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미, 그리고 기이한 결말
이때 삼성물산 3대 주주였던 미국사모펀드 엘리어트가 튀어나와 소수주주들과 기관투자가들을 규합하며 합병반대캠페인을 조직해서 반대논리가 먹히기 시작한다. 다급해진 이재용이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이자 제일모직의 2대주주인 국민연금을 합병찬성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박근혜와 최순실에게 뇌물을 준다. 안종범 경제수석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의중을 전달받은 국민연금은 합병주총에서 찬성 표를 던지고 덕분에 간신히 3% 차이로 반대를 누르고 양사의 주주총회를 통과해서 양사의 합병이 성사됐다. 이에 격분한 소수주주들이 합병무효소송을 내고 참여연대가 배임죄 등으로 형사고발을 했다.
물산 1주 대 모직 0.35주 교환비율은, 삼성물산 기업가치를 정할 때는 모든 자산과 사업기회의 가치를 최소로 평가하고 제일모직 기업가치를 정할 때는 부동산과 사업기회를 최대로 부풀려 억지로 맞춘 결과였다. 구체적으로는 제일모직이 보유한 에버랜드 토지가격과 이재용 시대의 플래그 십(flag ship)으로 만든 제일모직 자회사, 삼성바이오로직스 기업가치를 한껏 부풀리며 업무상 배임 등을 저질렀다.
삼성은 용인시청과 토지평가사, 건설부를 어떻게 구워 삼았는지 합병에 대비해 1년 전에 미리 에버랜드 공시지가를 대폭 올렸다가 합병성사 직후에 공시지가 재(再)인하를 요청해서 재산세를 아끼는 놀라운 재주를 부렸다. 또한 삼성 미전실은 삼바와 미국제약사 바이오젠의 합작 자회사, 삼성바이오에피스의 콜 옵션 회계처리와 관련해 회계부정을 저질렀고 이것을 덮기 위해 삼바공장의 콘크리트 바닥을 파고 대대적인 증거인멸 작업을 수행했으나 얼마 안 돼 덜미를 잡혔다.
윤석열-한동훈-이복현 검찰의 본격 수사 끝에 이재용과 하수인들은 2020년 9월 업무상 배임, 공시의무 위반, 증거인멸 등 19개 혐의로 기소된다. 그런데 결말이 기이하다. 놀랍게도 2024년 2월의 1심에 이어서 1년만인 2025년 2월 2심도 이재용 회장과 하수인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다시 불과 5개월 만인 지난 17일, 대법원 3부가 2심판결을 확정하며 삼성 이재용에게 완승을 선물함으로써 25년간 계속된 사법투쟁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삼바공장 콘크리트 바닥에 숨겨놨던 결정적인 핵심증거들을 모두 증거능력이 없다고 배척한 후 물산 부당합병과 삼바 회계부정이 경영권 승계목적만으로 행해졌다고 볼 증거가 불충분하고 합리적 경영판단으로 볼 여지가 없지 않다는 것이었다. 재판부가 피고인을 봐주려고 마음먹을 때 동원되는 손쉬운 증거불충분 타령을 떼창했다.
도대체 왜 이랬는지 궁금하지 않는가.
딜레마 아닌 딜레마 : 집행유예 없는 중형, 아니면 전부무죄
물론 지난 25년의 뒤틀린 사법과정에서도 때때로 희망의 순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만 예를 들자면, 2019년 김명수 대법원은 국정농단 상고심에서 2심의 가벼운 집행유예 판결을 파기하며 이 회장의 뇌물공여액수를 86억 8061만 원으로 올려서 확정짓고, 그에 맞춰 이 회장에게 실형을 선고하라는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때가 최고법원이 처음으로, 삼성그룹의 지배권을 불법 대물림할 목적으로 국가권력을 동원한 거대한 국정농단의 실체를 인정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어떻게든 집행유예를 붙여주기 위해 고심을 거듭하던 파기환송심 재판부도 종국에는 이재용 회장에게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해 잠시나마 법원이 살아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모두 마지막을 위한 서곡에 불과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지난 1, 2심의 전원무죄 전부무죄 판결에 대한 최종적인 추인이었다. 1심부터 대법원까지 모든 재판부는 도대체 무슨 이유와 배짱으로 전부무죄 결론으로 일관했을까? 그 답은 재판부가 느꼈을 심리적 딜레마에 있다고 본다.
만약 이 사건에서 단 하나의 유죄라도 인정된다면 뇌물공여 국정농단사건으로 이미 유죄판결을 받은 이재용 회장은 5년 이상 실형을 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모든 정황과 증거를 고려해서 나온 정당한 법의 판단인 이상 재판부는 어떤 결론이 나와도 하등의 딜레마를 느낄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현실의 법관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이번 불공정합병 사건의 배임수혜액과 회계부정액수가 워낙 커서 이재용 회장은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최소 5년 이상의 징역형이 불가피했다. 더욱이 국정농단 뇌물전과로 누범 가중처벌을 적용받기 때문에 집행유예 선고마저 법적으로 불가능했다. 즉, 재판부의 선택지는 '집행유예 없는 중형' 아니면 '전부 무죄'라는 양자택일뿐이었다. 각급 법원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관계자 14인 전원무죄, 19개 혐의 전부무죄의 길을 택한 실질적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 지배엘리트의 최상위층에 위치하는 엘리트 법관들 관점에서는, 물산-모직 합병 관련 뇌물공여사건으로 이미 2년이나 '국립대학' 생활을 맛보고 나온 이재용 회장에게 집행유예 없는 중형을 선고해서 다시 교도소로 보내는 것이 심리적으로 도무지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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