되어 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인들이 사용했던 화투. 첫 공개되는 전시물이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인들이 사용했던 화투. 첫 공개되는 전시물이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일본 점령지 실측지도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일본 점령지 실측지도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명칭은 청일전쟁이지만 실제로는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조선에서 청과 일으킨 전쟁'이라는 성격이 분명히 드러난다.

전쟁의 근본적 성격에 주목한 재일 사학자, 고 강덕상 선생은 '청일전쟁'이 아니라 '일청한전쟁'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장 학예실장은 "1894년 동학 농민군들의 꿈은 사실 좌절됐으나 25년 후에 3.1혁명으로 되살아났다. 일본은 이때부터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50년 이상의 전쟁을 이어온 나라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근현대사기념관은 오는 24일 서울역사박물관 야주개홀에서 청일전쟁 130년·러일전쟁 120년 기획으로 '위기의 동아시아,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의 학술토론회를 개최한다.

130년 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개요

<동학농민혁명 제 1차봉기>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맞서 동학접주 전봉준이 사발통문을 돌려 농민들을 규합한 제1차봉기가 1893년 말 시작되었다.

1894년 2월 15일 1천여명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말목장터에서 봉기해 고부관아를 접수한 뒤 원한의 대상이었던 만석보를 허물고 백산으로 진을 옮겼다. 후임군수로 박원명이 임명되고 안핵사 이용태가 파견되면서 농민군은 해산하고 전봉준은 4월 18일 남은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를 떠났다.

이용태가 동학교도를 탄압하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자 전봉준은 4월 25일 무장(茂長)에서 손화중과 함께 재봉기(무장 기포)하여 고창과 부안을 거쳐 고부를 점령(고부 점령 4.28)한 뒤 백산으로 이동해 전열을 정비(백산대회 5.1)한 후 전주를 향해 진격했다.

태인점령(5.4)과 부안 점령(5.8) 후 세력을 크게 불린 농민군은 황토현 전투(5.11)에서 전라 감영군을 격파했으며, 이후 차례로 정읍 점령(5.11), 고창 점령(5.12), 무장 점령(5.13), 영광 점령(5.16), 함평 점령(5.20)으로 호남 일대를 장악한 뒤 전주를 향해 북상하다 장성 황룡촌 전투(5.27)를 승리로 이끌며 노령을 넘어 금구 원평에 진을 치고 마침내 전주성을 함락(5.31)했다. 이때 농민군의 숫자는 2~3만명에 달했다.

조선 정부는 청에 파병을 요청해 6월 9일 섭지초(葉志超)와 섭사성(聶士成) 휘하 2,500명 군대(북양군)가 아산만에 상륙했으며, 일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내각은 조선 정부가 청에 원병을 요청한 사실을 확인한 후 6월 2일 혼성여단 파병을 결의하고 6월 5일 처음으로 설치한 천황 직할 전시대본영은 다음날 임시 편성된 혼성여단 선발대의 출발을 명령했다.

청일의 출병 소식이 들려오자 농민군은 6월 11일 관군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철수했다.

동학농민군은 이후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해 폐정개혁을 추진했으니, 동학농민군의 1차 봉기이다.

<청일전쟁인가, 일청한전쟁인가>

일본의 파병은 10년 전인 1885년 4월 이홍장(李鴻章)과 이토 히로부미가 체결한 텐진조약(天津條約, 청·일 양국의 조선주둔군 동시 철수, 일방이 조선에 파병시 상대방에게 통보하기로 합의)에 따라 이루어진 일방적 조치였다.

1884년 자신들이 지원했던 갑신정변이 청 군대에 의해 진압된 후 조선에서 실추된 영향력을 만회할 기회를 노리던 일본이었다.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휘하 혼성여단 선발대 7,000명이 인천에 상륙한 것은 전주화약 다음 날인 6월 12일이었다.

이들은 6월 13일 서울로 진입했으며, 6월 29일 도착한 본대가 용산 만리창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주둔을 시작했다. 

조선 정부는 농민군과 전주화약을 맺은 후 청일 양국에 철군을 요청했으며 철군 요청을 청은 수용했으나 일본은 거부했다. 일본은 대신 청일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 내정개혁을 제의했으나 이번엔 청이 일본의 제안을 거부했다.

일본군은 청군 철수와 조약폐기 요구를 거부한 조선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7월 23일 새벽 경복궁을 습격해 고종을 포로로 잡고 조선군대를 무장해제시켰으며 대원군을 앞세워 친일내각을 구성한 뒤 7월 25일 아산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향해 공격명령을 내렸다.

