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한국은 제대로 해냈다"... 뉴욕에 등장한 '태극기 피켓'의 정체

[2025 세계 속의 K문화] '민주주의를 지켜낸 나라' 한국에 대한 부러움 커져

민족·국제 최현정(baltic)25.10.23 06:42ㅣ최종 업데이트 25.10.23 06:42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흥행을 통해 다시 한 번 'K-POP은 세계적인 문화'라는 것이 입증됐습니다. 더불어 한국의 드라마·음식·뷰티 산업 등에 대한 관심도 증가하면서, 관광객도 점차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2025 K문화>는 세계인들의 삶에 더 밀접하게 다가가고 있는 한국 문화를 보여주며, '한류'의 현재를 진단하고, 향후 방향성을 모색해봅니다.[편집자말]

▲10/18 No Kings Day 참가자들최현정

​

행진 대열이 지나가는 데만 세 시간 가까이 걸렸다. 어디선가 새로 합류한 인파가 또 다른 대열을 만들어서, 끝인가 하면 또 그만큼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지난 18일 미 전역에서 궐기한 '노 킹스 데이(No Kings Day)' 시위의 뉴욕 현장이다.

​

타임스 스퀘어가 위치한 7번 에비뉴는 분노와 축제의 에너지가 넘쳤다. 토요일 오전부터 유모차를 몰고 휠체어를 타고 걸으며 춤추고 소리치는 시위대들이 차량을 대신하고 있다. 이 시위는 미국 역사상 단일 집회로는 최대 기록이란다. 시위를 '테러'라고 일컫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맞서, 시민들은 개구리와 공룡, 상어와 포켓몬 인형으로 한껏 치장하고 손수 만들어 온 각양각색 피켓을 들었다.

​

▲10/18 No Kings Day 참가자들최현정

​

"쿠데타를 멈춰라."

"뉴욕에서 손 떼시지."

"(트럼프) 관세가 내 일자리를 날렸다."

"왕은 없어, 1776년(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해)부터!"

"미국의 왕은 '버거킹'밖에."

"이케아 캐비닛이 (현 내각보다) 낫겠다."

"ICE(이민세관단속국)는 예수님도 추방할 걸."

"우리는 모두 이민자들"

​

"대통령 탄핵한 한국 사례를 열심히 공부해야"

​

▲10/18 No Kings Day 참가자최현정

​

뉴욕 33 스트릿 매디슨 스퀘어 가든 앞 인도 턱에 올라서서 시위대들이 만들어 온 피켓들을 읽는데 이게 웬만한 쇼츠보다, 광고보다 재미있고 기발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피켓 하나.

​

"KOREA got it RIGHT(한국은 제대로 해냈다)"

​

태극기까지 '제대로' 인쇄해 만든 피켓의 주인공은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다. 피켓을 가리키며 수많은 인파 속에 목소리를 높여 물어본다.

​

"한국이 뭘 해냈다는 건가?"

​

"민주주의를 지켰지않나.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한국 의회가 국민들하고 제대로 막아낸 걸 알고 있다."

​

오늘 집회에 나온 미국인들이 걱정하는 '계엄령'이 정말로 발생했던 10개월 전 한국의 상황을, 이 깔끔한 차림의 할아버지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인상 깊었던 장면을 얘기한다.

​

"그때 어떤 의원이 의회 담을 넘어가는 걸 봤다. <뉴욕타임스> 메인에 뜨더라. 결국 독재자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감옥까지 보낸 한국 사례를 지금 우린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

제리(Jerry)라는 이름의 할아버지는 같이 온 친구를 비롯해서 다른 참가자들에게 열심히 한국 사례를 소개한다. 뉴욕 도로 위 시위대 한복판에서 우리나라 얘기를 들으니 절로 어깨가 으쓱해진다.

​

어디선가 귀에 감기는 노래가 들려 까치발을 들어 소리 나는 곳을 찾아보니 <골든(Golden)>이 시위대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성능 좋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Up Up Up"이 나올 땐 주변 참가자들의 팔이 힘차게 올라가며 행진의 템포가 한껏 높아진다.

