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이 그런 성과를 거둔 것은 일차적으로 한국 가톨릭의 노력과 더불어 추기경 개인의 신념과 역량에 기인한다. 이와 함께, 1960년대부터 전개된 세계 가톨릭의 개혁 열풍과도 연관된 것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톨릭은 서양 제국주의의 세계 침략에서 첨병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직전에는 히로히토 일왕(천황)이 강행하는 신사참배도 공인하고 이탈리아 무솔리니가 자행하는 파시즘 폭정에도 협조했다. 이 같은 과오에 대한 반성으로 나온 것이 교황 요한 23세의 주도로 1962년 10월 11일 개회돼 1965년까지 이어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다. 개혁을 위한 이 공의회가 성과를 거두면서, 가톨릭은 세계 대중과 친숙한 종교로 거듭날 기회를 갖게 됐다.
공의회에서 강조된 핵심 정신은 현대 세계에 대한 적응, 대화와 자성, 교회 밖에서의 구원 가능성 인정, 종교의 자유 인정, 권위주의 철폐 등이다. 청년 신부 김수환은 1956년부터 1963년까지 유럽 유학을 했다. 그 같은 개혁 열풍을 가까이서 접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핵심 정신은 김수환 추기경의 이미지와 대략 맞아떨어진다. 이는 그가 그 정신에 입각해 한국 천주교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유학을 끝내고 귀국한 1964년부터 그는 공의회 정신을 한국에 전파했다. 위 이장우 논문은 "가톨릭시보사 사장으로 재임할 때 공의회 소식을 앞장서서 보도하면서,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로 거듭날 것을 강조했다"고 기술한다.
공의회의 정신적 세례를 받은 신부 김수환이 한국 가톨릭 지도자로 급부상하는 시점은 박정희가 독재자로 부각되는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 신부 김수환이 가톨릭시보사 사장이 된 것은 1964년, 마산교구장 주교가 된 것은 1966년, 서울대교구장 대주교가 된 것은 1968년, 교황청 추기경이 된 것은 1969년이다. 박정희는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에 취임하고 1967년에 재선된 뒤 1969년에 3선 개헌을 강행해 종신제 군주의 길을 열었다. 1960년대 후반은 김수환과 박정희가 각각 가톨릭 지도자 및 독재자로 떠오른 시기다.
그 시기에 추기경 김수환은 박 정권과의 협력을 통해 교단을 안정적으로 이끄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라 정권이 아닌 민중의 편을 들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본업이 추기경인지 운동권 투사인지 헷갈릴 정도로 그는 민주화운동에 깊이 개입했다.
그의 민주화운동이 반정부 차원을 뛰어넘어 반체제로까지 발전했다는 점은, 박정희를 사실상의 종신군주로 만든 1972년 12월 27일 이후의 유신체제에 대해 정면 대항한 데서도 확인된다. 1973년 12월 13일, 그는 함석헌 목사 및 윤보선 전 대통령 등과 함께 서울 시내 한복판인 중구 명동에서 시국간담회를 열고 박정희의 변화를 촉구했다.
다음날 이 상황을 보도한 <동아일보> 1면 기사의 제목은 '민주체제 회복 조치를'이다. 체제 문제를 거론하는 시국간담회였던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참여자들은 "중대한 민족적 위기", "정상적인 민주주의체제로의 회복", "평화적 정권교체" 등을 거론하며 유신헌법 체제의 부당성을 비판했다. 추기경 김수환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며 민주화 투쟁에 나섰음을 알 수 있다.
교회 밖 대중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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