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헌법재판은 1987년 6월 항쟁과 대통령직선제 개헌으로 들어선 6공화국에서 비로소 시작됐습니다. 1987년 개정 헌법과 1988년 8월 5일 제정한 헌법재판소법을 근거로 헌법재판소가 설치됐습니다.
1988년 9월 19일 조규광 헌법재판소장 등 재판관 9명이 임명됐습니다. 처음에는 상임 재판관 6명, 비상임 재판관 3명이었습니다. 1991년 헌법재판소법 개정으로 전원 상임 체제로 바뀌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한병채 전 의원을 초대 헌법재판소장에 임명하려고 했습니다. 한병채 전 의원은 판사 출신으로 대구에서 네 차례 국회의원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국회에서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부결되자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를 정치색이 옅은 조규광 변호사로 교체했습니다. 조규광 후보자는 국회 임명동의를 무난히 통과했습니다. 한병채 전 의원은 민주정의당 추천 국회 선출 몫으로 재판관에 임명됐습니다.
대법원판사 출신으로 12대 국회 민정당 전국구 의원을 지낸 이성렬 전 의원도 대법원장 지명 몫으로 재판관에 임명됐습니다.
6년 뒤 2기 재판부에는 13대 국회 평화민주당 전국구 의원을 지낸 조승형 전 의원이 평민당 추천 국회 선출 재판관에 임명됐습니다. 이처럼 헌법재판소 설립 초기에는 전직 국회의원들도 재판관에 임명됐습니다.
정치인 출신 재판관 임명이 가능했던 것은 1987년 헌법이 다양한 이념과 다양한 정치적 성향의 인물들을 재판관에 임명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다양성이 헌법 정신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정치인 출신 재판관은 사라졌지만 다양한 이념과 정치적 성향의 인물을 재판관에 임명하는 관행은 이어졌습니다. 헌법재판소의 이런 역사에 비추어 보면 최근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재판관의 이념과 정치적 성향을 문제 삼는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보수 언론의 공세는 말도 안 되는 투정에 불과합니다.
2020년에는 헌법재판소법이 개정되어 당원이었거나 선거에 출마했던 사람, 대선 캠프에 들어갔던 사람은 3~5년 동안 재판관으로 임명할 수 없게 됐습니다. 재판관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헌법 정신에 비추어 보면 올바른 개정이었는지 의문입니다.
저는 헌법재판소 설립 초기 헌법재판소 담당 기자였습니다. 헌법재판소 사람들은 “한겨레신문과 헌법재판소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함께 탄생했으니 형제지간”이라고 했습니다. 한겨레신문이 1987년 6월 시민항쟁 속에서 탄생한 신문이었기 때문입니다.
6월 항쟁으로 태어난 기관답게 헌법재판소는 지금까지 37년 동안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고 헌법 질서를 수호하며 위상을 높여왔습니다. 헌법재판소 덕분에 동성동본 결혼이 가능해졌습니다. 국회의원 선거 1인 2표제가 도입됐습니다. 간통죄가 없어졌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파면으로 민주주의를 회복했습니다.
흑역사도 있었습니다. 2004년 관습헌법 위반이라는 황당한 이유로 신행정수도건설법을 위헌으로 결정한 것, 2014년 통합진보당을 무리하게 해산시킨 것 등입니다.
어쨌든 헌법재판소는 이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헌법재판소의 기나긴 역사에서 이번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은 중대한 고비가 될 것 같습니다. 헌법과 법률에 따라서 상식적인 결론을 내리면 헌법수호 기관으로서 입지가 더욱더 탄탄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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