​

아이돌 뉴진스 멤버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버니 응원봉을 들고 행진하는 사람, 비눗방울을 퐁퐁 쏘아대며 행진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몇 달 전 우리의 광화문과 헌재 앞의 평화로운 풍경을 이들도 보았겠지 싶었다.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연결된 요즘 같은 세상이라면 뭐.

​

▲10/18 No Kings Day 참가자들최현정

​

"이거 진짜 한국 음식 맞아?

​

오래 자리 잡고 살던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이 이사하고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지 몇 년이 됐다. 카리브해 음식들을 팔던 낡은 식당들이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카페로 바뀌기 시작한 것도 같은 시기다. 브런치를 먹으러 찾은 동네 카페의 메뉴판에 낯선 메뉴들이 새로 입점해 있다. 떡볶이(Ttukbokki), 제육볶음(Jeyuk Bokkeumbap), 불고기 샌드위치(Bulgogi Sandwich).

​

동네에서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정확한 발음으로 떡볶이와 제육과 불고기를 주문했다. 잠시 후 내 테이블에 올라온 음식들의 비주얼을 훑어보고 국물을 한 모금 넘기고는 서빙한 히스패닉 직원에게 물었다.

​

"너, 떡볶이 먹어 본 적 없지?"

​

해맑게 웃으며 직원이 대답한다.

​

"응, 한 번도 없어."

​

국물 흥건한 떡볶이에 너무 단 제육과 불고기를 입에 넣으며 다른 메뉴보다 1.5배 비싼 가격이 아까웠다. 내 지인들도 늘 묻는다. 이거 "진짜 한국 음식(Authentic Korean) 맞아?"

​

그런데 요 며칠 제대로 된 한국 음식을 맛볼 기회를 가졌다. 160여 년간 미군의 선박 제조, 조립을 했던 브루클린 네이비 야드에서 개최한 K-컬처·K-스타트업 페스티벌 행사장(KOOM 페스티벌)에서다. 보고 싶었던 에픽하이나 자이언티의 공연은 매진이었지만, 대신 한국의 유명한 창업자들과 기업인들이 나온다는 낮 행사는 참가할 수 있었다.

​

▲Koom Festival최현정

​

어렸을 때, 교보문고에서 여성 기업인의 책을 구입해 인상 깊게 읽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첫날 강연자 중 한 사람으로 나와 자신의 경험을 나눴다. '특권'을 가진 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행운을 사용하면 좋을지 바람직한 예가 된다 싶었다. 배송시장의 신흥 강자로 등장한 회사의 창업자가 들려주는 일의 목표, 관점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

나는 잘 모르지만 꽤 탄탄한 위치에 오른 AI 관련 스타트업의 젊은 대표들도 무대에 올라 자신의 실수와 성공의 경험을 나눴다. 다들 맨땅에 헤딩하는 고생을 했고 결과적으로 운이 좋아 이 자리에 올랐다며, 자신감 있고 겸손하고 진솔했다. 듣다 보면 나도 고개가 끄덕여지고 영감이 떠올랐다. 스타트업에 관심 있는 한국 젊은이들에게 유용한 시간인 듯했다. 한국 국내 정치의 안정과 함께 이들의 에너지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펼쳐지길 바라는 마음이 커졌다.

​

노벨문학상 작품을 '원서'로 읽을 수 있다는 기쁨

​

▲책최현정

​

지난 13일, 우리 동네 도서관 북클럽에서 선정한 책은 <We Do Not Part(작별하지 않는다)>였다. 후다닥 저녁을 먹고 도서관 2층 콘퍼런스 룸에서 하는 모임에 자리를 잡았다. 비트윈 커버(Between Cover)라는 제목의 이 북클럽은 도서관장 크리스(Chris)가 직접 진행하는 일반 성인 독서 모임인데 다양한 장르의 책을 선정해 함께 읽고 토론한다. 지난 9월엔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의 <Small things Like These(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었고, 11월엔 서맨사 하비(Samantha Harvey) <Orbital(궤도)>를 읽는다.

​

"좀 많이 어려웠어...."