7월 25일 선전포고 전 아산만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 수송선단을  습격(풍도해전)하고 나흘 뒤에는 아산만에 주둔하던 청 육군과 벌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성환전투) 평양으로 퇴각하는 청군을 향해 8월 1일 공식 선전포고를 했다.

9월 15일 일본군 1만 2,000명이 평양 주둔 청군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해 당일 오후 함락시켰으며, 9월 17일 황해해전에서도 승리했다.

이후 일본군 제1군은 10월 말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격하여 금주성(錦州城)을 점령하고 조선을 완전히 장악했다. 

본국에서 증원된 제2군은 단동으로 진격해 뤼순(旅順) 요새와 다렌(大连)을 함락시켰으며, 이 무렵 일본 연합함대는 압록강 입구 해양도 앞바다에서 청의 주력인 북양함대를 상대로 한 해전에서 승리한 뒤 1895년 1월 산동반도 웨이하이웨이(威海衛)까지 진격해 북양함대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해 청으로부터 △2억냥의 전쟁배상금 지불 △랴오둥반도·타이완, 펑후 제도 등 할양 △통상 특권 부여 등을 약속받았으나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한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이 3국간섭을 벌여 랴오둥반도 반환을 수용하도록 함으로써 청일전쟁은 마무리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제2차 봉기-보국안민 깃발들고 일어선 항일농민봉기>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내각이 수립되자, 동학 지역조직들은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의병 준비에 나섰다.

1894년 7월말 호남에서 시작해 8, 9월에는 경상, 충청 등 삼남지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가장 먼저 재봉기에 나선 지도자는 9월 말 남원 대회를 열어 재봉기를 선언한 남접의 김계남이었다.

전봉준은 정국 추이와 전쟁 상황을 지켜보다 10월 초에 이르러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해 재봉기를 준비했다.

남접 농민군이 봉기하자 동학 최고지도자인 최시형은 각 포의 대접주들을 청산에 소집해 10월 16일 총기포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10월 말에는 항일 농민봉기가 전라, 총청, 경상도 뿐만 아니라 강원, 경기, 황해도까지 확산되었다.

전봉준의 남접 농민군은 11월 9일께 삼례를 출발해 논산에 도착하고, 손화중의 농민군은 나주로 이동해 바다를 통한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했으며, 김개남의 농민군은 남원을 떠나 11월 13일 전주를 점령했다.

손병희의 북접 농민군은 음성에서 출발하여 청산에서 전열을 정비한 후, 11월 13일께 논산에서 남접 농민군과 합류했다.

이렇게 논산에 집결한 남북접 연합 농민군의 수는 1만여 명에 달했으며, 1차 목표는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성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조선 정부는 이에 관군을 파견하고, 일본군은 11월 13일 농민군의 논산집결 전후에 후비보병 제19대대를 중심으로 한 진압부대를 남하시켰다.

일본군의 계획은 부대를 서·중·동 세 갈래로 나누어서 남하하되, 먼저 동로분진대를 출발시켜 강원도와 경상도로 진출한 농민군을 전라도에 몰아넣은 뒤 섬멸하려는 것이었다.

공주로 향한 농민군은 11월 20일부터 이인, 효포, 웅치 등에서 일본군, 관군과 전투를 벌이다 후퇴하여 전열을 정비한 뒤 2차 공격을 준비했다.

농민군의 운명을 건 우금치전투는 10월 23일부터 11월 11일 사이에 벌어졌다.

1만여명의 농민군은 조선 정부의 최정예부대와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 수십차례의 처절한 공방을 거듭하면서 마지막 불꽃을 피웠다.

이곳에서 패배한 농민군은 논산 황화대에서 관군, 일본군과 다시 맞섰으나 또 다시 패배했고, 청주 전투에서 진 김개남 부대는 남쪽으로 내려와 강경에서 합류한 뒤 함께 전주로 향했다.

이후 전봉준·손병희 부대는 고부방향으로, 김개남 부대는 남원방향으로 흩어졌다.

12월 말 원평과 태인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한 뒤 전봉준과 손병희는 농민군을 해산했으나 이중 일부는 1895년 초까지 장흥 석대들, 보은 북실, 완주 대둔산 등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다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잔혹하게 학살당했다.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동학농민 혁명 지도자들이 이때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고부 농민봉기로부터 1년여에 걸쳐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은 막을 내리고 농민들의 꿈은 좌절됐지만, 이들의 정신은 항일 의병을 거쳐 3.1혁명으로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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