​

대부분의 참가자가 과거와 현재, 생과 사의 교차가 수시로 드러나는 시적인 산문 글이 낯설고 쉽지 않았다 고백한다. 한국어 원서로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작가 한강에 대해 꽤 소상히 알고 있는 나는 진행자 크리스보다 더 많은 말을 해야 했다.

​

한국어 원서 <작별하지 않는다>는 도서관 웹사이트에서 신청해 하루 만에 받았다. 내가 사는 카운티의 78개 공공도서관은 협력 도서관 시스템을 운영하는데, 약 13만 권 이상의 자료를 보유 중이다. 그중 10%가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책인데, 최근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 책들이 많이 들어와 웬만한 베스트셀러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된 덕이다.

​

전에는 몰라도 상관없던 한국이란 나라의 현대사와 그 속에 숨어있는 미국 정부의 역할, 지구 반대편에서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공감까지 책을 통해 함께 나눈다. 하드커버 표지에 붙은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라는 황금색 스티커가 그 권위를 더해주면서 말이다.

​

크리스가 준비한 오늘의 질문 11번째는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에서 한 얘기였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 라는 말의 의미를 물었다.

​

고개를 갸웃하는 다른 멤버들을 대신해 내가 답해야 했다.

​

"정확히 1년 전인 작년 10월,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어. 최초의 아시아 여성이고 최초의 70년대생으로. 일주일 만에 100만 부 넘게 팔렸고 한국인들은 폭력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다시 한 번 학습했지. 그리고 두 달 후 계엄이 발생했어. 본능적으로 <소년이 온다> 속 인물들을 자신에게 투영한 한국인들은 국회로 달려가고 거리로 나가 계엄에 저항했어. 그리고 현재, 그 대통령은 탄핵돼 감옥에 있어. 이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한국인은 위 말의 의미를 100% 체득했지. 폭력은 없어지지 않겠지만 저항하는 이들이 있고 그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는 믿음을."

​

가장 열심인 북클럽 멤버인 안드레아는 부럽다고 했다. "아, 너네는... 대통령을... 탄핵했구나"하며. 바바라는 그게 문학의 힘이 아닌가 말한다. 그들은 젊은 작가들과 능동적인 독자들이 존재하는 한국 출판계를 더 알고 싶어 했다.

​

민주주의를 지켜낸 나라

​

'K'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한국 관련 콘텐츠는 확실히 큰 흐름을 타고 있다. 음악이나 영화, 드라마뿐 아니라 음식과 문학 작품 등등에서. 군사력이나 경제적 강압이 아닌, 나라 자체에 대한 매력과 호감이라는 소프트 파워가 더 큰 기세로 세계인들에게 스며드는 게 느껴진다.

​

그 정점은 지난 18일 미국의 2700여 곳에서 700만 명을 거리로 나오게 한, '위태로운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있는 나라에 대한 부러움이다. '세계'라는 무대에서 조명받고 있는 한국의 선택들 하나하나가 그래서 지금 더 중요하다.

​

전쟁으로 부서지고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울며 분노하는 나라, 불합리한 요구의 강압적 외교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의연한 나라. 정책과 행정에서 인간답게 사는 길을 늘 모색하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한류도 더 융성하면 좋겠다. 세계가 불안하고 위험한 2025년에 그걸 제대로 실현하고 보여줄 수 있는 건 우리 국민들, 우리나라밖에 없는 것 같아서다. 아직 진정한 우리의 매운맛을 보여주진 않았다 싶은 요즈음이다.

​

▲10/18 No Kings Day 참가자들최현정

▲10/18 No Kings Day 참가자들최현정

▲10/18 No Kings Day 참가자들최현정

▲10/18 No Kings Day 참가자들최현정

▲10/18 No Kings Day 참가자들최현정

▲#10/18 No Kings Day 참가자. 두려움과 추위와 긴 기다림을 견디고 민주주의를 지켜낸 우리처럼, 다종다양한 구호로 즐겁게 분노하는 뉴요커들을 보며 미국 민주주의가 여전히 파워풀하다고 느낀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다.최현정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